신부(新婦)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郞하고 첫날밤에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면서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 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 詩 : 서정주 -
미당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 첫장에 나오는 산문시입니다.
이 시는 여인의 절개를 강렬한 정서에 담고 있으면서도 괴로움과 한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않는 묘한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첫날밤의 신부가 신랑의 오해로 말미암아
소박을 당하였지만, 40년인가 50년이 지난 뒤 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 40~50년이란 그 긴 세월은 한 인간의 삶, 한여인의 삶 그것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는 말미
내용에서 여인네의 정절의 삶이 완성된 것이라 할것입니다.
미당께서는 생전에 15권의 시집과 함께 1000여 편의 많은 시와 산문을 남겼습니다.
언젠가 한번쯤 스치듯 읽었을 서정주의 ‘신부(新婦)’라는 시가 엊그제 학교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는 김형경의 《만가지행동》*이라는 책에 인용되어 있어 기억을 살려냈다.
아, 그런데 산문시(散文詩)를 이리도 맛깔스럽게 지은 것은 서정주의 내공이려니와 시의 내용이 자꾸만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과연 나는 젊은 날에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어리석고 허망한 실수를 범한 적은 없을까?
그래서 수십 성상(星霜)이 꿈같이 흐른 뒤 깊은 회한(悔恨)에 사로잡히게 되지나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인생은 무심히도 흘러가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