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지와 사적지]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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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시기 이후 새롭게 일군 내포 지방의 교우촌
내포(內浦) 지방은 한국 교회 중에서도 가장 많은 천주교회 사적지와 교우촌,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공소들이 있는 곳이다. 당진군 면천면 사기소리의 새터는 사기소천 너머 웅산 자락에 천주교 신자들이 새로 일군 마을이라 해서‘새터말’이란 이름이 붙여진 박해 시기 이후 교우촌이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의 《택리지》에 의하면, ‘내포(內浦)’란 과거에 예산, 당진, 홍성, 서산 일대를 일컫던 지방 명으로 아직도 예산군 삽교읍에 자연 촌락의 지명으로 남아 있다. 내포 지방은 어디를 가나 천주교 신앙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들 교우촌이나 공소들은 100여 년간의 탄압을 받으면서 산곡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한국 교회의 신앙이 자유기를 맞이한 이후에 처음으로 일군 터전이다. 또 이곳에는 박해의 흔적, 순교자들의 숨결, 그리고 이어지는 가난과 극복의 과정, 복음 전파를 위한 노력 등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충남 당진군 면천면 사기소리의 새터(혹은 새터말)는 사기소 공소 강당이 있는 마을이다. 사기소리는 면천 소재지에서 4.5km 정도 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윗 사기소와 아래 사기소, 새터라는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마을은 윗 사기소이다.
천주교 교우촌 새터라는 곳은 아래 사기소에서 남쪽으로 도로를 건너 500m쯤 되는 곳, 즉 사기소천 너머 웅산(253m)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새로 일군 마을이라 해서 ‘새터말’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지역에 정식으로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98년이었다. 당시 양촌(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거주하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가 처음으로 사기소를 방문하고 윗 사기소(64명)와 아래 사기소(58명) 두 곳에서 공소를 치른 것이었다. 이때 새터말 신자들은 아래 사기소에서 성사를 본 것으로 추측된다. 퀴를리에 신부에 의해 새터 공소가 설립된 것은 그 후 1901년이었다. 그러나 사기소(점말)의 두 공소는 그 뒤 신자들이 이주하였고, 따라서 현재는 그 유래를 잘 알 수가 없다.
사기소 지역의 신자 수가 줄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생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즉 옹기 마을에서는 점토가 부족하여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 했고, 새터에서는 가뭄이나 좁은 농토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1901년의 교우 수(새터 48명, 사기소 130명)에 비하여 1910년 교우 수(새터 32명, 사기소 55명)가 현격하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다.
비록 신자들은 줄어들었지만, 남아서 교우촌을 지킨 신자들은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신앙을 지켜 나갔다. 1950년경 양윤돈 타대오가 공소 회장 재임 중 새터와 사기소의 신자들이 모두 새터에 있는 그의 집에 모여 공소를 치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 중심지는 자연히 새터가 되었고, 마침내는 두 마을의 신자들이 힘을 합쳐 1956년에 현재의 공소 강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옥 기와에 10칸 정도의 크기인데, 사기소천 건너 언덕, 즉 새터말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5가구 중 4가구가 신자 집안이다.
▒ 내포(內浦)와 천주교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과 무한천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어 그 후로 교세가 크게 번창했었고, 이존창, 김진후, 성인 김대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면천 등의 순교지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 사기소 공소 이웃의 옛 공소
○ 잣치(잣디) : 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1883년(두세 신부), 1884년(128명), 1888년(54명)
○ 태봉골 : 현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잣치 아래 마을, 1883년(두세 신부), 1884년(40년)
○ 성주골 : 현 당진군 면천면 삼웅리, 1884년(22명), 1885년(27명)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