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문학 2호, 수필
성지(聖地)의 장날
임 선 빈(보은문학회 회장)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 밖의 세상이 참으로 궁금하던 때가 있었다. 매일 같이 만나는 하늘, 산, 들판은 항상 같은 모습이었고 하루하루가 지루하기 짝이 없던 날들이 계속되었다. 답답함을 벗는 일은 산과 산이 겹쳐지고 막아버린 그 너머의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네 개나 넘어야 하고 내(川)를 건너야 하는 오십 리 길은 어린 내가 엄두를 내 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하루가 얼른얼른, 열흘이 하루처럼 지나길 바라던 내가 고작 하였던 것은 마루 끝에 서서 앞산의 키 큰 나무를 세는 일이었다. 하나, 둘, 셋……,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고 또 세어 보지만 그 수가 한 번도 똑 떨어지게 맞은 적이 없다. 겨울이면 잎 푸른 나무도 세 보고, 봄볕 따사로운 날에는 온 산을 분칠한 듯 꽃을 피운 나무를 세지만 내게 산 넘어 그곳은 여전히 아득하게 먼 곳이었다.
궁금함이 목젖까지 올라 온 나는 편지를 써서 장마당에 나가는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하였다. 그 주머니가 도깨비 방망이 사촌쯤 되었으면 바랐기에 해 지는 저녁이면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토록 동경하고 꿈속에서조차 가고 싶어 하던 읍내 장을 다녀오신 아버지의 주머니는 여전히 비어 있다. 서운한 내 마음을 아셨을까, 지나간 겨울에 장사치가 다 얼어 죽었다며 아버지는 ‘허허’ 웃을 뿐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그 경계에서 그렇게 기다림은 멈추지만,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다음 ‘장날’을 또 손으로 꼽으며 기다렸다.
은혜를 갚는다는 명칭을 가진 대추 고을 보은군은 오랜 옛날 삼국시대만 해도 삼년산군(三年山郡) 또는 삼년군(三年郡)이라 불렀다.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신라가 성을 쌓았는데, 삼년 만에 쌓았다고 삼년산성이라 하며, 보은을 삼년산군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보은읍 동쪽 끝에 있는 삼년산성은 동시대 쌓은 많은 산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은 팔경 중 하나로 꼽는 고성추월(固城秋月)의 ‘고성’은 곧 삼년산성이다. 신라가 삼년군을 확보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만큼 대추 고을 보은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삼년산군은 고려 태조 때 보령(保齡)으로 부르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와서는 보은(報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다.
길이 끝나는 곳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산도 넘고 내(川)를 건너 마음이 먼저 갔던 보은읍에 들어와 살고 있는 지도 수십 년이 되었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는 살아갈 날이 적은 나는 더 자주 장마당을 나온다.
닷새마다 오는 보은 장날은 1일과 6일에 선다. 숫자 1과 6은 음양오행에서 색으로는 검정이고 방위로 보면 북쪽, 계절은 겨울이 되니 그 옛날 아버지의 말씀처럼 얼어 죽은 장사치가 있었을 법도 하다.
장날 사람이 모이는 곳은 중앙사거리에서 동다리 입구까지와 평화사거리에서 시외버스터미널 앞까지로 선을 긋고 마주 이으면 직사각형이 된다. 이 직사각형 안에 대추 고을 재래시장이 있으며 장날마다 모여든 장꾼들이 물건을 파는 화랑시장이 있다.
장마당에서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시간을 만나게 된다. 사람이 못 견디게 그립거나 마음의 짐이 더 무거운 날이면 장마당을 걷는다.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 속에서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도 만나고, 내가 살던 곳의 소식도 듣는다.
사람은 한울이 인격적 존엄성을 부여한 존재이고 한울을 믿음으로써 한울 앞에 모두 동등하게 된다는 동학사상도 만난다. 동학은 비폭력 무전(無戰)인 평화운동으로 죽이지 않고 살리는 운동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시민혁명이라 할 수 있다.
1893년 봄, 사람들은 그 평등의 권리를 찾겠다고 삼백 리, 또는 오백 리 길을 걸어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에 모여들었다. 모였던 동학 농민군의 수는 기록마다 들쭉날쭉한데, 돈을 일 푼씩 걷었더니 이백삼십 냥이 되었다고 전하는 말이 그 수를 짐작하게 한다.
장마당을 지나 동학혁명의 성지를 갈려면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동학 농민군은 다리를 건너면 더욱 가깝게 보이는 삼년산성을 마주해서는, 신라인이 이룬 삼국통일대업보다 더 큰 뜻을 품었을 것이다. 씨앗도 몇 줌 주머니에 넣었을 테고, 평등에 대한 메시지는 가슴에 꼭 품고 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신라의 변방으로 고구려, 백제와 대치하고 있었지만, 보은은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는 패자(覇者)의 땅이었다. 그러나 개혁은 실패했고, 왕권사회의 몰락과 식민지제국주의 밑에서 그 생활이 비참했던 동학 농민군에게 보은은 승리의 땅은 되어주지 못했다.
동학 농민군이 몰살당한 대추 고을 보은을 동학혁명의 성지(聖地)라고 한다. 한마음으로 척왜척양(斥倭斥洋) 깃발을 높이 들었던 그 성지의 장날이다.
약력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2000년」, 충북작가 신인상「2000년」
/수필집《꽃 피는 봄이 오면》2005년,《내 마음의 화첩》2013년 발간.
/보은문학회, 충북작가회의, 충북수필가협회 회원, 무심천 동인.
/현 보은문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