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형문화재 국악의 향기2/ 한강문학 6호, 봄호
* 무형문화재급-기억 따라 세월 따라/ 口述體
국악의 향기-2
국악의 거목 벽파 이창배 선생님께『가요집성』p426 중 경기민요를 ‘한국정악원’에서 배우게 된 행운을 잊을 수 없다. 1970년 초반부터 정악원이 사라질 때까지 십여 년을 너무나 흥이 나고 재미있어 열심히 다닐 수밖에 묘안이 없었다. 배우는 회원들도 정이 들어 보람찬 세월로 각인됨을 어쩌랴.
선생님의 한문 실력은 마치 옥편과도 같은 무한성에 놀랍고 오늘날 젊은 국악인들이 애창하는 수많은 작사 흐름에 감사한 감회가 떠오른다. 그 정악원 회원 중 손기정 마라톤 선수 1등 상품인 청동 투구가 독일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한국으로 들여온 서독 교포가 자기 아들이며 자기 집을 동네 분들께서 독일집이라 부른다는 애국심 가품도 계셨다.
창경원 울타리 곁에 「6,7. 구락부」성업 중, 벽파 선생님께서 경기민요 특강으로 인기가 절정이었다. 「6,7. 구락부」는 60과 70의 노익장 법조계 학계 예술계 정년퇴임 분들로 구성된 단체인데 바둑 서예 시조창 민요 만담 등이다.
그 무렵 젊은 저는 특별 초청으로 가끔 민요창 시간에 무용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대성모방」 성사장 부친께서 회식을 자주 베푸시어 화기애애한 가운데 나에게 성금이 많이 모인 전액을 항시 정악원 시절에도 벽파 선생님께 드린, 잘한 추억담은 즐겁기만 하다.
구락부 시절 인기 여배우 복혜숙님이 저에게 “너도 김장 몇 번하면 나 따라온다” 하시기에 나는 마음속으로 “아직도 멀었는데 무슨 말씀” 하고 의아해 했는데 오늘날 돌이켜보면 세월은 흐르는 강물 같아 그 자리가 지금 내 자리라 여겨진다.
정악원도 「6,7.구락부」도 사라진지 오래, 회원 모두 고인이 된 셈이다. 인생행로에 허무만이 감도는 세상사인가 보다. 벽파 선생님께선 가요나 가사를 단 한 번에 잘 소화하는 저에게 어느 날 “매혹적인 인물”로 칠판에 적어주신다. 그리고 “초죽”이라는 호를 내리시며 초나라 사람은 나빠도 퉁소 만드는 대나무는 참 좋은 점을 말씀하신다. 나는 초죽 발음이 초죽음 같은 해석으로 사용을 안 하고, 전원일기의 TV에 출연한 김혜자님의 부친 김용택 경제학 박사님께서 “蘭亭”으로 작명 하시며, 난초는 꽃을 피워 콩알 만하게 오므라져 깨끗이 뚝 떨어지니 즉 “유종의 미” 아닌가? 그러므로 “난초가 있는 정자”로 예쁘게 작성하시여 그때부터 “난정”이란 호를 한국화마다, 두인은 “난향천리”로 사용한다.
김용택 박사님과 탈랜트 임예진의 조부 ‘임고문’, 그리고 만화가 고바우의 부친 호 ‘청산’, 세분이 모이시면 다정한 우정의 고차원 처세술 명작으로 존경대상이었다.
어느 가을 세분 모시고 동두천 소요산 산사로 추담스님 뵈온 날도 먼먼 옛날이다. 도봉산 도선사 청담스님과 추담스님은 서로 상호간 라이벌 의식이란 말씀도 하신다. 저는 추담스님 방명록에 즉석 시를 기록하였다. 그날 추담스님께서 “다음에, 세분 선생님 말고 혼자 꼭 오렴” 하신 말씀에도 저는 망설이고 뵙지 못했다. 초대 종로문화원장이신 반재식 지음 백중당 발행 <경서도창 집대성>은 수많은 명창 제자를 길러낸 흔적의 지침서이다.(“벽파 이창배 일대기” p536, 2003년 4월 1일)
* 벽파(인간문화재 19호) 친필(사진 3매)
<신유 4월 1일>
<저자 벽파 근정>
<초죽 신순애 여사 혜존>
관산융마 <시창부>
추강이 적막어룡냉하니
인재 서풍중선루를
매화 만국청모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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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북 경진하일휴오<연속>
*신순애 시조시인이 기억하는 시창부 가사 일부
첫댓글 신순애 선생님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