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과 응신천황의 대결]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부여족 계통의 형제국으로 서로 화평을 유지해 오다가(고구려 태조대왕이마한과연합전선) AD 4C초 발해만 완충지역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각각 두 나라에 의해서 병합되자 양국의 국경이 접해지는 상황에서 자연히 국경분쟁에 노출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AD 371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선제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패수 근처에서 백제복병에게 기습을 당해 퇴각하다가 북평양성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되었고 마침내 양국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AD 390년 웅진백제에서는 응신이 왕으로 즉위하였고 불과 1년 후에는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왕으로 등극하게 되자 동시기에 두 정치적 영웅의 출현은 악화된 양국 외교상황에서 서로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되엇다
한편 근초고왕이후로 백제는 대해양 제국의 최 전성기를 맞고 있던 중 변방의 신라만이 조공관계를 거부하므로 웅진백제의 응신왕이 신라정벌을 선언하자 당시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실성태자를 질자로 보내 군사동맹을 맺고 구원을 요청하자 외교적 명분을 얻은 젊은 패기의 광개토대왕은 조부 고국원왕의 복수도 겸하여 백제와의 한판 승부를 시도한다.
먼저 AD 392년 백제수군의 중심지인 관미성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20여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킨다.
이로써 동양 최대의 막강한 수군력을 지녔던 대륙백제는 황해 제해권을 상실하고 그 세력도 황하 산동반도 이남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 후 광개토대왕은 관미성에서 4년 간 수군양성 및 군선제조를 하게 한 뒤 비문에 나타난 대로 AD 396년 병신년 9월 대왕자신이 직접 수군을 통솔한 채 해상 침투작전을 과감히 전개한다.
백제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수군을 동원한 절묘한 전술로서 응신도 반격을 포기하고 당시 비류백제계의 세력이 있었던 왜열도 나라지역으로 도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광개토대왕도 응신의 추격을 포기하고 공격방향을 웅진 거발성에서 북한산성으로 돌려 온조계 아신왕을 계속해서 공격한다.
응신의 패주소식을 전해들은 백제군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천황의 뒤를 따라 왜열도로 도망가는 형편이었으므로 아신왕은 군신들과 함께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을 한다.
이에 대왕은 아신왕의 화친을 받아들이고 남녀포로 일천명과 세마 일천필 등 전쟁배상금을 받은 후 개선하자 그 결과 동아시아의 패권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다시 넘어오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에게 패해 웅진에서 탈출한 응신 및 그의 망명집단 세력들과 이들을 뒤쫓아가는 백제 신군(神軍)의 대 선단들은 왜열도 큐슈 서북단 지역 축자(筑紫, 현 기타큐슈)에 응신의 선단과함께 AD 396년 12월 북큐슈 쓰쿠시(筑紫) 지역에 도착하자 가야계 임나(加那), 야뫼도(山門), 웅습(熊襲)등 주변국들이 조공을 보내알현하였다.(일본속기)
AD 397년 정월 응신 일행은 북큐슈를 떠나 日向國(현 미야자키현)을 거쳐 기내(畿內, 오오사카)지역에 도착한 후 백제 담로 통치지역이었던 하내왕조 대별국(大別國)으로 들어가 임시정부를 세웠다가 몇 년후 이웃 나라(奈良)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백제 망명정부를 선언하게 된다(AD 400년경).
응신은 이곳 나라 망명정부로부터 백제의 모든 담로국을 친정한다고 통보하니 천황의 어명을 받은 주위 담로왕들은 앞으로의 정책방향을 알고자 사신들을 파견하였다.(AD 397년도)
한반도 백잔국에서 온 사신도 있었는데 백잔 아신왕이 광개토대왕과 군신관계 맹약을 맺은 사실을 뒤늦게 안 응신이 이는 정치적 배신행위라고 백잔국 사신을 크게 문책하자 아신왕의 항복은 천황의 망명소식과 더불어 백제군의 사기저하로 패색이 짙어지자 성(城)과 백성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강변하면서 형제국 관계 복원을 간청하였다.
이것이 광개토대왕 비문(영락 9년 조)에 있는 백잔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했다(百殘違誓與倭和通)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자 나라백제의 응신 왕은 양국의 정치적 연합관계가 회복되기 위하여 아신왕의 친자를 볼모로 나라백제에 보낼 것을 요구하자
AD 397년 5월 백잔 아신왕은 자신의 아들 전지 태자를 질자로 보내는 대신 한반도 내의 옛 백제 땅-침 미다례(현 제주), 현남(차령 산맥 이남), 지침(차령 산맥 서쪽), 곡나(황해 지역), 동한지지(현 경남 해안)를 할양 받게 된다. 그 후 백제 계 양국간의 화평 관계는 태자를 포함한 왕의 친인척들을 질자로 보내면서 이백여 년 간 지속된다(추후광개태왕비문 중요부분게제)
(나라(奈良) 백제응신(應神)의 대반격)=미확인설?
한편 나라백제는 동쪽의 강력한 하이 족과 큐슈 남동쪽 일향국 세력을 제압하고 명실공히왜열도의 주인이 되었다
AD 403년 당시 백제 유민의 도왜 책임자 궁월군(弓月君)(후일인덕천황?)이 나라 천황궁에 건너와 약120현민이 신라 정부의
다물임나(부산) 구 폐쇄로 억류되어 포로 된 채 왜열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임나 항구를 신라에게 넘겨 준 고구려에 대해 응징하고자 총동원령을 내려 공격을 감행하였다(AD 404년, 갑진란).
즉 나라백제와 백잔국, 그리고 대륙백제 등은 대연합 수군을 결성하여 과거 광개토대왕이 웅진 거발성을 친 것과 같이 응신의 직접 지휘아래 요동의 북평양(요동반도의 현 요양으로 추정, 여기서 고조선의 왕검성인 옛 평양은 난하 북동쪽 현 승덕지역 추정, 북한의 평양은 고려장수왕의 남하정책 때 설치한 예비수도 하평양을 지칭)을 기습하였다. 그러나 400여척 규모의 대연합 수군이 발해만을 통과하여 패수(현 태자하로 추정, 일부 학자는 발해만 지역 으로 진입하였을 때에는 이미 백제의 전령선을 납포하여 공격 첩보를 알아낸 고구려 군이 미리 군선을 연결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을 퍼부어 백제 연합 선단을 괴멸시켰다.
응신은 북 평양성 공격의 실패로 웅진으로의 복귀가 실질 상 어려워지자 AD 405년 나라백제에서 야마토 왜(大和倭, Daiwa)로 국명을 바꾸게 되고 이것이 일본의 고대국가의 기원이 된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이번에는 다물 임나항에 있는 백제계 120 현민을 데려오기 위하여 응신은 AD 405년 4월 궁월군에게 병사를 주어 신라 계림근처에 있는 명활산성을 기습하여 처음에는 신라군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동년 8월, 목도 숙미와 전 숙미 장군을 이만명의 특공대와 함께 파견하여 임나항 탈환을 위한 신라와의 명활성 전투를 다시 전개하였다.
신라 실성왕은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응신의 야마토 왜와 평화협정을 맺은 후, 임나항을백제유민의 도왜 출항기지로 내어주고
백제유민 인솔 책임자 습진언(襲津彦)을 풀어주었으며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 왕자를 질자로 보내게 된다..
(삼국사기와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