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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정리가 끝나면 옮겨 가실수 있도록 열어놓겠습니다
해병대 군악대 (ROKMC Band) 정리중
(내용정리 1951년~1958년: 복기호-군악창설期=특하 1期-1951년 입대)
(내용정리 1959년~1961년: 서봉석-군악5期= 신병 118期-1961년 입대)
[참고] 하사관과 병의 계급명칭은 각군별로 달랐던 명칭을 1962년부터 전군 통일함.
1962년이전에는 해병대는 해군과 같은 명칭을 사용, 하사관은 병조(兵曺),병은 水兵에서 해병(海兵)을
기본으로 이등병조,일등병조,병조장/견습해병,이등해병,일등해병,상등해병 등으로 칭했었음.
(1) 해병대군악대의 창설(Since 1951)
1949년 4월15일 창설된 해병대는 380명의 해군의 단위부대로 시작한 관계로 전쟁의 와중에 병력이 늘고 군대의 형태를
갖추어지게 되면서 해군과 별도의 군악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51년4월경 당시 해병대사령부참모장 김대식
대령(후에 제3대 사령관)이 과거 만군(滿軍)시절 군악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관승병조장(당시 해군군악대근무)
에게 군악대 창설 준비를 맡겼다.
마침 그때 해체된 국민방위군13단(경남부산지구)군악대원 16명을 포섭하여 당시 진해의 도천국민학교에 있던
해병대하사관교육대(주로 해군에서 전환입대한 기간하사관과 해병대 병에서 하사관으로 진급하는 장병 교육기관)에
가입대 시킴으로서 우리 해병대군악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시절 군악대 창설의 모체가 된 국민방위군 출신자 16명은 Clar.-복기호,이성근. Sax.-김성태,이홍석,강철모.
Horn-이준호,양희문. Trbn.-한정진. Trpt.-조동순,이광수,유영인,김재만. Bar.-함성국 Drum-송상헌,김중국,신성모)
당시에는 육군과 해군의 장교와 하사관등을 해병대로 전환입대를 시켜서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되었기때문에
이관승병조장(현재의 상사)도 마찬가지로 해군군악대에서 1951년5월10일 전환입대케 되었다.
[참고] 국민방위군이란 갑작스런 북한의 6.25남침으로 인하여 남한의 젊은이들을 많이 희생시켰고 군 징집도 어려움을
당하자 1951년 1.4후퇴 직후 정부에서 현역군에 입대하지 않은 100만 젊은이들을 남쪽으로 안전하게 후송시키기
위해 국민방위군제도를 만들어 1951년1월30일 국회에서 209억원 예산을 통과시켜 운영을 했었다.
그러나 이 예산이 몇몇 정치인들에 의해 잘못쓰여진 관계로 국회가 시끄러웠고 결국 해체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16명이라는 인원이 너무 적어 가입대로 있던 도중, 군악대원들을 각자 고향으로 보내서 군악병 모병
운동을 벌인 결과 총 52명이 해병대제1기특과하사관후보생 의 이름으로 해병학교(당시 진해여고에 있던 해병대
사관후보생교육대-1951년4월1일 창설)에 입교하게 되어 정식 해병대원이 되어 해병대하사관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해병대군악대가 창설되었으며 1951년 6월18일을 군악대 창설일로 정하는 이유는 비록 교육기간이었지만
여러가지 행사와 일선 위문등 군악대로서의 활동을 이날부터 시작했기때문이다.
1951년 9월30일 창설기 요원 52명이 하사관교육을 마치자 그때부터 정식으로 해병대군악대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병대사령부(초창기 해병대는 해군총참모장 휘하의 단위 부대로 활동하다가 4개 대대로 병력이 증강하면서
진해여고에 사령부를 설치 운영중 1951년5월 부산용두산 막사로 이전)는 부산에 있었지만 해병대교육단이 있는
진해에 남아서 많은 행사를 담당하게 된다.
### 군악대 창설자 이관승 병조장은 누구인가?
해병대군악대 창설자 이관승(클라리넷)은 8.15 해방전 일본 만주군 군악대원으로 있다가 해방후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 군악대를 거쳐 해군군악학교 교관으로 복무후 전역, 고향인 충북제천에서 중학교음악교사생활을
하던중 6.25동란으로 해병대에 재입대하여 군악대를 창설하고 1951년10월 군악장교가 되기 위해 해병학교
제8기 간부후보생 교육후 중위로 임관, 후에 대위로 진급함. 1954년12월 금촌의 해병전투연대가 해병제1여단으로
승격되면서 군악대장으로 부임함.
이 시절 군악대 막사로는 (아래 막사의 내용은 신병12기 故김용기님의 증언임)
1.하사관교육대(진해도천국민학교) -가입대 기간중
2.해병학교 (진해여고 옥상)-하사관후보생교육기간중
3.舊일본군사병구락부 강당(진해운동장근처)-이때 신병12기가 군악대로 편입됨
4.하사관교육대로 다시 옮김
5.1953년 9월28일 진해 원일봉에 막사(콘세트 1개동과 천막 3동)를 새로 짓고 정착하게 됨.
(위와같이 자주 옮기게된 이유는 건물문제 보다는 악기소리때문에 타부서에서 근무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2) 초대 군악대장 한상기(韓相基)중위
1951년10월 해병군악대 창설자인 이관승병조장이 군악장교가 되기위해 해병학교로 입교하게 되자
사령부에서는 해군에 의뢰하여 해군통제부 군악대장인 한상기중위를 해병대군악대장으로 임명한다.
한상기(1923년 서울출생-피아노-작곡가)는 일본 동경 고등음악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해방 직후,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李안드레의 탱고오케스트라에서 백해제(후에 서울시향악장-바이올린)
전봉초(후에 K향 첼로수석)황병열(아코디온),김호길(아코디온-후에 MBC라디오악단장)등과 함께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크로스오버 장르의 연주 활동을 하다가 당시 해군군악학교교장이던 남궁요열씨의
권유로 해군사관학교 제4차 특교대를 거쳐 곧 중위로 임관되어 해군통제부군악대 대장으로 임명되고 당시
서울에 있던 해군군악학교 교관으로 출강하였으며 해병대로 전환입대, 1951년10월 해병대군악대장으로
임명되어 7년 복무후 1957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경 력
1942년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작곡가
대표곡: 산중일기,안남아가씨, 통군정의 노래, 청춘항로, 청노새극장, 꽃파는 꾸냥.등
군시절 작품
군가작곡: 도솔산의 노래
취주악곡: 휘날리는 태극기, 해병대 행진곡, 유엔기 아래에, 민요접속곡,
전원시곡: 시골풍경
예편후에 영화음악계에서 활동 300여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하여 3차례에 걸쳐 대종상 음악부문 수상.
예총 음악분과 위원장 역임.
(아래사진은 1952년12월29일 진해해양극장에서 군인가족을 위한 송년음악회-지휘:한상기 대위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3) 타군 고급 하사관의 전환입대
당시 해병대 자체에서는 군악대를 맡을 지도자급 인력이 없었기에 훗날 예하 각 군악대 대장이 될 4명의
고급하사관들이 해군으로부터 전입되었으니 병조장(현 上士)의 정삼윤,인석환,문병일과 일등병조
(현 中士)의 김명조이다.
정삼윤(바리톤)병조장은 후에 해병대사관후보생 교육을 거쳐 대위까지 진급했으며 진해교육단 군악대와
포항기지 군악대장을 역임.
인석환(트롬본)병조장은 해군의 전신인 해안경비대군악대를 거쳐 해군통제부 군악대에서 근무중
해병대를 지원 전환입대.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진해교육단 군악대와 김포여단 군악대장을 역임.
문병일(트럼펫)병조장은 한상기대장 부임후 해군군악대에서 해병대로 전환입대.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김포여단 군악대장을 역임.
김명조(클라리넷)일등병조는 해군에서 예편한후 해병대로 재입대하여 후에 준위로 진급하여 진해교육단
군악대장을 역임.
(4) 초창기 군악병 모집
창설당시 특과 하사관 후보생의 수료후에는 신병12기(1951년12월)때에 훈련병중에서 연주경력자를
선발해 군악병으로 다수의 인원을 충원케 한것을 시작으로 수시로 대원을 보충했는데 신병12기 이후에는
신병18기(1952년6월) 신병22기(1952년10월-제주도에서의 교직자들이 대부분)신병27기(군악병으로 모집된
첫 깃수)등이 군악대 초기의 군악병들이며 특히 신병27기는 군악대에서 연주경력자를 미리 선발 모병하여
훈련소에 입소시킨 첫번째의 경우이므로 이 깃수가 군악 1기가 되어야 타당하다고 보겠다.
이때의 군악병은 80~90명 정도 되었기에 훗날 사령부군악대, 진해교육단군악대, 포항지구군악대,
김포여단군악대등으로 분산 배치하게 될 밑거름이 되었다.
(아래사진은 1952년3월 1일 임시막사로 쓰던 해군사병구락부앞에서 <대장:한상기 대위>-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5) 초창기의 군악대 연주활동과 의장대(Cremonical Guard)의 창설
한상기대장 부임후 전대원들 각고의 노력으로 점차 음악의 기초와 실력이 쌓여 드디어 1952년 4월10일
진해해양극장에서 해병대창설 3주년을 기념하는 첫 군악연주회를 갖게 되었다. 그 이후로 전대원이 자신을
갖고 연주활동을 했으며 1952년 9월에는 서해의 백령도와 지금 북한땅인 석도등을 방문, 절해의 고도를
지키는 해병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 1953년 가을에는 서울,대전,대구,부산등지에서 수도탈환 3주년을
기념하는 순회연주를 개최하여 해병대군악대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 사진은 1952.04.10.해병대창설3주년기념연주후 진해 해양극장에서<대장:한상기대위>-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1953년12월10일에는 해병대 의장대(실지로는 제1임시여단 의장대-1955.01.15.사단창설)가 창설되었다.
의장대는 초기에는 군악대연주와 함께 하는것이 아니었고 의장대 자체에서 구령을 붙여가며 동작을 했었는데
당시 금촌주둔의 제1사단군악대 선임하사관인 복기호일등병조가 의장대장과 의논하여 의장대원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체크해서 의장대쇼의 반주음악을 편곡하여 의장대시범을 한 결과 동작과 음악이 딱딱 맞아
떨어지고 더욱 절도있게 보이고 아슬아슬한 묘기까지 연출되니 대단히 호응이 좋아 인근 미군부대에도 소문이
나면서 의정부에 있던 미육군1군단(I Corp)의 1956년 창설기념일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여기에 참석했던 이승만대통령 앞에서 군악대와 의장대가 쇼를 했는데 그날의 감동이 해병대 군악대와 의장대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특히 의장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장대쇼를 실시했고 M-1소총에 대검을 꽂고 곡예같은 아슬아슬한 묘기를
연출하여 해병대의장대는 국내는 물론, 동남아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지금도 그 명예를 유지하고있다.
이 시절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의 복장은 몇가지 있었지만 그중에도 미해병대가 입는, 쫄쫄이 무늬가 세로로
가늘게 이어진 세련된 작업복에 생전 처음 보는 얼룩무늬철모,빨간 바탕에 노란글씨의 명찰,오른쪽허리에는 빨간
악보가방,검게 탄 얼굴에 거칠게 보이는 외형이 육,해,공군과는 차별화된 느낌이 들어 그당시 시민들에게는
대단히 강인하고 믿음직스럽게 보여 한때 장안의 화제꺼리였었다.
(아래사진은 1956년 의정부 미1군단창설기념일에 의장대시범장면-이승만대통령 참관-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아래사진은 1956.09. 의정부 미1군단창설기념식 참석후의 이승만대통령 일행-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1954년 2월15일에는 서울특별시 후원으로 명동의 시공관에서 미 해병대 제1사단의 환송 연주회를 우리
해병대1사단군악대와 미 해병1사단군악대가 합동으로 가지므로서 양국간의 혈맹의 의를 더욱 깊게 하였다.
1958년에는 공보처(현 문화관광부)주관으로 동남아순회 문화예술사절단에 참가하여 KBS교향악단등과 함께
해병대군악대와 의장대가 해군함정으로 각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아래사진은 1955.02.15.한미해병대 제1사단군악대가 합동연주장면-명동소재 시공관 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6) 해병대 내에 4개 군악대 존립
(사령부군악대,진해교육단군악대,포항사단군악대,김포여단군악대)
(A) 사령부군악대: 1951년 진해에서 창설된 군악대가 사실상 사령부군악대이지만 실지로는 부산에
있는 사령부로 가지않고 진해교육단에서 활동을 했다. 1956년6월30일 사령부 청사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고, 그보다 앞서 3월26일 군악대의 주력을 중심으로 서울 용산구 한남동으로
옮김으로서 한상기 소령을 대장으로 김형섭 일등병조를 선임하사관으로 하여 명실상부한
사령부군악대가 탄생되었다.
이후 한상기 대장이 예편되면서 육군에서 안진영대위를 전환입대후 군악대장으로 임명했다.
(대장= 한상기 소령-안진영 대위-윤동균 대위[해간29기]-김영방 소령[해간29기])
(선임하사관= 김형섭 일조-복기호 일조-김성태 일조-김삼복 일조-김성태 상사-배봉환 상사)
(아래사진은 1959년 사령부군악대 합주실에서 찍은 모습-대장:안진영대위 자료제공:군악3기 이재창)
(B) 진해교육단군악대: 1951년 진해에서 창설된 군악대가 교육단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사령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하면서 교육단군악대가 명실공히 진해교육단군악대로 거듭나면서 1956년3월26일
정삼윤 중위를 대장으로, 조동순 이등병조를 선임하사관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1959년2월5일 교육단에서 진해기지사령부로 승격하면서 진해기지사령부군악대로 부대명을 변경.
(대장= 정삼윤 중위-김명조 준위-인석환 준위-김영방 중위- )
(선임하사관= 조동순 이조-김성태 이조-고중갑 일조-정병한 상사 )
(아래사진은 1961년10월1일 국군의날 부산시가행진-영도다리부근-진해기지군악대<대장:인석환 준위
지휘:고중갑 중사>-자료제공: 군악5기 서봉석)
(C) 제1사단군악대(현 포항): 진해에 1개의 군악대만 있다가 휴전(1953년 7월27일) 직후인 1954년2월1일
금촌에 있던 해병제1전투단이 해병제1임시여단으로 승격되면서 해병제1여단군악대가 창설되게 되는데
당시 진해에서 30명을 차출하여 대장에는 군악대 창설자인 이관승 대위(후에 인석환 준위)를
선임하사관에는 복기호 이등병조가 맡아 출발하였다.1955년1월15일 해병제1여단이 해병제1상륙
사단으로 승격함에 따라 해병제1상륙사단군악대로 부대명이 다시 변경되었다. 사령부군악대가
진해에서 서울로 옮기게되는 1956년6월이전까지는 금촌이 서울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로 서울과
인근지역의 행사는 사단군악대에서 맡아서 사실상 사령부군악대의 역할을 했었다.
1959년3월12일 금촌에 있던 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하고 본격적인 포항제1상륙사단군악대로
재발족되면서 대장에 정삼윤 대위 선임하사관에 한정진 일등병조가 담당.
(대장= 정삼윤대위 -곽진영대위[해간32기])
(선임하사관= 한정진 일조-유치준 이조- )
(아래사진은 1956년 사단군악대-금촌<대장:이관승중위, 선임하사관: 복기호 일조>-자료제공:창설기 복기호)
(D) 제1여단군악대(현 김포): 1959년3월12일 금촌에 있던 해병제1상륙사단이 포항으로 이동함에 따라 김포에
해병제1임시여단이 창설되면서 김포제1여단군악대가 발족하게 된다. 대장에는 금촌 사단군악대장을
포항 이동 직전까지 맡고 있던 인석환 준위가, 선임하사관에는
(대장= 인석환 준위-문병일 준위-김영방 소위[해간29기]-윤동균 중위[해간29기]-
인석환 준위-백대웅 소위[해간35기]- )
(선임하사관= -김삼복 일등병조- 이동석 중사 )
(7) 사령부군악대장 안진영 대위 육군에서 전환입대
1957년10월 사령부군악대장 한상기 중령이 예편한 후, 해병대내에서는 군악장교를 육성하지 않은 관계로
마땅한 후임이 없었다. 황기오 육군대령(군악2기 황기선 하사의 친형으로 육군본부군악대창설의 주역)의
주선으로 당시 육군군악대의 트럼펫 주자였고 육군상사에서 장교로 특진한 안진영 육군중위 를 전환입대후
해병대위로 진급시켜 군악대장에 임명했다. 안진영 대위의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 해병대군악대가 연주면에서
이시절이 가장 발전적이었고 군악대원 개개인의 능력도 대단히 향상 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사령부에서도 안진영
대위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악병을 군악대 자체에서 모집하고 사령부군악대에서 현지 자체교육하도록 배려했다.
군악1기(1957년10월입대-하사관 기) 군악2기(1958년6월입대 하사관 기)는 교육후 하사관으로 임명되었고
군악3기(1959년4월입대-신병92기)는 교육 후 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1962년 봄- 가운데의 안진영대장과 왼쪽의 윤동균소위,대원들-사령부군악대뒷산에서-자료제공:군악3기 이재창)
정리중
나가자 해병대가 (신영철 작사, 김형래/이병걸 작곡)
1) 우리들은 대한의 바다의 용사 충무공 순국정신 가슴에 안고
태극기 휘날리며 국토 통일에 힘차게 진군하는 단군의 자손
나가자 서북으로 푸른 바다로 조국건설 위하여 대한 해병대
2) 창파를 헤치며 무쌍의 청룡 험산을 달리는 무적의 맹호
바람아 불면 불라 노도도 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대한 해병혼
3) 백두산 봉우리 폭풍이 불고 태평양 검은 구름 굽이치어도
우리의 젊은 피가 약동하는 곳 원한의 삼팔선도 부서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