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First Blood)
1982년
감독 : 테드 코체프(Ted Kotcheff)
주연 :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
원작 : 데이비드 모렐(David Morrell)의 소설 <First Blood>
92분(국내)
97분(제작국가)
람보 2(Rambo : First Blood Part II)
1985년
감독 : 조지 P. 코스마토스
주연 : 실베스터 스탤론, 리차드 크레나
람보 3(Rambo III)
1988년
감독 : 피터 맥도널드
주연 : 실베스터 스탤론, 리차드 크레나
나는 <람보 2>, <람보 3>를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안 볼 가능성이 크다. 이 글은 <람보 1>으로 알려진 <First Blood>에 대한 글이다. 국내에 출시된 비디오는 상영시간이 원작에 비해 5분이 짧다. 이 글은 5분이 짧은 비디오를 보고 썼다. 게다가 번역도 성의없이 해서 자막만 봐서는 맛깔나는 대사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영어 듣기 실력의 한계를 느끼며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따라서 이 글에서 인용된 대사는 그리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운이 좋으면 비디오 가게에서 <람보 1>이라는 영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중고 비디오 판매점 몇 곳을 뒤진다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DVD 판으로 보면 사라진 5분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람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흔히 사람들은 ‘그것도 영화냐’라는 반응을 보인다. 사실 나도 그 영화를 보기 전에는 비슷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영화를 다 본 후에는 그것이 분명히 영화라고 믿게 되었다. 이 영화가 나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긴 이유 중 하나는 전혀 기대를 안하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치 않은 소득은 그 소득이 그리 크지 않더라도 아주 커 보이는 법이니까.
<람보> 시리즈 1, 2, 3편 모두에서 주연은 스탤론이 맡았다. 스탤론은 단지 주연일 뿐 아니라 <람보> 시리즈의 상징이다. 그것들은 ‘스탤론 영화(Stallone Movies)’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람보>는 근육질의 유명 배우가 나오는 그렇고 그런 영화인 것이다.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슈왈제네거 영화가 아니라 제임스 카메론 영화(3 편은 다른 사람이 감독했다)라고 인식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로버트 드 니로가 람보를 연기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사실 그는 물망에 올랐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이제는 <람보>가 아니라 원래 제목인 <First Blood>이라고 부르겠다. 처녀막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다(첫 성교First Sex와 피Blood). 원작자인 모렐은 람보라는 이름을 시인 랭보(Jean-Nicolas-Arthur Rimbaud)에서 따왔다고 한다. 마침 그의 아내가 Rambo라는 상표가 붙은 식료품을 사와서 람보라는 이름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Rimbaud를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Rambo와 비슷하다. 람보(John J. Rambo)의 이름은 John이다. 프랑스식 이름 Jean에 해당하는 영어식 이름이 바로 John이다. <First Blood>을 감독한 코체프의 영화를 두 편 더 봤는데 별로였고 추천하고 싶지도 않다. 원작 소설인 <First Blood>을 사기는 했지만 21 쪽까지 보고 중단했기 때문에 이 글은 소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나중에 소설까지 읽고 이 글의 증보판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항상 그렇듯이 영화보다 소설이 훨씬 낫다고 한다. 원작자인 모렐에 의하면 이전에는 대학교에서 영문과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많이 추천해주던 책이었던 <First Blood>이 영화가 히트를 친 후에는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First Blood>, 아니 <람보> 시리즈는 쓰레기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First Blood>을 읽고 과제물을 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First Blood>을 즐기는 한 가지 방식은 그것을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웅 영화로 즐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First Blood>에게 열린 단 하나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은 계속 실망과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First Blood>은 액션 영화다. 근육질 배우 스탤론이 나오고 2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봐 줄 만한 액션이 나온다. 문제는 영화의 다른 측면이 그 액션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 and the Tample of Doom>에서처럼 티격태격하다가도 마지막에 키스를 하는 여자가 없다. 백마 탄 기사가 구해주어야 할 공주가 없는 것이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는 여자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람보라는 영웅의 적으로 나오는 인물들도 문제거리다. 그들은 미국의 조그만 소도시(town, 앞으로는 마을이라고 칭하겠다)의 경찰들이다. <다이 하드Die Hard>에서처럼 착하고 용감한 경찰과 못된 악당이 나온다면 좋겠지만 여기서는 그 악당역을 경찰이 맡는다. 게다가 <스트라이킹 디스턴스Striking Distance>에서처럼 일부 못된 경찰이 아니라 마을 경찰 전체가 악당역을 맡는다. 착한 경찰인 밋치Mitch의 문제제기는 완전히 무시된다. 마을을 지켜주어야 할 경찰 전체가 악인 것이다. 더 나아간다면 경찰이 악이 된 이유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주인공인 람보가 영화에서 기껏 한 일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트남 전쟁 시절의 상관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다가 체포된다(원작에서는 상관이 람보를 쏴 죽인다). 람보는 헐리우드의 영웅이 되기에는 너무나 이상하다. 오히려 헐리우드 영웅 영화에 대한 조롱으로 읽는 것이 더 쉽다.
헐리우드식 해피앤딩(happy ending)의 원조가 옛날이야기(fairy tale)라면 <First Blood>의 영웅은 옛날이야기의 영웅이 아니라 신화의 영웅이다. 람보는 운명에 의해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와 더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이디푸스를 좌절케 한 것이 운명이었다면 람보를 좌절케 한 것은 영웅 혼자서는 깨뜨릴 수 없는 너무나 견고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람보의 상업적 성공과 그리스 비극의 상업적(?) 성공이 비슷한 요인 때문이라고 한다면 너무 나아간 것일까? 적어도 람보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이유 때문에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 같다. 우리는 람보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같이 좌절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선입견 없이 <First Blood>을 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영화 초반에는 주인공 람보를 히피, 빨갱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뭔가 다르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모욕과 폭행을 당한다. 원작자 모렐에 의하면 당시에 있었던 히피에 대한 경찰의 인권 침해를 의도적으로 ‘인용’했다고 한다. 원작에서는 영화와 달리 람보의 머리카락도 히피처럼 길다. 우리는 핍박받는 람보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First Blood>을 좌파 영화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람보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며 그것도 그냥 병사가 아니라 엄청난 전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단한 훈장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전쟁 영웅이다. 그리고 그는 성조기가 선명하게 보이는 군복을 입고 다니며 군번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베트남 전에서 썼던 것으로 보이는 칼(나침반도 있는 것으로 보아서 군용 칼인 듯하다)도 가지고 다닌다. 한마디로 그는 미국 제국주의를 상징할 수 밖에 없다.
좌파 영화라고 볼 수 없다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년>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헐리우드의 주변을 맴돌았던 B급 공포 영화(horror movie)와 연관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람보는 마을에 침입한, 따라서 마을을 위협하는 이방인인 것이다. 람보가 오기까지 그 마을은 아무 사건이 없는 평온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람보는 좀비라기보다는 좀비와 맞서 싸웠던 전쟁 영웅이다. 좀비는 베트남의 베트콩(미국 지배계급의 표현을 빌리자면)이어야 한다. 어쩌면 좀비에 물린 사람도 좀비가 된다는 사실에서(더 거슬러 올라가면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도 뱀파이어가 된다는 사실에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좀비 퇴치에 나섰던 람보 자신이 좀비가 되어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른 공포 영화와 다르게 좀비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영화이다. 좀비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그리고 누구나 심지어 좀비 퇴치사까지도 좀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니 좀비 퇴치사야 말로 좀비에 물릴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좀비가 되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일 수 있다.
도대체 람보는 누구인가? 람보의 기묘함은 그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는 체제의 수호자도 될 수 없고 체제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둘 모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영웅도 평범한 사람도 될 수 없다.
한편 <First Blood>는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First Blood>는 <람보 2>, <람보 3>에서처럼 그리고 인디언을 오락실에서 오락할 때처럼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시절의 인디언 영화들처럼 주인공이 20 세기의 인디언인 베트콩을 마음껏 사냥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올리버 스톤(플래툰Platoon, 하늘과 땅Heaven & Earth, 7월 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이나 스탠리 큐브릭(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의 영화처럼 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도 아니다. <First Blood> 속에서 베트남 전에 대한 기억을 아주 단편적으로 몇 번 나올 뿐이다. 게다가 영화 속의 람보는 베트남 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장면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장면들 뿐이다.
이 영화의 비밀에 대한 열쇠는 이 영화 속의 기억, 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이 예외적으로 단편적이라는 사실, 그가 베트남 전쟁의 경험 중 자신이 베트콩에게 고문 당한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미국 지배 계급이 미군이 베트남에서 네이팜탄과 고엽제를 퍼부어서 수백만 명을 학살한 것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듯이 람보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람보의 기억은 스크린 기억(Deckerinnerung)일 뿐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만약 기억(Erinnerung)할 수 없다면 되풀이(Wiederholung)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에서 베트남이라는 외상은 어떻게 되풀이되는 것일까?
사실 이 영화 전체가 베트남 전쟁을 즉 외상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람보는 베트남에서의 전쟁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전쟁을 되풀이한다. 과거의 베트남이라는 맥락(context) 속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미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베트남의 정글이 아니라 마을 옆에 있는 록키 산맥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마을에서. 하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왜곡이 일어난다. 람보 자신이 이번에는 베트콩이 된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의 역할을 맡는 것은 이번에는 마을의 경찰이다(나중에는 군대까지 동원된다).
영화 중에 “먼저 피를 보게 한 것은 그들이지 내가 아닙니다(They do first blood, not me)”라는 대사가 나온다. 람보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전쟁 영웅으로서의 람보, 즉 미국 지배 계급의 대변자로서의 람보는 ‘통킹만에서 시비를 먼저 건 것은 베트콩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베트콩으로서의 람보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베트남인들을 괴롭힌 사람들은 바로 미군’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문제의 발단은 베트남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에 세계 평화를 위협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람보가 문제를 일으킬 만한 인간으로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그 마을에 들어섬으로써 마을을 위협했다는 사실에 반영된다. 경찰 서장 티즐(Will Teasle)은 자신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람보를 마을 밖으로 쫒아냈을 뿐이다. 미국 지배 계급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베트남을 공격했다고 믿고 싶어하듯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의 주요한 사건들을 모두 되풀이한다. 경찰들(미군)은 람보(베트콩)를 잡기 위해 산(정글)을 뒤진다. 람보는 베트콩처럼 굴 속에 들어간다. 초라한 무기(처음에 람보에게는 칼 한 자루 밖에 없었다)를 든 람보에게 총과 사냥개와 심지어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람보를 잡기 위해 군인들은 (베트남에서 고엽제와 네이팜탄을 사용했듯이) 박격포를 쏜다. 람보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로서 전쟁의 외상을 되풀이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가해자 즉 살인자라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람보는 자신이 바로 가해자였다는 사실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마을로 다시 돌아온 람보는 마을을 쑥데밭으로 만든다. 자신이 몇 년 전에 베트남 마을을 불태웠듯이. 단, 아직도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까지는 되풀이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마을을 쑥데밭으로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람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살인자 대하는 것 같다”고 말함으로써 진실에 거의 접근한다. 그 전에는 좀 더 진실에 접근하는데 “우리가 받은 명령은 모두 살인이었다”라는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 대사는 람보가 아니라 이전의 상관이었던 대령이 한 말이다.
람보는 어떻게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부분에서 <트루먼 쇼The Truman Show>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트루먼 쇼>는 한 사람이 진실에 직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공 트루먼은 자신이 사는 세계에 속하지도 속하지 않지도 않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힘으로 그는 거대한 몰래 카메라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치 신경증 환자가 정신분석가에 대한 사랑 즉 긍정적 전이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에 직면할 수 있듯이. <First Blood>에서는 경찰 서장 티즐이 정신분석가의 역할을 맡는 듯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이의 주된 양상이 긍정적(사랑)이지 않고 부정적(미움)이라는 점이다.
람보는 보면 돈키호테와 닮은 점이 많다. 자신의 명마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와 한판 붙으려고 돌진하는 돈키호테는 군용 트럭을 타고 주유소의 주유기를 들이받는 람보로 부활한다. 람보는 박살난 주유기에 불을 붙여 주유소를 폭파하기까지 한다. 영화 초반부에 람보가 오토바이를 타고 주유소를 지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후의 실제 공격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풍차와 주유소 모두 에너지를 얻기 위한 곳이었다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람보가 전봇대를 공격해서 마을에 공급되는 전기 에너지를 공격하는 장면은 그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 자신 속의 에너지(프로이트가 리비도와 공격성이라고 부른)와 싸운 것이 아니었을까?
람보는 돈키호테처럼 사회라는 맥락 속에 속하지 못한다. 기사의 영광이 있던 중세가 끝났음에도 명마 로시난테를 타고 산쵸 판자를 거느리고 갑옷 입고 긴 창을 차고 있으면 그 영광이 재현되리라고 믿는 돈키호테처럼 베트남 전쟁이 끝났고 전쟁 영웅이라는 영광도 끝났으며 자신은 사회 부적응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고 싶지 않은 람보는 성조기가 새겨진 군복을 입고 칼을 차고 군번을 단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 그는 스스로가 그런 차림을 하고 다님으로써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분리시킨다. 그에게는 직장도 집도 없는 것 같다. 그런 그는 직장을 찾거나 애인이 될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옛 전우를 찾아다닌다. 첫 장면에서 그는 단란해 보이는 가정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지만 자신이 그런 가정을 꾸리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경찰 서장은 그를 떠돌이(drifter)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 초반에 경찰 서장에 의해 마을 경계에 있는 다리 밖으로 쫒겨났을 때 다리를 건너 마을을 향함으로써 사회라는 맥락에 속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람보는 영화 후반부에도 다리를 건너 마을로 간다. 이번에는 걸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로시난테인 군용 트럭을 탄 채로. 이번에는 더욱더 절망적인 몸짓으로.
이 영화에서 람보가 가지고 다니는 칼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찰 서장이 그를 위험 인물로 본 이유 중에는 람보가 칼을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이 한 몫 했다. 그는 경찰서에서 탈출할 때에 칼만은 잊지 않고 가지고 나온다. 그는 칼을 빼앗기는 것을 거부한다. 그의 소중한 남근(phallus)인 칼을 빼앗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거세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거부는 곳 그가 사회에서 거부당하는 이유가 된다. 경찰은 람보의 칼을 빼앗고 그를 목욕시키고 면도까지 해 줌으로써 그를 안전한 인간으로 만들려 하지만 람보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람보의 아버지뻘되는 나이든 경찰(그는 나중에 람보를 죽이려 하다가 람보가 던진 돌 때문에 헬리콥터에서 떨어져 죽는다)은 “어디 잘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면도하는 것 뿐이야”라고 말함으로써 면도가 곧 거세임을 암시한다. 게다가 람보는 면도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공포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베트남에서의 상황 즉 “그러면 네 목을 따게 될지도 모른다”고(목이 잘리는 것 역시 보통 거세를 뜻한다) 누군가가 위협한 상황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미국 경찰과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베트콩을 구별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라깡주의자라면 람보가 상징적 거세를 거부해서 사회에 통합되지 못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람보와 경찰은 심각한 갈등 상태에 빠진다. 경찰들은 처음에는 람보를 추방하려하고 나중에는 죽이려 한다. 경찰에게는 람보는 없었으면 더 좋은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찰의 태도 때문에 람보는 피해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태의 일면일 뿐이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람보를 잡아들인 경찰들은 10년 만에 일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한다. 그들은 경찰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 즉 사람들을 쫒아가서 잡고 때리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이것은 람보에게도 마찬가지다. 람보를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라고만 보면 안된다. 람보는 그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다리를 건너 마을로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정장을 하고 그 마을로 갈 수도 있었다. 그의 의식은 ‘나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나를 내버려 둬라’라고 말하지만 그의 무의식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람보는 경찰들이 쫒아오기 때문에 그만의 전쟁을 벌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다시 전쟁 영웅이 되어서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영웅답게 자신의 찢어진 팔을 스스로 마취도 없기 꿰매고 멧돼지 사냥을 하고 덫을 만들어서 경찰을 사냥한다. 그는 죽일 수 있었음에도 경찰서장을 살려주고 멋모르고 끼어든 소년도 살려준다. 그는 베트남 전쟁으로 돌아가서 영웅 놀이를 할 뿐 아니라 그때보다 더 잘하는 것이다. 그때에는 베트남 소녀, 소년들을 지금처럼 살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마초적 영웅놀이와 따뜻한 인간성을 모두 갖추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도 모른 것이 잘 될 수 있었다.’
한편 경찰 서장 티즐이 람보를 싫어하는 이유 중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티즐과 람보의 첫 대면 장면에서 티즐은 람보의 가슴에 있는 성조기(flag on the jacket, 자막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에 대해 기분나빠한다. 하지만 그는 바로 직전에 경찰서에서 나왔는데 경찰서에는 커다란 성조기가 걸려있고 영화에서는 그것이 강조되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사실 원작에는 티즐 역시 참전 용사로 나온다. 그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하기 때문에 람보를 싫어하는 것이다. 람보를 보면 이제 사회에 잘 적응해서 마을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그로서는 잊어버리고 싶어하는 사실들이 떠오를 것이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외상을 가지고 있는 람보는 그에게 한국 전쟁이라는 외상을 떠올리게 한다. 로버트 알트먼의 <야전병원 매쉬Mash>에서는 배경이 한국 전쟁인데도 한국인들이 베트남들이 입는 아오자이를 입고 있다. 그것이 알트먼의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베트남 전쟁과 똑같이 부도덕한 전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말한다면 알트먼을 근거없이 띄워주는 것일까?
첫댓글 람보2,3 에 나오는 람보는 중국의 이소룡, 한국의 김두환, 켈틱의 아스트릭스와 공통점이 있읍니다. 베트남전에서 받은 패전에 대한 수치심은 미국민들에게 상당한 고통이었는데..그것을 단숨에 날려버린것이 람보 랍니다.
진실이야 어찌됬건, 영화속 람보(미국병사) 승자입니다. 베트공과 싸워서 이기죠. 전 미국민이 영화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이렀게 엄청난 대국민 정신치료 영화가 있을까요.
만일 미국사람이 역사공부를 하다가 자신의 무적강국이라는 나라가. 조그만 아시안한테 박살났다는것을 공부한다면 황당하겠죠. 근대 비디오 한편만 빌려서 보면 이것이 해결 됩니다. 람보2,3
사람들이 람보를 오락영화라고 하면서 우습게 보는 것은 영화자체가 상업성이거나, 폭력적인 것 뿐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영화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얻는 자신이 한심한것이 아닐까요. 진실을 알고있는데.
일본인한테 당한 중국인들..대국이 섬나라한테..깨진 그 서러움 자신들의 무력함(사실 쿠후 할줄아는 중국인 드믐니다) 이소룡이 정무문에서 보여주었지요..영화를 보는 중국인은 이소룡이 되어서 일본인과 멋지게 싸울수 있지요.
애들 보는 만화인데.. Asterics (?) 로마인들한테 점령당한 켈트민족중에. 엄청난 장사가 로마인들을 골려준다는 것인데 정말 재미있읍니다.
영국,호주,뉴질랜드, 이쪽 어린학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지요. 픽션속에서. 자존심을 대리만족으로 회복할수 있다면 이것도 괜찮은것 같지 않을까요.
그리고, 람보2,3 이 한국에서 그래도 뜬 이유는 한국도 베트만 전에서 졌다는것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받았을거고, 람보를 보며 승리감을 느끼며 자존심을 회복할수 있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