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났다. 그런데도 늦더위 기세가 좀체 꺾이지 않는다. 아직도 시원한 물가가 생각난다. 경북 포항시 송라면 중산리에 위치한 청하골은 계곡의 청량함이 그리울 때 찾아가기 딱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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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골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우람한 연산폭포.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굉음과 무지개가 인상적이다. |
청하골은 향로봉(9백30미터)에서 내연산(7백10미터)을 거쳐 문수산(6백22미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다. 향로봉, 내연산, 문수산을 비롯해 청하골을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삿갓봉(7백18미터), 천령산(7백75미터) 등은 해발고도만 따진다면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동해안 가까이에 솟아올라 있어서 해발고도가 엇비슷한 내륙지방의 산봉우리들보다는 훨씬 더 높고 우뚝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청하골의 풍정도 백두대간 산자락의 어느 심산유곡에 못지않게 깊고 그윽하다. 의외로 걷는 길은 수월한 편이다. 등산로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고 평탄해서 구렁이 담 넘는 듯이 수월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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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골 초입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보경사의 여러 당우와 오층석탑. |
청하골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초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으로 청하현에 속했던 곳이라 그런 지명이 붙었다. 또한 맨 아래의 상생폭포에서 최상단의 시명폭포에 이르기까지 약 7킬로미터의 계곡에 모두 12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줄지어 늘어선 덕택에 ‘12폭포골’로도 불린다. 이곳처럼 형태와 규모가 저마다 독특한 폭포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청하골의 물길을 따라가는 계곡트레킹 코스는 보경사(寶鏡寺)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인 602년에 지명법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이다. 지명법사가 중국에서 가지고 온 불경과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연못에 묻고 지은 절집이라 해서 보경사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대웅전, 적광전, 천왕문, 요사채 등 당우가 여럿이지만 연륜에 비해 규모가 큰 사찰은 아니다.
보경사(寶鏡寺)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증산리 622번지 내연산(內延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내연산은 바위 하나 볼 수 없는 토산(土山)으로 주능선은 밋밋하지만 기암절벽으로 어우러져 산세가 빼어난 데다 무려 12개의 폭포가 이어져 절경을 뽐낸다. 이 골짜기를 내연산 12폭포골이나 보경사 계곡, 또는 청하골이라 한다. 20리가 넘는 보경사 계곡은 관음 폭포, 연산 폭포, 잠룡 폭포 등 크고 작은 수 많은 소(沼)와 협암․기와대․선일대․비하대․학소대 등의 기암절벽이 있다.
당우 [堂宇,唐虞,黨友] 뜻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경내의 문화재도 고려 고종 때의 고승인 원진국사의 비석(보물 제252호)과 부도(보물 제430호)를 제외하면 딱히 내세울 게 없다. 하지만 절집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번잡하거나 호사스럽지 않아서 오며가며 마음 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경내와 절 주변에는 소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등의 아름드리 노거수가 빼곡해서 삼복의 불볕더위조차도 기를 펴지 못한다.
부도2 [浮屠/浮圖] 【명사】
(1)
[불교]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
보경사에서 청하골 일대 여러 산봉우리들의 좌장격인 향로봉까지의 거리는 10킬로미터(편도)쯤 된다. 왕복 6시간 30분이 소요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산행길이다. 하지만 노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서 한 폭의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연상케 하는 청하골의 진면목은 보경사에서 연산폭포까지 왕복 5.4킬로미터 구간을 2, 3시간 동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에 중국화의 모방에서 벗어나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으킨 겸재 정선도 청하현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이 청하골을 다녀간 뒤 내연삼룡추도(內延三龍秋圖), 내연산폭포도(內延山瀑布圖), 고사의송관란도(高士倚松觀瀾圖) 등의 걸작을 남겼다.
우리의 산하(山河)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진경산수(眞景山水)가 등장했다.
이를 대표하는 화가가 겸재다.
그는 산세와 계곡의 형태를 직접 사생(寫生)한 후
그 아름다움을 독자적 형식으로 표현했다.
우거진 수풀은 묵법(墨法) 위주로,
절벽은 선묘법(線描法)으로 그려
음양의 조화를 찾는 등 주역의 원리를 도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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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등걸에 편안하게 등을 기댄 채 청하골 제1폭포인 상생폭포를 바라보는 탐방객. |
보경사 앞 등산로에는 시원한 계류가 쏜살같이 흐르는 수로가 한쪽에 설치돼 있다. 보경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이 수로는 절 아래의 너른 들녘에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늦더위를 참지 못한 등산객과 아이들은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고 이 수로에 발을 담그기도 한다. 워낙 물이 차갑고 유속도 빨라서 발등에 전해오는 냉기가 금세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곤 한다.
청하골의 등산로는 소나무, 참나무, 때죽나무, 생강나무, 단풍나무, 서어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등이 뒤섞인 숲으로 조붓하게 이어진다. 비탈지거나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무데크와 계단이 놓여 있어 남녀노소 안심하고 걸을 수 있다. 경사도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만한 등산로를 20여 분쯤 오르면 청하골의 제1폭포인 상생폭포 앞에 당도한다.
상생폭포는 우람하거나 위압적이지 않다. 두 줄기의 폭포수가 나직한 암벽을 타고 나란히 떨어지는 모양이 단아하기 그지없다. 상생(相生)이라는 그 이름처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편안케 해준다. 하지만 폭포 옆의 기화대(妓花臺)라는 암벽과 폭포수가 떨어지는 기화담은 다소 위압적이다. 특히 끝 모를 심연처럼 검은빛으로 일렁이는 기화담은 약간의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아니나 다를까, 옛날에 어느 풍류객과 함께 상생폭포 위쪽의 바위에 앉아 음주가무를 즐기던 기녀가 술에 취해 떨어져 죽은 뒤로 기화담과 기화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빠져나오기 어려운 곤욕이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행복의 절정이 어느새 고통의 심연이 되어 버렸다.
그 일 이후 그녀는 절망과 좌절의 심연에 빠져 버렸다.
수희는 이제 그만 혼돈의 깊은 심연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허무주의의 끝 모를 심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2)
마음이나 의식 속의 깊은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기 내면의 심연을 아프게 응시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극한의 상황에서 원초적인 본성의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저렇듯 깊은 눈매를 하고 있을 때의 그는 고독과 우수의 심연 속에 잠겨 있는 듯 보인다.
(3)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간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들의 사랑은 삶과 죽음의 심연조차 뛰어넘는 숭고한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인 듯하다.
열두 폭포 절경 관음폭포 서면 탄성이 절로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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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부군>의 집단목욕 장면이 촬영된 곳으로 유명한 잠룡폭포. |
상생폭포를 지나면 보현폭포, 삼보폭포, 잠룡폭포(보경폭포), 문수폭포(무풍폭포)가 연이어 나타난다. 그중 삼보폭포와 잠룡폭포는 등산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위치해 있어서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아주 비좁은 협곡에 위치한 잠룡폭포는 청하골의 여러 폭포들 가운데 가장 준수한 풍모를 자랑한다. 규모로는 연산폭포가 더 크지만, 그 형태와 주변 풍광은 잠룡폭포가 한 수 윗길이다. 이 잠룡폭포는 영화 <남부군>에서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모인 남부군 대원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발가벗고 목욕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하골의 열두 폭포 가운데 으뜸가는 승경(勝景)은 관음폭포다. 쌍폭인 관음폭포 주변에는 선일대, 신선대, 관음대, 월영대 등의 천인단애가 장승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억겁의 세월 동안 쉼 없이 쏟아지는 폭포수가 만들어 놓은 못 옆에는 커다란 관음굴이 뚫려 있다. 이 굴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쪽 입구를 가린 채 떨어지는 폭포수 줄기를 볼 수 있다.
승경.. 뛰어난 경치
천인단애 [千仞斷崖] 천 길이나 되는 높은 낭떠러지
심산유곡도 좋고 천인단애의 그림같은 소나무도 좋다 척박한 바위틈에 서 있는 소나무에선 그 질긴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끼고, 비옥한 지역에서 자라 올 곧은 자태에선 그 굳센 기상에 감탄한다. 하늘 끝까지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의 기상도 좋지만 휘돌아 몸을 비틀면서 마치 세상 온갖 풍상을 안고 오르는 모습은 더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닥아 온다.
못생기고 굽은 소나무가 고향과 선산을 지키듯이 우리에게 소나무는 고향 같고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품속 같다). 그래서 한국인은 마음속에 소나무 한그루씩을 품고 산다고 한다.
소나무아래서 태어나 소나무 기둥으로 된 집을 짓고 살다가 죽어서도 소나무 관에 눕는 삶이라고 한다.
새벽안개가 포근한 솔 숲길을 걸어 들어가는 스님과 중생의 모습은 연화장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오롯하다. 어느 곳의 솔숲보다 신비롭고 영적인 기운이 깃든 길임에 분명하다.
오늘은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도 의젓한 자태가 돋보이는 그 소나무 길을 걷는다.
의연한 소나무 아래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관음폭포 위에 걸린 구름다리를 건너면 높이 30미터, 길이 40미터에 이르는 연산폭포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하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폭포다. 학소대라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커다란 물줄기가 무지개와 물보라를 만들어내며 쏟아지는 광경에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제7폭포인 연산폭포 위쪽의 폭포들을 보려면 관음폭포 옆쪽의 벼랑길을 이용해야 한다. 벼랑 위에 올라선 뒤 다시 15분가량 물길을 따라가면 또 하나의 폭포를 만나게 된다. 숨겨져 있어서 ‘은폭’(隱瀑)이라 불리는 폭포다. 비단 같은 물줄기가 시퍼런 소(沼)로 떨어지는 모습이 정갈하고 기품 있다.
그 위쪽으로도 복호제1폭포, 복호제2폭포, 실폭포, 시명폭포가 이어진다. 그러나 등산로가 험한 데다 여태껏 만난 8개의 폭포만으로도 내연산 청하골의 진경을 두루 섭렵했기에 애써 더 올라갈 필요는 없다. 대체로 같은 길을 되돌아오는 일은 지루하고 퍽퍽하다. 하지만 청하골에서는 그런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오히려 눈으로만 봤던 풍경을 마음으로 느끼는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열두 폭포가 늘어선 청하골에서는 눈보다 마음이 더 즐겁고 상쾌해진다.
◆ 여행정보
▲ 숙박=보경사 매표소 앞에 위치한 연산온천파크(054-262-5200)는 비교적 시설도 괜찮고 온천탕과 모텔을 함께 갖춘 숙박업소다. 보경사 입구 도로변에 자리잡은 보경펜션(054-261-1183)은 깔끔한 목조펜션이다. 이밖에도 버섯집민박(054-262-9669) 등의 숙박업소가 보경사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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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할매식당의 김치말이국수. |
▲ 맛집=보경사 상가지구에는 직접 칼국수를 만들어 파는 음식점들이 여럿 있다. 밀가루와 생콩가루를 적당히 배합한 반죽을 손님들이 보는 앞에서 밀대로 밀어 국수를 만드는데, 쫄깃쫄깃한 면발과 고소하고 개운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더위가 완전히 스러지지 않은 요즘에는 새콤하고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가 더 입맛 당긴다. 집집마다 솜씨와 맛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이북할매식당(054-261-8921), 춘원식당(054-262-1170) 등이 맛집으로 소문 나 있다.
▲ 가는 길=익산포항고속도로 포항톨게이트→대련나들목(28번 국도·영덕 방면)→성곡나들목교(7번 국도)→송라면 소재지(보경사 방면)→보경사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