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지.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소리가 들려오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中-
1
-왔어? 조금 늦었네.
-미안해. 문자를 방금 봤어.
-너 좋아하는 크림 스파게티 해주려고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일 먹어야겠다. 일단 아쉬운 대로, 고기도 좀 사왔으니까…… 삼겹살에 소주?
-테이블. 다 닦았어?
-아, 식탁? 물감이 묻어 있길래. 이젠 식탁에서 그림 안 그리려고. 너 지저분한 거 싫어하잖아.
-내가 언제!
-······.
-됐다. 그래, 삼겹살에 소주. 먹자. 먹고 얘기하자.
은기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더백을 거실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윤우의 방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문을 닫고 그 문에 등을 기대어 서자, 온통 암흑이 에워쌌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조금은 보이겠지. 그렇게 꽤 오랫동안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온통 먹색이었다.
한 사람이 외로워지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 걸까. 등 뒤로 만져지는 문손잡이의 감촉이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졌다. 은기는, 윤우와의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무언가 울컥-하는 마음이 몸 속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감이 묻어 있는 식탁이 사실은 좋았어, 내가 언제 치워달라고 하디, 라고 말하는 대신 은기는 눈이 빨개져버렸다. 그래 먹자, 삼겹살에 소주를 먹자, 는 말을 할 때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정연과 카페에서 헤어지고 나서부터 윤우의 현관에 들어서기까지 계속 스스로에게 주문이라도 걸듯 되풀이한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let it be.' 그저 흘러가게 놔두자. 그가 변해서, 그런 그의 모습에 내가 언젠가 떠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두자.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하고,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을 때가 되면 떠나자. 그렇게 생각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현관을 지나 슬리퍼를 신는 순간 윤우의 뒤편에 놓인 식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뻑뻑한 유화물감이 아무렇게나 묻어 있던 식탁이 깨끗해진 것. 은기는 맥이 탁 풀렸다. 이제 밥 먹는 것조차 잊은 채로 식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윤우 같은 건 더 이상 없었다.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윤우는 소매에 물감 같은 건 묻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태껏 그렸던 그림들 중 단 한 점도 액자에 곱게 집어넣어 벽에 걸어놓은 적이 없었던 윤우. 그것은 일종의 자만에 대한 혐오감의 표시였다. 적어도 은기는 그렇게 추측했다. 하지만 요즈음 윤우는 작품에 어울릴 만한 액자들을 사 모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의 특정 부분에 어떤 색을 써야 할지 조언을 구하기 위해 교수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똑똑똑. 그 소리만큼 은기는 뒷걸음질 쳐야 했다. 그래야만 윤우가 그 문을 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윤우는 대답을 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은기의 뒷모습에 망연해져버렸다. 그래도 어쨌든 은기가 삼겹살을 먹자고 했으므로 윤우는 투명한 봉투에 들어있던 상추를 꺼내서 씻기 시작했다. 고추와, 쌈장과, 마늘도 냉장고에서 꺼냈다. 모든 식기구들을 식탁에 세팅해 놓고, 하마터면 깜빡할 뻔한 구워먹을 신 김치도 마지막으로 꺼내놓자 얼추 준비가 되었다. 한동안 인기척이 없던 방 안에서도 어느새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켠 은기는 옷을 갈아입었다. 윤우의 장롱 옆에 놓인 수납장은 은기를 위해 윤우가 마련한 것이었다. 은기가 말하는 ‘따뜻한 목재로 만들어진’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 윤우가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구입한 것이었다. 아차산부터 장한평까지 이어지는 가구의 거리를 돌고, 논현동에 있는 가구의 거리를 돌고, 이제는 진짜 발바닥에 아무 감각이 없어졌다 싶었을 때, 윤우는 이 수납장을 발견했다. 사실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거의 반쯤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구입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은기의 요구에 의해 반품을 하러 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은기는 그 수납장을 한 번 쓰다듬어 보았다. ‘정말, 충분히 따뜻한 거 확실해? 이정도면 합격?’ 손발이 꽁꽁 얼어있는 채로, 코가 빨개진 채로 그렇게 물어보던 윤우가 생각나서 웃음이 나와 버렸다. 세상에 따뜻한 목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건 화롯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은기가 말한 건 ‘느낌’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윤우도 당연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윤우가 그렇게 하루 종일 발품을 팔고 다니며 ‘물리적으로’ 따뜻한 수납장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은기는 ‘심리적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서 새삼 다시 한 번 수납장을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2
-윤우야. 세상의 모든 것이 변했는데 그 사람만 변하지 않은 것과, 세상은 예전과 같은데 그 사람만 변한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플까?
-취했어?
-아니.
-글쎄……. 나는 전자(前者)가 더 아플 것 같은데.
-그래? 왜?
-그냥, 갑자기 네가 그 얘길 하니까 시골에 있는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엄마 된장찌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똑같은 맛이 나거든.
-그게 무슨 의미야?
-나도 잘 모르겠어…… 모든 게 바뀌었는데도 끝내 변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알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해.
-그렇구나.
-서은기, 이제 삼겹살도 다 먹었는데 술 그만 먹어. 그거 이리 내.
-나도 나중에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엉엉 울더라도 그 편이 더 나을 텐데.
-뭐라고?
-근데, 안 그럴 것 같아. 그래서 그런 너 때문에 내가 점점 아파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내 대답은 후자(候者)로 할게.
은기는 윤우의 입술에 깊게 입맞춤했다. 소주에 흠뻑 취했으므로 은기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눈앞에서 팽팽 돌았다. 어쩌면 사람들은 멀미를 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은기는 윤우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은기는 지금, 윤우와 섹스를 해야만 했다. 지구가 구태여 자전을 해서 밤을 만들어낸 것은 다 그 때문이니까. 그걸 모른 척 하기에는 너무 취해버렸고, 취하면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무시할 수가 없어지니까. 은기는 윤우의 목을 끌어안았고, 조금 움찔하던 윤우도 이내 은기를 번쩍 들어 올려 침실로 데려갔다. 벗고, 또 벗고, 벗느라고 입 맞추지 못하는 순간이 아쉬워서 또 키스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듬더듬 촉감에 의지해서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하면 흘러가는 윤우를 잠시나마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생각도, 걱정도 중요치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프니?’ 윤우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어느 순간 은기의 다리에 힘이 풀리자, 윤우가 한 쪽 손으로 은기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렇게 하자 윤우가 더 깊숙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조금 아픈 것도 같아서 은기가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어두워서 윤우는 보지 못했고 격렬한 몸짓은 계속되었다. 설마 이 순간에도 윤우는 계속 흘러가고 있는 걸까. 은기는 윤우를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빠른 것보다 깊은 게 좋아서, 그렇게 해야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은기는 윤우가 빨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건지, 지구의 자전과 더불어 윤우의 움직임에 어지러운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웠으므로 윤우는 은기가 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돈에 쫓겨서 잠시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끄는 작품을 만들어내면, 그 결과는 늘 불쾌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다. 모베도 크게 화를 내며 “그게 아니야, 그 쓰레기는 찢어버려!”하고 소리쳤다.
처음에는 그림을 찢는 일이 힘들었지만 결국 다 찢어버렸다. >
- 반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中-
1
예술의 전당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우아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사람들도, 세미 정장을 입고 스모키 화장을 한 여자들도, 그런 여자들의 손에 이끌려 공연을 보러 나온 남자들도, 모두 잘 알지도 못하는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현대판 사교계가 따로 없었다. 그 와중에 푸른색 스키니진에 스니커즈를 신고 벤치에 앉아있는 은기가 있었다. 방금 전 끝난 공연의 브로셔를 손에 든 채로. 브로셔에는 공연의 주요 인물들과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삶을 뮤지컬로 재구성한 무려 백 오십 분짜리 공연이었다. 인터미션도 없었다. 윤우가 함께 가자고 조르지 않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은기에게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어쩐지 바라보고 있기 거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지 않았더라면, 후회를 할 수도 없었겠지만 잠정적으로 매우 크게 후회할 일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은기는 함께 공연을 보러 온 교수님들과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윤우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브로셔의 맨 첫 페이지에는 반 고흐 역을 맡은 남자 배우의 이미지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름, 나이, 공연 경력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면서 은기는 아까 가까이에서 직접 보았던 그의 생생한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면 어루만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던 그의 얼굴을.
「점점 닮아갈 것이오…….」
공연의 한 장면이, 그 대사가 계속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은기는 자꾸만 앞으로 넘어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멀리에서부터 윤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그가 그린 한 여인의 초상화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같은 동네에 사는 평범한 여인의 부탁에 의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반 고흐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그녀를 그려냈다. 하지만 그 초상화를 마주한 모든 이들은 그림과 그녀의 실제 모습이 ‘닮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초상화의 주인공인 그녀 자신마저도 궁금증을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반 고흐에게 찾아가 왜 이렇게 그린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반 고흐는 ‘점점 닮아갈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빈센트 반 고흐는 외면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느낌’을 그리는 화가였다. 때문에 그는 그녀의 성격, 인품, 속성을 파악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그 모든 함축을 담은 초상화를 그려준 것이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녀가 나이를 먹을수록 실제로 그 그림과 매우 닮아졌다고 한다.
은기는 그 대사를 하던 배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빈센트 반 고흐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라는 남자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동경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동정했을까? 은기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으로 범벅이 되어 곤란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벤치에 앉아 있는 채로 은기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혼자였다. 두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리고 허리는 반쯤 숙인 채로, 은기는 혼자였다. 한숨을 쉬어도, 그저 멍하니 시선을 풀어두어도, 뱃속까지 얼얼한 지금 이 상태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흐 역을 맡은 배우가 양극성장애로 인해 극심한 조증과 울증을 오가는 모습을 표현해 냈을 때, 사랑해 마지않던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을 때, 은기는 조용히 탄식했다. 윤우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어두운 밤에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자 위에 초를 올려놓았던 고흐. 그 장면에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마치 인디언의 쓸쓸한 자장노래처럼 구슬펐다.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조용히 되새기는 것인지 헷갈릴 만큼 잔잔해서,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했다. 그 순간 짧게 스쳤다고 생각했던 눈빛도- 착각인 걸까. 그 배우도, 브로셔에는 ‘이주성’이라고 적혀 있는 그 배우도 첫째 줄에 앉아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여자를 기억할까. 그 쏟아지던 시선들 속에서 나의 시선을 기억할 수 있을까. 은기는 고개를 젓는 대신 멀리 서 있는 윤우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예 수트가 교복이 되어버린 윤우를. 하지만 소리 내어 윤우를 부르지는 않았다. 흥얼흥얼. 아까 그 배우가 그랬듯이 매우 단조롭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사를 알지 못하니까 허밍으로. 모든 조명이 서서히 암흑으로 변할 때까지 끊이지 않던 노래, 스스로의 열정을 위로하듯 부르던 그 노래의 멜로디는 마치 이명처럼 언제까지고 은기의 귀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2
-많이 기다렸어?
-아니. 이제 갈까?
-그래.
은기는 습관처럼 윤우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고 홀을 빠져나왔다. 다음에는 힐을 신고 오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윤우는 은기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나가는 길에 보이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은기도 따라 웃으며 인사를 했다. 서양화과의 가장 유명한 캠퍼스 커플다운 세련된 인사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했어? 교수님들이랑.
바깥은 쌀쌀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12월의 초입이 으레 그러하듯, 홀을 나와 주차장까지 가는 길목에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과 연초에 대한 부담감이 반쯤 섞인 공기가 무방비하게 퍼져 있었다. 어둑어둑한 길목 양 옆의 잔디밭에는 은은한 노란빛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박혀 있었다. 윤우의 구두 굽 소리도, 일정했다.
-디자인계열 회사에서 제의가 들어왔어. 생각해보고 있는 중인데,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싶어서 오늘 같이 공연도 볼 겸. 겸사겸사.
윤우는 그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차 키를 꺼내서 버튼을 눌렀다. 삑,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은 차에 탔다.
-디자인?
-응. 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나봐.
-네 그림? 어떤 그림?
-우리를 만나게 해주었던 바닷가 그림.
차 시트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지만, 두 사람 모두 시동도 켜지 않은 채로 앞 유리만 보고 앉아 있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드는 입김이 피어오를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를 만나게 해주었던 바닷가 그림······ 그 대목에서야 은기는 고개를 돌려 윤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은기야. 네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근데······.
-가면,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 마음껏 그릴 수 있을까?
-······.
-왜 이러는 거야? 너?
-은기야. 우리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우리 과 선배들, 그 흔한 일자리 하나 없이 그림 그리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사는 사람 무지 많아.
-너는 그 사람들이랑은 달라. 이러지 않아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 최소한 먹고 살 수는 있어. 이미 이뤄가고 있잖아? 네 나이에 이정도 명성이면 된 거 아니야?
-나는··· 불안정한 게 싫어.
-불안정? 뭐 지금 돈 얘기하는 거야!
쾅. 은기는 차 문을 세게 닫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노래가, 아까 그 노래가 부르고 싶어져서······ 뒤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리자 은기는 달리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속도로. 숨이 가슴까지 차올라서 옆구리가 아플 때까지 내달렸다. 오늘만큼은, 다음에는 힐을 신고 오겠다고 다짐했지만 오늘만큼은 스니커즈를 신고 오길 참 잘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목이 시큰해져서 숨 쉴 때마다 따끔거렸지만 은기는 어쨌든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몰라도 불렀다. 아주 우스운 허밍이라고 해도.
무작정 주차장의 반대편을 향해 달린다는 것이 어느새 다시 예술의 전당 안으로 깊숙이 들어 와버린 은기는, 나무가 우거진 더욱 더 어두운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도, 사람들의 인사치레도 없는 곳으로.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은 뛸 수 없게 되었을 때 은기는 허리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영하의 추위에 덥다고 느낄 만큼 달리고 나니,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더운 숨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만이 짙게 내리깔린 밤에도, 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야. 고흐도 그랬어.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면서. 어쩌면 그 사람과 나, 이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같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지.」
언젠가 윤우는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이지 가당치도 않았다. 은기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숙이고 있었던 허리를 세우고,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와중에도 계속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바깥으로 밀어내며- 차라리 토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면을 응시했을 때, 빨개진 두 눈에 독기 같은 것이 서려 추위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모르게 미세하게 온몸이 떨려왔을 때, 눈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른거리는 눈물이 만들어낸 잔상처럼 그가 은기를 끌어안았다.
<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전과 후의 모습은 마치 불 꺼진 램프와 타오르고 있는 램프만큼이나 다르다.
어느 쪽이든 램프는 거기 존재하는 것이고 그게 좋은 램프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램프는 빛을 발산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램프의 기능 아니냐.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
-반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中-
1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은기는, 호텔 침실을 방불케 하는 하얀색 이불커버에 누워서 천천히 눈만 감았다 떴다. 간밤의 일을 되새김질이라도 하듯. 침대 위로는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은기의 머릿속으로 도무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이 오갔다. 입 밖으로 꺼내면 아무리 세련되게 표현한다고 해도 야유를 면치 못할 상황들이. 은기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윤우가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윤우는 없었으니까. 아니, 사실 언제를 기점으로 윤우가 사라졌는지는 은기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별의 순간, 윤우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 사람이 ‘위험’한 사람이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윤우가 그렇게 일러주기 전부터 은기는 실제로 주성을 대하며 스스로 눈치 챈 바가 있었으므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주성은, 말하자면, 배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흐’를 연기하려 한 것인지 은기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무모함마저도 순수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쪽 벽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은 다 뭐예요?
사실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현 듯 제목을 기억해낼 수 없는 신파 영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그건 마치 - 치매에 걸린 아내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아내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는 기억해야만 할 것들이 무엇인지 써 놓은 메모들 같았다. 물론 이번에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써 놓은 것이 아니라, 고흐가 되어야만 하는 한 남자가 스스로를 위해 써 놓은 것이었지만.
주성은 은기가 벽에서 떼어내 손에 쥐고 들여다보고 있었던 연갈색 포스트잇을 다시 제자리에 붙여 놓고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빼곡하게 늘어져있는 포스트잇들 중에는 종종 고흐의 미술적 사상과 그가 그림을 그릴 때 쓰던 기법들에 대한 것들도 펜으로 꾹꾹 눌러 쓰여 있었다. 조금 지나자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대체…… 그림을 한 번도 제대로 그려 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평생을 그림만 그렸던 사람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단지 이런 포스트잇들을 벽에 붙여 놓는 일은 조금도 의미가 없어보였다.
하루 날을 잡고, 은기는 학교 실습실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주성의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렇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은기는 수치스러워하는 윤우의 손에 붓을 쥐어주었고, 우는 사람을 연기하려면 일단 눈물은 흘려야 한다고 - 그래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같은 범주에는 들 수가 있다고 -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주성은 거의 하루 종일 캔버스 앞에서 그림만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유독 덕지덕지 여러 번 덧바르는 화법을 즐겼고, 실제로 고흐가 그러했듯이 붓을 사용하지 않고 물감을 그대로 화폭에 짜내어 쓰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집 안에는 시큼한 유화물감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은기에게는 더없이 익숙한 냄새였다.
은기는 침대에 누운 채로 곤히 잠들어 있는 주성의 등짝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 저마다 해가 뜬 낮 시간동안은 각자 다른 세상에서 다른 일을 하고 살아가지만, 이렇게 잠들어 있을 때만큼은 참 비슷하다고. 은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가 뜨고, 또 해가 지는 세상에 살아서 참 다행이라고. 그러다가 주성이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약을 먹기 위해 물을 찾으면, 은기는 재빨리 일어나서 그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어둠 속에서, 곁에 누워 자던 이가 급작스럽게 깨어나 건네준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삼키는 주성을 보고 있자면 이제는 정말 그 어떤 정신과 상담도, 심리치료도 다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았다. 어떠한 치료법도 백 년 하고도 수십 년이나 더 오래 전에 지구에 태어난 한 남자에 대한 그의 ‘깊은 공감’을, 그 완벽한 ‘일체감’을 낫게 해주지는 못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2
윤우는 스스로 고흐의 인생에 걸어 들어가고 있는 연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비참한 결말을 맺는 이야기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 책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만을 바라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를 곁에서 바라볼 때처럼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윤우는 주성을 미치광이에 정신병자라고 이야기하면서 은기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지만, 은기는 기어코 캐리어를 끌고 현관을 나섰다. 그 캐리어가 윤우의 집에 남아 있던 은기의 마지막 짐이었다.
-그 새끼 한쪽 귀는 아직 잘 달려있니?
석 달 만에 만난 윤우의 안부인사는 대충 그런 식이었다. 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그래서 가끔 밥이나 같이 먹자는 말은 당연히 핑계였고 거짓말이었다. 윤우는 은기의 얼굴에서 ‘불행’을 찾고 싶어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주 주성의 상태를 물었고, 은기의 피부가 나빠진 것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윤우가 바라던 대로 주성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은기의 피부트러블에 대해서는 윤우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건 주성이 은기를 고생시켜서가 아니라 은기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은기의 얼굴에는 평생 나지 않던 기미가 꽤 많이 올라온 상태였다. 은기는 자기도 모르게 가만히 배를 쓸어보았다. 하나의 몸속에 두 사람을 담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것들에서부터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우린 잘 지내. 정말로.
은기는 뱃속의 아이가 희망이 되어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그마한 상처에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심약해진, 그리고 그만큼 감정의 기복이 심해진 주성의 상태에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바로 그날 주성에게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디가 심장이고, 어디가 머리인지 꼭꼭 집어서 말해주며- 정말이지 그저 미소 지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주성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은기를 빤히 쳐다보았을 뿐 웃지도,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았다.
윤우가 주문한 음식이 먼저 나왔다. 은기가 가장 좋아하는 까르보나라 스파게티였다. 웨이터가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고 뒤도는 순간만 해도 ‘정말 맛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냄새가 코끝을 누르고 지나치자 버튼을 누르면 음악이 나오도록 설계된 라디오처럼 급작스러운 토악질이 올라왔다.
스스로에게 놀란 은기는, 입을 틀어쥔 채로 아무렇지 않은 척 무마해보려 옆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서 한 컵 들이켰다. 확실히 찬 물을 마시니까 속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지만, 최대한 음식 냄새를 맡지 않도록 숨을 조금씩 나눠 쉬어야 했다.
-미안. 아까 점심 때 먹은 게 좀 체한 모양이야. 신경 쓰지 말고 먹어.
-…….
먹는 음식을 앞에 두고 토악질을 한 것이 조금 미안해져서 은기는 괜히 반찬들을 윤우에게 가깝도록 밀어 주며 말했다. 그렇게, 꽤 자연스럽게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윤우는 포크만 한 손에 든 채로 어정쩡하게 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이 없는 건지, 무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눈을 한 채로.
-뭘 그렇게 빤히 쳐다 봐? 왜 안 먹고 그러고 있어?
-아니. 그냥 뭘 좀 계산하느라.
-뭐라고?
-우리,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지?
3
주성을 한 번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는 윤우를 만류하고, 그 날카롭던 눈빛을 외면하고, 다시 눅눅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집 밖으로는 거의 한 발짝도 나서지 않는 주성을 대신해서 장을 보러 나온 은기는, 카트를 끌며 마트를 누비고 있었다. 안 그래도 마른 주성이 요즘 따라 부쩍 살이 빠지고 있는 것 같아서 이것저것 해주려다 보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양 손 가득 짐이었다.
벌써 4월의 초입이었다. 주성의 오피스텔로 가는 오르막길에는 유독 벚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아직 흐드러지게 핀 정도는 아니었어도 곧 꽃잎이 만개할 봉오리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맴돌았다. 얇고 부드러운 감촉의 원피스를 입고 카디건만 하나 걸쳤을 뿐인데도, 무거운 짐을 들고 걸으려니 땀이 나려고 했다. 은기는 무거운 비닐봉투에 손바닥이 짓눌리는 것이 아파서 잠시 짐을 내려놓고 허리를 세웠다. 시야에 주성의 오피스텔이, 아니 우리의 집이, 아주 가까워졌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은기는 뱃속의 아이에게 말을 거는 습관이 생겼다. 아이는 물론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엄청난 굉음에 은기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주 기괴한, 목 뒤에서부터 소름이 돋는 거대한 충돌성 소음이었다. 사람들이 지르는 소리에 은기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가 오피스텔에서 떨어졌어.’ 한 여자가 울먹거리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주변은 119에 신고전화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경악에 찬 사람들은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가슴이 아니라 자궁에서 느껴졌다. 쿵…… 쿵. 앞이 하얘졌고, 은기는 자기도 모르게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냈다. ‘아이야, 가지 마라.’ 은기는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로 옆에 널브러져 있는 흰 봉투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일어나려고 바닥을 손으로 짚는데, 아스팔트에 끈적한 혈흔이 묻어져 나왔다. 두 다리 사이에서는 믿을 수 없는 양의 피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왔네, 왔어!’ 모두들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고, 붉은 사이렌의 소리는 아지랑이가 되어 은기의 시야를 일렁였다. ‘모두들 비켜주세요! 멀리 떨어져 주세요!’ 구급대원들은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냈고,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은기는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었다.
4
주성의 장례식은 단출하게 치러졌다. 누구 하나 통곡해주는 이도 없이, 화투를 치고 웃으면서 그를 추억해주는 이도 없이, 주성의 영정사진만 말없이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간히 팬들이 찾아와서 그가 출연한 뮤지컬의 포스터나 수록곡 앨범을 놓고 가기도 했지만, 진정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으므로 모두들 말없이 애도를 표하고 서둘러 돌아갔다.
은기는 상복 차림이었다. 비록 은기는 주성의 법률상 아내가 아니었지만, 주성은 고아였고, 은기 외에 ‘가족’이라 말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에 말없이 앉아 있는 시간동안 은기는 주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죽은 자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또 얼마나 솔직한지……. 모두들 입을 모아 그가 천재적인 배우였다고 칭찬했지만, 은기는 그러한 능력이 그의 삶을 얼마나 옭아맸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희미하게 웃어넘길 수조차 없었다. 대신 아무 이유도 없이 종종 옷고름을 풀어냈다가 다시 고쳐 매곤 했다.
-밥이라도 좀 먹어. 네가 저새끼보다도 더 송장같어.
윤우는 울지 않고 버텨내는 은기를 걱정했다. 차라리 울어버리라는 말을 할 정도로 질투심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먹은 것도 없이 계속 위액을 토해내는 은기의 등을 평소보다 조금 세게 문지르고 쳐 주었다. 은기는 문득, 변기에서 고개를 들고는 위액을 소매로 대충 닦아내며 윤우를 노려보았다. 피를 토해내는 자궁을 어쩌지 못하고 오피스텔로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했을 때, 쓰러지기 직전 윤우가 은기를 발견해내 병원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링거를 맞고 있었다. 아랫배는 고통보다 끔찍한 휑함을 느끼게 했고, 곁에서 그런 은기의 손을 부여잡고 잠든 윤우의 얼굴은 징그러울 정도로 은기를 괴롭혔다.
-윤우야. 병원에서부터 쭉 궁금했었는데. 너, 네가 왜 거기 있었어?
윤우는 대답 대신에 은기의 뺨을 때렸다. 제발, 이제 정신 좀 차려.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윤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담배를 물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그제서야 은기는 눈물이 났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윤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아이- 하늘나라에 갔대. 그렇게 말하는 윤우의 손아귀는 고집스러웠다.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아니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은기는 윤우의 손을 뿌리쳤지만, 윤우는 은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막무가내의 눈빛으로. 어쩌면 주성에게 아이에 대해 거짓을 고하는 순간의 눈빛 또한 그러했으리라. 은기는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5
시간은 꽤 빠르게, 때로는 지칠 만큼 느리게, 어쨌든 확실히 흘러가고는 있었다. 오랜만에 캔버스 앞에 앞치마를 두르고 앉은 은기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것도 그려있지 않은 공백의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압도하는지- 또 무력하게 만드는지. 은기는 다음 달 중순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는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들을 거의 완성한 뒤였다. 그리고 지금은 예정에 없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시 팔레트에 물감을 짜고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은기는 윤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역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에 그와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고, 그러한 일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가 주었던 느낌, 그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 은기는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었다. 윤우에게서만 나던 향기가, 그를 끌어안은 채로 그의 목에 코를 가만히 문대고 있을 때만 느껴지던 그 향기가, 문득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은기의 전시회를 다녀갔지만, 그 그림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제목도 없고 색도 기묘한 그 그림은, 보는 이에게 평온을 주지도, 잔잔한 감동을 주지도 못했다. 눈빛이 특이하다는- 그래서 어딘가 슬픈 곳을 두드린다는 평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슬픔’이라는 단어만으로는, 그림이 유발하는 정서를 꿰뚫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 초상에서 ‘타락’을 읽었고, 모종의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말로 담기는 어려웠으므로, 모두들 침묵했다.
그리고. 지금 그 그림 앞에 말없이 서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이. 그 그림과 점점 비슷한 모습이 되어갈 단 한 명의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