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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답사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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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letter No.444 2016/11/15
지난 10월 29~30일(토~일) 양일간 한국종교문화연구소에서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가야리에 소재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여주본부도장을 답사하였다. 2009년 이후 매년 진행되어 온 연구소 종교문화탐방 프로그램(2009년 2회, 2010년
3회, 2011년 1회, 2012년 2회, 2013년 이후 매년 1회)의 12번째 순서인 이번 답사에는 정진홍 이사장님을 포함한 총 8명의
인원이 참가하여, 영대(靈臺) 배례 및 도장(道場) 관람(29일 토요일), 대진요양시설과 대진요양병원 견학(30일 일요일) 등으로 구성된
1박2일의 일정을 소화하였다.
여주본부도장은 신륵사 동남방 5km 지점의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어 있다. 2차선의
아스팔트 차로 양쪽으로 주차동 부지와 회관 부지, 그리고 본전(本殿)을 포함한 성전(聖殿) 부지가 차례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약 2만 5천여
평의 넓은 규모와 고요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차로와 인도는 공용도로이므로 일반인의 통행이 가능하지만, 도장 부지 내로는 신도들만
출입할 수 있다. 특히 성전 부지에는 남녀신도―대순진리회에서는 이들을 각각 ‘외수(外修)’와 ‘내수(內修)’라고 지칭한다― 모두 한복을 갖추어
입은 후에야 출입이 가능하다. 성전 부지의 건물들은 대순진리회의 3대 교주인 우당(牛堂) 박한경(朴漢慶, 1918~1996) 도전(都典)의 지도
하에 1986년부터 신도들이 직접 건축에 참여하여 설립된 것으로, 그에 대한 교단의 자부심이 대단히 높아 보였다.
토요일의 극심한
교통정체로 예정보다 1시간 늦은 11시 경 여주도장에 도착한 답사단은 회관에서 간단한 환영식과 교단 홍보영상 시청 뒤 곧바로 영대에의 배례를
준비하였다. 영대는 구천상제로 숭앙되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옥황상제로 숭앙되는 2대 교주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1895~1958) 도주(道主), 서가모니(석가모니)의 3원위(三元位)를 비롯한 15신위를 봉안한 지성(至聖)의 전당으로,
치성(致誠) 의식을 봉행하는 곳이다. 답사가 이루어진 날은 교단의 치성이 예정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답사단은 비교적 간단한 예배인
배례(拜禮)만을 행할 수 있었다. 간단한 예배라고 하지만, 영대 배례 역시 내방객인 답사단에게는 특별하게 주어진 기회였다. 물론 교단에서
제공하는 한복도 착용하였다. 성전은 회관에서 약 200m 가량 떨어져 있었으며, 도보로 이동하여 먼저 성전 내의 식당[자양당(滋養堂)]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성전 부지 내에서도 지성소의 시작인 숭도문(崇道門)을 들어서서는 ―숭도문 안을 ‘정내(庭內)’라고 한다― 영대
쪽을 향해 서서 두 손을 가슴에 합장하고 허리를 굽히는 읍배(揖拜)를 하는 것[향전읍(向殿揖)]으로 예를 시작하였다. 숭도문 바로 앞의
정각원(正覺院)에서 배례법을 익힌 뒤, 곧바로 영대로 향하였다. 숭도문 내에서는 전원이 양손을 모아 잡은 채 두 줄로 나란히 서서 걸어야
했으며, 반드시 외수의 뒤를 내수가 따르게 되어 있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영대는 서양식의 1층 석조 건물 위에 2층의
한옥 기와 건물이 올려진 3층의 구조로, 내부에서는 4충을 이룬다고 한다. 최상층의 신전까지는 역시 두 줄을 이루어 복도식의 조도(照度)가 낮은
계단을 올랐는데, 그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신위는 중앙의 3원위―구천상제가 가운데, 마주보는 위치에서 그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옥황상제와 서가모니―를 중심으로 마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에 관성대군 등의 4위, 왼쪽에 명부시왕 등 4위, 다시 그 왼쪽에 칠성사자 등 4위가
모셔져 있다.
배례법은 다소 복잡하다. 우선 가운데에서 제단을 향해 서서 구천상제에게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손짓을
포함한 큰절[법배(法拜)]을 4회 올린다. 다음으로 우측 1보하여 옥황상제에게 손짓을 포함하지 않는 일반적인 큰절[평배(平拜)]을 4회 올린
후, 다시 좌측 2보 하여 서가모니에게 평배를 3회 올린다. 이후 좌측 1보를 더하여 명부시왕 등의 4위에 공동으로 평배 2회를 하고, 우측
4보하여 칠성대군 등의 4위에 공동으로 평배 2회를 하며, 마지막으로 좌측 2보하여 구천상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서 몸을 45도 가량
좌측으로 틀어 가장 왼쪽에 모셔진 칠성사자 등의 4위를 향해 읍배한다[향남읍(向南揖)]. 이렇게 총 15번의 법배 및 평배와 1번의 읍배를 다한
뒤에 배례식이 모두 끝난다. 각 동작은 선창자의 구령에 따라 절도 있게 이루어지며, 예를 몹시 중시하여 안경 쓴 이는 벗도록 권고되었다.
일반적으로 큰절이란 남성에 비해 여성의 동작이 복잡하고 힘이 드는 것이므로, 남녀신도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배례법은 불편하게 여겨졌다. 두 번째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또한 안경을 벗도록 권고되는 것을 포함해서, 전반적인 의례 동작이 몸이 불편하신 분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영대를 물러나와 중정(中庭)에 서니 영대 맞은편의 정심원(正心院) 외에도 영대의 좌우에 위치한 두 개의
전각이 눈에 띄었다. 이 세 건물은 모두 시학(侍學)시법(侍法)의 공부당이라는 설명이었다. ‘법을 모시는 공부’라니 무슨 뜻인가? 주문
암송이라는 것이다. 총 36명의 인원이 3인 1조로 조를 편성하여, 일정 시간 동안 주문을 외우며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1958년 2대 조정산
도주의 50년 공부 완성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왔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후천개벽을 앞당기기 위한 수도행위라고 한다.
대순진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수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에 결원이 생길 경우 반드시 대체 인원이 투입되어야 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만 65세 이상의 고령자는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주문의 내용은? 비밀. 공부당의 공개 여부는? 역시 엄금. 이해가 된다. 가장
핵심적인 교의(敎義)이자 밀의(密儀)일 테니까. 다만 시학과 시법의 주문은 약간 다르다는 팁을 얻었다.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다면 후천개벽이
도래한 뒤에는 시학시법의 공부는 끝나는 것인가?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인 듯, 대답이 멈칫한다. 하지만 후천개벽의 원활한 운행을 위해 공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들을 후, 질문을 마쳤다.
신도들은 시학시법이라는 지엄(至嚴)의 비밀의례 외에, 일반 기도에
참여하기도 한다. 영대 2층의 넓은 공간에는 수십 명의 신도들이 모여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것은 인원수나 시간의 엄격한 제약이 없이, 정해진
날 참석이 가능한 신도들이 자유롭게 모여 행하는 의식인 것 같았다. 이 역시 외부인에게는 공개가 금지된 공간인데, 특별히 뒷문을 열고 몸을
기울여 들여다보는 정도로 견문이 허락되었다. 뒷문과 공간 사이에 아주 짧은 복도가 있어 완전히 파악되지는 않았으나, 전면에 특별한 신위가 모셔진
것 같지는 않았다. 향과 초 정도가 놓여져 있을 뿐이며, 지도자가 특별히 대중을 향해 있지도 않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 기도의 목적 역시
후천개벽의 준비일까? 그 질문을 미처 하지 못했다.
영대 앞의 중정을 빠져 나오면 영대 맞은편의 정심원과 숭도문 바로 앞의 정각원
사이에 2겹의 기와를 올린 3층의 봉강전(奉降殿)이 있고, 그 측면에 13층의 높은 석탑과 석대가 있다. 원위(元位)와 28수 및 24절
신장(神將)을 봉안한 신전이라는 봉강전은 1986년의 성전 건설 당시에는 본디 영대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처마와 단청이 대단히 화려했는데,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이 건물의 처마는 무려 27겹이나 되어 그 위에 얹힌 기와의 무게가 톤 단위를 넘는다는 설명이다. 청계탑(靑鷄塔)이라는
이름의 석탑은 1~3층이 원형으로 원만함을 상징하고, 4~6층은 8각으로 24절기를 상징하며, 7~13층은 4각으로 28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탑 상단의 두부(頭部)는 9천을 상징하는 9마디의 층으로 구성되었다. 교리에서 의미를 지닌 법수를 가득 채워 넣은 탑이었다. 또 그 앞의
석대에는 초대 교주 강증산의 주요 어록이 새겨져 있었다.
이로써 숭도문 안쪽 지성소인 정내의 주요 전각은 모두 둘러보았다. 숭도문
밖을 나오니 긴장이 풀렸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숭도문 바깥(그러나 여전히 성전에 해당하는 공간)에 위치한 대순성전(大巡聖殿)에 들렀다.
대순성전의 맞은편이 종무원이고 두 건물의 측면에 점심식사를 한 자양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확실히 성전 내에서도 생활동에 해당하는
공간이었다. 대순성전은 초대 교주인 상제 강증산과 2대 교주인 도주 조정산의 일대기가 그림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특히 강증산에 관한 묘사는 그가
행했다고 하는 신이한 이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어, 대순진리회에서 차지하는 그의 확고부동한 신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명백한 신성(神性)으로
명실상부한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미륵에 대한 또 다른 신앙이었다. 대순진리회 금강산도장에는 미륵불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기도 한데, 이것은 구천상제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대순진리회의 교리와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교단 측의 설명은
1909년에 천지공사를 마치고 화천(化天)한 강증산이 미래세에 미륵의 위치로 올 것을 기약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불상은 강증산의 현현이라고 하며, 그 미륵불상이 솥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이야말로 2대 교주인 조정산(鼎山)이 강증산(甑山)과 직접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의를 계승하였음을 역설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3원위 중 하나로 모셔진 서가모니는 무슨
의미인가? 강증산은 일찍이 선천세계를 이끌어온 종교 지도자로서 서가모니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였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서가모니의 위격 여부는
사실상 대순진리회의 교단분파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3대 교주인 박한경 도전의 사후 일부 신자들은 박도전이야말로 구천상제 및
옥황상제와 더불어 3원위에 모셔져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교단으로서는 교리 해석의 위기를 맞은 셈인데, 결국 박도전을 3원위에 모시기로 한 일부가
서울중곡도장을 중심으로 분파되었고, 여주본부도장 측에서는 선임 교주들의 말씀을 받들어 서가모니를 3원위에 존치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들 분립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경제력 장악의 측면에서 찾기도 하지만, 교단에서는 물론 이러한 해석을 강하게 부인한다. 여주도장의
설명에 의하면 위격의 변경은 필연적으로 주문의 변경을 초래하므로, 이는 교주들의 가르침을 위배하는 조처라는 것이다. 배례법과 주문만큼은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이들의 신념은 몹시 확고해 보였다. 여주 측과 중곡동 측의 분립은 아직까지는 결정적이지 않다. 비록 교리의 차이는 엄연하지만,
여전히 서로를 대순진리회의 일파로 인정하며 포천에 위치한 대진대학교의 경영은 공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어지는 여주도장 김욱
교무부장 이하 관계자들과의 차담 및 저녁회식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하나는 교단에서 치성 의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이었다.
영대 배례의 정교한 몸짓에서 이미 그 의례적 중요성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의례는 치성이라는 것이다. 치성은 강증산과 조정산의
탄생일과 화천일, 그리고 몇몇 명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 밖에도 신도의 입도 시에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대체로 모든 기념일을
준수하지만, 그 간격이 5일을 넘지 않을 때는 정성이 부족해질 것을 우려하여 뒤의 것을 생략한다. 치성은 대단히 중요한 의식이므로, 여기에서
소용되는 모든 음식은 신도들이 직접 마련한다. 과거에는 육고기의 준비를 위하여 가축을 사육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도살장에서 공수해 오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새로 알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은 대순진리회의 포교 방식이다. 이들은 동학의 접주 방식을 원용하여,
포교자[선각자(先覺者)]를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되는 방식을 취한다. 즉 포교자 밑에 입도자[후각자(後覺者)]들이 존재하며, 그 입도자들이
선각자가 되어 다시 새로운 입도자들을 포교하면 최초의 선각자 휘하에 그 모든 인원이 포섭되는 식이다. 그렇게 모인 후각자의 인원이 1000호가
되면 방면(方面)이라고 하며―대순진리회에서는 방면의 인원을 ‘명(名)’이 아닌 ‘호(戶)’라고 지칭한다―, 한 방면을 이룬 처음의 선각자는
선감(宣監) 또는 교감(敎監)의 임원이 될 수 있다. 방면의 명칭은 선각자의 거주지를 고려하여 주어지며, 대인(對人) 중심의 조직이므로 방면에
소속된 후각자들 각각의 거주지역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선감은 조직의 운영에 교감은 조직원들의 교학에 주력하는 직책으로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며, 그들 사이에 위계적인 차이는 없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하나의 방면에 선감과 교감이 함께 존재하여 상호 보조하는 경우도 있다. 그 밖에
포정(布正)이라는 임원직도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보지 못했다.
그날 밤 답사단은 교단에서 제공한 청소년수련원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이튿날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대진요양병원에서 조식을 해결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일행은 대진요양시설과
대진요양병원을 안내받았다. 현재 국가에서 시행 중인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에 포함되어 운영되고 있지만, 본래 요양보험 제도가 실시되기 전에 서구의
사례를 참조하여 건립이 추진되었던 까닭에 상당히 수준 높은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요양원의 공간이 생활 위주로 구성되어, 10개의
방[입원실]이 1개의 유닛을 이루어 가운데에 넓은 거실을 공유하도록 된 점이 인상적이었다. 건물 밖에는 나무와 바위와 잔디로 조경이 이루어진
넓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그 산책로를 걸으며 대순진리회의 과거와 미래를 잠시 생각해 본다. 못내 마음에 남는 것은
여주본부도장의 성전을 스스로 이룩한 과거 신도들의 땀과 노력이다. 대부분 넉넉지 않았을 살림을 나누고 제 손으로 직접 벽돌을 만들어 나르고
기와를 이며, 또 전각의 그림들을 하나하나 채색하며, 그들은 거룩한 종교심을 느끼고 벅찬 환희에 눈물지었으리라. 이제 여주본부도장은 여주 지역
공동체의 주된 축의 하나로 성장하고 있다. 동시에 젊은 신도들의 확충에 힘써야 할 때다. 젊은 신도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땀과 눈물로 이루어낸 그
종교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을까. 교단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여주도장은 현재 적극적인 교리해석을 통한 종교적 정체성의 구축에 힘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교단 내 브레인의 양성에도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모든 노력에 언제나 신도들의 권익이
우선되기를 바란다. 대순진리회가 한국의 민족종교로 굳건히 발전할 수 있는 첫 번째 기반이 될 것이다. 이번 답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신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의 관계자 여러분과 신도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nirvana1010@hanmail.net 주요 논문으로 〈조선 초 법화신앙과 천도의례: 천태종의 전개와 관련하여〉,
〈조선 초 조계종의 불교주도적 자의식과 종파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전과 권근의 불교이해와 그 의의〉, 〈조선 세종 대 僧役給牒의 시작과 그
의미〉, 〈조선전기 승인호패제도의 성격과 의미 -중앙집권적 승적관리의 측면을 중심으로-〉, 〈조선 초 불교 사장(社長)의 성격에 관한
일고(一考)〉, 〈조선전기 도첩제도의 내용과 성격 -『경제육전』 체제와 『경국대전』 체제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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