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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
19일 열린 FA컵에서 승부차기 선방으로 포항의 우승을 이끈 신화용 (사진=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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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1년 전 한일월드컵에 출전했던 한국 대표팀의 골키퍼는 이운재(183cm), 김병지(184cm), 최은성(184cm)이었다. 하지만 현재 대표팀의 골키퍼인 정성룡(190cm), 김승규(187cm-실제 키는 190cm라고 본인이 밝힘), 이범영(199cm), 김진현(194cm)은 모두 190cm를 넘는다. 과거의 호세 레네 이기타(175cm), 호르헤 캄포스(173cm) 같은 180cm도 안 된 ‘별종 골키퍼’는 논외로 하더라도 안드레아스 쾨프케(182cm), 미셸 프뢰돔(183cm), 장 마리 파프(180cm), 제프 마이어(183cm)와 같은 명골키퍼들도 지금 시대에 온다면 작은 키로 인한 편견에 시달렸을 것이다.
하지만 단신 골키퍼들은 큰 골키퍼들이 갖지 못한 자신들만의 절대적 강점이 있다. 기민한 대응, 순발력, 넓은 활동반경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밀린다는 위기의식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와 정신력이 단신 골키퍼가 ‘멸종 위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잇는 이유다.
지난 주말 우리는 또 한명의 단신 골키퍼의 맹활약을 지켜봤다. 포항스틸러스의 수문장 신화용은 전북현대와의 FA컵 결승전에서 120분 혈투를 단 1골로 막아냈다. 경기 중 수 차례 선방을 펼친 그는 키커와의 1대1 대결인 승부차기에서 상대 1, 2번 키커의 슛을 완벽하게 막아내며 기선을 제압했다. 포항은 신화용의 활약 속에 네 명의 키커가 성공시키며 승부차기에서 승리, FA컵 2연패와 최다 우승(4회)의 영광을 맛봤다.
짜릿한 우승의 감격이 아직 남아 있는 21일 포항 시내에서 열리는 우승 축하 카퍼레이드를 앞두고 신화용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애초에 “이 기사의 컨셉은 단신 골키퍼의 삶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하니 그는 “늘 그거부터 시작하죠”라며 웃어보였다. 신화용은 정확한 키를 묻는 질문에 “181cm예요”라고 고백(?)했다. 모든 프로필에 182cm가 돼 있다고 하니 “그럼 그냥 182cm라고 하죠”라며 웃음 지었다. K리그 최단신 골키퍼는 그가 아니다. 제주의 박준혁이 180cm다.
포항 유스 출신인 신화용은 지난 10년 간 팀과 다섯 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그 중 네 차례를 주전 골키퍼로서 기여했다 (사진=포항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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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가 축구부에 입단한 그에게 주어진 것은 골키퍼 장갑이었다. 그렇게 골키퍼 신화용의 인생이 시작됐다. “당시 축구부 감독님이 또래 애들에 비해 순발력과 점프력이 좋다고 골키퍼를 추천해주셨어요. 그 뒤부터 계속 골키퍼였어요. 운동신경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셨죠. 아버지께서 실업배구 선수로 활약하셨거든요. 지금도 연세가 있으신데 1주일에 6회 정도 테니스를 하러 나가세요.”
처음 축구부에 오라고 했을 때 당연히 필드 플레이어를 맡을 줄 알았던 소년 신화용은 골키퍼라는, 축구소년들에겐 가장 인기 없는 포지션을 맡아야 했다. 다행이라면 그가 무엇이든지 주어지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다는 점이다. “어린 마음에 그 임무에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어떤 상황이 닥치면 내 몫은 무조건 해야 된다는 성격이거든요. 이번 FA컵 결승전 승부차기 때도 그랬어요. 이제 내 차례고 팀을 위해 그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고민이 커졌다. 바로 키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당시 그의 키는 172cm였다. 일반적으로는 작은 키가 아니지만 골키퍼를 맡는 또래 친구들은 모두 180cm가 넘은 상태였다. 성장기는 왔지만 키가 확 자라지 않고 꾸준히 자라 티도 안 났다. “고등학교를 힘들게 갔어요. 키가 작으니까 어른들이 반신반의한 거죠. 포철공고의 김경호 감독님이 골키퍼 2명을 뽑는다고 했는데 저는 애매했어요. 그런데 다른 1명이 안 간다고 해서 안전하게 입학할 수 있었죠.”
기량은 괜찮았지만 키가 작아 주전 골키퍼는 선배들이 모두 졸업한 고등학교 3학년 때야 처음으로 맡을 수 있었다. 신장 차가 워낙 많아서 선배들을 제칠 기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신화용의 키는 179cm였다. 이후 청주대학교에 진학해서 2cm 가량 더 자라며 현재의 키가 됐다.
"두려워 말고 자신 있게 나오라" 파리아스 감독의 이 한마디가 단신 골키퍼 신화용의 운명을 바꿨다 (사진=포항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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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신화용의 운명을 바꾼 것은 2005년 파리아스 감독이 부임하고, 그해 말 김병지가 자유계약 신분으로 FC서울로 이적하면서였다. 파리아스 감독은 김병지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젊은 선수들을 놓고 경쟁시켰다. 신화용과 정성룡의 플래툰 시스템이었다. 2006년 신화용이 13경기, 정성룡이 26경기에 나섰고 2007년엔 신화용이 26경기, 정성룡이 16경기에 나섰다. 선의의 경쟁 속에 둘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당시 파리아스 감독이 신화용에게 해 준 한마디가 그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저를 직접 지도해 보신 분들이 공중볼에 대한 지적한 적은 없었어요. 편견이 있다면 억울하죠. 파리아스 감독님은 제게 무조건 자신 있게 나오라고 했어요. 그 전에는 작다, 작다 하니까 오히려 위축이 돼서 골문을 비우고 나가기보다는 그 앞에서 막으려고만 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 자신이 다 책임질 테니 나오라고 하면서 제 활동반경이 넓어졌어요. 그때 느꼈죠. 페널티박스 안의 모든 영역이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실제로도 신화용은 작은 키지만 두려움 없이 양팀 선수들이 경합하는 페널티박스 곳곳으로 돌진한다.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프하고, 몸을 던져서 크로스와 프리킥, 코너킥을 막아낸다. “그 부분에서 안정감 얘기들이 나와요. 그렇게 경합해서 다 잡을 수 있는 건 안거든요. 부딪히면서 놓칠 때도 있고, 뒤로 넘어가는 장면도 나와요. 골문을 비우지 않고 경합을 덜 하면 불안하다는 평가가 안 나올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감안하면서도 나가요. 전 그런 경합을 안 하면 책임회피라고 생각해요. 골키퍼가 안 하면 그 고통을 다른 동료들이 가져가야 하거든요. 안정감이 없다고 지적 받을 순 있지만 실수를 하더라고 희생을 한 만큼의 대가라고 받아들입니다.”
FA컵 결승전에서도 신화용은 페널티박스 안의 공이 있는 곳이면 주저 않고 돌진해 펀칭하고 잡아냈다. K리그에서 헤딩 타점이 가장 높고 육체적으로 강하다는 전북의 케빈과도 수 차례 격돌했다. 신화용은 “케빈 같은 경우는 머리가 아니라 몸부터 먼저 들어오는 선수라 더 많이 부딪혀요. 아직도 손가락이 퉁퉁 부어서 아파요”라고 말했다. 승부가 끝난 뒤 오는, 이겼기에 영광의 상처라고 할 수 있는 숙명과 같은 고통이다.
신화용은 매일 훈련이 끝나면 조찬호를 비롯한 후배들과 페널티킥 연습을 하면 감을 키웠다 (사진=포항스틸러스) |
“예전에는 한달 전부터 부산을 떨며 병적으로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황선홍 감독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너무 생각이 많으면 자신감이 오히려 떨어진다는 거죠. 생각을 바꿔서 매일 일상처럼 준비했어요. 골키퍼는 같은 상황을 몇 번을 경험해야 몸이 기억을 하거든요. 그래서 팀 내 후배들과 연습을 많이 했어요. 특히 (조)찬호와 많이 했어요. 훈련이 끝나면 찬호를 불러요. 그러고는 ‘네 마음대로 차 보라’고 하죠. 서로 연습 때부터 고집을 피워요. 제가 막으면 찬호가, 찬호가 성공시키면 제가. 몇 개 막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찬호가 더 악을 쓰면서 하거든요. 어떤 날은 둘이서 승부차기만 1시간을 해요. 그렇게 그 상황에 대비하는 능력을 키웠어요. 그래선지 찬호가 엊그제부터 ‘자기가 FA컵 MVP 만들어줬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요.”
신화용은 포항 입단 후 5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2007년 K리그 우승, 2008년 FA컵 우승, 2009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2년 FA컵 우승, 그리고 올해 또 FA컵 우승에 성공했다. 주전골키퍼로서 그가 들어온 트로피는 그 중 2007년을 제외한 4개다. 현재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 K리그 클래식에서도 우승에 성공하면 그는 K리그에서 들어올릴 수 있는 트로피는 모두 쥐게 된다.
“남들은 한번 들기도 힘들다는 트로피가 제 손에 온다는 건 감사한 일이죠. 늘 동료들에게 고마워요. 승부차기를 통해 제가 주목을 받았지만 미안하죠. 앞에서 2시간 내내 뛰어다닌 선수들도 있는데 마지막에 승부차기 하나 잘했다고 상 받고, 인터뷰 하고 기사가 나오고. 그날은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힘들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하지만 우승이 현실이 되면 곧 바로 다음 경기에 포커스를 맞춰야 해요. 다음 대회, 다음 시즌 그런 건 없어요.”
우승을 놓고 경쟁한 상대팀 전북의 골키퍼 최은성에게 꼭 이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경기를 앞두고 은성이 형님 기사를 읽었어요. 2002년 FA컵 결승전 도중 부상을 당해서 트로피를 직접 들지 못했고 그 뒤로 11년을 기다리셨잖아요. 우승하기 전까지 절대로 은퇴 안하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오랜 시간 그라운드에 남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은성이 형님 같은 분을 보면서 따라가야 하거든요. 아마 지금 저보다 몸이 더 좋으실 거예요. 물론 리그 우승도 저희가 노려야 하지만.(웃음)”
신화용은 대표팀을 꿈꾼다. 승부차기를 준비하듯 매일 대표팀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포항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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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대로만 다 된다면 내년에 브라질에 가겠죠.(웃음) 키 작고 보잘것없는 선수였는데 프로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 하나로 노력했어요. 중간에 기회를 얻었고 프로에 데뷔를 한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10년의 시간이 지나갔지만 몇 년 전부터는 계속 대표팀이 생각나더라고요. 포기한 적이 없다기보다는 지금이 시작이라고 생각하려고요. 한번은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고 승부차기처럼 준비를 하고 있어요.”
182cm의 키는 신화용에게 콤플렉스였을까? 키로 인해 진학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었지만 단 한번도 자신의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모두가 콤플렉스라고 지적할 때 자신이 당당해진다면 그것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닌, 더 큰 위치로 자신을 옮겨주는 자극제임을 신화용이 보여준다.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네 키가 5cm만 더 컸으면 대표팀 갈 수 있지 않았겠냐고’. 네, 더 컸더라면 이미 한번쯤은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 봤어요. 언젠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거란 믿음을 갖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제 일을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