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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산 백두산
<백두산 개관>
백두산은 함경남도, 함경북도와 중국 동북 지방의 길림성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 2,744m이다. 백두산은 휴화산(休火山)으로, 그 총면적은 약 8,000㎢에 달하여 전라북도의 전체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산의 북쪽으로는 장백 산맥(長白山脈)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쳐 있으며, 백두산을 정점으로 하여 동남쪽으로는 마천령 산맥(摩天嶺山脈)이 대연지봉(大密脂峰, 2,360m), 간백산(間白山, 2,164m), 소백산(小白山, 2,174m),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편,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熔岩臺地)가 펼쳐져 있어 백두산은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 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백두산의 지명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으로 ≪산해경(山海經)≫의 〈대황북경(大荒北經)〉에는,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고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서 백두산을 ‘태백산(太伯山)’이라 하였고, ≪고려사≫ 광종 10년조에는,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백두산’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백두산의 명칭은 이처럼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백산, 장백산, 백두산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왔으나, 여러 명칭의 공통점은 ‘희다〔白〕’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은 최근까지 활동한 휴화산인데, 산세가 험준하고 지형이 복잡한 데다가 대륙 쪽으로 열려 있고, 한반도 쪽은 고원과 2,000m 이상의 고산지가 둘러 있는 형태여서, 독특한 산지 기후와 자연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백두산 천지는 흔히 용왕담(龍王潭)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는 용담(龍潭), 온량박(溫凉泊), 도문박(圖門泊)이라고도 하는데, 남북의 길이 4.9㎞, 동서의 너비 13.4㎞, 집수 면적 21.41㎢, 수면의 면적 9.2㎢, 수면의 둘레 13.11㎞, 수면의 높이는 2,155m이다. 천지의 가장 깊은 곳은 312.7m이고, 평균 수심은 204m에 이른다. 천지의 물은 북쪽의 화구벽, 곧 승사하(乘笑河)로 뚫린 달문(眷門)을 통하여 넘쳐흘러 비룡폭포(飛龍瀑布, 중국에서는 장백포라고도 한다.)를 이룬다. 폭포의 높이는 68m로서 이 물이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이루어 송화강(松花江)의 원천을 이룬다. 전세계적으로 높이 2,155m의 산정에 천지처럼 큰 호수를 가진 산은 오로지 백두산뿐이다. 천지의 물은 강수량으로 보급되는 것이 약 60%이고, 지하수로 보급되는 것이 약 40%인데, 이렇게 이루어지는 천지의 총 적수량은 20억 400만㎥이다.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높이 2,500m 이상의 산봉우리가 16개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들의 명칭이 우리 문헌에는 병사봉을 비롯하여 망천후(望天吼), 비류봉(沸流峰), 백암산(白巖山), 차일봉(遮日峰), 층암산(層巖山), 마천우(麻天隅) 등만 밝혀져 있고, 중국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최고봉인 백두봉, -우리 나라에서는 병사봉, 또는 장군봉으로 칭함.- 을 비롯하여 삼기봉(三奇峰), 고준봉(孤準峰), 자하봉(紫霞峰), 화개봉(華蓋峰), 철벽봉(鐵壁峰), 천활봉(天豁峰), 용문봉(龍門峰), 관일봉(觀日峰), 금병봉(錦屛峰), 지반봉(芝盤峰), 백운봉(白雲峰), 옥주봉(玉柱峰), 제운봉(梯雲峰), 와호봉(臥虎峰), 관면봉(冠冕峰) 등의 명칭으로 되어 있다.
백두산의 기후는 수직적 분포가 뚜렷이 나타나 저지대에서 정상부까지 온대로부터 한대에 이르는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천지 주변의 기후는 고산 기후의 특색을 이루어 겨울이 춥고 길며 바람이 세고 일기 변화가 큰 것이 특징이다. 9월 하순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다음해 5월까지 눈이 내리기 때문에 겨울이 9개월이나 된다. 1월 평균 기온이 -24.0℃이고, 7월의 평균기온은 10℃ 내외이다. 연평균 풍속이 초속 11.7m나 되며 12월이 특히 심하여 초속 17.6m에 이른다. 바람이 가장 센 곳은 높이 2,690m 지점에 있는 풍구(風口)라는 곳이다. 백두산 일대의 지형적 장애로 인하여 습기를 가진 대기가 강제 상승되거나 서쪽에서 이동해 오던 저기압계(低氣壓系)가 지연되므로 강수량은 주변 지역보다 증가된다. 산정상부에 가까워질수록 구름과 강수일수가 증가하여 연중 청명한 날씨는 40여 일 정도에 불과하다.
백두산에는 1,400여 종의 식물과 400여 종의 동물이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도별로 높이 500∼1,050m 지대에는 낙엽송, 가문비나무, 사시나무 등 침엽수와 자작나무, 황철나무, 분비나무 등 활엽수가 함께 혼재하는 혼합림지대이며, 높이 1,750m까지는 침엽수림지대이다. 높이 2,100m까지는 관목림 지대(灌木林地帶)로서 여름 최고 기온이 10℃를 넘지 못하고 토양이 척박한 데다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 적응하는 이깔나무, 월하나무 등이 주요 수종을 이룬다. 높이 2,100m 이상은 동토 지대로서 겨울 기온이 -45℃ 미만이며 연중 300일 이상 흐린 날이 계속되고 강풍이 불기 때문에 수목의 성장은 어려우며 털진달래, 풍모버섯, 바위솔, 둥근잎버드나무 등이 자생한다. 이른바 한 대림지대(寒帶林地帶)이다. 백두산에 서식하는 동물로는 백두산 호랑이를 비롯하여, 꽃사슴, 수달, 표범, 곰 등이 있으며, 130여 종의 텃새와 70여 종의 철새등 20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대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서 숭배되는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백두산에는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천지(天池)를 비롯한 절경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생태적 환경과 풍부한 삼림자원이 있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백두산 기행: 백두록-권필정>
을미년(1775) 5월 13일에, 나는 남병영(南兵營) 의 우후(虞侯)로서 백두산으로 길을 떠났다. 이번 유람은 자항(玆航), 제인(濟仁), 황수(黃水), 종포(終浦), 웅이(熊耳), 호린(呼麟)등지를 거쳐서 갑산부(甲山府) 에 도착하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 백두산까지는 모두 갑산부 경내이고, 허항령(虛項嶺) 북쪽으로는 무산부(茂山府)와 경계다. 남병영에서 후치령(厚峙嶺)까지는 110리, 후치령에서 갑산부까지는 170리, 갑산부에서 연지봉(臙脂峯) 까지는 350리, 연지봉에서 백두산 가장 높은 봉우리〔上峯〕까지는 35리이다.
우리 일행은 불행히도 비가 쏟아지고 안개가 짙어서 비록 정상을 5리쯤 남겨 둔 곳까지밖에 가지 못했지만, 그 높이를 어림잡아 보건대 과연 백두산 높이가 300리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다행히 때마침 산 동쪽 기슭이 맑게 개더니 붉은 해가 막 떠올랐다. 온 산이 영롱하게 빛나고 여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에 갑산부에서 가져온 홍로주(紅露酒)를 꺼내 술잔에 가득 채워 한 잔 마시고는, 머리를 들어 산을 멀리 바라보며 길게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손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이는 내 평생에서 가장 유쾌하고 웅장한 일이다.
정상 아래는 둘레가 2,000여 리쯤 되는,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은 언덕이다. 산의 몸체 〔山體〕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2,000여 리의 언덕은 백두산의 배와 장기에 해당하고, 평안도 지방은 오른팔에 해당하고, 함경도 지방은 왼팔에 해당하고,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은 왼쪽 다리에 해당하고, 충청과 전라도 지방은 오른쪽 다리에 해당하고, 한라산과 대마도는 양쪽 발이 끝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두텁고 웅장한 기세를 쌓아 둔 산은 비단 우리 조선에만 처음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곤륜산(崑崙山) 외에는 온 천하를 통틀어도 비할 바가 없다.
옛말에 ‘뛰어난 인재는 땅이 영험한 덕택이다.〔人傑地靈〕’라는 말이 있는데, 단군 이래로 뛰어나고 이름나고 신이한 인재들이 우리나라에서 그 얼마나 많이 배출되어 중국의 인물들과 미명(美名)을 함께 일컬을 수 있었던가? 그것은 이 백두산이 정기와 신령을 잘 모아서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 태어나서 백두산을 한번 보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대여섯 밤을 길에서 지내기는 사람으로서 쉽게 견딜 만한 일이 아니고, 비록 호랑이를 만나는 재난을 당하지 않더라도 막힌 길과 어지러이 나 있는 나무 사이를 혼자 힘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까닭에 이 산을 유람하는 이가 거의 없다. 이 산에 오르는 이가 단지 ‘조종(祖宗)이 되는 산이로다.’라고 말할 뿐이라면, 이 넓고 높고 웅장한 산이 뛰어난 인재를 보물처럼 감춰 두었다가 이 세상에 낸다는 사실은 모른다 할 것이다.
이 산을 오르는 길에 겪는 위험은 이 세상에서 비할 바가 없는데, 만약 무산에서 곧바로 삼지원(三池院)으로 가는 길을 택하면 진창길도 피할 수 있고 발에 걸리는 나무뿌리도 적다. 훗날 이 산에 오르는 이들은 반드시 무산에서 여정을 시작하면 좋을 것이다.
정상 안쪽에는 둘레가 3, 40리쯤 되는 큰 못이 있다. 압록강은 이곳에서 발원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두 강 중에 황하(黃河)는 곤륜산에서 시작하고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시작하는데 압록강의 수원은 거의 2,000리나 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백두산이 곤륜산에 버금간다는 사실 또한 징험할 수 있다.
연지봉 아래로 30리 지점에는 골짜기가 깊지 않고 평평한 백사장이 아득히 펼쳐져 있고, 양쪽 벼랑으로 난 좁은 길은 평평해서 높지 않다.
새로 돋아난 나뭇잎으로 울창해진 녹음이 바람 따라 움직이며 백사장 좌우측으로 돌아 나간다. 이처럼 큰 산 꼭대기에 이와 같은 자연이 있을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비가 많이 내린 뒤에는 모래 색깔이 선명해져, 사람의 심기(心氣)를 바짝 맑고 새롭게 해서 강산이 주는 흥을 일깨워 주니, 이는 더욱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다.
나는 북쪽 지방으로 온 일개 관리인지라, 비록 근심이 깊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관직이 아니면 이번 유람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비록 이런 유람을 하더라도 갑산 부사(甲山府使) 오재희(吳載熙)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 어찌 마음 가는 대로 길을 택해 이 산에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인가?
정상에서 15리 못 미친 곳에 정계비(定界碑) 가 있다. 말에서 내려 비문을 읽었다. 비문에는 ‘분수령(分水嶺)을 경계로 삼는다.’고 적혀 있는데, 어째서 이 비를 꼭대기에다 세우지 않았단 말인가?
목극등(穆克登)이 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쪽에서 일을 맡은 관리들이 험난한 곳까지 오르기 싫어, 목극등의 말에 따라 이곳에 세워 두었으리라!
나는 이번 여행에서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탄식했다.
“사람이 추로(鄒魯)의 고장유람하지 않고서 공자와 맹자께서 성현(聖賢)이 되신 이유를 어찌 알겠으며, 웅장한 산과 바다를 보지 않고서 홍고(洪高)가 부유하고 성대해진 까닭을 어찌 알겠는가?
생각건대 별 볼일 없는 내가 비록 이번 산행을 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만약 만물을 보고 잘 배우는 이로 하여금 이 산에 올라 얻는 바 있게 하면, 우뚝 서서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받드는 두터운 기상이 그 사람의 마음에 체득되고 몸으로 실행되어, 마치 백두산처럼 세상에 오뚝 서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문헌상 기록>
1. 택리지 기록
백두산(白頭山)은 여진(女眞)과 조선(朝鮮)의 경계에 있는데, 일국의 눈썹처럼 되어 있다. 산 정상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豆滿江)이 되며,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混同江)이 되는데,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이다.
백두산에서 함흥(咸興)까지는 산맥이 가운데로 내려오다가, 동쪽 줄기는 두만강의 남쪽으로 달리고, 서쪽 줄기는 압록강 남쪽으로 달리는데, 함흥에서 산의 산등성이가 동해가를 따라서 서쪽 줄기가 7,8백리나 내달리지만, 동쪽 줄기는 백리를 내달리지 못한다.
산맥의 큰 줄기〔大幹〕는 끊어지지 않고 가로로 내달려 남쪽으로 수천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산(太白山)에 이르기까지 통하여 한 줄기의 산봉우리를 이룬다.
2. 대동지지
갑산도호부(甲山都護府)조
백두산(白頭山)은 읍치에서 북쪽으로 350리 거리에 있다.
○ ≪산해경(山海經)≫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하였고, ≪당서(唐書)≫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하였다. ≪일통지(一統志)≫에서 이르기를, “옛날 회령부(會寧府) 남쪽 60리 거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요사(遼史)≫ <지지(地志)>에 이르기를, “냉산(冷山) 동남쪽 1,000여 리 거리에 있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하므로 곧 혼동강(混同江)이다. 큰 나무를 갈라서 배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종려나무 같다.”라고 하였다. ≪개국방략(開國方略)≫에 이르기를,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뻗쳐 이어진 것이 1,000여 리나 된다. 산 위에는 달문(闥門)이라는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물의 근원이 깊고 흐르는 폭이 넓다.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애호강(愛滹江)의 세 강의 물이 이곳에서 나온다. 압록강은 산 남서쪽으로부터 흘러 요동(遼東)의 남쪽 바다로 들어간다. 혼동강은 산 북쪽으로부터 흘러 북쪽 바다로 들어간다. 애호강은 동쪽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 갑산 이북은 높은 산과 높은 고개가 층층첩첩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여러 날을 노숙한 이후에야 비로소 정상에 이르렀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자부심에 들떠 이르기를, “높이가 200리로, 백두산의 길은 큰 나무가 산을 드리우고 있는 게 하늘에 닿아 해를 가리고 있고, 때때로 쓰러져 있는 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반드시 멀리 돌아서 피해가야 하므로 이 100리의 행차가 200리나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장백산을 살펴보면 둘인데, 하나는 이르기를, ‘백두산’이라고 하고, 하나는 이르기를, ‘경성(鏡城)에 있는 장백산’이라 하였다. 태백산(太白山)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르기를, ‘백두산’이라 했고, 하나는 이르기를, ‘함흥에 있는 태백산’이라 하였다. 혹은 백두산을 한나라의 개마산(蓋馬山)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 형승(形勝)
북쪽으로는 장백산을 지키고 압록강을 한계로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태백산을 제어하며 마령(馬嶺)을 경계로 하고 있다. 모든 산이 남쪽으로 내려 뻗어오고 온갖 물이 북쪽으로 쏟아져 나온다. 산수가 얽혀 있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무산도호부(茂山都護府)조
백두산(白頭山)은 읍치에서 서북쪽으로 300여리 거리에 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이라 했고, 또 이르기를, ‘태백산(太白山)’이라 했다. 산의 바위가 모두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백산(白山)이라 이름하였다. 가로로 천 리나 뻗쳐 있고 높이가 200리나 된다. 산 위에는 둘레가 80리나 되는 못이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 토문강(土門江)이 된다.
숙종(肅宗) 38년(1712)에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에 와서 경계를 정했는데, 그 일의 자취는 대략 이러 하였다.
“오시천(吾時川)은 경성(鏡城)의 장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흘러 여기에 이르러 강물과 합쳐진다. 그 밖에는 모두 황폐한 곳이라 머무는 사람이 없다. 북쪽으로 백덕(柏德)까지 70리 정도이고, 검문(劒門)까지는 20리 정도이며, 곤장우(昆長隅)까지는 15리 정도이다. ”라고 했다. 큰 산이 있는데 그 앞에서 서쪽으로 강물을 건너 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을 따라서 5, 6리를 가면 길이 끊긴다. 다시 산언덕을 좇아가면 화피덕(樺皮德)이 있는데 더욱 험하다. 80여 리를 가면 하나의 작은 못이 있고, 또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서 한덕지당(韓德支當)에 올라 수십 리를 가니, 나무가 점차 작아지고 산이 점차 드러나서 이산으로부터 모두 순수한 뼈의 색과 같이 창백하다.
동쪽으로 한 봉우리를 바라보니, 하늘을 뚫을 듯 하였으니, 바로 소백산(小白山)이다. 비스듬히 산의 지맥 서쪽으로 10여 리를 가서 산 정상에 올랐는데도 20, 30여 리가 더 남았다. 조금 동쪽으로 하나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소백산의 큰 줄기이다. 그 위의 산등성이를 건너서 백두산을 올려다보니, 웅장하고 장대하여 천 리나 뻗쳐 있는데 한결같이 푸르렀다. 정상은 하얀 항아리를 높은 도마 위에 엎어놓은 것 같다.
고개 밑을 따라 수 리를 가니, 산에 모두 풀과 나무가 없는 모양이다. 5, 6리를 가는데, 산이 갑자기 가운데가 움푹 패여 구덩이를 이루어 띠처럼 가로막고 있는데, 깊이는 끝이 없고 너비는 겨우 2자쯤 되어서, 혹 뛰어서 건너기도 하고 혹은 손을 잡아주어 건너기도 했다. 4, 5리를 가니 또 웅덩이가 있어서 나무를 잘라서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조금 서쪽으로 수백 걸음을 가서 정상에 이르렀다.
산 정상에는 못이 있는데, 사람의 정수리에 있는 숨구멍 같았다. 둘레는 2, 30리가 되었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의 벽은 깎아지를 듯 서 있어 마치 붉은 찰흙을 칠한 것 같았다. 그 북쪽은 몇 자쯤 터져서 물이 넘쳐흐르는데, 이것이 흑룡강(黑龍江)의 수원(水源)이다. 동쪽에는 석사자(石獅子)가 있는데, 색깔은 누렇고 꼬리와 갈기가 움직이려고 하는 것 같아서 중국 사람들이 망천후(望天吼)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등성이를 따라 아래로 3, 4리를 가면 샘이 솟아나는데 채 수백 걸음을 가지 않고 협곡이 열리면서 큰 골짜기를 이루어 가운데로 물이 흐르다가 또 동쪽으로 흐른다. 작은 산등성이 하나를 돌아 넘으니 한 샘이 2개의 물줄기가 되어 흐르는데, 그 흐름이 매우 가늘었다.
목극등이 두 갈래로 갈라진 물 사이에 앉아서 이름 붙이기를 ‘분수령”(分水嶺)’이라 하고, 돌에 새겨서 기록했다. 목극등이 돌아간 뒤에 보내온 문서에서 이르기를, “비를 세운 뒤에 토문강의 원류를 좇아 살펴보았는데, 물줄기가 수십 리를 흐르다가 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가 돌 속에 묻혀 밑으로 흘러 100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큰물이 드러났습니다. 이 물줄기가 없는 곳에 어떻게든 사람으로 하여금 변경 경계가 있음을 알게 한다면 감히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토문강의 수원이 끊긴 곳에는 혹 흙을 쌓거나 혹 돌을 모아 놓거나 혹은 목책을 세워서, 그 아래의 수원을 표시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정계비문’에 이르기를, “대청(大淸)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여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이 되는 까닭에 분수령 위에다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康熙) 51년(1712) 5월 15일”이라고 하였다.
3.증보문헌비고 여지고
산에 대한 총설(總說)
산(山) 가운데 나라 안에서 으뜸 되는 산이 12산인데, 1은 삼각산(三角山), 2는 백두산(白頭山), 3은 원산(圓山), 4는 낭림산(狼林山), 5는 두류산(豆流山), 6은 분수령(分水嶺), 7은 금강산(金剛山), 8은 오대산(五臺山), 9는 태백산(太白山), 10은 속리산(俗離山), 11은 장안산(長安山), 12는 지리산(智異山)이다.
백두산조
백두산(白頭山)은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당서(唐書)》에서는 '태백산(太白山)'이라 하였다. 백두산은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의 두 강(江) 사이로부터 남남쪽으로 연지봉(臙脂峯)과 허항령(虛項嶺)에 이르러서 에워싸여 천평(天坪)이 되고, 동남쪽으로 뻗어 보다산(寶多山), 사이봉(沙伊峯), 완항령(緩項嶺), 어은령(漁隱嶺)이 되어 원산(圓山)에 이른다.
【연지봉(臙脂峯)】:한 기슭은 동쪽으로 뻗어서 대각산(大角山), 감토산(甘土山), 남증산(南甑山)에 이른다.
【사이봉(沙伊峯)】:한 기슭은 동쪽으로 노은동산(蘆隱洞山)이 되었고, 한 기슭은 서쪽으로 나한산(羅漢山), 마산(馬山), 하방덕(何方德)에 이른다.
【완항령(緩項嶺)】:한 기슭은 서남쪽으로 백덕소리(栢德所里)의 덕아간령(德阿間嶺), 회령(灰嶺)이 되고, 한 기슭은 서쪽으로 참도령(斬刀嶺), 종가령(鍾家嶺)에 이른다.
【어은령(漁隱嶺)】:한 기슭은 서쪽으로 장평산(長平山), 천봉산(天鳳山)에 이르며, 갑산부의 치소(治所)가 있다.
○ 무산(茂山)조
백두산(白頭山)은 서쪽 3백 5리 거리에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이르기를,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거리에 있다. 가로로 1천리에 뻗쳤고, 높이가 2백 리이다. 고개 위에는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 이며,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混同江)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강(阿也苦江)이 된다." 라고 하였다.
홍세태(洪世泰)가 기록하기를, "숙종(肅宗) 38년(1712)에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에 와서 경계(境界)를 정(定)하니, 우리나라에서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이선부(李善溥)를 보내어 목극등을 삼수부의 연연에 가서 맞이하게 하였으나, 목극등이 다만 역관 김응헌(金應瀗)과 김경문(金慶門)과 같이 산에 올랐다. 괘궁정(掛弓亭)에서 오시천(五時川)을 따라서 내려갔는데, 내가 경성(鏡城)의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이곳에 이르러 강의 물과 합류하며, 그 밖에는 모두 거친 돌무더기여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북쪽으로 백덕(栢德) 70리, 검문(釰門) 25리, 곤장우(昆長隅) 15리를 지나가니, 큰 산이 있어서 앞을 가로막았다. 곧 서쪽으로 강물을 건너 나무를 베면서 언덕을 따라 5, 6리를 가니, 길이 끊어졌다. 다시 산언덕을 따라 갔는데, 이름을 화피덕(樺皮德)이라 하였으며, 백덕에 비하여 더욱 험준하였다. 80여 리를 가니 하나의 작은 못이 있었고, 또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서 한덕(韓德)에 오르니 지맥이 우뚝 서서 가로막았다. 수십 리를 가니 수목이 점차 드물어지고 산이 점차 드러났는데, 이곳에서부터 산이 모두 순전히 뼈의 빛처럼 푸르고 희었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하나의 봉우리가 하늘로 치솟았는데, 곧 소백산(小白山)이었다. 계속하여 산 발꿈치를 지나 서쪽으로 10리를 가니, 산꼭대기에 이르자면 아직도 2, 30리가 남았고, 그 조금 동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소백산의 지류였다. 그 산등성이를 올라서 바라보니 백두산이 웅장하게 천리에 솟았는데, 푸르스름한 산꼭대기가 마치 높다란 도마에 하얀 독〔甕〕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고개 밑을 따라서 몇 리를 가니 산이 모두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고, 5, 6리를 가니 산이 갑자기 그 가운데가 푹꺼져서 구덩이를 이루었는데, 가로지른 모양이 마치 띠〔帶〕와 같았고, 그 깊이는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너비는 겨우 2척(尺) 정도였으므로 혹은 건너뛰기도 하고 혹은 서로 손을 잡고 지나갔다.
4, 5리에 또 구덩이가 있었으므로 나무를 잘라서 사다리를 만들어 지나갔고, 조금 서쪽으로 수백 걸음을 가서 산꼭대기에 이르니, 못이 있었는데 마치 숫구멍과 같았으며, 그 둘레가 2, 30리 가량 되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방의 석벽이 깎아 세운 듯한데, 마치 붉은 찰흙을 발라 놓은 것 같았다. 그 북쪽으로 몇 자로 터져 물이 넘쳐흘러 나가서 흑룡강(黑龍江)의 근원이 되었다.
동쪽에 돌사자가 있어 빛깔이 누르스름한데 마치 꼬리 갈기를 슬슬 흔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중국 사람들이 망천후(望天吼)라고 하였다. 산등성마루를 따라서 3, 4리를 내려가니 샘이 흘러 나가는데, 수십 걸음을 못가서 협곡(峽谷)이 터져 큰 구렁이 진 속으로 물이 쏟아졌다. 또 동쪽으로 작은 언덕을 넘으니, 샘이 있어서 두 갈래가 나누어지는데, 그 흐름이 아주 가늘고 약하였다. 목극 등이 그 물길이 갈라지는 사이에 앉아서 김경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곳을 분수령(分水嶺)이라고 부를 만하다.' 라고 하고, 마침내 돌에 새겨서 기록하였다."라고 하였다.
목극등이 돌아간 뒤에 글을 보내오기를, "비(碑)를 세운 뒤 토문강(土門江)의 수원(水源)을 따라서 살펴보니 그 흐름이 수십 리에 이르다가 물이 흔적을 볼 수가 없고 돌 틈을 따라 보이지 않게 흘러서 백리에 이르다가도 바야흐로 큰물로 나타나는데, 이처럼 물이 없는 곳에서는 어찌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변방(邊方)의 경계임을 알게 하여서 감히 서로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 토문강의 수원이 끊어지는 곳에 혹은 흙을 쌓기도 하고, 혹은 돌을 모으기도 하고, 혹은 목책(木柵)을 세워서 하류(下流)와 연접(連接)시키겠다는 뜻으로 다시 회답하였다고 한다.
갑산(甲山)조: 백두산(白頭山)은 북쪽 3백 30리 거리에 있다.
< 역사와 예술 속의 백두산 >
백두산은 사화산이 아니라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한민족의 직접적인 거주지라기보다는 불을 뿜어내어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음직하다.
역사속의 백두산
삼국이 성립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읍루·숙신·동옥저가 백두산 주변에 흩어져 살았고 이들 종족 모두 백두산을 성역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가 강성해진 이후에 백두산은 고구려 세력권이었으며, 발해시대에도 영토 한가운데 위치하여 여전히 성역으로 간주되었다. 그 후 통일신라, 고려시대에는 백두산의 영역 외곽에 위치하여 거란, 여진족 등 북방 이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조선 시대 1434년(세종 16)에는 북방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두만강 일대에 6진(경원·경흥·회령·부령·온성·종성)를 설치하였고, 1443년(세종 25)에는 압록강변에 4군(무창·자성·여연·우예)를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다.
1677년(숙종 3, 淸 康熙 16)에는 궁정내무대신인 무목납(武木納) 등 4인이 백두산에 파견되어 실황을 조사,《장백정존록 長白征存錄》을 기록하니 이것이 최초의 백두산 답사 기록으로 추정된다. 1712년(숙종 38) 5월에는 청나라의 제의에 의하여 오라총관(烏喇總館)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 조태상(趙台相)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니,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최초의 금석문 유적이다. 당시 정계비를 세우게 된 상황을 보면 조선 측 대표로서는 참판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簿)가 나갔으나, 목극등이 조선 대표의 연로함을 빙자하여, 조선측의 이의복·조태상·김응헌(金應憲) 등만을 대동하고 산정에 올라가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들 측에 유리하게 세운 것이다. 그 지점은 백두산의 정상이 아니라 남동방 4km, 높이 2,150m의 분수령 지점이었으니, 합법적인 비도 아니며, 이른바 정계비라고 명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 데도 두만강이 국경선이 되면서 토문강 일대의 국토를 잃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우리의 영토임을 주장하였으나, 청의 세력 때문에 관철되지 못한 데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완봉선(安奉線) 부설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하여 철도 부설권을 취하는 댓가로 간도지방을 청나라에 넘겨줌으로써 간도지방인 연변(延邊)일대에 현재 우리 동포가 180만 명이나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영토로 환원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침략했던 민족 항일기에 있어서는 백두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기지로서 청산리전투나 어랑촌 전투에 승리를 안겨 준 전승지이기도 하다.
예술 속의 백두산
우리나라 사람이 쓴 최초의 백두산 기행문으로는 1764년(영조 40)에 함경북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백두산유록 白頭山遊錄》이다. 이 유록은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 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백두산유록》에는,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趙榮順)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여행기는 찾아 볼 수 없다.
근래의 자료로는 1927년에 간행된 최남선의《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백두산등척기 白頭山登陟記》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두산에 대한 한글 기행문은 최남선의《백두산근참기》가 처음이 될 것이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백두산천지》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진태하(陣泰夏)는 1984년 7월,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백두산'이라는 시로써 토로하였다.
민족도, 국토도, 분단된
슬픈 역사 속에
통일의 그날을 기다려
하마 하마 사십 년
세월의 기만(欺瞞)에
분노는 열화처럼
이역(異域)길 돌아 돌아
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
신들린 걸음으로
민족의 성지(聖地), 국로의 시원(始原)
백두산을 찾아
장강(長江)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
잃어버린 우리의 땅
만주(滿洲)벌 수만리 (하략).
그리고 최근 백두산에 대한 장편 시로서는 1987년 발행한 고은(高銀)의 '백두산'이 있다. 근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안수길(安壽吉)의《북간도 北間島》를 들 수 있고. 이외에 이미륵(李彌勒)도《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백두산은 민족 발생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특히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많이 전래되고 있는데 '백두산의 목동과 처녀'는 우리 민족의 발생과 재미있게 연관시켜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는 전설이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로서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예술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많은 화가들이 백두산의 신비를 화폭에 담았는데 그 대표적으로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작품으로는 1985년 3월 '조선일보'에 사진들이 보도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 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도 확실한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민족이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누군가가 백두산을 노래한 것이 지금까지 불러지고 있는 것처럼 백두산에 대한 음악 또한 적지 않다. 이처럼 우리나라에 있어서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마다 깊숙이 아로새겨져 존재하는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聖域)이요, 통일된 신앙이다.
단군왕검으로 줄 잇는 민족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원(始原)하고, 이곳으로부터 바다 멀리 제주도·울릉도까지 국토의 맥이 줄 닿고, 민족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 잡고 있음을 믿어왔기 때문에, 반만년 애환의 역사 속에서도 면면한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되어 온 것이며
우리 한민족을 '백두산족'이라고 자처할 만큼 우리 민족 누구나의 가슴속에 백두산의 혼이 잠재되어 있다 할 것이다.
<백두산 등반 코스>
제1코스: 한국인이 제일 많이 가는 달문에서 천활봉
제2코스: 장백폭포에서 겅어서 천지까지 가는 곳 (약3시간) 며칠 전 강호동의 1박2일에서 나왔던 곳인데 그곳이 그렇게 힘 든 곳은 아닌데---. 너무 과장 되었드구만
제3코스: 서파로 가는 코스인데 올라 가면 5호경계비가 있는 청석봉 아래임. 근래에 개발되어 한국인도 자주 가는 곳임. 입구에 백운장 산장이 있다.
제4코스: 아직 개방되지 않았음. 위 내용에서 백두산 등참기는 대부분 북한에서 등반한 코스임.
백두산 지도: 중국과 북한의 경계지역은 청석봉에서 비루봉을 가로질러 북쪽은 중국땅, 남쪽은 북한땅이다. 백두산 천지 가는 곳은 세곳이다.
<백두산의 사계---아래 사진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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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숙종때에 국토의 경계 개념에 충만한 관료가 목극등과 같이 갔더라면 우리의 국토경계가 토문강으로 정해졌을것을
안이한 관료때문에 우리땅의 소유권을 잃게 되다니 너무나 애석합니다. 토문강 유역, 간도땅을 되찾을날은 언제일지...
우리의 국력이 강해지는길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