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안재홍(1891∼1965) 선생이 태어나 살던 집이다.
가옥은 계루지 마을 야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대문간채까지 남아 있던 큰 집이었으나 현재는 1994년~1995년에 보수한 안채와 사랑채, 담장, 화장실, 대문 등만이 남아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전통가옥들이 생활의 편의를 수용하여 변화하게 되는데, 이집의 경우가 이러한 변화된 경기지역 살림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동쪽에 대문과 화장실이 있다. 안채는 경기도지방의 기단 위에 전형적인 ㄱ자형 평면의 7칸 전퇴집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건너방이 왼쪽에는 안방이 일렬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앞으로 부엌과 부엌광, 나무간이 연결되어 있다. 구조는 오량(五梁)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기와지붕이다. 양쪽 맨 끝 칸을 적절히 이용하여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고 있는데 특히 부엌과 대청 사이에 있는 연결 통로는 이 집만의 특색이다. 사랑채는 8칸 규모로 一자형 평면의 오량구조,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에 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온돌방, 왼쪽에는 대청보다 한 단 높여 만든 누마루가 연결되어 있으며, 대청과 온돌방 전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장대석 두벌대로 돌린 기단위에 잘 다듬은 방형 초석을 놓고 각기둥을 세웠으며, 누마루 하부는 높은 주춧돌을 사용하였다. 온돌방 전면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머름을 설치하고 띠살문을 달았으며 대청 앞과 누마루에는 들어열개를 달았다. 대청 들어열개는 띠살문이고, 누마루 들어열개는 궁판이 높은 용자살인데 궁판 위에 궁판과 같은 높이로 한 단을 만들고 가운데 세로대를 세웠다. 누마루 하부에는 함실아궁이가 설치되어 방을 비교적 빨리 데울 수 있게 하였다.
□ 안재홍의 생애 (安在鴻: 1891~1965) 안재홍의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이다. 1891년 12월 30일 고덕면 두릉리에서 순흥 안씨인 윤섭과 남양 홍씨 사이에 8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순흥 안씨는 청주 한씨와 함께 옛 종덕면의 중심인 계루지의 대표 성씨이다. 순흥 안씨는 부친 안윤섭의 대를 거치며 크게 성장하였는데, 그는 개화된 의식으로 자녀 교육에 힘써 빛나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안재홍은 어린 시절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7년(17세)부터는 이른바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단발을 하고 이 해에 서울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 중학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안재홍은 이상재, 남궁억, 윤치호 등과 교분을 가졌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기독교청년회에 계속 관여하여, 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조직, 활동하면서 1911∼1914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귀국하여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하여, 이회영·신채호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하였다.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직을 역임하고, 그 해부터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 해 5월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안재홍은 여기에 참여하여 총무로 활동하다가 이 단체가 11월 대구에서 발각됨에 따라, 검거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2년 출옥한 뒤, 1924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산업구조상 일본자본에 비하여 조선인 공업생산이 다소 우세한 분야이었던 직물업․\\\;제지업․\\\;요업․\\\;화학공업 등 중소공업과 가내공업 분야 등에서 중소자본의 육성과 토산장려(土産獎\\\;勵)를 내세웠다. 그는 일본 독점자본주의라는 외래 자본이 침투하는 현실에 대응하여, 민족자본․\\\;민족경제의 독자성을 전제로 하는 조선인 자본의 육성을 강조하였다. 그해 5월 최남선이 사장으로 있던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언론활동을 시작하여, 9월에는 <조선일보> 주필을 거쳐 부사장(1929∼1931) · 사장(1931∼1932)을 역임하여 10년 동안 언론인생활을 하였다. 1927년 좌우합작단체로 결성된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여 총무간사를 맡았다. 하지만 조선일보에 사설에 대한 책임으로 2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1929년부터는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문맹퇴치를 위한 문자보급운동과 생활개선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해 말에 신간회가 주도한 광주학생운동진상보고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4년에는 정인보와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기 시작하면서 다산 정약용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6월 난징(南京)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사건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이후 20여 년 동안 9번에 걸친 투옥으로 7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고,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8·15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곧 사퇴했고, 그해 9월 24일 국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한성일보사 창립 사장·비상국민회의 의원·민주의원 의원·좌우합작위원회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47년 입법의회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 민정장관이 되어 한인체계에 의한 행정기반을 굳혔다. 1950년 5월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6․\\\;25전쟁의 발발로 피신해 있다가 1950년 9월 21일 제자인 권태휘의 밀고에 의하여 납북되었다. 납북 뒤의 행적은 정확치가 않고 1965년 3월 1일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해방 전후 계급적 통합 민족국가 건설을 위하여 중도 우파 노선을 실천하다 좌․\\\;우익의 배척을 받아 역사에 묻혀버린 그의 이념은 당시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 우리 현대 민족사적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한민족의 기본노선≫ 등이 있다.
자료제공: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