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밀양 삼랑진 작원관 전투
조선시대 영남대로에는 2개의 큰 관문이 있었다. 문경의 조령관(鳥嶺關)과 삼랑진의 작원관(鵲院關)이다.
문경새재의 관문은 사적 제147호로서 국민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으나 작원관은 아직도 존재가 미미하다.
복원된 성문이 외진 곳에 자리한데다 홍보가 안된 탓이다. 작원관은 원(院)·관(關)·진(津)의 역할을 맡던 국방요새로서 영남 제1관문으로 불렸다.
여행 관원들이 묵던 역원(驛院)이 있었고, 천험의 관방(關方)인 동시에 출입자 및 화물을 검색하는 나루터(津)로 기능했다.
임진왜란 때는 격전이 벌어졌다. 조선의 군·관·민 300여 명은 길을 지키기 위해 왜적 1만8000명을 상대로 싸우다 산화했다. 아쉽게도 작원관은 자취가 희미하다. 1936년 7월 대홍수때 성문 등이 쓸려갔고 1938년 일제가 세운 '작원관원문기지'라는
작은 비석만 간신히 전해지고 있다.
그후 지역주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1983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됐고, 1997년에야 성문 등이 복원됐다.
작원관이 위치한 삼랑진읍 검세리 작원마을은 10호 안팎의 한갓진 농촌이지만 까치원 설화, 중다리·처자다리 전설,
원추암(員墜岩) 전설 등 이야깃거리가 많다. 영남대로의 요처였음을 반증한다.
고니시는 동래성을 함락시킨 다음 날인 16일 본국으로 전황보고서를 보내고 곧장 진격을 시작하여 선발대가 17일에 양산에 무혈입성 -
양산 군수 조영규가 동래성전투에서 전사하여 양산에는 사실상 방어병력이 없는 상태였던 걸로 추정됨 - 한 후 18일에는 동래에 있던
주력군까지 양산으로 이동을 완료하고 밀양성 방면으로 선발 부대를 진출시켰다.
밀양은 인구 천명이상의 도호부로써 당시 도호부사는 박진으로 그는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선조22)에 심수경의 천거로
등용되어 선전관을 거치고 밀양부사에 임명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군(郡)내 병사 300여 명(혹은 500여 명)을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을 가서 당시 성을 빠져나온 좌병사 이각과 함께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은 우리 것이 아니오. 내가 앞에서 적을 견제할 터이니, 공은 뒤에서 점거하였다가 내가 패하면 공이 나를 구원하고
내가 이기면 공은 협공해 주시오. 부디 약속을 저버리지 마시오." -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임진일록 1(壬辰日錄一)
박진의 군사는 1선에 이각의 병사는 2선에 배치하고 전열을 가다듬었으나 동래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소산역으로 접근하자 이각이 박진이
적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먼저 도망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박진은 후위를 맡아 줄 아군이 없어졌기에 역시 후퇴하여 밀양성으로 돌아갔다.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성에서 전황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밀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인근 군현의 수령들에게 밀양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실제로 밀양을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동원되었다고 해도 중간에 도주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16일 밀양으로 복귀한 박진은 남은 병력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그러는 동안 일본군 선발대가 밀양 근처까지 접근하였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박진은 남은 병력을 양산과 밀양 사이의 요충지인 작원관 부근에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작원은 밀양에서 동쪽으로 4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밀양과 청도, 대구 등 서울을 향해 이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특히 작원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황산잔도라는 험한 길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지세만 잘 이용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였다.
(1872년 지방도 중 밀양부 지도)
(*현재 작원관지 부근) (*붉은 원 : 복원된 작원관지, 파란 원 : 작원관지 옛터) (클릭하면 좀 더 커짐)
(고지도 상으로 본 이동 예상도)
(위성 사진으로 본 예상 이동로)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일부 기록에는 박진이 병력을 나누어 자신은 밀양성에 남고 일부만 작원관에 배치했다고도 하고
다른 기록에는 박진이 직접 작원관 전투를 지휘했다고도 한다. 황산잔교가 비록 좁고 험한 길로 군사 요충지였다고는 하지만 우회하는 길이 존재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문제는 이 우회길을 일본군도 알고 있었다라는 점이다. (아니면 근처 조선인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했을지도...) 조선군이 병력 여유가 있었다면
우회 길까지 충분한 병력을 배치했겠지만 그러질 못했다. 고니시는 주력군을 이끌고 선두에 나타나 조선군의 주의를 그쪽으로 집중시킨 후
별동대를 내륙의 산악지형으로 우회시켰다. 일본군의 우회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박진은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의 직속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우회 부대을 요격하려 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였다. 그 때 정면의 주력군도 공격을 시작하여 앞과 옆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조선군의 방어선은 무력하게 무너졌다.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은 전사하였고 박진만이 탈출하여 밀양성으로 돌아가 성 안의 각종 시설과 군량창고를 불태운 후 도주하였다.
이 때 박진이 일본군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이 일로 박진의 명성이 높았졌다고 하니 이것도 역사의 코메디라고 볼 수 있듯....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
성이 불타는 것을 본 일본군은 다음 날인 19일 산에서 내려와 성을 점령하였는데, 이 와중에 밀양성을 지키던 일부 군민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밀양 작원관 전투의 우회 기습 공격과 상주 북천 전투의 양측 공격 전술은 탄금대 전투(1차 - 단월역 방어, 2차 - 탄금대 방어)에서 사용된다. 우회기습공격은 단월역에서 사용되고, 양측 공격 대형은 탄금대에서 사용된다.
작원관 전투와 북천 전투는 야전 전투이다. 부산성 전투와 동래성 전투는 공성전이다. 이 둘을 통해 그 이후의 일본군 전술을 알 수 있다.
밀양성으로 퇴각했던 박진이 밀양성에 도착해 있는 경상우도 지방장관인 김수에게서 보고를 받은 후 작원관 방어, 협곡을 건너오는 일본군을 방어하려 하였으나, 마쯔우라가 우회 기습 공격을 하여 괴멸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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