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도피와 회귀,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도피와 회귀가 세상에 나온 이유이다.
“인문학은 나를 죽이지 않는데, 체제가 나를 죽이거든요.”
● 책소개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수상작 『비어 있는 방』으로 등단한 최인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도피와 회귀』는 1월 1일에 시작해 12월 25일로 끝맺는 일기체 소설이다. 날짜 하나하나에 국내외적 사건과 철학적 개념을 인용 제시해 도피와 회귀가 역사 속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주인공 명하(철학교수)는 남북분단과 좌우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는다.
남과 북 그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명하는 결국 제3국으로의 도피를 결심한다.
명하의 도피는 이념적 도피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부터의 도피다. 남한당국은 주인공이 북으로 망명할 것을 우려해 방해공작을 펼친다. 남한당국의 시선으로 보면 주인공의 망명은 체제에 대한 불복일 뿐. 도피와 회귀는 명하의 삶을 날카롭게 재단하며 그 존재를 드러낸다. 명하의 선택은 어디를 향하게 될까.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은 명하의 뒤를 쫓으며 깊은 철학적 사색을 해나가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 작품은 인류의 생존과 번영이 도피와 회귀의 법칙으로 진행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선과 악, 생과 사, 이념과 제도, 문명과 역사까지도 도피와 회귀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집단에서 도피해 자유롭게 되었지만, 다시 집단을 그리워해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피력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이 도전과 응전의 연속 과정으로 탄생했으며, 도전과 응전이 인류를 진화시키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역사의 연구>에서 주장했다.
이와 같이 생성과 소멸, 전진과 후퇴, 진보와 퇴보, 건설과 파괴는 도피와 회귀를 바탕으로 역사를 만들고 문명을 꽃피웠다.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전쟁과 이념의 대립, 종교적 갈등, 문명의 충돌 또한 이 법칙 아래서 발생하고 봉합되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사용한 변증법의 논증과, 헤겔이 현상학적 인식론에 적용한 정립(테제)- 반정립(안티테제)- 종합(진테제)도 도피와 회귀의 틀 안에서 구현되었다. 이와 같이 도피와 회귀의 법칙은 학문과 역사, 종교, 이데올로기를 견인하며 인류를 성장시켰다.
『도피와 회귀』는 작가 최인이 2005년 3월에 집필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났다. 그동안 최인은 도피와 회귀를 108번이나 수정했다. 그 숫자를 정확히 짚어낼 정도로 도피와 회귀에 대한 그의 애정은 남달랐다. 집필 시작 시점은 오래 전이지만 소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의 ‘오늘’ 이다. 주인공 최명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떠나고 싶은 욕구’ 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욕구’ 를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에 그려진 1년은 거대한 역사의 축적이며, 최명하의 삶은 도피와 회귀의 굴레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역사는 반복되며,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의 과거까지 돌아봐야 한다는 걸 소설은 알려준다.
『도피와 회귀』는 이 시대를 돌아보고, 가름하고, 통섭(統攝)하는 소설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범국민 교양서이자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철학소설이다. 일반인, 대학교수,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예술가, 공무원, 회사원, 노동자, 학생 모두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미래를 전망하고 통찰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 저자 소개
최인
본명 최인호
1982년〜1996년간 인천경찰청 근무. 파출소장, 형사반장 역임.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비어있는 방」으로 등단
2002년 1억원고료 국제문학상 수상 「문명, 그 화려한 역설」
2008년〜2019년간 <최인 소설교실> 운영
2020년 <도서출판 글여울> 창립
2021년 「문명, 그 화려한 역설」, 「도피와 회귀」 출간
2022년 「돌고래의 신화」 단편집 출간
2023년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출간
2023년 「늑대의 사과」 출간
2024년 「신에겐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상/하권)」 출간
● 책 속으로
p10
그는 새해 아침, 무위로부터 자신을 탈출시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p11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괴리된 고독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독감이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무력감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하고, 밤새워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도 해 보았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무력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p22
“자살보다는 선생님이 낫잖아요.”
“자살?”
“네 자살.”
그는 안경 너머로 시리도록 투명한 화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화니가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화니는 언제든지 죽음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여자애였다. 그것이 자신 때문이든, 타인 때문이든, 사회 때문이든 마찬가지였다.
p22
죽음이란 어려운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란 언제든지, 누구에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또한 죽음은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도리조차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감정조차 통제치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막겠는가.
p39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p51
철학은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p72
행복은 분명히 순간이고 불행은 확실히 지속적이다.
p73
인간의 앞모습은 악하나 인간의 뒷모습은 선하다. 그에 반해 동물은 앞뒤에 관계없이 언제나 선하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항상 등을 하늘로 향한 채 살아가기 때문이다.
p98
인간들은 높은 곳을 갈망할 때 당연한 것처럼 위를 올려다본다.
p99
오늘의 슬픔으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도피하라.
p293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처럼, 절망하지 않는 사람 또한 단 한 사람도 없다.
p296
기본적인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라도,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내준 것은 결코 아니다.
p301
나의 시선은 물질적 환경이 가장 먼 항성의 세계까지 파악한다.
p302
현상 속에는 언제나 본질이 내재해 있고, 내재적 본질 없는 외부적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p308
인간이 현상에 호도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현상은 아름답지만 본질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어서다.
p318
작은 마을에서 살다보면 소문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p328
그는 사람과의 공통감, 조직과의 소통감, 우주와의 일체감까지 상실해 버렸다. 그의 천국은 사라지고 외로운 세계와 마주 서게 되었으며, 막막한 곳에 던져진 이방인이 되었다.
p352
“인문학은 나를 죽이지 않는데, 체제가 나를 죽이거든요.”
p375
역시는 언제나 개인과 집단 위에서, 그들의 피를 먹고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p383
그는 그 순간 자신 앞에 도래한 우연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앞에 나타난 또 하나의 무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진정성을 담보로 한 우연으로부터 도망칠 것인가. 그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우연이 어떤 것을 가지고 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