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래 부르지 않는가
고대시대는 왕이 제사장의 역할을 겸하였으니 언어표현의 사회적 기능은 주술과 노래(歌)로 나타난다. 일본문학의 시작도 노래에서 시작하였고(우따 歌) 그 다음 형태가 노래와 이야기를 섞은 형태인 우따모노가타리(歌物語) 그 다음 형태가 모노가타리(物語)이다(소설이 아닌). 어째든 인간생활에 있어서 혹은 인간감정표현에 있어서 노래하고자 하는 감정은 본능에 가깝다. 또한 감정중에서는 기쁨보다는 슬픔과 비탄이 첫 번째이다. 우리는 슬픔이 극에 달할 때 땅을 치며 아이고 아이고 노래같은 감정을 토해낸다.
울면 그냥 울지 땅을 왜 치는지 그게 일본인들은 기이하게 보인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슬픔을 절제하며 우는 편이다. 감정의 절제가 마냥 좋기만 한건지. 그건 아닌 것 같다.
어릴 때는 밤늦은 시간 귀가길의 아버지들이 골목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다. 노래를 부르는 아버지들의 대부분은 술이 좀 취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부르는 그 노래를 책상머리 앞에서 듣고 있으면 느낌이 묘하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부르는 노래가락 속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래자체는 정겹게 다가왔다. 지금 동네거리를 걸으며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면 인근주민들이 싫어 할 것 같다. 현대인들은 이제 귀가길에 한번 불러보는 노래를 낭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0년대 어느 날 저녁 내 또래의 남루한 옷차림을 한 지나가는 한 아이가 나훈아의 노래 「해변의 연인」 을 부르며 집앞을 지나갔다. 노래를 얼마나 처량하게 구성지게 부르는지 유심히 쳐다본 적이 있었다. 그런 이후 「해변의 연인」 의 노래를 들으면 그 아이가 떠오른다. 그 날 그 아이가 노래부르지 않고 조용히 길을 그냥 지나갔다면 그 날은 기억없이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이었을 것이다. 용감하고 박력이 넘치는 둘째형의 고교시절 그는 늘 동네어귀에 들어서면 온 동네가 울릴정도의 우렁찬 목소리로 「돌아오라 쏘렌토」 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집에서 자신의 아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던 어머니는 나를 보며 「얘야- 너거 둘째형 온다」라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쏘렌토」가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는 남자의 이름인 줄 알았다.
옛날에는 주로 길을 가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많이 들었다. 혹은 남의 집 담장너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최희준의 「하숙생」이 공전의 히트를 칠 때는 온 세상이 허무해 보였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 유행할 때는 부산거리가 온통 흥청거리는 느낌이었다. 뒤돌아보면 대히트를 치는 노래가 있을 때는 즐거운 시절이었다. 이제는 웬지 옛날같이 일년내내 인기를 누리는 노래는 나오지 않는다. 세대차이 라고 하지만 좋은 노래는 시대가 흘러도 좋다. 40년이상 세월이 흘렀지만 「Sound of Silence」같은 노래는 청춘도 중년도 노인도 여전히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의 노래는 시끄럽기만 할 뿐 마치 예쁘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서 상스런 말을 내뱉는 여자를 보는 기분이다.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소설도 강의도 연주도 tv드라마도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것은 남의 시간과 에너지와 기회비용을 빼앗는 몰염치한 짓이다.
노래는 슬픔의 감정을 더 순수하게 만들고 기쁨을 더 벅차게 만든다. 코로나 때문에 경제 때문에 전쟁 때문에 요사이 우리의 감정은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감정을 따뜻하게 혹은 뜨겁게 데우려 하지 않는다. 기껏 남이 부르는 노래를 멀찌감치 구경만 했지 자신이 즐겨 노래부르지 않는다. 나는 과거에 길을 걸으며 노래를 많이 불렀다. 큰 소리로 노래불러도 자동차소음에 묻혀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노래조차도 부르지 않은지 꽤 시간이 흘렀다. 주위를 둘러봐도 노래부르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왜 노래 부르지 않는가?
첫댓글
그렇습니다!
노래는 불러야 합니다!
요즈음도
열 걸음쯤 거리를 두고 걸으며
노래를 불러봅니다!
그런 날은
기분 제법입니다!
걷고 싶고 노래할 마음이 내키면 아주 건강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걷는 것이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