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죽었다. 인간의 악함이 악마를 죽였다.
악(惡)이 평범해져버린 시대의 인간, 신, 천사 그리고 악마에 대한 사유.
30년 동안 캄캄한 토굴에서 지내다 세상 밖으로 나온 남자.
그는 인간인가, 짐승인가, 악마인가, 선지자인가.
곁에 두고 평생 읽을 책.
소설책이라 쓰고, 명언집이라 읽는다.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는 철저히 악마화 된 인간, 인간을 대신해 죽은 신, 천사를 타락시키는 악마를 서사시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신의 종말, 천사의 저주, 악마의 죽음, 인간의 타락, 짐승의 멸종을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논하고, 노래하고, 회억(回憶)한다. 이 역설적이면서도 부조리한 회억은 과거를 되새기고, 반성하고,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저주와 조소와 비난의 읊조림이다. 이미 죽어서 궤란(潰爛)의 무덤 속에 자리 잡은 미래는 신조차도 살릴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 되살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차라리 창조주를 어둠의 동공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하여 인간으로부터 버림 받은 신과 천사와 악마는 궤란의 무덤 속에서 스스로의 죽음을 재확인한다.
● 저자 소개
최 인
본명은 최인호(崔仁鎬)다.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비어 있는 방』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2년 장편소설 『문명 그 화려한 역설/ 원제, 에덴동산엔 사과나무가 없다』로 1억원고료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2003년간 부산 국제신문에 『에덴동산엔 사과나무가 없다』, 2006년∼2007년간 인천일보에 『누가 블루버드를 죽였나』를 연재했다.
출간작품
문명, 그 화려한 역설 (초판)
도피와 회귀
돌고래의 신화 (단편소설집)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문명, 그 화려한 역설 (개정판)
늑대의 사과
신에겐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상/하권)
● 책 속으로
산다는 것은 곧 죽음 위를 걷는 영혼의 그림자와 같다. 삶은 언제나 죽음을 밟고 서 있으며, 그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다.
p18
자신이 옳다는 허영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잊도록 만든다. 자신이 천재라는 자만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짐승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p24
누군가가 천상의 말을 할지라도 진실이 없으면 소리 없는 징일 뿐이다.
p101
가난하면서 세상을 원망하지 않기 어렵고, 부자이면서 스스로 교만하지 않기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p138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오만함은 때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착각하게 만든다.
p145
인간들이여, 행복의 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첫째 남을 위해 일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p154
“사실 화려한 궁전 속을 유유히 거닐어도, 누추하지만 내 집만한 곳은 없는 것이외다.”
사내가 말했다.
“누추하지만 등을 붙일 수 있는 자기 집에서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자는 없지요.”
그가 말했다.
“맞소. 노상에 살면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자가, 왕궁에 살면서 눈물 흘리는 자보다 나은 법이오.”
사내가 말했다.
“큰 집 천 칸이 있다 해도 밤에 눕는 곳은 여덟 자뿐이요, 좋은 논밭이 만경이나 돼도 하루 먹는 것은 두 되뿐이지요.”
p168
“나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오. 그렇더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오.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소. 그렇더라도 나는 어떤 것은 할 수 있소. 그리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오.”
p187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역사는 마지막 모습만 기억한다네. 자네도 느끼고 있었지만, 삶은 도생(圖生)의 모습만 기억한다네. 자네도 짐작했겠지만, 죽음은 과거의 모습만 기억한다네.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죽음은 역사보다 위대하다네.
p277
악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돈이나 부가 아니라, 돈이나 부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과 집착에 있습니다.
p292
“죽을 때에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죽기 전에 죽어 두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 버릴지 모르니까요.”
p328
“악마도 인간이었을 때는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p332
진실을 말할 용기 없는 자들이 거짓말을 일삼고, 진실을 실천할 용기가 없는 자들이 위선을 일삼는다.
p343
진리를 갈구하는 자들이여, 이것을 아는가?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날이 있다는 것을.
p344
그대 과감히 행동하라. 인간은 굴종하기 위해서 시대에 묶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기 위해서 시대에 예속되는 것이다.
p419
"당신은 악마를 만나 봤소?"
남자가 말했다.
"늘 만나고 항상 마주칩니다. 우리 곁에 무수히 많으니까요."
p428
한 사람을 죽이면 그는 살인자이다. 수만 명을 죽이면 그는 정복자이다. 전 인류를 멸망케 하면 그는 악마이다.
p432
강한 인간이란 가장 훌륭히 자신의 일을 해 낸 사람이고, 나약한 인간이란 가장 게으르게 자신의 일을 회피한 사람이다.
p441
갑작스럽게 착한 사람이 되거나, 갑작스럽게 악인이 되는 경우는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기피함으로써 악인이 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선용함으로써 선인이 된다.
p442
“그대는 하수구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남자가 긴 턱수염을 말아 쥐고 대답했다.
“꿈과 도덕과 명예를 찾고 있습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수구 속에서 꿈, 도덕, 명예를 찾다니요?”
남자가 허리를 굽힌 채 대답했다.
“이 오물 속에 인간들이 버린 꿈, 명예, 도덕, 윤리, 지성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거든요.”
그가 탄성조로 중얼거렸다.
“아하, 욕망의 찌꺼기 같은 것을 말하는군요.”
남자가 하수구를 쓱쓱 뒤졌다.
“그 비슷한 것입니다.”
p458
남자는 흰 천으로 감싼 항아리 2개를 지게에 얹어 놓고 있었다. 도심 속에서 지게를 지는 것도 이상했지만, 흰 천으로 감싼 항아리는 더욱 수상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게 위에 얹어 놓은 항아리는 무엇이오?”
남자가 술을 한 잔 마시고 대답했다.
“슬픔입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항아리가 슬픔이라니?”
남자가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제 슬픔의 모든 것입니다.”
그가 항아리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면 누구의 유골이라도 된다는 말이오?”
남자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제 어머니와 아버지 유골입니다.”
p462
인간은 과거에 사나운 짐승이나 물고기처럼 살았고, 지금도 큰 것이 작은 것을 먹어 치우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악마나 사탄처럼 살았고, 현재도 악이 선을 지배하고 있다.
p469
악마는 절대로 인간을 유혹하지 않는다. 악마를 유혹하는 것은 오히려 타락한 인간들이다.
p473
우리는 흔히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 뜻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
우리는 흔히 악마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저주한다.
p474
말이 오해될 때가 아니라, 침묵이 이해되지 못할 때 인간관계의 비극은 시작된다.
p487
해나 달이 밝게 비추고자 해도 뜬 구름이 가리고, 강물이 맑아지고자 해도 흙이나 모래가 더럽히듯, 사람이 진실하고자 해도 욕심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p487
훌륭한 삶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즉 지식을 쌓는 일, 마음을 닦는 일, 타인을 돕는 일이다. 훌륭한 죽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즉 가족을 위해 죽는 일, 남을 위해 죽은 일, 세상을 위해 죽는 일이다.
p491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려거든, 그 여자의 연약한 점, 불완전한 점을 다 알고 난 뒤에 사랑해야 한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려거든, 그 남자의 강인함 점, 불건전한 점을 다 알고 난 뒤에 사랑해야 한다.
p493
사랑은 완전하지도 불완전하지도 않다. 완전과 불완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때뿐이다.
p494
인생에 있어서 청년기는 대실수이다. 장년기는 투쟁이다. 노년기는 후회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p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