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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전설!
천경자 화가 탄생 100주년 기념특별전
월산 이 상 완
https://m.blog.naver.com/swlee8585/223716965805
2024년 12월 31일(수요일), 오늘은 갑진년甲辰年(2024)의 마지막 날이다. 간밤을 나의 고향인 전남 고흥읍의 Sun Motel 502호실에서 보내고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났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살이의 연속이어서 내일의 일을 정확하게 예단하지 못하고 그저 우연 속에서 덤벙덩범 살아갈 때가 많다. 어제 하루도 그야말로 엄벙덤벙 보낸 하루였다.
내가 갑자기 고향땅인 고흥에 오게 된 것은 한 때 우리나라 미술계의 슈퍼스타였던 천경자 화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그간 45일간의 전시를 마치고 오늘이 폐막을 하는 날이어서 막을 내리기 전에 전시회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천경자 화가는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4년 11월 11일, 전남 고흥읍 서문리 10번지에서 태어났다.
고흥군은 천경자 화가의 생일인 11월 11일부터 올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까지 〈찬란한 전설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이번 행사를 주관했다.
이 행사를 위하여 전시회에서는 천경자 화백의 차녀인 ‘수미타 김’ 교수가 사실상 전시작품 선정과 기획 등 예술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이름으로는 김정희인데, 그녀는 현재 몽고메리 칼리지대 미술교수다.
그간 천경자 화가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있지 않았다.
천경자 화가는 국내에서 미술계의 슈퍼스타였지만 글 솜씨도 좋아서 20여권의 수필집도 저술하였다. 그 중에는 Best seller가 된 책들도 여러 권이 있다. 따라서 그녀의 수필집마다 ‘작가 약력’이 인쇄되어 있는데, 출생지를 ‘고흥’이라고만 밝혀놔서, 독자들이 고흥을 ‘작은 섬’ 정도로 잘못 인식할 우려도 있었고, 나를 포함한 동향인들조차 드넓은 고흥의 어느 동네인지 출생지를 몰라 무척 궁금해 했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고향 사람들이나 향토사학자들도 외갓집이 있는 ‘점암면 성기리’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천경자의 돌잔치가 바로 외갓집에서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그 마을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고, 점암면 성기리에 사는 몇 사람이 주장을 해서,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일부 지역 방송 또는 신문기자들까지도 천경자 화가의 출생지가 정말 ‘점암면 성기리’라고 잘못 기사화했던 것이다.
나는 지난 날 외교관 생활 20여년 이후 명퇴하여 20년간을 동서울 광진구에서 〈영어전문 바로 학원〉을 운영했었다.
때마침 영어학원을 시작할 때 ‘한국의 세계화’가 당시 김영삼 문민정부의 주된 정책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부터 ‘영어’가 정식 교과과정으로 결정되어 전국의 초중고생들에게 영어학습열이 제고되는 시기였다. 학부모들은 이렇게 영어학습 분위기가 조성되자 영어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어서 자녀들의 조기 영어교육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KBS-TV에서 전국 유치원과 초중생을 대상으로 영어스피치 대회를 주최하였는데, 영어스피치 대회를 전국에 방영을 하여 영어학습 열풍이 조성되는데 크게 기여했었다.
나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바로 영어학원’ 내에 영어 ‘쇼앤텔’반을 개설하여 유치원생과 초중생들에게 영어스피치를 가르쳐 왔었다.
영어스피치 학습을 통해서 미국식 영어 발음을 습득시키고, 아울러 영어스피치의 영어 원고를 외우게 하여, 긴 영어문장을 통째로 외우고, 암기하는 능력을 학습시켰고, 이를 영어회화에 크게 도움을 주도록 학습을 시켜왔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때마침 KBS-TV에서 영어스피치 대회를 주최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간 스피치 연습을 해왔던 유치원생과 초중생들 10명을 대회에 출전시켰는데 특히 유치부와 초등부에서 대거 7명이 입상하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게다가 KBS-TV가 영어웅변대회 장면을 전국에 방영을 하게 되자 ‘바로영어학원’이 위치한 동서울 광진구에서는 자기네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유치원생과 초등생이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원고를 보지 않고 자연스러운 제스추어까지 보이면서 스피치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다니는 학원이 ‘바로영어전문학원’인 것을 널리 알려졌다.
이때부터 광진구 주민들뿐만이 아니라 강남구, 강동구, 서초구 주민들에게도 입소문이 번져 나가서, 내가 운영하던 학원은 제법 성공적인 운영을 하게 되었다.
학원을 처음 개설하였을 때, 내 나이가 48세였는데, 20년간 학원 운영에 정진하다보니 벌써 68세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을 때 ‘바로영어학원’을 접을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두 딸도 서울대 대학원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에 유학을 보내게 되었고, 그간 여행도 자주 못할 정도로 학원 운영에 몰두하였기에 상당한 재력이 형성될 수 있었는데, 이 정도 재력이면 두 딸의 미국 유학경비와 우리 내외의 노후 대책자금으로는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잘 나가던 학원운영을 접고, 더 이상 돈 욕심을 부리지 않고, 미련 없이 잘 나가던 학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재력 중에서 일부 여력을 내가 태어난 고향의 향토사 탐구에 바치며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마침표를 찍기로 작정했다.
특히 향토사에서 내가 태어난 고향을 더욱 빛나게 했던 인물들, 그러니까 고향의 큰바위 얼굴들이 되어 고향의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또한 큰 꿈을 품도록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인물탐구에 적극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천경자 화가였다.
특히 천경자 화가의 출생지인 생가 찾기, 천경자 화가의 어린 시절 의 발자취를 탐구하는데도 용맹정진을 하였다.
그 결과의 하나로 천경자 화가의 출생지와 생가는 ‘점암면 성기리’가 아니고 〈고흥읍 서문리 10번지〉라는 것을 밝혀낸 일이다.
천경자 화가가 서문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증언해주신 분을 여러 사람 찾아내어 캠코더로 녹화 녹음도 했다.
그들 중에는 천경자의 외가 친척들인 박송희 여사, 김기현 선배, 그리고 천경자 외할아버지가 한 때 자기네 집의 사랑채에서 살았고, 1941년 천경자 화백이 일본 여자미술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셋방살이를 하던 외할아버지 집에 거처하면서 〈조선미전〉에 외할아버지를 그려서 출품 작품을 만들 때 자기 아버지(이영대)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상문 애국지사도 만났다.
그런데 이상문 애국지사는 바로 나에게는 사촌형님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부친(이영순)과 그의 부친 (이영대)은 친형제 간이었다.
나에게 사촌형님이 되시는 이상문 애국지사는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가 동남아 전쟁터에 파견되었고, 연합군이 붙잡혀 있는 인도네시아 사마랑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경비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한국인 병사들과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7년간의 감방생활을 하던 중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2년 뒤늦게 귀국을 했던 애국지사였다.
이런 이상문 사촌형님은 고흥읍 서문리 142번지에서 1920년에 출생했었다. 그리고 고흥동초교를 1932년 3월에 20회로 졸업을 했다.
한편 천경자 화가는 1924년에 서문리 10번지에서 출생을 했고, 고흥동 초교를 1937년 3월에 25회로 졸업을 했다. 그러니까 이상문 형님이 고흥동초교 6학년일 때 천경자 화가는 고흥동초교 1학년 어린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이상문 형님은 천경자 아버지인 천성욱이나 외할아버지인 박헌유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경자 화가의 이름도 초등학교 1학년일 때는 ‘천옥자’라고 불렀고, 외조부가 자기네 사랑채에서 살 때 외손녀를 보고 “짜야”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그리고 천경자 부친이 노름과 술을 좋아해서 그 집이 망하게 되었고, 그 망한 살림 속에서도 외조부가 도움을 주어 천경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화가를 ‘환쟁이’라고 비하하여 불렀는데, 여자 아이를 ‘환쟁이’로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까지 보낸 것을 미친 짓한다고 맹비난을 했다고 한다.
특히 천경자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 이상문 형님의 사랑채에서 살던 외조부의 생활은 비참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위인 천성욱이 장인의 마지막 재산인 전답을 다 팔아 가지고 양말공장을 차렸는데 그 공장이 쫄딱 망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 형편 속에서도 여자 아이인 천경자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었으니, 천경자가 사실상 외갓집까지 망하게 한 나쁜X이라고 욕까지 하는 마을사람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천경자의 긴 얼굴을 트집 잡아 “말 대가리 같이 못 생긴X이 자기 집과 외가를 망쳐놓았다”고 지나친 비난을 했다고 한다.
천경자의 친할아버지는 상여를 만들거나 수리도 하고, 절이나 옛 작청과 아문의 벽이나 천정에 단청 칠하는 일을 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를 당골(무당)들처럼 천한 직업으로 보았고, 따라서 마을 잔치나 행사에 그들이 참여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시골사람들은 결혼이나 환갑잔치 등 경사 날에 상여를 만지거나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오면 부정을 타거나 재수가 없다는 미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흥지역에서도 ‘천방지축마골피’는 쌍놈들이나 천민들의 성씨라고 전래되어서 ‘천씨’를 비하하여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7대 천한 성씨로 천방지축마골피(千方地丑馬骨皮)가 있다는 것을 이 월산도 어린 시절에 한문 서당을 다닐 때 훈장선생으로 부터 이미 이런 우수개 소리를 많이 들었었다.
천千씨는 무당출신 가문이고
방方씨는 목수 출신 가문이고
지地씨는 지관 출신 가문이고
축丑씨는 소백정 출신 가문이고
마馬씨는 말백정 출신 가문이고
골骨씨는 말백정 출신 가문이고
피皮씨는 가죽 백정 가문 출신이니라!
고로 ‘천방지축마골피’ 성씨는 모두 천민의 비천한 성씨니라!
이래저래 천경자는 이때부터 고향에 대하여 애증을 동시에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천경자 화가를 탐구대상으로 삼게 된 계기는 ‘이영대 초상화’를 1941년에 그려주었는데 이것이 천경자 화가의 최초 작품이었고 초상화의 인물 ‘이영대’는 나에게 숙부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였다. 아울러 천경자는 왜 고향인 고흥에 ‘애증’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이런 것을 탐구하다보니 천경자 화가의 애매모호한 출생지와 생가가 있는 곳을 아울러 추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천경자 화가가 쓴 책들 중에서 15권을 소장하고 있다. 고서점 등을 통하여 어렵게 구입한 이 책들을 모두 통독을 했다. 그런데 이 책 중에는 친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나 언급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고흥읍에서 유기상을 했다는 문장 한 줄이 친할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천경자 화가는 해방이 되던 1945년에 결혼을 하고 고흥을 떠나 광주로 이사를 간 후에 고향을 방문한 것은 꼭 한번 밖에 없었다. 그 때는 고향을 떠난 지 20년만인 1965년이었다. 그 후로는 2015년 뉴욕에서 타계할 때까지 50여 년간 고흥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이제 고흥에서 〈천경자 화가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여러 매스컴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면서 비로소 출생지가 ‘고흥읍 서문리’ 또는 ‘서문리 10번지’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흥군에서도 천정자 화가의 생가와 출생지는 ‘고흥읍 서문리 10번지’임을 공인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를 계기로 삼아 천경자 생가 일대를 매입하여 ‘천경자 기념공원’으로 설립하고 ‘천경자 생가’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고흥읍 중심가에서 천경자 화가의 생가가 있는 곳까지 이르는 길을 ‘천경자 예술의 길’로 명명하기로 했다. 듣던 중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일찍이 10년 전부터 천경자 화가가 출생했던 생가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문리 동정지 몰랑을 ‘천경자 기념 공원’으로 만들어 보자는 의견을 내 블로그와 고향 친지들에게 펼쳐 왔었다.
서문리 동정지 몰랑에서는 천경자가 화가가 어린 시절에 봄이면 나물을 캐고 겨울에는 연날리기를 하던 놀이터였다는 것을 천경자의 저서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어릴 때 친구가 그 몰랑에서 놀다가 꽃뱀이 너무 아름다워 마치 댕기나 예쁜 띠로 착각하고 만지다가 그만 뱀에 물려서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도 나온다.
천경자 화가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꽃뱀 사건 때문인지, 천경자를 유명 화가로 만들어 준 〈생태〉라는 출세 작품은 뱀 37마리가 얽혀 있는 파격적 그림이었다.
더욱이 어떤 그림에는 예쁜 여인이 꽃과 뱀을 머리띠로 칭칭 감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그 친구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제는 예쁜 여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그리움 때문인지 어린 시절에 사별했던 그 친구를 추모하는 듯 그 그림에도 역시 뱀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뱀을 소재로 한 작품을 남긴 천경자 화가는 ‘그 작품 속에 일찍이 이별을 한 전 남편이나 애인에 대한 애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미술평론가들은 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친할아버지의 상여에서 보았던 단청색과 상여에 그려진 연꽃, 여인 보살그림 등이나 어릴 때 뱀에 물려서 죽었던 친구에 대한 애환이 뱀을 소재로 삼은 그림에 스며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여생을 천경자 화가의 생가 복원과 천경자 기념공원을 조성하는데 미력이나마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 또한 천경자 화가의 생가가 복원된다면, 특히 대문 앞에 ‘오동나무’를 한 그루 기념식수로 심어 주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65년 여름, 고흥읍 서문리 10번지에 있는 초라한 대문간 앞에는 성목이 다 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오동나무 줄기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묘령의 두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 집 주인이었던 장판옥씨는 화물트럭 운송작업을 마치고 귀가 중이었는데 자기 집 대문간의 오동나무를 붙들고 우는 두 여인을 보고,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여보시오! 당신들은 누구신데 남의 집 문 앞에서 그렇게 훌쩍거리고 있소? 나는 이집 주인이요”
그러자 한 여인이 눈물을 몰래 훔치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아! 실례했습니다. 사실 이 집은 제가 어릴 때 살던 집이었어요. 제가 태어날 때 아버지께서 출생 기념으로 이 오동나무를 심었답니다. 그러니까 40년 전의 일이지요. 저는 천경자라는 화가에요. 제가 고향을 떠날 때가 해방 되던 1945년이었지요. 그러니까 20년 만에 처음 온 것이지요. 그것도 첫 딸과 함께요”
집 주인인 장판옥씨는 알았다는 듯이 또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고흥읍에는 천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이 집을 살 때 전 주인이 천씨였지요. 천머시기라 했는데 이름은 까먹어부렀소. 그란디 그 분께 고흥에서는 희귀한 성인데 어디서 살다가 고흥읍으로 와 살게 되었느냐고 물응께 자기 아버지 때는 순천 근처에 있는 낙안에서 살다가 그 다음에는 벌교에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고흥읍 호형리에서 살다가 이 집이 있는 읍내로 와서 살게 되었다고 하드랑께요”
이렇게 천경자 화가와 나눈 대화는 집 주인인 장판옥씨가 그의 아들인 장세종(고흥동초교 45회)과 장병선(고흥동초교 47회)에게 말해주어 나의(고흥동초교 46회) 귀에까지 전달되어 왔던 것이다.
천경자 화가의 수필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조상이 어디서 살다가 어떻게 고흥에 굴러들어 와 살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단지 친할아버지가 유기상을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친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타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 추정으로는 벌교에서 유기점(놋그릇, 수저, 젓가락 등을 파는 곳)을 운영했는데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면서 대포나 총알을 만드는데 광물인 동이 필요했기에 동 제품을 모조리 강제 수거했고, 그 때문에 유기그릇 장사를 할 수 없어서 가게를 닫고 고흥읍으로 이사를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광산에서 동 채굴이 쉽지 않아 조선인들 부엌이나 유기상에 있는 놋쇠 제품을 모조리 강제로 수거해 갔었다고 하니 천경자 친조부는 가난을 싸들고 고흥읍으로 이사를 온 것이 된다.
천경자 친할아버지의 벌교 유기점이 망하고 고흥읍으로 와서 조상들이 해왔던 단청 전문가(?)가 되어 아들인 천성욱을 1911년 개교한 고흥동초교에 보내어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시키고 광주에 있는 농림학교(현 광주농고)까지 유학을 시켜놓은 다음 당시 유행병인 호열자 병에 걸려 고흥읍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고흥읍에는 이미 ‘윤홍구 유기점’이 대대로 터를 잡고 있었기에, 유기전을 개설할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윤홍구의 딸 윤수영이 고흥동초교(46회) 졸업생이었기에 고흥읍 유기상가를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래서 천한 직업이지만 상여 만들기, 수리, 단청 색칠하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만은 신분 상승을 위해서 농림학교에까지 보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농림학교를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나 군이나 면사무소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천경자 부친 천성욱은 광주농림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고흥군청의 말단 직원이지만 면사무소에서 한동안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천경자의 외조부인 박헌유도 점암면 성기리에 있는 전답을 팔아서 고흥읍으로 이사를 해 왔었다. 그리고 서문리 향로당 앞에 작은 정미소를 차리고 살았는데, 때마침 맏딸인 박운아가 시집 갈 나이여서 같은 서문리에 살면서 군청직원인 천성욱을 눈여겨보고, 가문은 자기네 보다 가난하지만 청년이 장래성이 있게 보여 데릴사위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외조부는 방앗간(정미소)이 한 때 잘 운영되어 ‘중추원 의관’이란 벼슬도 돈을 주고 사게 되었고, 자기를 ‘박의관’ 또는 ‘박헌유 의관’으로 스스로 소개했으며, 또한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천경자의 외조부인 박헌유(1867년생) 가문도 대대로 향리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박헌유의 부친인 박용억(1844년생)은 작청에서 공형(추방)이라는 향리였다. 향리란 중인 계급으로 양반처럼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계층이었다. 그때 고흥 서문리에 있는 향로당은 향리 출신의 후손들이 향교를 출입하며 양반 행세를 하는 유림들에 맞서서 설립한 자기네들이 군수 다음으로 지방 실세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카르텔 모임 장소였다.
이 향로당에는 필자의 부친(이영순), 중간 숙부(이영대), 막내 숙부(이영화)가 출입을 했었다. 물론 조부(이종호)님도 조선말기 흥양현에서 향리 중에서 수장격인 호장을 역임했기 때문에 1925년 타계할 때까지 원로당원으로 향로당을 출입했었다.
그런데 재력이 약간 생긴 천경자의 조부인 박헌유도 나의 부친과 숙부의 권유로 향로당에 입당하여 친하게 지냈다. 특히 사교성이 능했던 숙부(이영대)는 박헌유와 더욱 절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박헌유가 재력이 탕진되었을 때 자기네 사랑채에서 살게 해주었다.
이런 게 인연이 되어 1941년 천경자가 동경여자미술대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방학 중에 잠시 귀향하여, 숙부님 집 사랑채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외갓집에도 자주 들리게 되었다.
천경자 미술학생은 당시 중풍 환자 신세인 외조부님을 그려서 조선미전에 출품도 하였다. 그런데 그 작품을 그리기 전에 나의 숙부님(이영대)의 초상화를 무료로 먼저 그려주었다.
원래 천경자는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동양화와 인물화인 초상화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인 지도 교사가 초상화 전문가가 되려면 대상을 일본인으로 삼지 말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여 조선인 초상화가가 되라는 권유를 받곤 했다는데, 그리하여 숙부님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을 때 흔쾌히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보를 나에게 알려준 분은 인척으로 사촌이 되는 김무현 이종형님이었다. 그리하여 천경자가 그린 초상화가 우리 가문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타계 전인 지금부터 5년 전에 나에게 알려주면서 찾아보라고 권했다.
수소문 한 결과 이 초상화는 화순에 사는 이영대 숙부의 손녀 이순희가 소장하고 있었고 그 초상화에는 한자로 ‘鏡子’라는 낙관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고 했다.
아울러 추사 김정희의 원본 8폭 병풍도 우리 가문의 누군가가 역시 소장 중이라고 했다.
김무현의 부친인 김상률은 추사체의 4대 전수자로 알려진 소완 김홍현의 부친인 김상익의 친동생이었다. 그리고 김무현의 모친(이경동)은 필자의 부친(이영순)의 친여동생이어서 김무현의 부친은 나에게 고모부였다.
김상율은 1925년에 고흥면 서문리 동정지 몰랑부락에 유치원이 설립되었을 때 유치원 원장을 역임했는데, 그 시절에 천경자는 1930년 8세였을 때 어린 시절 천옥자라는 이름으로 3년제였던 유치원을 1년간 다니고 졸업을 했다.
이때 신형식 어린이도 유치원에 입학하여 1년간 함께 다녔고 2년 후에 고흥동초교에 입학하였다.
천경자는 고흥동초교를 25회로 졸업을 했고 신형식은 27회로 졸업하여 고흥동초교 2년 선배가 된다.
신형식이 국회의원이 되고 공화당 사무총장을 거치고 건설부 장관 재임 중이던 1978년, 당시 홍익대 미술교수였던 천경자 화가는 장관 취임을 축하해주려고 장관 사무실에 방문까지 했고, 이를 당시 장관 보좌관이었던 김방진 선배가 최근에 증언해 주었다.
신장관의 모친(이중경)은 내 숙부(이영대)의 차녀로 나에게는 사촌누님이 되고 신장관은 조카가 된다. 신장관은 나보다 20세 연상이지만 나에게 언제나 ‘외당숙’이라 호칭하며 존댓말을 했다.
그 당시 필자는 1978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원에서 아랍어와 중동정치사를 공부하던 유학생이었다.
그해 여름 방학에 잠시 귀국하여 7월 29일, 지금 집사람 AK와 결혼을 하였다.
신장관에게 결혼을 알리는 초대장을 보냈더니 업무로 바빠서 못 온다고 비서관을 보내서 축하인사를 보내오고 결혼축하 선물로 A4 크기의 액자 안에 연필로 스케치하여 드로잉을 한 그림을 보내왔다. 그림 밑에는 ‘경자’라고 낙관 대신에 서명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이 드로잉 그림이 장관급 인사가 준 결혼축하 선물 치고는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이 그림을 형님(이상관)에게 맡기고, 카이로 귀환 전에 신혼여행을 홍콩과 서유럽 6개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2년간 이집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형님께 맡겨 둔 그림을 달라고 했더니 방배동 새집으로 이사를 가는 통에 분실되었다고 했다. 처음에 초라한 드로잉이라고 무관심했던 내 자신이 지금도 얄밉고 속이 좁았다는 후회가 이제는 내 생명의 밑바탕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천경자의 친여동생 천수자도 유치원 김상률 원장의 차남인 김무현 어린이와 함께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천경자의 막내 남동생인 천규식도 역시 이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천옥희와 김무현 어린이는 고흥유치원을 함께 다녔고 1941년 3월에 고흥동초교 25회의 동기 졸업생이 되었다.
천경자가 고흥동초교 6학년일 때 여동생 옥희와 친구인 김무현은 같은 학교 1학년이었다.
고흥등초교가 개교 1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2011년에 발간한 《고흥동초교 100년사》에는 25회 졸업생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단에 천경자는 ‘천옥자’로 여동생은 ‘천전수자’로 김무현은 ‘금강무현’으로 등재되어 있다.
고흥동초교는 1941년 제29회 졸업생부터 1945년 34회 졸업생까지는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졸업생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그래서 천경자는 25회 졸업생으로 1937년 3월에 졸업을 했기 때문에 한국식 이름인 ‘천옥자’ 그대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동생인 ‘천옥희’는 창씨개명을 일본 총독부로부터 강요를 받던 때인 1941년 3월에 졸업을 했기에 ‘천전수자’로 김무현은 ‘금강무현’으로 동창생 명단에 등재되어 있었다.
천경자도 1940년 경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부친 천성욱께서 창씨개명을 하려고 했는데, ‘옥자’ 보다 ‘경자’라는 이름이 ‘거울을 보는 여자’ 라는 뜻도 있고, 일본어로 발음을 하면 ‘게이꼬’ 라고 들려서 마치 비단 폭을 찢을 때 나오는 “짝~!” 하는 경쾌한 소리로 들려 자기 부친인 천성욱에게 이왕에 창씨개명을 하려면 ‘옥자’ 보다 ‘경자’라고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 유학시절이나 해방 후 이름과 낙관에는 ‘경자’로 쓰여 있다.
인척 사촌 형인 김무현은 천경자의 친동생인 천옥희와 동갑이고, 같은 동네인 서문리에 살았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같은 곳을 다녀서 천경자 집안 사정에 대해서 훤하게 상세히 잘 알고 있었다.
천경자 동생인 천옥희와 함께 찍었던 유치원 졸업기념 사진도 필자에게 보여 주었는데, 지금도 그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김무현 형님은 천경자의 친할아버지가 단청 전문가였다는 사실도 이렇게 귀뜸 해주었다. ‘단청 전문가’란 쉽게 말해서 꽃상여의 외벽이나 기둥에 빨간색이나 파랑색을 칠하거나 상여 벽면이나 지붕에 연꽃이나 보살 등의 그림을 그리고 단청丹靑 색을 칠하는 일종의 환쟁이 사람들이라고 했다. 단청丹靑이라는 말은 단丹은 빨강, 청靑은 파란색을 말한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천경자가 친할아버지의 색감을 유전받아서 독특한 색깔로 이승과 저승을 상징하는 환상적인 그림이나 꽃들을 잘 그리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촌평도 해주었다.
1911년에 고흥읍성의 서문 밖에 있는 행정리 교촌에 있는 향교의 대강당을 교실로 빌려서 임시 교사로 삼고, 고흥군에서는 맨 처음으로 초등학교가 개교되었다.
이때 학제가 2년제인 초등학교에서 천경자의 부친 천성욱은 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하였다. 1회 졸업생은 총 18명이었는데 대부분 고흥읍성 안에서 살고 있는 향리들의 후손들이었다. 그것도 읍내 중심지인 옥하리와 서문리에서 태어나고 생가가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읍내 읍성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 조선시대 흥양군의 향리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이었다.
특히 고령신씨 옥거리 문중, 경주이씨 서문리 서문 문중, 김해김씨 사군파 문중을 3대 실세가문이라 자처하며 혈연 카르텔을 형성하고 서로의 자녀들이 혼맥을 이루었다. 혼맥도 겹겹으로 2중 3중으로 맺어진 겹사돈 관계였다.
실세 가문 행세를 했던 3대 가문은 특히 지난 200년 전인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 때, 흥양군 작청에서 향리의 육조 간부와 말단 향리까지 거의 80%를 3대 가문의 자손들이 차지하는 전성기였다.
지금부터 10여년 전에 향로당 기와집을 헐고 2층으로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하면서, 향로당 마루 밑 깊은 곳에서 지난 400백년간 간부급인 색리 이상의 향리명단을 써놓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고령신씨 옥거리 가문의 400년간의 향리들 이름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 경주이씨 서문 가문도 300년 전부터 향리를 했던 조상들의 이름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었다.
최근 이 고문서를 분석하고 있던 고흥군 포두면 출신이며 향토사학가인 송호철 박사로부터, 이 향리들 중에서 요직을 역임한 향리들의 직계 후손들이 현재의 누구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필자(월산 할배)에게 도움을 요청을 해왔었다.
그때 향리 명단의 복사본을 받아 가지고 분석을 해보았다. 나는 대부분의 향리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살았던,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을 추적해 보았다. 특히 신, 이, 김 3대 가문의 족보 사본을 구입하여 족보에 실린 단자를 통해서 직계나 방계 가족들 또는 혼인으로 인맥을 맺어 혼척이 되는 가문들 간의 서로 얽혀있는 관계를 분석해보고, 현재 고흥이나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을 직간접으로 만나서 전화와 면담을 하여 나름대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3대 가문 간에는 혼척관계가 겹겹이어서 마치 거미줄 같았다. 그래서 지금 내 나이가 80이니까 지금부터 140여년 전인 1880년에 고흥읍에서 태어난 어른들도, 특히 향로당을 출입했던 향리들이나 그들의 후손들도 대부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고, 그들에 대해서 들은 바가 많아서 인맥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10년대에 고흥동초교를 졸업했던 분들과 서문리와 옥하리에 살면서 서문리의 향로당을 출입했던 어른들의 이름을 현재에도 대부분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억력을 바탕으로, 천경자 부친인 천성욱과 함께 고흥동초교를 졸업했던 18명의 1회 졸업생 중에는 내가 어렸을 때 보았거나 그들에 대해 자주 들어보았던 어른들이 많았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고흥동초교 1회 졸업생 명단에는 천경자의 부친인 천성욱을 물론이고 동기생들인 김상형, 배장령, 신승휴, 신상경, 이판선, 고광순, 이상태 9명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 김상형은 천경자 화가의 수필집에서 자주 나오는 영광집 부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나의 세째 작은 아버지(이영화)의 둘째딸인 이소경과 결혼하여, 나에게는 사촌 누님의 남편이어서 매형관계였다.
◌ 배장령은 나의 이복누님(이효경)의 남편이어서 나에게 역시 매형이 되는 분이었다.
◌ 신승휴는 양로당을 출입하면서 나의 부친과 숙부님들의 친한 친지였다. 그는 천경자 부친인 천성욱과 절친이어서 광주농림학교도 같이 다니고 졸업도 같이 했다.
그의 첫째 아들인 신균우는 1943년 일제강점기에 광주서중을 다닐 때 제2차 광주학생운동 사건의 주동자로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다가 체포되어 감방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출옥하여 서울대학교를 다니다가 국대안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였고, 그로 인해 제적을 당하고 동국대로 편입하였는데 6.25 전쟁 때 실종되었었다.
그러나 2020년 광주서중 일고 출신인 이낙연이 총리로 있을 때 신균우는 항일 독립운동의 공적이 보훈처로부터 공인이 되어 애국지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신승휴의 막내아들인 신창우는 현재 여수에서 제빵 제과사업을 하면서 항토사를 연구하는 사림들을 측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고흥의 최후 의병대장이었던 신성구와 《봉헌만록》 유고문집을 남긴 신창모는 바로 신승휴의 숙부와 조부님이다.
◌ 이판선씨는 서문리에서 살았는데 그의 아들들과 손자손녀들도 서문리에 살았었다. 손자들 중에서 이대형은 나에게 고흥동초교와 고흥중의 선배였고, 그의 남동생인 이태형은 나에게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후배였다. 그리고 이판선씨의 손녀인 이정숙은 고흥중 15회 졸업생인 나와 동기동창생이었다.
◌ 고광순은 천경자 외조부가 서문리 향로당 앞에서 정미소를 운영할 때 직원이었는데 그 정미소를 매입하여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 정미소를 운영했었다. 그의 아들 고재일은 고흥동초교 선배였다.
◌ 신상경은 중절모를 쓰고 하얀 수염이 난 멋진 노신사처럼 보였는데 늘 하얀 두루마기 옷을 입고, 서문리에 있는 향로당을 출입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서 그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 이상태는 이름을 많이 들었지만 얼굴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는 1906년경 장흥경찰서에서 고흥읍에 파견소(파출소)를 설립했을 때 이 파견소를 야간에 불을 지르고 멀리 도망을 간 항일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였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 분의 얼굴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이상하는 고흥동초교 2회 졸업생이며 나의 이복형님인데 천성욱과 1년간을 동정지 몰랑길을 통학로로 삼아 1년간을 같이 다녔다. 그래서 천성욱과 내 형님은 같은 서문리에 살았기 때문에 친한 사이였다.
천성욱 뿐만 아니라 그의 2남 1녀도 모두 고흥동초교를 졸업한 동창생들이다. 천성욱 (1회), 큰딸 천옥자 (25회), 작은딸 천옥희 (29회), 외아들 천규식 (33회)이 그렇다. 이렇게 천성욱 아버지와 3자녀가 모두 고흥읍에 있는 고흥동초교의 동창생들이며, 동문수학을 한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이 월산 할배가 천경자 화가의 어린 시절에 고흥읍 서문리에 살면서 고흥동초교를 다닐 때까지의 자질구레한 것을 쓰고 있는 까닭은 앞으로 나의 손녀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이 문학가나 미술가가 되어 혹시 천경자 화가에 대한 대하소설을 쓰거나 다큐영화를 제작하거나 또는 화가가 되었을 때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여기에 기록해 둔다.
물론 천경자 화가는 어린 시절 고흥에서 살았던 옛 추억들을 그녀가 쓴 여러 권의 수필집에 써두었다. 그러나 단편적이거나 일부 인명이나 지명 등에 오류도 조금 들어있다.
그러나 나의 4손녀들은 천경자의 저서인 이런 책들은 꼭 한 번쯤은 읽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아린이와 혜리는 이 한글 수필 책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천경자 화가가 세계적인 유명 화가로 일컬어지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천경자 화가의 수필집〉
① 《유성이 가는 곳》
② 《언덕위의 양옥집》
③ 《한》
④ 《내 슬픈 전설의 49 페이지》
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⑥ 《탱고가 흐르는 황혼》
⑦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⑧ 《꽃과 색채와 바람》
⑨ 《나의 소녀시절》
⑩ 《남태평양에 가다》
이 월산 할배의 이복과 동복의 형제자매들은 큰누님(이효경)을 제외하고 모두 고흥동초교에서 동문수학을 한 동창생들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천경자 화가의 형제자매들과 6년을 동문수학을 한 형제자매들도 있다.
이 월산 할배 형제자매들의 고흥동초교 선후배 관계를 정리해 본다.
① 이상하 - 2회
② 이예정 - 13회
③ 이혜경 - 29회
④ 이상성 - 35회
⑤ 이화경 - 39회
⑥ 이상관 - 41회
⑦ 이상완 - 46회
⑧ 이신경 - 48회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경주이씨 서문 문중에서 친인척들도 대부분 고흥동초교를 졸업했다. 그들 중에는 천경자 화가의 형제자매들과 고흥동초교를 6년간 함께 다녔던 분들도 꽤 많다.
따라서 나는 고흥동초교를 졸업한 천경자(25회), 천옥희(29회), 천규식(33회)의 각각 동기생들 중에서 이 월산할배가 알고 있는 친인척들과 또는 알고 있거나 이름을 들어 본 적 있는 분들을 좀 더 정리해 본다.
〈천경자 화가 고흥동초교 25회 동기생들〉
◌ 이동형 : 고흥 출신으로 최초 서울대(옛 경성제국대학교) 입학 및 졸업, 성균관 대학교 화학과 교수 역임, 그의 부친 이상곤은 적정한 소작료 지불을 위해 소작농민들을 위해 최초로 앞장서서 노동운동을 했던 분이다.
월산할배에게 이동형은 경주이씨 서문 문중에서 조카가 된다.
◌ 신정식 : 서울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안과 전문의였으나 한센병 환자의 대부였던 최흥종 목사의 영향을 받아 한센병 치료를 위해 헌신을 하며 소록도 한센병 병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박사로 호칭되고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월산에게는 사촌 누님(이중경)의 장남으로 조카가 된다.
신형식 건설부 장관과 홍보처장을 역임한 신중식은 바로 신정식 원장의 친동생들이다. 이 형제들의 부친인 신지우는 고흥군수, 해남 군수를 역임했다.
◌ 배명홍 : 부친은 배장령이며 모친은 경주이씨 고흥 서문 문중의 이효경이다. 이효경은 월산의 이복누님이다. 그의 친형인 배민홍은 고흥출신으로 1960년대 산업은행 부총재를 역임하여 고흥이 배출한 금융계 최고의 직위에 오른 금융인으로 기록을 남겼다.
◌ 유종식 : 서울대 졸업한 수재였다.
◌ 오형오 : 서문리 동정지 출신으로 당시 고흥면사무소에서 지방 공무원 역임했다.
오형오의 아들인 오세일은 이 월산의 고흥동초교 46회 동기동창이며 바로 서문리 동정지 마을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오형오는 고흥읍 철학자 걸인으로 유명한 오행길의 친형이기도 하다.
◌ 신원식 : 고흥읍 성촌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광부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다.
◌ 유봉근 : 고흥읍 서문리 출신으로 서문리와 행정리의 경계에 있는 옛 서문 터에서 대장간을 운영했다.
〈천옥자의 고흥동초교 동기생들〉
◌ 박송자 : 천경자 화가의 모친 박윤아와 박송자의 부친과는 사촌 관계이므로 천경자에게는 오촌 자매 관계다.
천정자 화가와 가장 가깝게 지낸 절친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 천경자의 미술과목은 항상 갑(1등) 등급이었고 박송희는 종합성적이 반 1등이었다.
천경자가 1940년 일본으로 유학을 갈 때 박송자는 16세였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조기 결혼을 하여 신랑과 함께 만주 개척지로 이민을 갔다. 그 때 서로 헤어지면서 박송자는 천경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경자야! 너는 좋겠다. 일본에 유학을 가고~ 유학 가서 미술공부 잘 해서 크게 성공하여라. 그리고 언젠가 귀국하면 다시 만나자”
이후 천경자와 박송자가 다시 상봉을 한 것은 1992년,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천경자의 아파트에서 박송자의 친동생인 박송희와 함께 3명이 같은 방에서 동숙을 하며 지난 회포를 풀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52년 만에야 상봉을 한 것인데, 이는 1992년에 비로서 한중수교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때 천경자는 친구이며 친척인 박송자가 만주에서의 고된 이민 생활과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었을 때 겪었던 고초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송자야! 너의 지난 과거 이야기는 너무나 슬퍼서 눈물이 나는구나! 내가 이 다음에 너의 슬픈 스토리를 써서 반드시 책으로 만들어, 그 책에 너의 그간 슬프고 괴로웠던 삶의 모습을 삽화로 그려 넣을 께!”
이 말은 수년 전에 박송자의 동생, 박송희를 월산이 대면 인터뷰를 했을 때 이렇게 직접 증언해 주었다.
그러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박송자는 10여년 후에 사망을 했다고 한다. 이 때 동생인 박송희가 전화로 언니의 사망 소식을 천경자 화가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천경자는 박송자 동생에게 이렇게 사과의 말을 했다고 한다.
“송희야!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그간 바빠서 언니에게 약속을 했던 책을 만들지 못해서. 내가 죽어서 너의 언니를 보면 볼 낯이 없겠다. 그저 미안했다고 용서를 빌꺼야! 흑흑흑~~~”
현재 서울 풍납동에 살고 있는 동생 박송희는 이 월산과 누님 이화경 (서울 반포 거주)이 자택인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이런 증언을 해주었다.
박송희의 남편인 김세구는 천경자 화가가 1965년 큰딸과 함께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 소록도 병원의 방사선 과장이었다.
그의 부친인 김상천은 월산의 큰어머님인 김종일과 남동생 관계여서 나에게는 외당숙으로 혼척관계가 된다.
부연하여 참고로 천경자의 동생들인 천옥희와 천규식의 고흥동초교 동기생들 중에서 이 월산이 알고 있는 분들도 이왕 내킨 김에 좀 더 요약 정리해 본다.
〈천옥회의 고흥동초교 29회 동기생들〉
천옥희의 고흥동초교의 졸업생 명단에는 당시 개명된 이름인 ‘천전수자’로 올라있다. 동기들도 역시 창씨개명인 일본식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천옥희와 동기인 나에게는 이종 사촌인 김무현 형님이 ‘천전수자’라는 동기생 명단을 보고 한국식 이름이 ‘천옥희’라고 알려주었다.
◌ 김무현 : ‘천전수자’는 ‘천옥희’의 창씨개명된 이름인데, 같은 서문리에 살았었고, 유치원, 초등학교도 함께 다녔다. 김무현 아버지 김상율은 당시 유치원 원장을 역임했다.
김무현 이종 형님은 당시 천옥희와 함께 유치원 졸업기념으로 찍은 사진을 한 장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 사진을 이 월산에게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천경자와 천옥희의 조부님이 단청 전문가여서 향교 건물이나 절 또는 군청의 아문의 벽이나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이 퇴색되면 다시 단청 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업으로 상여를 수리해주거나 새로 제작하여주고 상여에 단청으로 연꽃이나 보살 등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그림들을 단청으로 그렸다고 한다.
다시 언급하지만 아마도 천경자 화가의 독특한 색감으로 그려진 여러 작품을 보면, 할아버지의 단청 칠 색감의 감각을 받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이 월산에게 증언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경주이씨 서문 문중에는 천경자가 일본 여자미술대학교에 유학을 갔을 때 첫해 방학 때 귀국하여, 당시 이영대(월산의 숙부님)씨의 사랑채에서 외조부 박헌유 의관이 살았는데 그때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아마도 이 초상화는 천경자화의 첫 작품으로 생각되니 이 월산에게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했다. 수소문해 보니 그 초상화는 현재 전남 화순에서 살고 있는 이영대 숙부님의 손녀인 이승희가 소장하고 있었다.
이 초상화는 이 월산이 직접 확인하여 내 블로그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그 정보를 나에게 주었던 김무현 형님은 5년 전 타계했다.
◌ 신선우 : 동창생 명단에는 ‘실전계조’로 기록되어있다.
당대 고흥 유명인사 신오휴씨의 장남으로 고흥읍에서 탁주제조회사를 운영했다. 광주고보(현 광주일고)를 졸업한 수재였다. 장녀 신혜령은 고흥지역의 여권신장과 문예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 송기완 : 동창생 명단에는 창씨개명인 ‘산원빈사’로 기록되어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고흥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보성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고, 그 후에는 전남지역 여러 중고등학교에서 행정공무원인 서무과장을 역임했다.
이분은 이 월산의 매형 송규태의 친형이다. 송규태는 내 누님 이화경의 부군이다.
◌ 김용현 : 당대 호남지역에서 10대 만석꾼의 대지주이며 부자였던 속칭 ‘영광집 부자 김정태’의 손자였다. 그는 미국에 유학하여 방사선 치료 전문의사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최초의 X-ray 치료 전문가였다.
이 월산에게는 사촌 누님(이효경)의 장남으로 조카가 된다. 동시에 세째 숙부(이영화)의 둘째 사위이기도 하다.
천경자 화가에 함께 고흥지역에서 여학생으로 처음 광주여고(전남여고)에 진학했던 김봉자가 그의 누님이다. 김봉자와 천경자는 초등학교 시절 고흥지역에서 최초로 단발머리를 했다고 천경자 화가는 한 수필집에서 언급했다. 고흥지역에서 이런 ‘단발머리’를 ‘복개머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김용현의 조부인 김정태가 빙구뜽에 큰 정자를 지어서 생일이나 회갑날에는 지역 유지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때 천경자 소녀는 외조부 박헌을를 따라서 그곳에 갔다가 창가를 부르게 되었는데, 크게 칭찬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천경자가 쓴 수필집에 나온다.
그리고 천경자의 베스트셀러 수필집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서는 자기가 태어난 고흥읍 서문리 생가에서는 고흥의 명산 봉황산과 함께, 고흥의 최고 부자인 ‘영광집의 기와집 지붕이 남향으로 빤히 보인다’고 묘사를 했다.
바로 이 ‘영광집 부자’의 손자인 김용현의 아버지는 김상형인데 그는 바로 나의 사촌 누님(이소경)의 남편이어서 나에게는 매형이 된다. 그러니까 김용현은 나에게 조카된다.
나는 10여년 전에 서울 개포동 부근에서 살고 있는 김용현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초등학교 시절 천옥희에 대해 물었더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천규식의 고흥동초교 33회 졸업 동기생들〉
천규식은 동창생 명단에 창씨개명으로 ‘오전 승’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천전 승’의 오기였다. 2011년 고흥동초교 총동창회에서 《교흥동초교 100년사》를 편집할 때 학적부에 한자 ‘천千’을 편집자가 ‘오午’로 착오하여 잘 못 기록된 것이다.
천규식은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육사에 입학하여 11기로 졸업을 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이 동기생들이다.
◌ 김종근 : 고흥읍 호산리 출신으로 창씨개명 ‘금본위정’으로 기록되어있다.
최종학력은 육사 11기 중퇴다. 천규식도 육사 11기여서 서로 친밀하게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박송희 : 동창생 명단에는 창씨개명으로 ‘이동송희’로 기록되어 있다. 박송희는 천경자와 동기(25회)생 박송자의 친여동생이다.
박송자 언니처럼 박송희도 천경자의 모친 박윤아와 자기 부친과는 사촌관계이다. 따라서 박송희는 천경자를 “오촌 언니”라 불렀다고 나에게 증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일 때 일본 동경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있던 천경자 언니가 겨울방학에 귀국을 하였을 때, 겨울방학 숙제로 그림 그려오기가 있었는데, 그때 천경자 언니가 겨울 풍경을 대신 그려주었다고 한다. 방학 후에 숙제를 담임선생님께 보여 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며 혼을 내고 야단을 쳤다고 하는 에피소드도 나에게 전해주었다.
“우와~! 이것 너무 잘 그렸잖아! 누가 그려주었지? 나는 못 속여~. 누가 그려준거야? 날 속일려고 넌 나쁜애구나!”
그래서 천경자 언니가 그려주었다고 실토를 했다고 한다.
“근데 도대체 천경자가 누구야? 제법 잘 그렸는데. 그런데 너, 송자는 담임을 속이려하는 죄를 지었으니까 일주일간 변소청소 담당이야!”
그때만 해도 천경자는 고흥 출생지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 화가 지망생이었다.
이 말을 나에게 전해 주면서 박송희씨는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때 천경자 언니가 그려준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면, 비록 이 그림은 습작이지만, 고흥에서 최초로 그리진 그림이 되었을 터인데.
그때 변소 청소할 때 화가 나서 쫙 쫙 찢어부렀당께. 워이 마이씨 이잉”
천경자 화가가 그의 첫딸과 함께 1965년 고흥을 방문했을 때 세 곳을 되찾아 보았다고 한다.
첫째는 고흥읍 서문리에 있는 생가이고 둘째는 고흥읍 봉황산 중턱이고 셋째는 소록도였다고 한다.
바로 그 당시 박송희의 남편 김세구씨가 소록도병원 방사선 과장이어서 소독도 동면 쪽의 직원주택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소록도는 직원들 마을이 있는 곳에 직원들 친인척의 방문은 가능했지만, 소록도 서편 쪽의 한센인촌 마을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경자 부녀는 박송희 남편이 소록도 병원 과장이어서 안내를 받아 한센인 마을도 구경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외부와 차단된 한센인촌에서 8.15 해방 직후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의약품과 식량창고의 관리권을 가지고 한국인 직원들과 나환자촌 간부를 사이에 서로 열쇠를 갖겠다고 싸우다가 분쟁 일어났고 그동안 억눌려있던 한센인들이 단체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폭동으로 간주한 고흥경찰서의 일본 경찰이 고흥경찰서에 남겨둔 25개의 소총 중에서 15개의 소총을 고흥 자경대로부터 지원을 받아 폭동을 진압했다고 한다.
그때 소요를 벌이고 있는 수백 명의 환자들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하여 150여명의 한센인들이 학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대학살 사건이었는데도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그들의 시신을 화장한 유골만 〈만령탑〉이라고 하는 납골당에 안치시키게 하였다.
천경자 부녀는 이 끔직한 이야기를 듣고, 그 소록도에서 800여 미터 떨어진 지척지간의 거리에 있는 녹동항구의 한 여관에서 투숙하며 하룻밤을 지새우며 그린 그림이 바로 〈초혼〉이라는 그림이다.
불쌍하게 죽은 한센인들의 혼령을 불러내어 위로를 해주고, 그 혼령들이 극락이나 천국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인도주의적인 정감이 이 그림에 들어있다고 한다.
◌ 이계경 : 고흥동초교 동창생 명단에는 창씨개명 ‘송강계자’로 되어 있다. 성인 ‘이’씨는 ‘송강’으로, 이름 ‘계경’은 ‘계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계경은 이 월산 할배의 친누님이다. 박송자와는 초등학교 뿐만이 아니라 고흥중학교 3회 졸업생으로 동기여서 서로 친한 사이였다.
이번 천경자 화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고흥분청박물관 1층에 천경자 화가 포토전시회에는 천경자와 관련이 되어 있는 사진들이 다수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맨 첫 사진에는 천경자 화가가 다녔던 유치원 운동장에 설치된 철제 미끄럼틀이 있었다. 이 미끄럼틀 위에는 이계경, 박송자, 신정덕 등 고흥중의 여학생들이 찍힌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천규식은 육사 11기로 졸업을 하고 중령으로 예편을 했다. 육사생이 되면 모자와 군복 어깨에 별을 단 장군이 되는 것이 꿈인데, 왜 별을 달지 못하고 속칭 말똥 2개만 붙이고 제대를 했을까? 특히 육사 11기생들인 전두환이나 노태우는 별을 4개나 달았고,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까지 해 먹었는데. ‘별’이 못되고 ‘말똥’이 되어버린 것이 아쉽다. 그러나 다음 이 에피소드를 들으면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든다.
군인이었던 박정희 장군이 5.16 쿠데타에 성공하여 군복을 벗고,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 천경자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천경자 화가는 동생 천규식이 육사를 다녔고 첫 남편이 6.25전쟁 때 실종이 되었고 그 후 기자출신으로 군에 입대하여 정훈장교였던 김남중씨를 만나게 되어 친한 친구의 선을 넘어 얄미운 부부관계를 맺어서인지 군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임시 종군화가의 타이틀을 가지고 1960년대 중반에 월남에 파병된 맹호부대를 방문하여 위문을 하고 현지에서 월남파병 용사들의 모습을 여러장 스케치를 해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동생인 천규식이 장교로서 이미 월남에 파병되어 있어 동생을 응원 하려고 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튼 천경자 화가가 월남에 종군화가로 다녀왔다는 뉴스를 듣게 된 박대통령은 천경자 화가를 청와대에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그때 약간 술기가 오른 박대통령이 기분이 좋아서 반말로 친밀감을 나타나며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천 화백! 우리 언제 우리 다시 한 번 만나서 막걸리라도 해야지. 껄껄껄”
천경자는 이때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이런 자리에서 아직도 월남전에 파견되어 말똥을 달고 있는 동생 천규식이 생각나서 박대통령에 동생을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속에 연기처럼 솟아 나오려고 하는데도 이를 꾹 참고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후
에 동생 규식이가 중령으로 예편을 했을 때 동생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이런 동생이 자기보다 15년 전 2000년에 타계했다. 그리고 천경자가 가장 아꼈던 여동생 옥희도 이미 6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었다.
그러니까 두 동생들을 자기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던 ‘한’도 천정자의 그림 속에 들어있다고 한다.
나의 손녀들아!
아린아, 혜리야!
수아야, 윤아야!
이것저것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구나.
원래 ‘수필’이란 붓이 가는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의식의 흐름을 조절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란다.
이런 수필을 ‘스토리 에세이’라고 요즈음은 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해주고 있단다. 이 월산 할배는 이 〈4손녀 육아관찰기〉도 스토리 에세이 스타일로 쓰고 있단다.
아무튼 너희들의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자녀나 또는 손주들까지 생겼을 때는 4손녀 대가족들이고 천경자와 이 월산 할배의 출생지인 고흥읍 서문리 동정지 마을을 꼭 한 번만이라도 방문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어제 새벽 5시쯤에 일어나 핸드폰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데, 출생지로 고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전 통일부 장관인 정세현 장관이 현 시국 문제를 담론하는 개인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시국 담론을 하는 도중에 ‘며칠 전에 고흥을 다녀왔다’고 하면서 〈천경자 화가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전〉을 보고 왔다고 했다.
나와 동갑으로 80세인 정세현 장관이 고흥을 방문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지난 20여년 간 천경자 화가의 생가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고, 출생지가 같으며 내가 알고 있는 친인척들이나 친지 어른들과 천경자 가족과 인연이 많은데, 간경변증 환자라는 이유로 이번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시전에 가는 것을 자제해왔던 것이 갑자기 부끄러운 변명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후다닥 방한복을 챙겨 입고, 집사람 AK와 큰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아파트를 몰래 빠져 나와 우리 아파트와는 지척거리에 있는 ‘동서울 고속버스터미날’로 갔다.
아직 새벽 어두움이 걷히지 않은 6시였다. 때마침 광주행인 우등고속버스가 출발 직전 시동을 걸고 엔진소리를 내고 있는 차에 탑승을 했다. 그리고 4시간 후에 광주터미날에서 고흥행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후에 고흥읍 버스터미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곧장 택시를 탔고 10분 후에 두원면 운대리에 있는 ‘천경자 화가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장’이 있는 〈고흥분청박물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사!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월요일이라 정기휴관일이라는 공고가 박물관 출입문 유리창에 부착되어 있었다.
내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전시관에 전시된 천경자 화가의 전시 작품만 캠코더로 촬영한 후 곧장 귀경 하려고 했는데 휴관이었다.
할 수 없이 하루 밤을 읍내 버스터미널 인근에 있는 Sun Motel에서 1박을 했다.
1박을 하기 전 오후 늦게 시간이 있어서 도보로 서문리에 있는 천경자 생가와 이 월산 할배의 생가 터도 둘러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일이 연말이고 동시에 천경자 기념 전시전의 폐막일이어서 모텔 인근에 있는 갈비탕 전문 식당에서 저염된 갈비탕으로 저녁 식사를 때웠다. 그리고 모텔로 돌아와 친한 후배에게 천경자 화가 전시회를 구경하고 이를 캠코터로 촬영을 하여 동영상으로 편집한 다음 내 블로그에 올려서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고흥에 와 있다고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 후배가 말하기를 전시회장에 전시된 작품들은 ‘촬영금지’ 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잘 알고 있는 공영민 군수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더니 자기가 그렇게 지시를 했다고 하면서, 선배님이 그렇게 몸이 불편하신데도 서울에서 와서 촬영을 한다고 하니 당장 박물관 직원에게 선배님을 잘 안내하고 촬영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지시를 내리겠다고 했다.
천경자 화가의 미술작품 전시관의 개관은 오전 10시이고, 1층 사진 전사관은 9시에 개관을 했다. 10시에 개관이 되기 전에 공영민 군수가 군 담당 직원을 대동하고 전시관을 찾아와서 박물관 관장과 담당 과장과 문화해설사에게 직접 안내를 잘하라고 지시하여 나는 뜻하지 않게 VIP 관람객 예우를 받았다.
오늘 오후에 고흥군청 종무식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면서 저녁에 만찬 대접을 하겠다고 제안을 했으나 나는 간경변증이 있어 저염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정중히 사절을 했다.
공군수가 떠나기 전 30분 정도 천경자 화가의 생가 복원과 천경자 기념 공원을 서문리에 설립할 계획이라고 하며, 나의 의견을 묻기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분청박물관 2층에서 전시하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발표 작품들과 천화백이 쓴 편지, 엽서의 육필도 구경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고 감독했다는 천경자의 차녀이며 미국 대학교에서 미술교수로 있는 ‘수미타 김’교수도 만나보려고 했지만,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폐막식에는 참석을 못했는데 서울에서 치료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전시회 구경과 촬영을 마치고 다른 층에 전시된 고흥지역의 역사유물과 분청사기 특별관도 구경과 촬영을 동시에 했다.
그리고 나서 분청박물관 밖에 별도로 설립되어 있는 조정래 가족 문화관도 박물관 원장과 담당 과장의 안내를 받으며 설명을 듣고 전시물을 일일이 캠코더에 담았다.
이제 볼일을 다 보고, 할 일을 다하고 고흥분청박물관을 떠나려고 하는데, 원장과 담당 과장이 이렇게 천경자 전시회와 고흥분청 박물관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시고, 인터넷 블로그에서 좋은 글도 많이 써주시는데 고마움을 표시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여러 번 저염음식을 핑계로 거절을 했지만, 20km 떨어진 풍남항구 근처에 월남 쌀국수 전문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저염음식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담당 과장이 승용차를 손수 운전을 해주어 그곳에서 오찬을 대접받았다.
이제 고흥버스터미날에서 고속버스편으로 광주를 경유하여 동서울로 간다고 했더니 담당 과장이 때마침 광주에 있는 박물관에 업무 협력차 출장을 오후에 가는데 승용차 편으로 모시겠다 하여 뿌리치지 못하고 광주 금호버스터미날에서 하차하고 헤어졌다.
벌써 오후 5시가 되고 있었다. 6시에 우등버스를 탑승하고 또 4시간 후인 저녁 10시에 동서울에 도착하여 귀가하였다.
광주에서 오는 도중 정안휴게소에서 15분 쉬는 동안 쇼핑몰에 들려서 손녀들인 수아와 윤아에게 줄 선물로 아동용 예쁜 방한 털모자를 사서 집에와서 주었더니 두 손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모자를 서로 바꾸어 쓰며 좋아한다.
오늘은 제야의 날,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밤 12시에 올해가 가고 TV에서는 보신각에서 타종을 하는 장면을 실황으로 중계방송을 한다.
나는 보신각의 마지막 타종 소리를 듣고서야 드디어 2025년 푸른 뱀의 첫날을 맞이한다.
아디오 2024년!
Good by 2024년!
잘 가라 2024년!
Welcome 2025년!
환영 2025년!
나는 송구영신의 인사를 차리고 새해 첫날 새꿈을 꾸려고 침대의 잠자리에 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