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변절의 기억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놓인 전갱이 한 마리.......
그것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내 몫의 생선 한 마리.
그것이 보장해주는 것은 안정과 평화였다.
6살짜리가 절개나 지조를 염려할 계제는 아니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첩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저 작은 어머니였고 ‘어머니’라고 부르면
쌀밥과 고기반찬이 끊어지지 않는 신기한 나날들이었다.
때 묻은 무명 바지저고리 대신 양복이 입혀졌다.
가슴에 영문 UN이 수놓아진 짙은 녹색의 모직양복이었다.
무명천 끈이 아닌, 매끈매끈한 비닐 재질의 허리띠는
현대문명의 신비하고도 눈부신 산물이어서
작은 어머니 집으로 팔려간 나에게 제공되는 것 중에서
환상의 조건에 다름없는 신문명의 특혜였다.
나는 현란한 바둑판 무늬의 허리띠를 풀어서 하루 종일 갖고 놀았다.
눈에 다래끼가 나면 지체 없이 새하얀 페니실린 액이 투여되었다.
페니실린은 가정에서 구할 수 없는 신비의 명약이었건만
작은 어머니 집에는 상비약으로 구비된 품목이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아버지는 작은댁으로 삼았다.
비교적 부유하였던 작은 어머니는 고향에서 15리나 떨어진
읍내에 살았는데 친정 모친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식을 낳지 못해 소박을 맞고 홀로 사는 중
아버지를 만난 모양이었는데 자식 욕심이 유별나
우리 형제 셋 중에서 나를 점지하여 양자로 달라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졸라대었다.
대학까지 공부시킨다는 조건으로 아버지는 나를 양도하였다.
당시 어머니의 심경이 어떠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작은 어머니에게는 ‘성님’답게 체통을 지키는 대신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닦달하셨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나는 영문도 모르고 어린 나이에 변절자가 되었다.
변절의 대가는 실로 달콤하였다.
그러나 그 달콤한 세월은 얼마 안가서 끝장이 나고 말았다.
아버지와 작은어머니의 관계는 어린 내가 알 수 없는 사연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나는 우리 집으로 원대 복귀하였다.
1년인가 2년이 흘렀다.
우리 가족도 읍내로 이사를 하였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느 날 뜻밖에도 교문에서 작은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은 읍내 장날이었는데 고무신 점으로 데려간 작은 어머니는
나에게 꽃무늬가 화려한 장화를 사서 신겨주셨다.
바둑판 무늬의 허리띠 이후로 환상적인 선물공세였다.
나는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꽃장화를 신은 채 대문간에 들어섰다.
그때 중학교에 다니는 형이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 등 뒤에는 한 때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작은 어머니가 서 있었다.
적의에 가득 찬 형의 눈빛은 작은 어머니를 대문간에서 돌려세웠고
신고 있던 꽃장화는 형의 싸늘한 눈빛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절개가 무엇이고 지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나
어린 나이에 나는 변절자로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였다.
상당기간 나에게는 ‘배신자’라는 오명이 뒤따랐고
그때마다 나는 ‘감수해야만 한다’라는 막연한 반성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아름답고 탐스럽던 꽃장화는
때때로 내 머릿속에 떠올라 한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