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말(2024) / 김민홍 제 7시집 (끝)
제4부
76. 한계
자꾸 그 일이 생각나는 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아니면 아직 그 일 속에 있길 바라는 건지
내가 문제인지 그 일이 문제인지
잘 구분할 수 없다
다만 해결방법이 없는
일종의 고통이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내려놓았다거나
혹은 마음을 비웠다고들 하는구나
하지만 난
나의 한계에 굴복했다고
시방 쓴다
77. 아마튜어
저는 개런티가 없어도 노래합니다
저를 위해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따스한 마음으로 초대하지 않으면
슬그머니 거절할 뿐
저는 부담이 없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제 시집은 무료가 아닙니다
원가도 녹녹치 않고
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 혼자 기타 들고 올라가는 무대엔
눈에 보이는 원가가 없기에
주면 받고 안 주면 안 받습니다
그렇다고 무대를 제공했다는 걸
생색낸다면
결코, 올라가지 않지요.
전 아마튜어이고,
끝까지 그럴 겁니다.
78. 재발 再發
봄이 재발 되고
여름이 재발 되고
가을, 겨울이, 그리고,
내 병도 재발 된다
도지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죽어야 완치될 나의 병!
세상도 끝까지 재발 될 것이다
결코, 바뀔 수 없는 너와 나처럼
그러니
닿지 않는 건
닿지 않는 대로 덮어 둘 밖에
늙어가는 나는 기껏해야
"무엇이 아픈가?“
”어디가 아픈가?"
물어볼 뿐
79. 근본
K씨에게 얻어 온
화초 한 그루 심었습니다,
틈나는 대로 K씨를 생각하며
정성껏 돌보다 보면
연약한 뿌리도 튼튼해지겠지요.
하지만 여름이 오기도 전에
시들시들 앓다가
바짝 말라갔습니다.
아무래도 내 테라스 화분의
토질이 좋지 않거나
너무 더운 나라에 온 근본이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K씨의 베란다 그 화초는
잎새마다 윤기가 흐르고
꽃도 환하게 피웠기 때문입니다.
80. 그래도 난 기다렸지
그래도 난 기다렸지 ,
늘 도로(徒勞)가 되어버린
내 기다림의 한끝을 꼭 쥐고,
너덜너덜해진 외투를
벗어 걸면 구린내가 났지
구린내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셈쳤지
재활용 봉투에 넣지도 못했지
병동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던
익숙한 눈길이 떠올랐지
그래도 언젠가 퇴원하겠지
그래, 그래도 나는
'그래도'라는 부사어에
평생을 의탁해
내 삶의 주어만 기다린 셈이군
81. 미열 같은 설렘
오래 집에 머물다
초대받은 설렘에 끌려
티맵으로 외출할 주소를 찾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별 아는 이 없는 곳
그래도 외출한다
낡은 자동차에 기타 하나 싣고
시동을 건다
낯선 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음악회 같은 곳
노래 몇 곡하고
커피 한잔 마시고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한 번도 유명해 본 적 없으므로
늘 이방인인 나의
이 미열 같은
설렘
82.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내 속을 다녀가곤 한다,
이름이나 얼굴조차 전혀 알 수 없는
누군가.
기껏해야 허접한 산문이나
엄살 같은 시나 쓰는 나는
들키면 큰일 나는 비밀 같은 건 없다.
그래도 감(感)조차 잡을 수 없는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것,
고맙다
그러니까 고마워하라는
암시만 남기고 가는 누군가
흔적도 없이.
83. 따로국밥
파고다 공원 근처
순대 국밥집 골목은
내가 즐겨 찾는 곳
저렴하기도 하지만
순대국은 익숙하고
속 든든해서
일행이 없을 때만
들리곤 한다
그 골목 끝,
낙원 악기 상가에서
약속하는 친구들은 대체로
순대국을 싫어하므로
詩 따로 人生 따로
환상 따로 일상 따로
음악 따로 삶 따로
취향이야 서로 다르겠지만
국 따로 밥 따로라도
꼭 국에 밥을 말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순대국밥이야말로
나의 뮤즈,
나의 詩 쓰기라네
84. 꼼꼼히 읽는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시들도
꼼꼼히 읽는다, 혹시
내 눈이 놓치고 있는 게 있을까 해서.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은 음악들도
집중해서 듣는다, 혹시
내 귀가 못 들은 게 있을지 몰라서.
성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참고 만난다, 분명
내 성향에 오류가 있을 것만 같아서.
아니야, 내 멋대로 재단하면
더 외로워질까 봐.
이런 내 속셈이나 잘 짚어주길!
아직 더
살고 싶다는 말이겠지.
85. 춘천공원묘원
벼르고 벼르다가
이승훈 시인께 다녀왔다
춘천공원묘원으로 이사하신 지
어느새 오 년이 지났구나
눈부시게 양지바른 묘 앞
따가운 햇살 속에 잠시
서 있었다
고향도 선산도 없고
묻힐 곳도 마땅치 않은 나는
이런 풍광 속으로 스며들 순 없겠지
관리실에서 꽃 몇 송이 사서
시인께 드리고
평소 좋아하시던 맥주는 딸아드리지 못했다
당분간 변두리에서 더 시달려야 할
나의 음주운전이 될 것만 같아서
비석 뒤의 지상에서의 이력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촌놈인 스무 살짜리 국문과 일 학년의 봄
최초로 만난 나의 詩 은사의 묘비문
춘천공원묘원엔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시인
이승훈 선생님이 계신다
내겐
공원 전체에 이승훈 시인만 계신다
86. 슬픔 한 근
슬픔 한 근,
아픈 부위만 골라 썰어,
잘 냉동시켜,
택배로 보냅니다
소금만 뿌려,
그대로 구워 드십시오!
87. 너무 직설적이라구?
그가 내게 말했지
"선생님은 너무 직설적이라
사람들을 질리게 하곤 해요
시인이라면 좀 은유적이고
순화시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내게 말했지
"선생님 말을 따라가다 보면
개그맨 같아요!"
시적 표현엔
반어와 역설과 풍자도 있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 난 직설적 말쟁이야"
민망해서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88. 매혹
평생 날 매료시킨 것은
몇몇 음악과 기타라는 악기였고,
몇몇 시인의 詩였고,
오토바이였고, 자동차였다
예쁜 여자 쳐다보기 바빴지만
날 매혹시키진 못했다
아니, 매혹될 자신이 없었다.
종교나 명상, 철학 등은
열등감과 두려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다
파산한 적은 없지만 궁핍했고
사는 게 불안해
꼬박 35년이나 직장을 다녔다
그러고 보니, 난
불안에 매혹되어 살았구나!
89. 흡연 부스에서
“그건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녀가 해외 순방 중 나랏돈으로
명품 쇼핑을 했다고 한들!”
“스캔들은 늘 호기심을 유발하지요
당신도 그렇잖습니까?”
“아니요!”
링거를 꽂고 휠체어를 탄
늙은 사내가 단호하게 대답할수록
“그렇습니다”라고 들렸다
“올 장마엔 벌써 사십 명 이상 죽었다는군요”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그렇다구요?
그건 개인적인 편견일 뿐입니다
함부로 발설하지 마세요!”
그가 목청을 높였고
"너무 비만 오니까 우울하네요
너무 습해서 여기저기 가렵기도 하고!"
내가 웅얼거렸다.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90. 용서에 대하여
타고난 성향이 물렁해서
마음에 오래 두면
몸으로 병이 오곤 하지
그래서, 그냥 잊으려 해도
의지대로 되지 않더군
그저 시간에 맡겨 잊혀지길
하지만, 잊힐 만하다가도
조그만 단서라도 집히면
병적으로 재발 되는
나의 고질
그래서 다짐했네
무조건 용서하기로 ,
그럴듯하잖아?
폼도 나고!
분명 남은 날이 적은
생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읽어도 된다네!
91. 비 오는 날의 휴대폰
종일 비만 내렸어
천변 산책길은 폐쇄되었지
그래도 우산 하나 달랑 들고
비 오는 거리 외진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웠어.
"비만 쳐다보니 턱이 빠질 지경이예요"
"그래도 아직 넋은 안 빠졌어요!"
"황토로 지은 집이라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불안해요, 흙이 쓸려가거든요"
오늘 내게 걸려온 전화의 전부다
“이번 토요일 공연은 취소합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네요
야외 공연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 내게 온 문자의 전부이다.
스펨 문자, 여론조사 전화조차 없는
비 오는 날의 내 휴대폰
92. 교통사고
새벽 네 시가 점점
세 시로 바뀌어 간다
초저녁부터 꾸벅꾸벅
졸다가 잠자리에 들면
깨는 시간도
조금씩 앞당겨지기 시작하더군
이러다 낮과 밤이 바뀌는 건 아닐까?
예술가들은 새벽까지 잠 못 들고
오전 늦게야 일어난다던데
나는
예술가가 아닌 게 분명하구나
새벽잠이 없으셨던
외할머니도 초저녁부터 졸으셨지
외할머니의 새벽은
얼마나 적적하셨을까
간혹, 지방의 저녁 음악회에 가서
노래하다 졸진 않지만
돌아오는 길, 하염없이 하품이 쏟아져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대고
잠시 눈을 붙이면
어김없이 기겁해서 깬다
졸음운전으로 교통사고 나는 꿈!
며칠째 유명 가수가
음주 뺑소니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2024. 5.)
93. 어디로 가든
‘아프지만 말길’
나도 모르게
틈만 나면 웅얼거린다
이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
떠나는 그대들의 앞길은
내 능력 밖이지!
언제고 떠날 그대들의
뒷모습을 각오하고 있을 뿐
이는 세상에서 가장 허약하고
쓸쓸한 대처법
혹시 더
견고한 대처법이 있다면
내게도 알려주시게!
94. 장마 잠시 그치고
숲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폭우는 어디서 피했는지
다들 무사한지
흙탕으로 뒤집혀 진
우이천, 잉어들,
왜가리, 오리, 원앙들
가슴 속 앙금들도
잘 삭히고 있겠지
장마 잠시 긋고
먹장구름 틈틈이
햇살 눈 부셨다
95. 고질 (痼疾 )
은밀하게 뻔뻔함을 감추는
일은 이해할 순 있어도
용서하긴 힘들다
그래서 평생 몸이 아픈 걸까?
내 속에서
은밀하게 둥지를 튼
고질이여
이젠 날 놓아다오
소리소문없이
나도 뻔뻔해지고 싶다.
96. 거리에서 나는 쓴다
거리는
시 같지 않은 나의 시.
난 쓴다,
거리에서 거리를.
거리에서 난 늘 혼자다.
혼자 걷거나
편의점 테라스에 앉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저렴한 편의점 커피 한 잔
홀짝거리며 담배도 피운다.
유치원 아이들이 지나가면
슬그머니 끈다, 죄지은 것처럼.
이어폰을 끼고 거리를 걷다가
몇 번 차에 치일 뻔한 후로
걸을 땐 이어폰을 꽂지 않는다.
이어폰은
거리 모퉁이에 불량스럽게 서 있거나
쭈그려 앉아있을 때만
닝거처럼 가슴에 꽂는다.
종종 무선 이어폰 한쪽을 잃어버린다.
그러면 한 쪽 가슴으로 듣는다.
답답해 지면 곧 새로 산다.
그 정도는 날 위해 쓸 수 있다.
내가 주로 외출하는 곳은
거리이고 내가 하는 일은 방황이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주제는
거리이고 방황이었군
하지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난 쓸 것이다,
허접하지만 그런대로 살았다고.
97. 노래
노래란 조화롭고 밝으며
슬프지만 처연하진 않은 것이라고
날 깨우친 스승은 오직 한 분
오래전, 수덕사의 선방인 정혜사에
기타 둘러메고 노래하러 갔을 때
큰스님께서 내게 내려 주신 휘호
화명애아(和明哀雅)
잘 표구하여 내 서재에 걸어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있지만
스님은 날 기억하지도 못하실 것이다.
98. 타입 type
그 음악은 내 타입이 아니야
그, 혹은 그녀의
시도 내 타입이 아니지
그럼 내 타입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나도 내 타입이 아니니까
습관처럼 웅얼거리는 말,
"It's not my type!"
그렇다고 영어를 좋아하거나
잘하는 타입도 아니지
지루한 시
지루한 음악
말하자면 매너리즘에 빠진
내 속에 사는 것들은
내 타입이 아니야
왜 자꾸 영어를 쓰냐고?
매너리즘 대신
신선하지 않다거나
변질됐다고
까놓고 말하긴 좀 그렇잖아
안 그래?
99. 비수匕首 와 비수悲愁
비수匕首와 비수悲愁는
같은 말
비수悲愁가 조금씩 날을 세워
비수匕首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소리가 같은 것 아니겠어요?
오래전부터 나는 속에
비수 하나
품고 살았어요,
종종 꺼내 숫돌에 날카롭게 갈았지요.
마음은 세상을 찌르고 싶었지만
끝내 나만 찌르고 말았어요
그래서 匕首는 또 悲愁가 되고
소리뿐 아니라
같은 뜻이 되고 말았지만요.
100. 안전 알림 문자
도봉구 주민인
김민홍 (남 71세) 씨를 찾습니다
회색 점퍼 허접한 청바지
검정 운동화 검정 야구모자
선글라스 착용
우이천 벚꽃 놀이 중 실종
연락처 01037705306 김민홍
後記
검은 빵
검고 딱딱한 빵을 씹으며 희망을 노래했던 그 시인은 변절했지만 젊은 시절 내내 나는 생라면을 씹으며 그의 시를 외웠었지. 물론 아무도 듣지 않았어. 우물쭈물 웅얼거리기만 했었으니까. 대학 시절엔 아주 어둡고 우울하고 이기적이고 난해한 스승에게 현대시를 배웠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어. 막일에 지쳐있었고 열등감이 들통날까 눈만 부라리고 다녔지. 사고무친 고학생이었던 내 피 묻은 돈 떼먹은 녀석들은 지금 어디서 살까. 살아있기는 할까. 이제 이름조차 희미하고 얼굴 윤곽조차 흐려지네.
어느덧 돌아가신 스승의 나이 근처에 이르러 스승의 시를 다시 읽었지. 스승이 씹었던 캄캄한 시간은 씹을 엄두도 나지 않고 가슴만 먹먹해지는 날은 전활 걸었지. 요즘은 카톡이 대세라는데 공짜라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구? 그래서 전활 걸었지. 휴대폰으로 문자 찍는 건 아직 서툴러. 눈도 흐리고 대세와는 늘 거리가 먼 내 인생처럼 잘 적응이 안 돼. 전활 걸었지. 오래된 번호. 증발된 번호. 저승 간 번호에 전활 걸었지. 그곳에도 공짜가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