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시리즈
제목 : 회개와 복음 — 좋은 소식이 먼저 왔습니다
본문: 마가복음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 마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많은 경우 조용히 한 발 물러섭니다. 틀린 말이라서가 아닙니다. 내 삶과 별 상관없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몸이 아프지 않은지, 아이가 잘 지내는지, 이번 달 살림이 버틸 만한지를 살핍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과 괴롭게 하는 일에 마음이 빠르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그 목록에 잘 끼지 않습니다. 회개한다고 자녀의 성적이 오르지 않습니다. 사업이 갑자기 풀리지도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다고 당장 벌이 떨어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죽은 뒤의 이야기로 밀려납니다. 지금 급한 일부터 처리하자는 마음이 앞섭니다.
만약 회개하면 곧바로 복이 오고, 회개하지 않으면 곧바로 재앙이 온다면 어떨까요. 아마 모두가 앞다투어 회개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그런 신앙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믿으면 잘되고 정성을 드리면 일이 풀리는 신앙입니다. 이것을 흔히 번영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을 복 받는 수단으로 여기는 생각을 말합니다.
이 마음을 쉽게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삶이 고단할수록 그 약속이 간절해지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복을 바라는 마음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복이 목적이 되어 버릴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목적을 이루게 해 주는 도구가 되십니다. 그리고 회개는 쓸모없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굳은 결심이 아닙니다. 현실을 보는 다른 눈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향해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듣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공적인 첫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한 문장의 순서를 천천히 보십시오. 앞의 두 마디는 소식입니다. 때가 찼다는 소식,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뒤의 두 마디가 부르심입니다. 회개하라는 부르심, 복음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신 일을 알리시고, 그다음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를 불러오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기 때문에 드리는 응답입니다. 이 말씀은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돌아서라"는 뜻으로 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세례 요한의 설교에는 무서운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평온해 보이는 세상을 그만큼 긴박하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의 첫마디를 도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기록합니다. 심판이 가볍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보다 먼저 좋은 소식을 들려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그릇에 물이 가득 차오른 모습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래 기다렸습니다. 선지자들은 약속을 전하고도 그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정하신 때를 하나하나 채워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가득 찬 순간, 아들을 보내어 입을 여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등진 백성을 멀리서 심판만 하지 않으십니다.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시다가, 친히 가까이 오셔서 좋은 소식부터 들려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용서가 있기에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문이 닫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소식이 먼저 들려야 사람은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 좋은 소식은 어두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여기서 "잡혔다"로 옮긴 말은 본래 "넘겨졌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파라디도미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권력자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가두는 곳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달가워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 안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주인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십니다. 전령이 갇힌 그 땅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십니다.
마가는 이 "넘겨지다"라는 말을 뒤에서 다시 씁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 씁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요한이 걸어간 넘겨짐의 길을 예수님도 걸어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요한은 증인으로 넘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넘겨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칼을 든 왕이 원수를 쳐부수는 방식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왕이 스스로 넘겨지시는 방식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등진 우리에게는 스스로 돌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죄를 자복하던 사람들도 요한에게서 죄 사함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시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넘겨지신 그분의 몸에서 우리의 용서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까이 오신 이분을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 곧 이 복음의 내용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현실을 보는 눈을 바꿉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늘 변합니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생깁니다. 오늘 붙들고 있는 것도 내일은 손에서 빠져나갑니다. 그 변하는 세상 뒤에서 흔들림 없이 다스리시는 분이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이 가장 단단한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먼저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멀리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까지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서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마주쳤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금 모습 그대로 좋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다시 다스리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전부로 여기며 사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인지 분명해집니다. 가까이 오신 왕을 등지고 서 있는 삶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오래 빠져 있는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악을 악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현실이라고 여기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으니 돌아설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회개라는 말이 현실감 없이 들리는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회개하라"에서 멈추지 않고 "복음을 믿으라"를 붙이셨을까요.
성경에는 뉘우쳤으나 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았고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뉘우침에는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벌하시는 분으로만 보았고, 그 두려움 속에서 무너졌습니다.
그 반대편에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가 심히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소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죄를 보았습니다. 차이는 그 죄를 본 다음 누구를 바라보았느냐에 있습니다. 복음 없는 회개는 절망으로 끝나고, 복음 안의 회개는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명령을 한 호흡으로 주셨습니다. 돌아서는 일과 붙잡는 일은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옛 자기에게는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다시 사는 일입니다. 방향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손은 이미 복음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이렇게 돌아서고 이렇게 믿는 힘은 어디서 옵니까. 우리가 마음을 굳게 먹으면 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누구신지 기억하십시오. 세례 요한은 그분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그리고 요단강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분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을 받으신 그분이 이제 갈릴리에서 "회개하라, 믿으라" 하고 부르십니다.
명령하시는 분이 그 명령에 응답할 힘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받으신 성령을 그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여셔서 죄를 죄로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지고 넘겨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는 것을 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회개도 선물입니다. 바울도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믿음의 첫걸음도 성령께서 내딛게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나라는 아들 안에서 가까이 왔습니다. 아들은 넘겨지심으로 그 나라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그 문 쪽으로 돌려세우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회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가까이 오신 분 앞에서, 성령께 이끌려 몸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어떻게 서야 할까요.
먼저, 회개는 한 번 치르고 끝나는 행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평생 돌아서며 삽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어도 우리 마음은 자꾸 보이는 것만 현실로 여기는 자리로 미끄러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돌아섭니다. 그리고 돌아설 때마다 좋은 소식이 먼저 와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루를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 오늘은 저를 세워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합니까." 오늘 내가 무엇을 얻을지를 먼저 묻지 않고, 오늘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스리실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 하나가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게 묻도록 우리 마음을 기울이시는 분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십니다.
오래 기도했는데 형편이 달라지지 않은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믿었는데 왜 삶은 그대로냐고 묻고 싶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형편을 반드시 좋게 해 주겠다는 약속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형편이 어떠하든 가까이 오신 왕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는 소식으로 왔습니다. 형편이 바뀌지 않았다고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익숙해져서 회개라는 말이 무뎌진 분도 계실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서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던 자리를 비추실 때가 있습니다. 그 빛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빛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빛이 아니라 돌아오게 하려는 빛입니다.
오늘 처음 이 자리에 오신 분도 계십니다. 예수님의 첫마디는 오늘 그분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돌아서서 그분을 신뢰하면 됩니다. 그 걸음을 내딛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모두 "너희"를 향한 말씀입니다. 회개는 혼자 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함께 하는 일입니다. 가정에서 누군가 먼저 용서를 구할 때 그 집이 하나님께로 돌아섭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의 연약함을 덮어 주고 다시 일어서게 도울 때, 우리는 함께 가까이 온 나라를 향해 걸어갑니다.
예수님의 첫마디는 결국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오셨습니다.
우리가 돌아서기 전에 아버지께서 때를 채우셨습니다. 우리가 찾기 전에 아들이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기 전에 그분이 우리 대신 넘겨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설 힘조차 없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돌려세우십니다.
그러니 회개는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좋은 소식을 들은 사람이 그 소식을 향해 몸을 돌리는 일입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만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그 소식이 우리에게 들렸습니다.
한 줄 메시지:
아버지께서 때를 채우시고, 아들이 넘겨지심으로 나라를 여셨으며, 성령께서 지금 우리를 그 나라로 돌려세우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