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시작했다면 은혜로 끝나십시오
갈 3:1~14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살면서 우리는 참 많은 계약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집을 살 때도, 새 일을 시작할 때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계약에는 언제나 조건이 붙습니다. "당신이 이만큼 해야, 내가 이만큼 주겠다."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우리는 이 조건부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조건부 사고방식이 신앙생활에까지 스며들면 참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수십 년 교회를 섬겨오신 권사님, 집사님, 오랜 세월 주일학교를 맡아오신 선생님들일수록 이 유혹이 더 교묘하게 찾아옵니다.
"내가 이만큼 오래 봉사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조금 더 인정해 주시겠지."
"내가 이만큼 헌금하고 기도했으니 이제는 내 기도에 좀 더 귀 기울여 주시겠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는 분명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눈물을 흘렸는데,
신앙의 연차가 쌓일수록 어느새 내 신앙의 이력서를 하나님 앞에 슬며시 내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바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넘어진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가슴을 치며 외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로 시작해놓고 왜 자꾸 여러분의 힘으로 결승선을 끊으려 합니까?"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 (1절~5절)
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꾀더냐"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바스카넨(ἐβάσκανεν)'인데,
이 단어는 본래 '주술을 걸다', '나쁜 눈길로 홀려서 판단력을 흐리게 하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지금 점잖게 타이르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눈이 멀어버렸다"고 안타까움 섞인 탄식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다만 거기에 '내 노력'이라는 작은 양념 하나를 더 얹으려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지 않습니까?
할례도 받고, 규례도 좀 지켜야 진짜 완성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속삭이는 거짓 교사들의 말에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은 하나님이 십자가라는 완벽한 은혜의 옷을 값없이 입혀 주셨는데,
"내 노력이 안 보이니 왠지 허전하다" 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자꾸 덧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묻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들을 때, 믿을 때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해놓고 이제 와서 인간의 알량한 공로라는 육체로 마무리하려 하십니까?
오늘, 하나님 앞에 내 자격을 증명하려는 그 오래된 습관을 내려놓아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6절~9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여기서 "의로 정하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ἐλογίσθη)'는 본래 회계장부에 "금액을 기입하다", "
계좌에 입금 처리하다"라는 상업 용어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 장부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직접 기입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속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꺼내 듭니다.
"좋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았습니까? 법을 잘 지켜서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것은, 그가 할례를 받기(창세기 17장) 훨씬 이전이었고,
모세의 율법이 생기기는 무려 430년이나 더 뒤의 일이었습니다(갈라디아서 3:17, 출애굽기 12:40 참고).
아브라함은 그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인생 장부에 '의인'이라 적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입니다.
구약의 백성이나 신약의 백성이나 구원받는 길은 단 하나, 오직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대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의 유대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미 우리를 의롭다 기록해 주신 그 은혜의 장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오늘 부족한 모습 그대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율법의 저주를 끝낸 십자가 (10절~14절)
여기서 오늘 본문의 정점, 복음의 가장 깊은 신비가 드러납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면 내 얼굴에 묻은 오물은 아주 잘 보이지만, 거울이 그 오물을 씻겨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을 붙들고 살면 살수록 우리는 내가 얼마나 철저한 죄인인지, 얼마나 깊은 저주 아래 있는지만 발견하게 됩니다.
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10절).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다만 우리의 죄를 비추어 저주 아래 가둘 뿐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속량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세고라센(ἐξηγόρασεν)'은
노예시장에서 엄청난 몸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자유인으로 풀어줄 때 쓰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저주'로 번역된 '카타라(κατάρα)'는 단어 자체로는 단순한 저주를 뜻하지만,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과 결합될 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진노라는 무게를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신명기의 그 저주의 자리에, 죄 없으신 그분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더러운 죄와 허물,
율법을 지키지 못해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했던 그 진노와 저주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셨습니다.
자리 바꿈이 일어난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종종 '위대한 교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예수님은 나의 저주를 가져가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우리에게 거저 넘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을 홀로 감당하셨고(마태복음 27:46),
그 대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참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는 그 보답으로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보다 더 통쾌하고 위대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십자가 이후에 우리에게 더 채워야 할 조건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갚으셨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3장은 우리 가슴에 대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까?"
우리는 내 자격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는 그 믿음 하나로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처음을 그렇게 은혜로 시작했다면, 끝까지 은혜로 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 참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저주에서 건져주신 그 크신 십자가 사랑에 감격해서 터져 나오는 감사의 '열매'여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신앙은 순식간에 숨 막히는 율법주의 — 곧 내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신앙 태도 — 로 변해버립니다.
오늘 하루, 이번 주, 이번 달,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시길 바랍니다.
첫째, 오늘 밤 기도하실 때, 여러분의 신앙 이력서 — 몇 년째 직분을 맡아왔는지, 얼마나 헌신했는지 — 를 잠시 내려놓으시고, "주님, 제 세월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지합니다"라고 짧게 고백해 보십시오.
둘째, 이번 한 주간, 스스로 "나는 자격이 없다"는 낙심이 찾아올 때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을 마음에 되새기며, 그 저주를 이미 예수님이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붙드십시오.
셋째, 이번 달 안에, 곁에 있는 새신자나 후배 성도 한 사람에게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이 한 문장을 직접 나눠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은혜받은 자의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머리로만 알던 이 십자가의 복음을 오늘 가슴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저주를 받으셨구나. 내 인생의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셨구나!"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내 행위의 온도를 재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완전한 공로를 의지하여, 오늘 우리를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로 시작한 인생, 은혜로 마치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