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시리즈
1부 · 믿음의 본질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 믿음과 연약함
마가복음 9장 14절~24절 (개역개정)
"이에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과 물에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기도는 하는데, 마음 한켠에서는 "그래도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하는 불안이 동시에 떠나지 않던 순간. 자녀 문제로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도, 기도가 끝나자마자 다시 걱정으로 잠을 설치던 밤. 저도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나서, 바로 다음 순간 "그런데 정말 될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은근히 죄책감이 듭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한가 보다. 믿음이 있다면 이렇게 흔들리지 않을 텐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아버지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뜻밖에도 우리 신앙의 가장 정직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1. 산 아래, 무너진 사람들
이 장면이 벌어지는 배경을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앞 장면인 9장 2절부터 13절까지,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변화되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이 잠시 열린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영광의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예수님이 마주하신 것은 정반대의 풍경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논쟁하며 곤경에 빠져 있었고, 한 아버지가 귀신 들려 고통받는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은 그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이 탄식은 단지 아버지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무능, 서기관들의 논쟁, 무리의 소란 — 그 자리 전체를 향한 탄식입니다. 산 위에는 영광이 있었는데, 산 아래에는 무능과 절망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 아닙니까. 예배당에서는 은혜를 경험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서 무력한 우리. 성경을 읽을 때는 확신이 생겼는데, 막상 현실의 벽 앞에서는 다시 흔들리는 우리. 본문은 바로 그 간극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얼마나 절박했는지,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과 물에 던졌나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그러니까 평생을 이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제자들마저 실패하는 것을 방금 목격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던진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여기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 속에, 이 아버지의 남은 신뢰와 동시에 남은 의심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2.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 능력의 소재가 바뀌다
예수님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되받으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23절은 "판타 뒤나타 토 피스튜온티(πάντα δυνατὰ τῷ πιστεύοντι)", 직역하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입니다. 여기서 "피스튜온티"는 '피스튜오(πιστεύω, 믿다)'의 현재분사형입니다.
이 말씀을 자칫 "당신이 충분히 믿기만 하면, 원하는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읽으면 본문의 방향을 완전히 놓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뒤집으신 것은 아버지가 던진 질문의 초점입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네가 누구를 신뢰하느냐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능력이 있고 없고는 애초에 예수님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이 아버지가, 그리고 우리가,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을 향해 신뢰를 두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크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이 크면 큰 기적이, 믿음이 작으면 작은 응답이" 온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믿음이 자판기에 넣는 동전의 액수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그 믿음이 붙들고 있는 대상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약한 믿음이라도 강하신 그리스도를 붙들면, 그 믿음은 능력 있는 믿음입니다. 강한 확신이라도 잘못된 대상을 향해 있다면, 그것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3.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그러자 이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대답합니다. 24절, 오늘 본문의 심장입니다. 헬라어로는 "피스튜오, 보에테이 무 테 아피스티아(πιστεύω· βοήθει μου τῇ ἀπιστίᾳ)"입니다. 여기 세 단어를 하나씩 짚어보고 싶습니다.
먼저 "피스튜오(πιστεύω)" — "내가 믿습니다." 이 아버지는 자신 없이 말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믿는다고. 그런데 바로 이어서 "테 아피스티아(τῇ ἀπιστίᾳ)"라는 말이 붙습니다. "아피스티아(ἀπιστία)"는 '불신, 믿지 못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에테이(βοήθει)" — '보에테오(βοηθέω, 돕다)'의 명령형, "도와주십시오"라는 절박한 외침입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저의 믿지 못함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믿지 못함을 도와주십시오." 믿음의 고백과 불신의 고백이 한 문장 안에, 한 사람의 입술에서 동시에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솔직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자주 넘어집니다. 기도하면서 "주님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흔들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가 자신의 불신을 고백했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거리나 미덕은 아닙니다. 불신은 여전히 불신입니다. 부끄러운 것이고, 책망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불신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초점은, 이 아버지가 자신의 불신을 숨기거나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 불신을 그대로 들고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잘한 것은 불신 자체가 아니라, 그 불신을 가지고서라도 예수님을 붙든 것입니다. 능력은 여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텅 빈 손을 예수님께 내밀었을 뿐입니다.
4. 우리 안에도 있는 오해 — "의심하면 안 된다"는 강박
우리 중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 믿음이 성숙하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마음 한켠에 의심이 스치기라도 하면, 그것을 얼른 감추고, 남들 앞에서는 확신에 찬 얼굴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우리를 더 지치게 만들지 않습니까. 의심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본문은 그런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오래전부터 '믿음(faith)'과 '확신(assurance)'을 구별해 왔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도 때로 두려워하고, 흔들리고, 확신이 약해지는 시기를 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이 없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이 아버지처럼, 우리도 흔들리는 채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균형이 있습니다. "그러니 의심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불신은 여전히 우리가 씨름해야 할 죄이고 연약함입니다. 다만 그 씨름을 혼자 감추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정직하게 가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 완전한 확신도, 완전한 불신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그래도 주님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
5. 예수님의 권세와 기도 — 능력의 진짜 소재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5절부터 27절까지, 결국 이 상황을 끝낸 것은 아버지의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명령 하나로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귀신을 쫓을 때 흔히 사용하던 여러 절차나 방법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권세가 얼마나 다른 차원의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둠의 세력을 명령 한마디로 물리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28절, 나중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이 대답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이 본문 전체가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능력은 인간 안에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믿음 안에도, 제자들의 노력 안에도 없습니다.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가지신 분께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복음 — 우리의 불신까지 짊어지신 분
믿음은 내가 완전하기 때문에 갖는 확신이 아니라,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아이를 고쳐주신 것은, 아버지가 마침내 흠 없는 믿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끝까지 불신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산 위의 영광을 뒤로하고 산 아래로 내려오신 것 자체가, 무능하고 흔들리는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오신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은 훗날 결국 십자가로 걸어가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어둠의 권세를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를 무력화하시고 드러내어 이기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축귀 사건은, 그 십자가에서 완성될 승리를 미리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우리의 불신은 부끄러운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불신조차 예수님 앞에 내놓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밀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부터 일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확신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구원의 근거입니다. 믿음조차도, 그 시작과 자람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자랑할 수도 없고, 우리의 불신 앞에서 완전히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 아버지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
기도할 때, 확신에 찬 언어로만 기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 믿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감추지 말고, 억지로 확신을 꾸며내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주님께 가져가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실제적인 초대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씨름하는 대신, 그 흔들리는 마음을 들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그 믿음이 향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 에너지를 쏟으십시오. 그리고 제자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리로 매일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
이 아버지가 예수님께 가져간 것은 완벽한 신앙고백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져간 것은 절박함과 의심과 눈물이 뒤섞인,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불완전한 손을 뿌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 저도 압니다. 우리는 흔들리는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부끄러워지고, 그 부끄러움 때문에 오히려 주님 앞에서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의 길을 가리킵니다. 흔들릴수록,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은 내 안에서 완전한 확신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확신의 크기가 아니라, 나의 믿음 없음까지 들고 주님께 나아가는 발걸음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