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대신왕(四大神王)의 전설(傳說)
황포진(黃浦鎭)으로 향하는 관도 위에
일신에 백의를 걸친 여인이 모습을 나타낸 것은 정오(正午) 무렵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의를 입은 그녀는 발이 지면에 닿을 듯 마는 듯한 경쾌한 신법으로
울창한 숲 사이로 난 관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백의여인의 나이가 부인(婦人)인지 아니면 소녀(少女)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얼굴이 망사(網絲)로 가려져 있어 진면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백의여인은 유유자적하며 길을 걸어 황포진으로 향해 걸어갔다.
헌데 한순간,
후다닥…!
관도 옆의 숲속으로부터 병약해 보이는 촌노(村老) 한 명이 비틀거리며 뛰쳐나왔다.
이어 숲 안에서 살기등등한 외침이 들려왔다.
[게 섰거라!]
흉흉한 노갈과 함께 장검을 뽑아든 세 명의 황의노인이 뛰쳐나왔다.
당장이라도 촌노를 쳐죽일 듯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세 명의 황의노인들은
놀랍게도 나부사흉 가운데 첫째인 탁천을 제외한 나머지 삼형제들이 아닌가?
시퍼런 검을 번뜩이며 촌노 뒤를 는 나부삼흉과
그에 쫓기는 촌노의 등장에 백의여인은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바로 그순간 촌노는 다급한 모습으로 백의여인에게 구원을 청했다.
[사… 사람 살려요! 나… 낭자! 저 좀 구해주십시오!]
백의여인의 앞으로 달려가던 촌노의 몸엔
검상(劍傷)이 서너 군데 나 있어 피로 옷이 물들여져 있었다.
백의여인의 망사가 가볍게 출렁였다.
아마도 촌노의 무참한 모습을 보고 크게 분개한 듯싶었다.
그때 촌노가 관도 위에 쓰러졌다.
찰라 나부사흉 중 둘째인 탁운이 소리쳤다.
[이 늙은이야! 보물만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줄 테니 어서 보물을 내놓아라!]
노갈과 함께 탁운 등 세 형제는 쓰러진 촌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덮쳐갔다.
쌔액-
탁운의 검이 허공을 그으며 쓰러진 촌노의 등을 찔러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라!]
휙-!
앙칼진 교갈과 함께 백의여인은 물찬 제비처럼 신형을 날려
탁운 등 세 형제의 앞에 내려섰다.
탁운 등 세 형제는 백의여인을 노려보며 살기등등한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네년은 어디서 굴러온 계집인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냐? 썩 물러가라!
그렇치 않으면 네년마저 죽여 없애 버리겠다.]
백의여인은 그들 세 형제를 쓸어보며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어디 한 번 죽여봐라!]
[좋다! 화는 네년이 자초한 것이니 내 손에 죽더라도 원망을 마라!]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탁운 등 세 형제는 백의여인을 향해 일제히 덤벼들었다.
[계집, 죽어랏-!]
[캇캇! 홍예살지(紅刈殺指)로 구멍을 뚫어주마!]
쌔애애액- 츄츄츄츄-!
그들의 협공은 추호의 빈틈도 없이 치밀하고 쾌속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백의여인은 반격은커녕 피할 생각조차 않고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게 아닌가?
세 사람의 장검은 이미 그녀의 몸과 간발의 차이밖에 안 되는 곳까지 찔러갔다.
탁운 등 세 사람은 백의여인이 꼼짝없이 죽는 줄 알고 희색이 만연했다.
사실 누가 보든지 백의여인이 피하거나 반격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 그런데 전혀 다른 결과가 벌어졌다.
[으악!]
[컥!]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탁운 등이 검붉은 피를 사방으로 뿌려내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 세 사람은 한결같이 가슴에 호두알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 실로 입이 딱 벌어질 놀라운 출수였다.
백의여인이 무슨 수법으로 탁운 등 세 사람을 일시에 처치했는지
귀신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 사람의 상처로 미루어
그녀가 일종의 지공(指功)을 펼쳤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것도 무형무음(無形無音)의 지공이 틀림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형체도 없었으니까…
한편 누구보다 더 혼비백산한 것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촌노이었다.
기실 그는 나부사흉 중 첫째인 탁천이었다.
탁천은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써 백의여인을 죽이고 구운룡주를 탈취하려 했다
. 하나 졸지에 세 동생이나 잃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피를 나눈 동생들을 한꺼번에 잃었으니 그의 심정은 오죽이나 비통하겠는가?
그는 동생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의여인과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는 피가 끓어오르는 비통을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무공으로는 백의여인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피눈물을 삼켰다.
(내 실력으로 저 계집을 죽인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암습(暗襲)! 계획대로 밀어붙이는 것 뿐이다.)
탁천은 동생들의 복수와 구운룡주를 빼앗기 위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계교를 머릿속에 그리며
계속 쓰러져 있는 척해야만 했다.
이 무렵, 탁운 삼형제를 처치한 백의여인은 서서히 몸을 돌려 탁천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악도들을 처치했으니 이젠 염려하지 마세요.]
하지만 탁천은 실신한 척하며 아무 소리도 않했다.
백의여인은 몸을 굽혀 그의 상체를 살펴보았다.
[이대로두면 출혈이 심해 돌아가시겠다. 일단 상처를 지혈부터 해야겠는데…]
백의여인은 혼자 중얼거리며 품 속에서 하얀 분말의 약을 꺼내어
탁천의 검상 부위에 발라주기 시작했다.
이때,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탁천의 오른손 식지와 중지가 아주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슷…
그의 그 두 손가락은 방심하고 있는 백의여인의 중부혈(中部穴)을 향해 살며시 뻗쳐갔다.
백의여인은 그의 암습을 눈치조차 못 채고 있었다.
기실 백의여인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탁천의 암습을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그같은 상황에서 탁천을 의심하고 방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마침내 탁천의 식지와 중지는 정확하게 백의여인의 중부혈을 찍었다.
파팍-!
[아니! 이게 무슨…]
백의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탁천을 노려보았다.
탁천은 득의의 냉소를 날리며 벌떡 일어섰다.
[흐흐흐! 네년이 내 손에 걸려든 이상 무사할 것 같으냐?]
탁천은 득의만면하면서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人皮面具)를 벗었다.
[아니! 네놈은 쌍부혈마 탁천…!]
백의여인은 그제서야 탁천의 흉계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경악과 분노에 파르르 떨었다.
탁천은 불쑥 손을 내밀며 살기어린 음성으로 외쳤다.
[이년! 죽기 전에 어서 구운룡주나 내놓아라!]
백의여인은 움찔하더니 성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네놈은 구운룡주를 탈취하기 위해 이런 흉계를 부렸단 말이냐?]
[그렇다! 그러니 어서 구운룡주를 내놓아라!]
백의여인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같은 악적에게 죽어도 구운룡주를 내줄 수 없다!]
일순, 탁천의 두 눈에선 무서운 살기가 번뜩였다.
[흐흐흐…오냐! 정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계집이로군,
그렇다면 동생들의 원수도 갚을 겸 네년이 얼마나 잘났는지 알아볼 겸
이 어르신께서 네년에게 최고의 황홀을 맛보게 해 주겠다.]
탁천은 품 안에서 은납(銀納)으로 밀봉된 한 알의 작은 알약을 꺼냈다.
[환락춘음산(歡樂春陰散)! 네년을 가장 처참하게 짓밟아 죽은 동생들의 원혼을 달래주겠다.]
[무…무슨 짓이냐!]
백의여인의 음성이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환락춘음산에 중독되면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환락춘음산(歡樂春陰散)!
이름 그대로 일종의 춘약(春藥)이다.
하지만 워낙 독성이 강해 일반 춘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것으로
일단 복용하게되면 정기(精氣)가 고갈될 때까지 음양교합(陰陽交合)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끝내 목내이(木乃伊:미이라)처럼 정기가 빠져나가 죽음을 당하고 마는 무서운 춘약이다.
저주(詛呪)의 춘약이란 말이 나돌정도이기 때문에
흑도인들도 사용하기를 꺼리는 금약(禁藥)이 바로 환락춘음산이다.
탁천은 환락춘음산을 싼 은납을 부시며 말했다.
[무슨 짓은 무슨 짓이겠느냐? 네년 살맛을 본 후 구운룡주를 빼앗겠다!]
그는 백의여인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낚아채갔다.
이미 중부혈이 제압당해 무공을 쓸 수 없게 된 백의여인은 눈앞이 아찔했다.
구운룡주를 빼앗기는 것도 억울한데 몸까지 더럽혀져야 하니 어찌 분하지 않으랴?
하나 지금의 그녀는 한낱 궁지에 몰린 쥐일 뿐이었다.
(아…여기서 한을 품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이 닥쳐왔다.
[흐흐! 앙탈해도 소용없다!]
탁천은 여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환락춘음산을 먹이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탁천!]
싸늘한 외침과 함께 한 줄기 흑영(黑影)이 탁천의 등 뒤에 내려섰다.
[웬 놈이냐!]
살기 서린 폭갈과 함께 탁천은 일 장 옆으로 피하며 홱 몸을 돌려 나타난 사람을 쳐다보았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그가 태평주루에서 보았던 흑의청년이었다.
흑의청년, 즉 단사영을 바라보며 탁천은 냉랭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크크! 애송이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네놈은 노부의 일을 방해했으니 절대 살려줄 수 없다!]
단사영은 싸늘하게 말을 꺼냈다.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탁천!]
탁천은 가소롭다는 듯이 냉소를 날렸다.
[흐흐흐… 능력? 네놈 정도는 일장이면 조용히 황천으로 보낼 수 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탁천은 단사영을 향해 비호처럼 덮쳐가며 일장을 격출했다.
쐐액--
마치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듯 예리한 경풍이 그의 장심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탁천이 자랑하는 성명절기인 부혈장(斧血掌)이었다.
장력의 기운이 도끼처럼 무거우면서도 날카로운 부혈장은
스치는 모든 것을 그 즉시 반으로 쪼개어 버린다.
단사영은 오른손으로 대천신력(大天神力)을 일으켰다.
일순, 그의 장심에선 눈부신 홍광(紅光)이 번쩍하며 폭사되어 나왔다.
번쩍! 화르르륵…
탁천은 그의 장력이 바위라도 녹일 듯이 뜨거운 열류를 발하자 대경실색하며 황망히 피했다.
꽝-!
그가 서 있던 자리의 땅이 입을 쩍 벌리며 갈라지고 주변이 새까맣게 그을렸다.
만약 조금만 늦게 피했다면 탁천의 몸은 통구이가 되었을 것이다.
탁천은 등줄기에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서운 고수다. 대수롭지 않게 보았는데 자칫하다가는 놈에게 죽을지도 모르겠다.)
탁천은 대번에 단사영이 자기 실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정고수임을 깨달았다.
바로 그 순간,
[흥!]
단사영은 냉랭히 코웃음을 치며 이번에는 분양지(分陽指)를 전개하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때다.
화르르륵…
탁천은 공중에서 서너바퀴를 제비를 돌고는 백의여인 옆에 떨어졌다.
동시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 몸 앞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멈춰랏!]
백의여인은 졸지에 탁천의 방패가 되고 말았다.
탁천은 득의하며 오른손으로 백의여인의 목을 눌렀다.
[흐흐흐, 놈, 네놈도 이 계집이 지닌 구운룡주가 탐이나 나타난 것 같은데
허튼 짓을 하면 이 계집 죽는 것을 먼저 보게 될 것이다.]
탁천은 일단 백의여인을 방패삼아 시간을 벌 수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사영의 입에서 냉냉한 말이 튀어나왔다.
[탁천, 나는 정인군자가 아니다!]
추앗-!
단사영은 백의여인의 생사 따위는 돌보지도 않고 지풍을 격출했다.
[앗!]
탁천과 백의여인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졌다.
설마하니 단사영이 백의여인을 돌보지않고 살수를 펼칠 줄은 상상치 못했던 것이다.
탁천은 혼비백산하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두 손에 힘이 가해졌다.
퍽! 스스슥…
[악!]
두 개의 서로 다른 소리가 들렸다.
한 소리는 탁천의 왼손에 여전히 들려져 있던 환락춘음산이
그가 손에 힘을 주자 터지며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소리였고,
다른 신음소리는 백의여인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탁천의 오른 손에 목이 잡힌 백의여인은 놀란 나머지 힘을 준 탁천의 악력(握力)에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 직후,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뿌려졌다.
탁천의 양미간 사이에 엄지 손가락만한 구멍이 뻥뚫린 채 뒤로 자빠졌다.
그와 동시 탁천에게 잡힌 머리채가 풀린 백의여인은
일시 맥이 빠지는 충격과 함께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사영은 잠시 묵묵히 서 있더니 백의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지풍을 발출했다.
파팍-
백의여인은 혈도가 풀리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앙칼진 음성으로 쏘아부쳤다.
[하마터면 나까지 죽을 뻔했잖아요? 자칫 잘못해서 내가 맞았으면 어쩔뻔 했어요?]
[그래서 맞았소?]
[…?]
단사영의 무뚝뚝한 말에 백의여인은 일시 멍해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단사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어쨋든 당신은 살고 저 자는 죽었지 않소.]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백의여인은 속으로 열불이 터졌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눈 앞의 흑의인 말대로 쌍부혈마 탁천이 곱게 두 사람을 살려보낼 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백의여인은 살았고 탁천은 죽었다. 그 사실 하나면 족한 것이다.
[당신 말이 맞군요, 구해주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어요.
그런데 공자의 대명은 어찌 되나요? 은인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군요.]
공손히 예를 취하는 듯하지만 아직도 아까의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듯
그녀의 음성 속에는 화가 남아 있어 다소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단사영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 않고 대꾸했다.
[단사영(段社煐).]
찰라 백의여인의 얼굴을 가린 면사가 파르르 떨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가냘픈 어깨도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말 은공이 오 년 전에 실종된 검성(劍城)의 소성주
다정공자(多情公子) 단사영이란 말인가요?]
[다정공자는 죽었소, 오 년 전 그 날…]
[아…]
백의여인은 끝내 가슴의 격동을 금치 못하며 신형을 휘청였다.
-다정공자(多情公子) 단사영(段社煐)!
이 이름은 오 년 전만 해도 강호의 뭇 여협녀들 가슴 속에
설레임이란 말로 가득차게 했던 이름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철혈검제(鐵血劍帝) 단천학(段天鶴)의
일점혈육이라는 막강한 배경(背景),
문(文)으로는 한림대학사(翰林大學士)을 역임한 청풍선생(靑風先生)의 제자요,
무(武)로는 부친의 절기는 물론 백도무림의 정중무학들을 두루 섭렵한 청년고수가 아니던가?
그가 강호종횡하던 일년 동안 검성의 이름은 더욱 빛났고,
사마의 무리들은 쥐구멍찾기 바빴다.
더우기 그 뛰어난 용모로 인해 강호소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다정공자가 아니던가?
단사영은 백의여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낭자께 몇 가지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 줄 수 있겠소?]
그가 백의여인을 낭자라고 부른 것은 그녀의 음성이 소녀처럼 앳되고 아름다왔기 때문이다.
백의여인은 은쟁반에 옥을 굴리는 듯한 맑고 고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저의 내력 이외엔 사실대로 대답해 드리겠어요.]
단사영이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백의여인의 신세내력이다.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본인은 먼저 낭자께서 구운룡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알고 싶소.]
[사실이에요.]
단사영은 경악과 흥분을 금치 못해 전신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럼 구운룡주가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도 알고 있소?]
[단공자께서도 구운룡주의 비밀을 알고 계시군요.]
백의여인은 오히려 단사영에게 되물었다.
단사영의 검미가 꿈뜰거렸다.
단사영의 그녀의 말을 통해 이미 구운룡주의 비밀을 그녀가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단사영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낭자는 그 물건이 어떤 건지 알고 있으면서 버젓이 강호를 횡행한단 말이오?]
[내 일신을 지킬 정도의 무공은 소녀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탁천에게 당했소?]
[그건…]
[강호란 무공만 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 아니오.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어느 때는 무공보다 계략에 의해 승패가 좌우되기도 하오.]
[모습과 기운은 변했어도 오 년 전 그대로군요.]
백의여인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인정을 베풀던 다정공자의 소문이
결코 허튼 소문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달았어요.]
[다정공자는 이미 죽었소.]
[아니에요, 지금 소녀 앞에 서 있는 분은 분명 다정공자에요.
다만 한가지 달라진게 있다면 예전엔 밝으셨는데 지금은 너무나 우울하다는 것 뿐이에요.]
[날 알고 있소?]
[풋, 오늘 처음 뵈어요,
하지만 오 년 전 소녀는 당시 강호에 떠도는 공자님의 소문을 귀에 따갑게 들었지요,
그 소문은 열 여섯 어린 소녀에게도 꿈을 꾸게 했을 정도였죠.]
[……]
단사영은 눈 앞의 백의여인이 이십일 세의 여인임을 알았다.
하나 왠지 그녀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나부사흉을 뒤쫓은 이유는 건곤마존의 무공을 익힌 백의여인의 내력과
그녀가 진정 구운룡주를 지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지난 과거를 들추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사영은 안색을 차갑게 굳히며 입을 열었다.
[건곤마존의 무공을 믿고 버젓이 화를 불러올 구운룡주를 지니고 다니다니
… 낭자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군.]
[단공자께서는 소녀가 건곤마존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하고 계시죠?
하지만 소녀는 건곤마존의 후예는 아니에요,
물론 그의 무공을 익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니 공자님과 아무런 갈등의 있을 수 없지요.]
백 년 동안 마도무림을 통치해온 건곤마존을 강호상에서 없앤 사람이 철혈검제 단천학이다.
자연 건곤마존의 무공을 익힌 백의여인과 철혈검제의 아들인 단사영 사이엔
사문에 얽힌 원한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백의여인은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백의여인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소녀의 신세내력을 밝히지 못함을 다시 한번 양해 부탁드려요.]
[말못하는 내력엔 건곤마존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소?]
[단공자님 말씀이 맞아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좋소, 나 역시 상대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알고 싶지는 않소.
하나 한 가지 분명해 둘 것이 있소.]
[무엇인가요?]
[이 길로 즉시 강호를 떠나시오.]
[구운룡주 때문인가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기실 소녀가 구운룡주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은 소녀 스스로 퍼뜨린 것이에요.]
[음…!]
단사영은 그녀의 말에 무거운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 자기를 죽여달라고 광고하는 여인이 눈 앞에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으랴?
그런데 백의여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소녀가 그런 소문을 퍼뜨린 데에는 피치못할 이유가 있어요.
그건 그렇고…단공자님…주위가 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나요?]
[……?]
단사영의 눈에 의아한 빛이 일렁였다. 그는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특별한 것이 눈에 띠지는 않았다.
대로상에 죽어 있는 나부사흉의 시신 외엔 사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돌연 단사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냄새!
분명 이상한 냄새가 났다.
산중에서 자연히 우러나는 풀내음이 아니다.
나부사흉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피비린내(血香) 역시 아니다.
꽃의 향기 같기도 하고, 여인네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쓰는 분냄새 같기도 한
향긋한 향기가 분명 공기 중에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절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게 흐르는 향긋한 냄새…
(혹시 이 냄새는…?)
흠칫 놀란 단사영은 급히 백의여인을 바라보았다.
[낭자, 조금 전 탁천이 무엇인가를 들고 낭자를 핍박하는 것 같던데 그 작은 단환이 무엇이었소?]
헌데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으흐흥…공…공자님…그…그건…환락…환락춘음산이라고…]
백의여인의 자세가 눈에 띠게 흐드러졌다.
찰라지간 단사영의 검미가 찡그려졌다.
(아뿔싸! 놈이 죽기 전에 환락춘음산을 터뜨렸구나!)
그렇다!
탁천이 백의여인에게 복용시키려고 꺼냈던 환락춘음산!
그러나 그것을 백의여인에게 먹이기 전에 단사영이 나타나
미쳐 치우지 못한 채 손에 쥐고 있었다가 그만 터져 버린 환락춘음산의 가루가
지금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
비록 깨져 버렸지만 그 춘독(春毒)은 극히 강해
냄새만으로도 사람의 욕정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더욱이 백의여인은 처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단사영과 말을 나누는 데에 신경을 쓰다보니 미처 냄새의 정체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자연 그녀는 다량의 환락춘음산 가루를 들이마신 후였고
몸이 점차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때는 늦었다.
[으으…]
백의여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털썩 쓰러졌다.
단사영이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환락춘음산의 춘독이 그녀의 혈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백의여인은 이성과 본능의 기로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는 그녀의 눈은 당혹과 애원의 눈길로 단사영에게 향해 있었다.
면사를 쓰고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흔들리는 면사만보아도
그녀의 고충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것 같았다.
묘한 신음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으으…아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목숨을 잃으리라는 것은 물보듯 뻔한 일이다.
백의여인의 가쁜 신음 사이로 간간히 한숨이 새어나왔다.
헌데 그러한 증상은 그녀 혼자만이 갖는 것이 아니었다.
단사영의 차가운 얼굴에도 뜨거운 기운이 차츰 번지고 있었다.
그 역시 공기 중에 흐르는 환락춘음산 가루를 들이마신 탓에
점차 혈맥이 팽창하고 욕화가 치미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신 분량은 극히 미량(微量)이었다.
운기조식을 하여 체내의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태워 없앨 수 있는 분량에 지나지 않았다.
백의여인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단사영을 바라보았다.
[아…으음…]
살기 위해 저 흑발귀신같은 사내가 자신을 범해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저 사내에게 안기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나 한 순간,
[가요! 어서 가버려요!]
전신 혈맥이 터지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지 못한 그녀는
자신의 심중과는 다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문득 심연처럼 흔들림이 없던 단사영의 눈에 파랑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짧은 순간 갈등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냉정히 몸을 돌렸다.
그녀가 죽건, 말건, 지나던 사람 아무나 붙잡고 욕정을 풀 건 말 건 상관없다는 듯
그의 돌아선 뒷모습은 냉냉했다.
[가! 어서 사라져! 크으응…]
등 뒤로부터 백의여인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그와 상반되는 뜨거운 교성이 들려왔다.
저벅…저벅…
단사영은 무정히 걸음을 떼었다. 그가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돌연 그의 발걸음을 잡는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크윽! 가지 말아요! 당신이 원하는 것 무엇이든 줄 테니…
제발…이대로 죽기엔 너무나 억울해…원수를 갚지 못하고…
복수를 해야하는데… 흐윽! 날 살려 줘요 제발!]
(원수, 복수!)
단사영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때 다시금 백의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것도…크흐흑! 짐이 되지 않을 테니…
제발…이대로 죽으면 구천에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줄 수 없어…
원수를 갚을 수 있게…제발 날 안아줘…
그녀의 말에 단사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구운룡주를 미끼로 무엇인가가 걸려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 자기 목숨을 미끼로 원수를 찾아다녔단 말인가?)
그녀의 말을 통해 비로소 단사영은 백의여인도 일신에 처절한 한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기 목숨을 미끼로 할 정도로 처절한 원한을 지닌 여인!
그 때문인지 냉냉하던 단사영의 몸이 빙글 돌아섰다.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 역시 나 못지 않은 한을 지닌 장한녀(長恨女)이기 때문에 구하는 것 뿐이다.)
백의여인의 모습에서 왜 설연청의 모습을 보았을까?
정인에게 배신을 당한 나머지 여살성이 되어 버린 설연청의 한과 증오를
백의여인에게서 다시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심정에 이끌려 단사영은 백의여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것이 세상을 한과 증오로 바라보며, 마음에 복수심을 지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생각하며…
백의여인 근처로 다가온 단사영은
어느새 뜨겁게 달라올라 헐떡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지풍을 날렸다.
[끄응…]
혈도가 찍힌 백의여인은 축 늘어졌다.
(여기선 서로 곤란하지…)
숲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산신묘(山神廟)!
비록 오래되고 낡았지만 안은 비교적 깨끗했다.
단사영은 백의여인을 반듯이 눕히고는 조심스럽게 옷을 벗겨갔다.
그러는 그의 손끝엔 파르르 경련이 일고 있었다.
또한 그의 차갑던 얼굴에도 은은한 홍조가 어려 있었다.
(나도 견디기 힘들다. 이미 운기조식으로 춘독을 뽑아내기엔 늦었다.)
미량이라 하지만 춘독은 춘독이었다.
단사영 역시 춘독을 해소시킬 시기를 놓쳐 혈맥을 타고 도는 욕정을 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윽고 백의여인의 옷이 벗겨지고 나신이 드러났다.
인적없는 황량한 산 속의 산신묘 안에서 옷을 벗은 절세미인의 나신은
기가막힌 조물주의 걸작이었다.
희고 동그런 두 어깨에서 뻗어내린 두 팔, 가슴에 봉긋 솟아난
풍만하고 육감적인 두 개의 젖가슴,
그 위에 수줍은 듯이 달려 있는 두 알의 포도송이
……
투명한 아랫배로 흐르는 감미로운 선, 매끈하게 흐르는 선정적인 잘룩한 허리의 굴곡!
아아! 이같이 기가 막히고 뇌살적인 몸매가 또 있을까?
풍만한 젖가슴은 농익어 터져나갈 것 같았으며 잘룩한 허리는 자극적으로 가늘었다.
그녀의 두 허벅지 사이 삼림(森林)은 무성하여 사나이로 하여금 미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든다.
더욱이 나신의 여체가 비비꼬며 야릇한 교성을 연신 발하고 있다.
[아아…!]
적나라한 나신을 바라보는 무심한 단사영의 눈길 역시 화끈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나 좀…나 좀 안아 줘…]
여인은 마구 몸을 꼬며 야릇한 교성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쁜 숨결이 토해져 나올 때마다 얼굴을 가린 망사로 된 면사가 흔들거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뚱아리,
이성은 이미 강건너 갔건만 여인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면사를 벗어던지지 않았다.
절박한 가운데서도 명사만은 벗지 않으려는 묘한 이성의 몸부림인가?
허긴 단사영 역시 그녀의 옷을 벗겼지만 굳이 얼굴을 확인하고저 면사를 벗기지는 않았다.
어쨋든,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몸은 불덩어리같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단사영도 옷을 벗엇다.
그는 불같은 그녀의 나신을 끌어안았다.
그가 여인의 혈도를 풀자 여인은 마치 발정난 암고양이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아아…어서…]
매그러운 여체를 안자 단사영의 이성이 무너진다.
그는 본능에 이끌려 여체를 애무했다.
사내가 여체를 탐해가자 여인은 열락의 교성을 질렀다.
그녀의 몸은 활처럼 뒤로 젖혀졌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채 마구 온 몸을 짖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여인은 영혼과 육신, 모든 의식까지도 사내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고 말았다.
사내는 난폭한 군왕이었다.
[아아…어…어서…]
타오르는 화산처럼 터질 것만 같은 육신을 주체하기엔 그녀의 정신은 너무나 몽롱했다.
두 남녀의 나신은 극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내는 자신의 불기둥을 여인의 몸 안으로 가져갔다.
여인의 깊은 동굴입구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사내는 그 미끈덩한 늪지로 자신의 무쇠기둥을 서서히 밀어넣었다.
[아--악!]
한순간 여인은 엄청난 고통에 그만 눈을 흡뜨며 사내를 꽈악 힘주어 안아야만 했다.
어깨를 쥔 손가락의 손톱은 몸을 반으로 쪼개는 듯한 극통에
사내의 살을 찢고 파고들어가 피를 보고 말았다.
그와 아울러 한껏 사내의 우람한 불기둥을 먹어치운 그녀의 밀궁 안으로부터도
선연한 피가 한줄기 내비치기 시작하였다.
앵혈(櫻血)! 처녀지신(處女之身)이 깨지는 파과(破瓜)의 눈물이었다.
[학…학…]
단사영은 거친 숨을 토해내야만 했다.
여인의 뜨거운 욕정이 그를 미친 말처럼 마구 채찍질했다.
미친 듯한 열기와 격렬한 열풍이 두 남녀를 달구어진 용광로에 집어 넣은 채
욕망의 나락을 향해 떨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나신은 한 올의 공간도 없이 밀착된 채 한없는 세계를 향해 내달렸다.
격렬한 몸부림과 함께 가쁜 숨결이 산신묘 안을 뜨겁게 달구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가?
넓지 않은 공간(空間) 속에 우주(宇宙)가 멈춰 있었고
그 속에 사내와 여인의 뜨거운 동작이 정지해 있었다.
문득 단사영이 눈을 떴다.
그의 옆에는 면사여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녀의 알몸은 영롱한 빛을 발하며 단사영 눈 앞에 적나라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 그러는 그녀의 하체,
여인의 가장 소중한 곳은 사내에게 유린을 당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폭군에게 당한 나약한 자의 아픔처럼 진홍빛 선혈이 점점이 검은 숲을 젖셔놓고 있었다.
[음…]
단사영은 벌떡 일어났다.
이어 망연한 시선으로 면사여인의 나신을 내려다 보았다.
아름다운 여체였다. 그러나 곧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자조(自照)였다.
그는 조용히 벗어놓은 옷을 입고는 등에 묵직히 여섯 자루의 검을 맸다.
그는 일말의 감정도 없는 눈으로 누워 잠이 든 면사여인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빙글 몸을 돌렸다.
그가 산신묘를 벗어나려고 할 때다.
[당…당신…]
면사여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단사영은 흠칫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그 사이 면사여인이 일어나 앉으며 옷을 걸친 후 입을 열었다.
[그냥 떠나시려는 건가요?]
[………]
그가 말이 없자 야속하다는 듯 면사여인의 면사가 파르르 떨렸다.
[비록 공자님 뜻이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어쨋든 공자님 덕분에 살아난 목숨이에요. 감사드릴게요.]
[……]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 천근 무게의 바위가 짖누르는 듯한 적막에 단사영은 검미를 찌푸렸다.
[달리 할 말이 없다면 난 가봐야겠소.]
순간이었다. 그가 다시금 발을 떼려 하자 면사여인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잠깐만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
[공자께선 어떻게 구운룡주의 비밀을 아시죠? 혹시…]
일순 말꼬리를 흘린 그녀는 얼굴을 가린 면사를 통해 예리한 안광(眼光)을 폭사해냈다.
[혹시 단공자님께선 사대신왕(四大神王) 중 하나의 기연(奇緣)을 얻은 것이 아닌가요?]
[……!]
단사영의 입술이 굳게 다물려졌다
. 그의 얼굴은 이 순간 석고상처럼 단단히 굳어졌다.
면사여인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눈치채고는 놀란 경호성을 발했다.
[호…역시 그랬군요…그럼 실례가 아니라면 어느 것을 얻으셨는지 어쭈어도 될까요?]
그녀의 음성엔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담겨져 있었다.
단사영은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직시하더니 무거운 어조를 흘려냈다.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소, 허나 그보다 먼저 낭자에게 묻고 싶소,
용왕(龍王)의 문을 열었소?]
[조만간 단공자께서는 강호를 위진시키는 빙백용녀(氷魄龍女)란 이름을
귀에 따갑게 듣게 될 거예요.]
[빙백용녀…아마도 낭자의 아호 같군, 용왕의 문을 열었으니 당연히 강호가 시끄럽겠지…]
단사영은 조용히 뇌까려보았다.
-빙백용녀(氷魄龍女)!
이것이 백의여인의 명호인 듯싶었다.
또한 그녀가 그렇게 대답한다는 것은 용왕의 문이 열렸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때 백의여인, 즉 빙백용녀가 입을 열었다.
[이젠 단공자님이 말씀하실 차례예요.]
[본인은 혈왕(血王)의 문을 열었소.]
[축하드려요, 단공자님께서 혈왕의 진전을 이으셨군요.
그럼 전설(傳說)이 사실이었군요, 소녀는 혹시 했는데…
단공자님을 만나뵈니 결코 천기(天機)는 변하지 않음을 알았어요.
그렇다면 조만간 천왕(天王)과 염왕(閻王)의 진전을 이은 사람이 나타나겠군요.]
[아마 그럴 것이오.]
[……]
빙백용녀는 말없이 조용한 눈빛으로 단사영을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대체 거듭 거론되는 사대신왕의 전설이란 무엇일까?
-사대신왕(四大神王)의 전설(傳說)!
강호 무림의 기원(紀元)을 말할 때 어떤 이는 인간이 힘(力)을 키우고,
손발을 발달시키고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 무림의 기원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무림의 기원을 강호 협걸들이 대륙을 종횡하던
군웅할거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을 기원으로 삼는다.
지금으로부터 따진다면 대략 이천 년(二千年) 역사(歷史)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강호 무림이란 세계를 만들고 그 기틀을 이룬 네 명의 신인(神人)이
대륙을 종횡했던 천오백여 년 전을 진정한 무림계의 시작이라 보는 이가 상당수 있으니…
그들 네 명의 신인들을 일컫어 사대신왕(四大神王)이라 했다.
-혈왕(血王)!
모든 죽음을 관장해온 마(魔)의 기원(紀元)!
당금 무림에 있어 마학(魔學)들 가운데
그 뿌리를 혈왕지무(血王之武)에 두지 않는 절정마학은 없다
. 가히 마의 요람이라 말할 수 있는 신인이 바로 혈왕이다.
-천왕(天王)!
모든 삶과 생명을 보호하는 의협(義俠)의 원조(元祖)!
불도속(佛道俗)의 정종삼학(正宗三學)은 물론
지고한 오의를 지닌 유문(儒門)의 정통무학까지 두루 섭렵하고
그 정대함을 더욱 빛나게 한 신인이 바로 천왕이다.
-염왕(閻王)!
세상을 도탄으로 몰고가는 온갖 사이(似而)와 요악(妖惡)의 근원(根源)이며
뿌리가 바로 염왕이다.
염왕은 혈왕처럼 패(覇)를 통한 군림(君臨)을 바라지도 않으며
천왕처럼 세상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불태우지도 않는다.
오직 그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혼돈(混沌)과 질서(秩序)의 파괴(破壞)뿐이다.
-용왕(龍王)!
사대신왕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신인이다.
그는 마(魔)도, 정(正)도 아님은 물론 염왕처럼 세상을 도탄으로 몰고 가는 자 또한 아니었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였다.
그의 깊은 오의(奧意)를 지닌 무론(武論)은 어떤 면에선 가장 정종무학적인 이론이지만
반면 패도적인 면마저 지니고 있어
혈왕의 혈왕지무조차 한 수 물러줘야 할 정도로 파천황적인 힘마저 지닌다.
무론을 놓고 따진다면 자연 용왕이 사대신왕 가운데 가장 강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의 무론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대자연의 힘을 이론상 집약하긴 했지만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
그것을 펼칠수는 없다는 점이다.
오직 신과 같이 동화된 자이거나
, 신이 인정한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꿈의 무학이 용왕의 무학이다.
그러나 그가 지닌 이론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빙산일각(氷山一角)이긴 하지만 용왕의 초자연력(超自然力)의 일부를
그는 무학으로 정리 인세에 남겼다.
그 초자연력이 그를 사대신왕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 것이다.
마(魔)의 요람(要覽) 혈왕(血王)-
정종무학(正宗武學)의 원조(元祖) 천왕(天王)-
혼돈(混沌)과 파괴(破壞)의 근원(根源) 염왕(閻王)-
초자연력(超自然力)의 용왕(龍王)-
그들 사대신왕은 동시대에 무림에 나타났다.
만약 그들 중 한 사람만이 그 시대를 관장했다면 무림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하나 동시대에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네 명의 신인이 태어남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자신의 역량을 더욱 돋구어 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 사대신왕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만치
힘(力)과 무리(武理)에 있어 백중지세(伯仲之勢)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대방보다 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혼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러한 노력은 그들을 따르는 수 많은 강호인들에게 거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대신왕이 홀연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동시에 강호에 나타났고,
이백여 년 동안 강호 무림이란 곳의 체계의 기틀을 닦은 후 약속이라도 한 듯 사라진 것이다.
그들을 따르던 수많은 강호인들이 사대신왕을 찾았지만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진 듯 그 종적이 묘연했다.
그 후, 강호 무림은 사대신왕이 다져논 기반을 토대로 무공을 더욱 발전시켜와
당금에 이르게 된다.
강호엔 수많은 무류(武流)가 존재하지만
그 뿌리를 캐보면 사대신왕이 이룩해 놓은 무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점만 보아도 사대신왕의 위대성을 가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허면 사대신왕은 이런 엄청난 일을 만들어놓고 왜 홀연히 사라진 것일까?
수많은 억측이 분분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이 바로 천하쟁패설(天下爭覇說)이다.
서로의 힘을 견주어 보던 사대신왕은 결국 모처에 모여 찬하웅주의 자리를 놓고 결투를 벌였지만
승패를 가릴 수 없어 훗날을 기약한 채 강호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대신왕은 자신들이 지닌 신력(神力)을 이을 기재를 기다리기 시작했고
각기 신물(身物)을 만들어 그 신물에 얽힌 비밀을 푼 자를 전인으로 삼아
못다 이룬 승패를 겨룬다는 말이 구전(口傳)으로 회자(膾炙)되었다.
과연 그럴까? 그들은 자웅을 벌였으나 승패를 결할수 없어
후대(後代)에게 모든 업을 넘겨주었을까?
그리고 후대들 대에 이르러 진정한 승자가 나타나면
그는 천하웅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일까?
그 대답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한낱 낭설일 수도 있고, 액면 그대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천하쟁패설의 신빙성을 뒷받침이라도 하듯하나의 깃발(幡)이
천 년 전 강호에 나타나 강호 무림을 일대 혼란으로 몰고간 적이 있었다.
-천왕번(天王幡)!
사대신왕 가운데 정중무학의 원조라는 천왕이 이 세상에 남겼다는 신물(身物)!
비단 한 마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지만 푸른 색 바탕에 흰색이 선명한 천왕(天王)이란 글과
그 글씨 아래 그려진 한 자루 검(劍)의 모습은
천오백 년 전 홀연히 사라진 천왕의 제왕천검(帝王天劍)과 너무나 닮았다고 전한다.
천 년 전 천왕번이 나타났을 때 강호인들은 천왕이 천왕번에 절기를 새겨놓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강호를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드는 가운데 수십 명이 천왕번을 손아귀에 쥐었지만
천왕번은 그저 푸른 비단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강호인들은 천왕번 안에 천왕의 비밀이 서려 있음을 철석같이 믿었다.
천왕번은 무려 백 년 동안 강호를 떠돌며 죽음과 욕망을 준 후 갑자기 사라졌다.
사대신왕의 전설은 그들이 남겼다는 신물을 통해 전인을 찾고,
그 후대에서 천하웅주를 놓고 겨룰 천하쟁패설이라는 야망(野望)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렇다!
-구운룡주(九雲龍珠)!
아홉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비상하는 모습이 새겨진 구운룡주는
바로 용왕(龍王)이 남긴 신물이었다.
더불어 검성이 피바다 속에 묻혀진 이유는
바로 혈왕의 신물인 혈왕정(血王鼎)이
철혈검제 단천학 손에 있다는 말로 인해 빚어진 참화(慘禍)였다.
결국 천하쟁패설의 사대신왕 전설은
당금에 이르러 용왕과 혈왕의 진전을 이은 두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기정사실화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천 년 전, 세상에 나타났던 천왕번과
아직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염왕의 신물마저 다시 강호에 나타난다면
천오백 년 전에 승패를 겨루지 못한 사대신왕이
다시금 천하웅주의 자리를 놓고 겨루게 될지도 모르는데…
혈왕정에 의해 검성이 참화를 당하고, 그 자신은 혈왕의 비밀을 풀어
그 진전을 잇게 된 단사영의 복수행과 사대신왕이 이루지 못한 승패는
당금 무림에 어떤 풍운을 가져올 것인지 사뭇 궁금해진다.
단사영은 빙백용녀의 내력이 사뭇 궁금했으나 차마 묻지 못했다.
그때 엉뚱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구운룡주을 보여드릴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단사영의 대답도 듣지 않고 옷 속에서 목합(木閤)을 꺼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단사영에게 건네주었다.
단사영이 목합을 받아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보았다.
촤라라랑…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원주(圓珠)가 들어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오색찬란한 원주에는 과연 아홉 마리의 운룡(雲龍)이 조각되어 있었다.
눈부신 빛을 발하는 그 아홉 마리의 운룡은 어찌나 정교하게 조각되었는지
살아 움직일 듯한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원주의 중심부엔 한 마리의 백룡(白龍)이 새겨져 있었고
팔방(八方)으로 각기 색이 다른
청(靑), 황(黃), 적(赤), 흑(黑), 취(翠), 갈(葛), 남(藍), 녹색(綠色)의
여덟 마리 용이 새겨져 있었다.
아홉 마리의 운룡의 모양도 제각기 달랐다.
누워 있는 와룡(臥龍)이 있는가 하면 막 승천(昇天)하려는 모양의 용도 있고,
사해를 누비는 해룡(海龍), 창공을 비상하는 비룡(飛龍)도 있었다.
[아…]
단사영은 구운룡주의 아름다움에 심취되어 넋을 잃고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구운룡주가 용왕의 개세신공을 터득할 수 있다는 신비한 위용은 차제하더라도
그 구슬 자체가 값을 따질 수 없는 천공(天工)의 명주(名珠)라 생각되었다.
단사영은 한참 후에서야 목합의 뚜껑을 닫고 백의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잘보았소.]
빙백용녀는 구운룡주가 들어 있는 목합을 손에 쥐고는 입을 열었다.
[이 구운룡주는 보름달의 월광을 받으면 용왕의 무림기서가 숨겨져 있는 장소가 나타나게 되지요.
그런데…]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중단했다.
빙백용녀는 다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약간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우둔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 용왕과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보름달의 월광을 받아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전혀 알아볼 수 없었어요…]
[………]
[구슬이 보름달의 월광을 받으면 구슬에 새겨져 있는 용이 수배로 확대되어 그림자로 나타나는데,
그 그림자 속에 무슨 그림같기도 하고 글같기도 한 괴이한 도형이 그려져 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수줍은 듯한 태도로 얘기를 계속했다.
[제가 무지한 탓인지 그 괴이한 도형이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단사영은 부지중에 구운룡주가 월광을 받아 나타난다는 그 괴이한 도형(圖形)이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하지만 그는 빙백용녀에게
'내가 알아볼 테니 구운룡주를 빌려주시오'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구운룡주가 어떤 물건인데 그가 빌려 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게 사람 마음이련가?
빙백용녀는 뜻밖에도 단사영의 그러한 마음을 간파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공자께서 괴이한 도형을 알고 싶다면 구운룡주를 빌려드리겠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빙백용녀는 구운룡주가 들어 있는 목합을 단사영에게 내미는 게 아닌가?
단사영은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빙백용녀가 구운룡주를 자진해서 빌려주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빙백용녀는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구운룡주를 빌려주려는 것일까?
혹시 그녀는 단사영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요,
자신을 처음 안은 사내이기 때문에 구운룡주를 빌려주려는 게 아닐까?
단사영의 입장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쨋든 단사영은 구운룡주가 들어 있는 목합을 선뜻 받지 못하고 망설였다.
[받을 수 없소.]
빙백용녀는 망사를 통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인가요? 선대에 얽힌 업(業) 때문인가요?]
[그건…]
[알아요. 비록 전부를 해독하지는 못했지만 일부를 해독한 결과
강호 전설처럼 사대천왕은 태산(泰山) 관일봉(貫日峰)에서 천하웅주의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어요
. 하지만 승자는 없고 모두 동패구상을 당하고 말았지요.
그들은 훗날을 다시 기약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익힌 그들이라 해도
천수(天壽)가 다했음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하여 자신들 대에서 이루지 못한 승부를 후대로 미루게 되었어요.]
[………]
[천기를 살핀 그들은 무려 천사백 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서 자신들의 진전을 이을 네 명의 신성(神星)들이 세상에 나타남을 알게되었지요.
사대신왕은 그들 신성들과 자신들을 운명으로 엮어놓았어요.
바로 그들이 남긴 네 개의 신물이 그것이에요.]
[………]
[천 년 전 천왕의 천왕번이 강호에 나타나긴 했지만
진정한 전인을 만나지 못한 채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지요.
아마 천왕의 후예 중 누군가가 천사백년 세월을 기다릴 수 없어
절세기재를 찿기 위해 강호에 일부러 흘려낸 것 같았지만
사대신물의 비밀은 천사백년 전의 사대신왕이 예견한 네 명의 신성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겐 그저 신비로운 물건일 뿐 그 비밀을 보여주지 않지요.]
[……]
[억울한 일이지만
소녀는 사대신왕이 예견한 네 명의 신성 가운데 한 사람이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소녀가 네 명의 신성 중 한 사람이었다면
용왕의 문을 열었을 것이 당연한데…풋, 열지 못했거든요.]
[음…]
[소녀가 푼 것은 구운룡주를 보름날 자정에 월광에 비추면
용의 그림자가(龍影)이 나타난다는 것과
그 그림자가 어떤 도형(圖形)을 말하며,
그 도형을 해독하면 용왕의 무림기서가 장진되어 있는 장소가 나온다는 것 뿐이에요. ]
[……]
[도형이 나타내는 장소를 도저히 풀 수 없었죠,
그러나 오기가 발동한 소녀는 연구를 거듭했고
아홉 마리의 용그림자 속에 또 다른 비밀이 있음을 알아냈어요.]
[또 다른 비밀?]
[아홉 마리의 용은 각각 하나의 절기(絶氣)를 감추고 있어요.
이름하여 구룡비예(九龍秘藝)라 하죠.]
[구룡비예…]
[소녀는 구룡비예 가운데 네 가지를 터득했어요.
그 네가지를 터득하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십년이죠.
하나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었고
구룡사예만으로도 능히 일신을 보호할 자신이 있어 강호에 나온 거지요.]
[그렇다면 아직 다섯 개의 절기가 이 구운룡주에 남아 있단 말이군.]
[그래요, 소녀가 푼 것은 적(赤), 황(黃), 흑(黑), 녹(綠)의 네 마리 용이 지닌 절기예요.]
[정말 대담한 낭자로군,
만약 이 물건이 사마외도들 손에 들어간다면 어쩔려고 버젓이 이걸 지니고 다니는 거요.]
[이젠 그럴 염려가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이제부터 구운룡주는 단공자님께서 보관하시게 될 테니까
소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해도
구운룡주가 사마도들에게 뺏기지는 않을 것이 아니에요.]
[………!]
단사영은 일시 아연해졌다.
빙백용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강호인들은 여전히 소녀가 지니고 다니는 것으로 알 테니까
공자님께서는 구운룡주의 비밀을 완벽하게 파악하시면 되는 거예요.]
[내게 바라는 것이 뭐요?]
[간단해요. 구운룡주의 비밀을 해독했을 때
소녀와 함께 용왕의 문을 열어준다고 약속만 하면 돼요.]
[날 믿소?]
[믿어요.]
빙백용녀의 단호한 말에 단사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빙백용녀는 단사영을 응시하더니 청아한 음성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소녀는 공자께서 무사히 구운룡주의 그 괴이한 도형의 내용을 해독하시길 빌겠어요.]
이 말이 끝났을 때다.
파팟-!
돌연 빙백용녀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단사영은 급히 산신묘 밖의 숲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만약 용왕의 비밀을 알아내면 어떻게 낭자를 찾소?]
그러자 숲 안에서 빙백용녀의 청아한 웃음이 들려왔다.
[호호호, 그 점은 염려마세요. 구운룡주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소녀는 공자님을 언제라도 찾을 수 있어요.]
단사영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굳어지고 말았다.
[구운룡주 안에 어떤 장난을 쳐놓은 모양이군…]
단사영은 숲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빙백용녀의 기척은 유령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빙백용녀는 떠나갔어도 그녀의 향긋한 체취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단사영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며
빙백용녀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가 빙백용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무공이 추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고하다는 것밖에 없었다.
단사영은 빙백용녀의 정체도,
그녀가 구운룡주를 빌려준 의도도 알 수 없자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군…)
계 속
|
첫댓글 잘 보고갑니다
잘봅니다..~~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