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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우원의 영구(靈柩:시신)를 파내고 보니 광중(壙中)에 물이 거의 한 자 남짓 고여 있었다.
이를 본 정조는 또다시 오열했다.지난 세월동안 아버지의 시신이 물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목이 메이지 않을 수 없었다."<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할아버지 영조가 천하의 흉당으로 알려진 경기도 양주 배봉산(서울 청량리 서울시립대 일대)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묻어버린 것이 정조에게는 더 가슴 아프고 저밀게 하였다.
"어버님,살려주소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처절한 절규를 한시도 잊지 못한 정조이다.
정조는 즉위 즉시 그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기위해 풍수공부에 들어갔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지 13년만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천장하기 위해 그 광중을 연 것이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던 그 아버지 사도세자가 광중의 물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참혹한 현장에서
그 아들 정조는 또다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드디어 용이 엎들여 있는 듯한(龍伏) 수원의
화산(花山) 명당을 사도세자의 천장지으로 찾아 융릉을 조성했다.
지금 그 동네 이름도 참으로 묘하게 용복면(龍伏面)이다.
영조에게는 조강지처가 있었다.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 13세의 나이로 11살인 연잉군(영조)에게 시집을 왔다.그가 원비
정성왕후 서씨었다.
정성왕후가 돌아가자 왕릉풍수에 해박했던 영조는 직접 나서
명당을 찾았다. 그의 왕릉조성공사만 두달 보름씩이나 걸렸다.왕후 오른쪽에 영조의 신후지지 왕릉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공사기간이 길었다.바로 영조의
우허제(右虛制) 왕릉 홍릉(弘陵)이다. 영조는 자신의 우허제 왕릉을 재위 시에도 변함없이 고수하였다고 한다.
그는 왕비 능의 오른쪽에 자신의 수릉을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였고 능위의 석물도 쌍릉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배치하였다.
영조실록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가 승하한 해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진다.
* 능의 혈을 결정하면서 조금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 오른쪽을 비게 하여 정혈(正穴)을 삼도록 하였는데,
임금의 하교를 따른 것이었다.
* 산릉도감에 명하여 홍릉의 오른쪽 비어 있는 곳에 숭릉, 명릉의 예에 의거하여 조각에 ‘십(十)’자 모형을 새겨
정혈에 묻어 표시하게 하였다.
영조가 승하하고 그의 손자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영조의 유언대로 우허제 왕릉에 장사를 치르라!" 정조는 어명을 내렸다.
영조의 국장논의 첫날 영조가 가 조영한 수릉 우허제(右虛制)에 대한 논란이 격하게 일어났다.
처음 산릉을 홍릉에 정했다가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과 예조의 당상에게 명하여 풍수상의 길지를
살펴보도록 했었다. 이에 이현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릉 위쪽의 비워 놓은 자리는 곧 영조께서 유언하신 곳으로서, 선왕께서 오늘날의 처지를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처리해 놓으신 것인데, 어찌 이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풍수의 논리는 땅속의 일이라 아득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니, 선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중요한 관계가 있는 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마땅히 신중하게 살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장릉(長陵)의 동구(洞口) 자리도 또한 먼저 정해 놓은 곳이었으니, 유독 선대왕께서 분부를 남겨 놓은 데가 아닐 수 있겠느냐?”
하고, 이현모의 관직을 박탈하도록 명하였다. 결국 정조의 하교 이후 영조의 왕릉은 현재의 위치인 동구릉 내 영릉으로 결정되었고, 홍릉의 오른쪽은 영원히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능을 서오릉과 정반대 쪽인 동구릉으로 끌고 간 것이다.
홍릉의 오른쪽은 영원히 비어 있는 채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동구릉에서 결정된 영조왕릉 터는 103년 전 효종왕릉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이봉이실(二封二室) 형태의 쌍릉 원릉에 계비 정순왕후 김씨과 함께 잠들어 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장례가 끝난 후 6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중전의 자리를 비워두면
안 되기 때문에 15세의 어린 처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야 했다. 그가 바로 정순왕후다.
장영훈은 <왕릉이야말로 조선의 산 역사다>에서 정조가 영조의 능을
홍릉 우허제에 쓰지 않고 동구릉 원릉으로 정한 이유를 분석했다.
"정조는 고의적으로 영조왕릉을 흉지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가 미웠고
사도세자 묘를 흉지에 쓰게 했던 영조를 용서할 수 없다는 증오 때문이었다."
정조는 영조를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동구릉 파묘자리 흉지에 묻은 것이다.
풍수에서 파묘자리는 혈이 파괴되어 맥이 빠진 자리라 하여 흉지로 친다.
영조는 결국 동구릉 계비 정순왕후 곁에 묻혀 영면한다.
세조가 세상을 뜨자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이 세조의 왕릉 택지에 나섰다.
세종 왕릉(당시 대모산 남쪽인 서초구 내곡동)이 세조의 왕릉 택지로 먼저 천거되었다.
그 곳을 답사한 정인지 등이 쓸 만한 혈이 없다고 해 왕릉택지에서 탈락하였다.
한양 동남쪽 죽산(竹山) 양지(陽智) 산세를 그려 와서 “이곳에 왕릉을 쓰면 복을 대물림할 것입니다.”며
올렸던 한귀(韓貴)의 풍수도를 분석한 결과 흉지라고 판명되었다. 한귀는 즉시 왕명으로 추핵당했다.
왕릉 후보지는 어전회의에서 갑론을박 끝에 세 개의 후보지로 압축되어 갔다.
가장 먼저 광주 땅 이지직(李之直)의 선산이 거론되었으나
정흠지(鄭欽之)의 선산이 더 낫다는 것에 중론이 모아졌다.
연희궁 뒷산(연세대학교 동북쪽 산 아래)이 세 번째로 거론되었으나
산 모양이 기이하고 빼어났다는 품평에 따라 정흠지의 선산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지관 안효례와 경기도사 박숭질을 보내어 정흠지 선산을 살필 수 있게 주위의 나무들을 배도록 하였다.
왕실의 종친들과 대신들 그리고 지관들이 정흠지의 선산으로 몰려가서 혈자리를 찾아 서로 의견들을 논의했다.
정흠지의 무덤은 명혈이지만 단정치는 못하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지관들이 땅을 다지는 적당한 보토(補土)로서 왕릉을 쓸 수 있다고 하자 중론은 그리로 모아졌다.
이때 최호원이 왕릉지 불가론을 주장하다가 후일 추국(推鞫)을 당하는 등 택지 논쟁은 진지했다.
다시 종친과 대신들이 임금과 어전회의를 거친 10월 2일 드디어 예종이 거동하여 앞산까지 오르면서
안산(앞산)과 산줄기의 내맥(來脈, 혈자리로 직접 들어오는 뒤쪽의 산줄기)들을 살폈다.
이때 광릉 택지의 형세 파악에 발군의 풍수 실력을 발휘했던 안효례는 지관 신분으로
일약 정3품인 당상관(堂上官)에 올랐고 정흠지의 선산에 있던 무덤들은 강제 이장을 당하게 되었다.
정흠지의 아들은 정창손(鄭昌孫)으로 세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당시 광릉 택지시 좌익 공신에
봉원군으로 시퍼렇게 살아 있었으나 이러한 문중의 선산도 실세인 후손이 쳐다보는 앞에서
뿌리 채 뽑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10월 4일 8개의 무덤이 매김질된 선상을 송두리째 이장당한 정창손을 달래기 위해 예종은 호조에 전지했다.
“정창손에게 관곽 8개와 유둔(油芚, 기름칠한 천막) 8개, 종이 100권, 쌀과 콩을 100가마 내려주어라.”
여주에 있는 세종의 영릉은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풍수가들은 말한다.
한겨울의 영릉은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려도 눈이 쌓여 있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이 곳의 왕성한 땅 기운으로 인해 눈이 쌓일 사이도 없이 그대로 녹기 때문이다.
영릉은 원래 서울 강남의 대모산 자락 부왕인 태종의 헌릉 옆에 있었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자신이 사후의 수릉으로 조성한 영릉에 장사하였다.
이때 수릉에서는 물이 많아 흉당으로 왕후의 릉으로는 적합치 않다는 주장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 복지(福地)를 얻는다 한들 어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느냐?"
세종은 사후에도 부모를 모시겠다는 지극한 효심에서 지관들의 흉당 이론을 물리치고
소헌왕후의 무덤을 그자리에 섰다.세종대왕의 아들들 가운데서 장자인 문종대왕은 즉위한지 겨우 2년 만에 승하하고,
그 아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 땅에 유배되어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등
나라에 크고 작은 변고가 많아 헌릉 아래 있는 영릉이 길지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천장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 되었다.
이에 세조는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영릉의 개장을 논의케 하였다.
서거정은 "천장을 하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라며 이장을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였다.
세조가 승하한 뒤 예종이 즉위 하면서 다시 영릉의 천장 문제가 거론되다.
예종은 1468년 노사신, 임원준(임사홍 아버지), 서거정 등을 여러 곳에 파견하여 천장할 땅을 물색토록 하였다.
재신의 한 무리는 광주 이천 땅을 거쳐 여흥땅(여주)을 답산하게 되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이 곳 북성산에 대신들과 지관이 올라 사면을 바라보았다.
한 곳 산 기슭에 정기가 어리어 있어 그 곳을 따라 산을 내려와 찾으니
한 아름 둘레의 울창한 나무들은 하늘이 덮여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키가 어려워 길마저 잃고 헤매었다.
마침 개울 저편에 돌다리가 보이는 지라 요행히 길을 찾아 들어가는데
난데없이 천둥 번개가 요란하면서 폭우가 쏟아져 내리었다.
일행은 당황하여 폭우를 피하려고 사방을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마한 묘막 비각이 보였다.
그리로 가서 폭우를 피하고 있으려니 한참후 비는 멈추고 날이 도로 청명하게 개었다.
일행은 이인손의 산소라는 것을 알고 이왕 온 김에 구경삼아 찾아 올라갔다.
마침 산기슭에 정기가 어리어 있는 곳이 있어 찾아 올라가 주위의 지세를 살펴보니
이곳이 풍수적으로 매우 뛰어난 지세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미 이곳에는 세조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예종에게 살펴본 내용을 복명 하였다.
"몇군데 산릉 자리를 살펴보았지만, 이인손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창하고
만세에 승업을 계승할 땅으로 릉을 모실 장소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사옵니다."
라고 아뢰었다.
예종은 이인손의 무덤 자리로 영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하고 정인지, 강희맹, 서거정 등을 천릉도감으로 삼고
산릉의 일을 나누어 담당하도록 당부 하였다.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불러
그 자리를 비워 달라는 말은 못하고 은근히 당신의 뜻을 비추셨다.
이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 한 끝에 자리를 내 놓았고 예종 또한 기쁜 마음으로 천장 할 수 있었으며
예종은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것은 매우 애절한 일이라며 이극배를 불러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 시키었다.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하기위하여 산소를 파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비기를 새겨 넣은 글 한귀가 나왔다.
"이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하늘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리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 묘를 옮기어 모셔라."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 이장한 후에도 자손이 번창 하였다.
그리고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연주리라 하였다고 한다.
영릉을 이 자리로 이장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100년 더 연장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를 "영릉가백년" 이라 한다.
이인손은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윤, 호는 풍애다.
이인손은 침착하고 굳세며 과감한 성격으로 담백한 것을 좋아했으며 일에 임해서는 결단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인손의 묘자리와 관련한 전설이다.
이인손은 극배·극감·극증·극돈·극균 다섯 아들이 있었다.
이인손이 졸하자 지관이 잡아 준 지금의 세종대왕 영릉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이 때 지관은 아무리 가문이 번창하더라도 제실을 짓거나 개울에 다리를 놓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지관의 당부대로 하였던 결과 이인손의 집안이 번성하였다.
큰아들 극배(克培; 광릉부원군)는 관찰사를 거쳐 영의정이 되었고, 둘째 극감(克堪; 광성군)은 형조판서,
셋째 극증(克增; 광천군)은 성균관동지사, 넷째 극돈(克墩; 광원군)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克均; 광남군)은 좌의정이 되었다.
그의 집안은 세칭 오군(五君)집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그 후손들도 정승, 판서 등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가문이 번성하자 후손들은 선조의 음덕(蔭德) 때문에 가문이 번성하였다.
제사를 모실 집하나 없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여 묘하에 재실을 짓고 성묘 길을 편히 하기 위하여 다리까지 놓았다.
지관이 재실을 짓지말고 다리를 놓지 말라는 충고를 듣지 않아 이인손의 명당을 끝내 세종에게 내준 셈이다.
왕은 조선에서도 절대적었다.
조선 왕릉 앞에서는 공신 직책도 추풍낙엽에 불과했다.오직 이장만이 후손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조선 왕실은 툭하면 왕릉으로 신권을 눌렀다. 신하들을 군기 잡는 방법중에 왕릉 점령보다
더 막강한 특효약은 없었던 모양이다.
성종이 죽자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무덤자리로 밀고들어선다.
광평대군은 성종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임금이라는 이유로 작은 할아버지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자신이 그곳에 묻히게 된 셈이다. 광평대군은 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인 대모산 자락
(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일원역 부근)으로 이장한다.
광평대군의 무덤은 그 후손들의 묘들과 함께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진다.
게다가 광평대군이 이곳으로 이장된 뒤 그 후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주이씨 문중은 조선시대 문과에 85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 광평대군 후손이 115명이나 된다고 한다.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가 스무 살의 나이로 죽는다. 세조가 임금이 된지 3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병이 든 의경세자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예견하였던지 지필을 달라고 하여
“비바람 무정하여 모란꽃이 떨어지고...”라는 옛날 시를 써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한다.
세조는 죽은 아들을 최고의 길지에 안장하려고 직접 나선다.
부왕 세종임금 생전, 세조(당시는 수양대군)는 부왕으로부터 풍수공부를 하라는 명을 받아 풍수공부를 한다.
또한 대군시절부터 왕실의 능선정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여 풍수의 이론과 실무를 충분이 익혔다.
풍수지리의 이론과 실무를 겸한 왕은 세종 세조 영조 정조 등으로 조선의 왕은 풍수에 밝았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죽은 그 다음날 조정에서는 3개월 장으로 치를 것을 결정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인 9월 5일부터 길지를 찾아 한양부근의 곳곳을 문자 그대로 ‘이 잡듯’ 뒤진다.
조정의 주요 대신들과 풍수학 소속의 지관들이 경기도 일원에 보내어져 길지를 물색한다.
하루에 한 팀이 아니라 세 팀이 동시에 보내어지기도 한다.
“호조 판서 권준·풍수학 소속의 지관 노목·전 교감 방문중에게 명하여 양근(현재의 양평)·미원(현재의 진접읍)으로
가서 땅을 보게 하고, 지중추원사 홍윤성·정랑 고태필·풍수학 소속의 지관 안효례에게 교하·원평(현재의 파주)에
가서 땅을 보게 하고, 판원사 이인손, 풍수학 소속의 지관 김경손·원구에게 용인에 가서 땅을 보게 하였다.”
의경세자의 무덤자리 찾기는 40여 일 동안 계속된다.3개 월장의 절반 이상을 길지를 찾기 위해 조정의 주요대신들과
지관들이 총출동한다. 당시 길지를 찾기 위해 현장에 파견된 조정의 대신들과 지관들 가운데 우리들이 TV 사극이나
역사소설에서 한번 정도 들어본 이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능자리 선정에 직접 현장을 답사한 주요 신하들로는 영의정 정인지 좌의정 정창손 우의정 강맹경 이조판서 한명회
좌찬성 신숙주 우찬성 황수신 지중추원사 박강 첨지중추원사 김길통 동부승지 정식 한성부윤 이순지
세자좌필선 임원준 병조참판 구치관 좌참찬 박중손 판원사 권남 대사성 안지귀 등이다.
능자리선정에 참가한 주요 지관들로는 안효례 노목 원구 조수종 김경손 방계충 등이다.
경기도 전역에서 최고의 길지로 최종 결론이 난 곳은 그 당시 지명으로 고양현 봉현(蜂峴) 땅이다.
아들 의경세자가 죽고 나서 길지를 찾기 시작한지 40여 일 만인 음력 10월 14일 세조 임금은 주요 대신들과
지관들을 대동하고 고양 땅을 보고 본 뒤 그곳을 능 자리로 결정한다. 그는 네차례나 직접 방문했다.
물론 이 자리는 조선의 역대 왕릉들이 그러하듯 새로운 자리가 아니라 이미 다른 사람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조선 초기에 대제학 벼슬을 지낸 정역(鄭易: ?-1425)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당연이 정역의 무덤을 다른 곳(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부근)으로 옮겨가게 하고 그곳에 의경세자를 안장한다.
이곳이 바로 경릉이다. 서오릉이 든 동네 이름이 용두동(龍頭洞)으로 명당임을 이야기한다.
정역은 고려시대 태종과 과거에 함께 합격,조선 초기에 대제학 벼슬을 지냈고 효령대군의 장인이다.
정역의 무덤은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부근으로 옮겼다.
그는 연산군 때 성종의 선릉에 자리를 내주고 다른 곳으로 또 밀려날뻔 하였다.
끝내 그는 80년대 법조타운에 묘자리를 빼앗기고 여주로 다시 이장한다.
법원과 검찰청사 가는 큰 길 좌우에 거대한 정곡빌딩이 군(群)을 이루고 있다.
정곡은 해주 정(鄭)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왕릉풍수는 당쟁에 동원돼 정적을 제거하기도 했다.
김안로는 희릉 능침의 돌이 물에 젖어 있는 흉당이라며 천장을 주장한다.
기묘사화로 유배를 갔던 김안로는 자신을 탄핵했던 심정을 탄핵하고 다시 정권을 잡는다.
김안로가 정적이었던 정광필마저 죽이려고 일으킨 소동이 바로 희릉 천장이다.
정광필이 장경왕후 국장 당시 3도감 총호사였던 것을 물고 늘어져 흉당에 파묻은 죄를 묻겠다는 의도였다.
끈질지게 풍수를 거론하며 중종의 윤허를 받아 멀쩡한 희릉을 파헤쳐 서삼릉으로 천장하는 데는 성공한다.
김안로는 천장한 지 한달 뒤에 문정왕후까지 폐위를 기도하다가 유배를 가 끝내 유배지에서 사사된다.
중종의 병이 깊어지자 우의정 홍언필과 좌의정 윤인경을 불러 세자에게 왕위를 전위하도록 명한다.
이튿날인 11월 15일 중종은 57세로 승하했고, 1545년 2월 3일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 산줄기에 안장된다.
왕이 함께 묻히면 왕의 능호를 써야지 왕비의 능호를 쓸 수 없다.
대문의 문패를 남편의 이름으로 거는 것과 같은 이치다.
희릉은 중종이 묻히자 중종의 능호인 정릉
(靖陵)이라 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가
묻힌 두 산줄기 사이로 옮긴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보우는 문정왕후에게 "정릉 터(靖陵基:증중릉)는 풍수상(風水上)
수파(水破:수구)가 불길(不吉)하니,
선릉 근처에 있는 길지(吉地)로 옮기자"고
청원했다. 문정왕후는 보우선사와 의논 끝에 중종릉을 옮기기로 했으며, 대신들 중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의 자리고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야심을 가지고 불법을 확장하고자
풍수를 빌어 중중릉의 천장을 꾀했던 것이다.
그는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능과 한 묘역에 있는 중종릉을 따로 떼어놓고 그 곁에 문정왕후의 능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구실로 문정왕후의 여성의 심리를 자극,
그의 마음을 교묘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막상 중종의 능을 옮겨놓고 보니 지대가 낮아서 여름철에는 재실까지 강물이 들어 보토하였다. 많은 비용을 낭비해야 했으며 매년 비가 오면 침수로 재실이 잠기는 현상이 잦았다.
남편 중종릉을 이장한지 2년만에 문정왕후 자신이 승하했다. 문정왕후릉은 다른 곳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중종은 결국 왕비 곁을 떠나 단릉(單陵)에 홀로 지내야 했다.
조선의 왕은 막강했다. 절대군주 조선의 왕들은 왕릉을 명당에 조성하기 위해 장애물은 과감하게 제거했다.
필요하면 할아버지의 묘도 헐어냈고 사돈 정승 판서의 선산묘도 왕릉 앞에는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명당을 확보하려는 왕릉 터 잡기는 풍수이론을 내세워 거침없이 정복해나가는 하나의 처절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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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을 글 감사합니다. 어제 비와 사투를 벌이며 한양나들이반 데리고 태릉을 다녀 왔는데.... 아이들과 간간히 나눴던 내용들이 있어서 반갑네요.^^
좋은 글을 대하니 매우 반갑습니다. 노고에 감사드리고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