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배반
5. 2. 1 학생(student)은 교수(teacher)에게 배워 이해하려는 자라면, 제자(disciple)는 배운 바를 새겨 스승(master)처럼 행동하려는 자를 말합니다. 서양학에는 이해만 있을 뿐 실천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가르치는 기술이 프로페셔날인 교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수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상품화한 직업인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프로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선생(先生)은 지식과 아울러 자신의 인생 경험을 보여주고 가르쳐줍니다. 선생은 어떻게 사는 게 옳고 좋은 것인지를 늘 염두에 두고 관찰해 그 경험을 학생에게 가르쳐줍니다.
아무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돈이나 명예 보다 사람을 중시여기는 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직업에 관계없이 머니를 많이 가져오는 사람을 최고로 취급합니다. 선생이든 교수든 그저 어떻게 하면 머니를 많이 벌 수 있을까에 골몰합니다. 인품이나 연구 성과에 관계없이 머니를 많이 벌면.. 아니 이름을 날리고 존경받으려는 목적이 바로 머니와 직결됩니다.
박정희씨의 경제정책은 한국을 빈국(貧國)에서 부국(富國)으로 만들었으나.. 잘 사는 나라로 가는 길은 막았습니다. 아니 박씨는 잘사는 게 곧 머니가 많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벌어도 좋다. 많이만 벌어라. 그런데 돈이 많아지면서 마음이 더욱 사악해져만 갑니다.
사회가 그러니 학생은 많아도 제자는 없습니다. 교회나 절은 늘어가지만 제자는 더욱 찾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5. 2. 2 예수님은 스스로를 신의 아들 또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전자는 고귀성을 후자는 평등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예수)를 파는 자는 사람의 아들을 판 자(者)로써, 신의 아들을 팔았다는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예수님의 배려인지도 모릅니다.
당시 예수일행은 매우 피곤하고 궁핍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 유다가 은 삼십에 스승을 팔았다는 것은 이해가 안갑니다.
만일 유다가 정말로 예수님을 팔았다면 더 큰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 동안 스승이신 예수의 능력을 직접보고 병 고치는 능력을 얻은 유다가 고작 은(銀) 삼십에 팔았다는 것은 예수님은 물론 예수의 제자인 자신을 무시하는 게 아닐까요? 유다는 자기의 가치를 자존심을 고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을까요.
왜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을까?
많지도 않은 은 삼십에...
그것을 돌려준 후에 자살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유다의 다른 뜻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화두입니다.
인자를 파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그것을 유다가 모르고 있었을까요?
사건은 인연(因緣) 따라 일어나지만.. 마음은 하나로 흐릅니다.
5. 3 제자가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모르면 스승 될 자격이 없습니다. 제자의 상황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금강경> 시작 부분에서 석가 부처님 제자인 수보리 장로는 이러히 말을 꺼내지요.
“놀랍습니다(希有). 스승님(여래)께서는 제자(보살)들을 깊이 염려하시고 잘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보았습니다.
거의 삼 년을 함께 있어서 당신의 뜻을 그들이 이해는 하고 있지만 아직도 의심이 있고..
하고자 하는 뜻은 있으나 몸이 따르지 않고..
어려움이 생기면 당신에게 의지만 하려는 제자들의 약함을 익히 알고 보고 있습니다.
뜻은 있되 몸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이요, 칼집 속의 칼일 뿐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 몫을 하나님 외에는 의지함이 없이 해나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어야만 자기를 알고,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정하나 예수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보다 더 정확하게.
특히 교회에 반석이 될 베드로에게는 더 큰 신뢰를 심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렇게 까지 단련을 시키지만.. 제자 베드로는 아주 중요한 시기에는 그래도 헷갈립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베드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 경지에 와 있었지만,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는 완전한 실천은 완전한 이해와 함께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배운 대로 말했다가 죽은 어린이는..
‘그렇게 말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없었던 어린이의 무지와
‘반(反)공산당적 행위는 죽여도 괜찮다’는 이데오르기의 무지가 만나 만들어낸 업보(비극)입니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어린이의 죽음이 마치 한국적 민주주의 교육의 성공적인 사례로 판단한 당시 남한 지도층의 정신 상태입니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시원찮을 비극을 영웅적인 행위로 극화시키다니..
한 형제가 사상문제로 싸움하고 담을 쌓고 지내는 분단의 비극은..
무엇이 슬픈 일이고 영웅적인 행위인지, 무엇이 우선이고 나중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마비시키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정확한 판단(定見)은 자기와 세계에 대한 애착이나 증오가 없을 때 가능합니다.
자기에 대한 애착이나 증오가 없을 수 있는 이유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이고,
세계에 대한 집착이나 증오가 없을 수 있는 까닭은 무상(無常)이기에 가능합니다.
무아와 무상을 깨닫지 못하면 무언가에 머문 게(着)됩니다.
무언가에 머물면 그것이 씨가 되어 생기(生氣)를 타고 끝없는 윤회가 된다고 합니다.
윤회란 원래 없는 씨가, 씨가 되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5. 4 이해도 쉽지 않지만 깨침(行)은 더욱 더욱 어렵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씨앗이 되어 죽을 때 많은 밀알이 생깁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박힌 뜻은 어리기만 한 제자들을 완성해주려는 자비의 극치입니다.
그러히 보면 유다의 배반은..
제자들 가운데 예수의 뜻을 가장 바르게 알고 실천한 것이 됩니다.
네 할 일을 속히 하라.
그런 유다였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진실 된 모습은 돈을 돌려주고 자기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누가 유다의 괴로움을 헤아릴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뿐 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성스러움입니다.
성스러움을 판 자(者)는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다는 자살을 함으로써 그것까지 보여주었습니다.
괴로움은 깨달음을 향하는 터가 된다고 해서 ‘거룩한 진리’(苦聖諦)라고 합니다.
현재 괴로움이 없다면 누가 깨달음이나 깨침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이 아니라면 잘못한 게 없을 터.. 무엇을 회개할 수 있습니까?
죄인은 천국에 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됩니다.
유다의 악행은 기독교가 세계에 퍼질 수 있는 소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먹는 음식에는 소금을 넣어야 맛이 납니다. 소금은 맛을 내면서 자기 모습은 잃어버립니다. 소금이 제 모습을 잃지 않으면 음식 맛이 날 리 없지요.
그런데 요새 소금(기독교)은 자기 모습을 버리지 않아요. 꼿꼿하게 자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국가 축구 대표 팀 감독인 차범근씨 기도하는 장면이 자꾸 방영되는 것을 도올 김용옥이 비판한 적이 있지요.
도올이 비판 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부터 예수교의 다락방 기도가 큰 거리 기도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준엄한 비판인데... 오히려 도올 자네가 무언가 하면서.. 그를 시비하더군요.
듣는 귀가 없으면.. 말을 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유다의 자살을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기독교 해석에서는 천편일률적으로 가룻 유다를 배반자로 낙인 찍어 가르치고..
기독교인들은 벽돌을 찍어내듯 무조건 그렇구나 하고 그들의 <바이블>을 받아 들이고 있는데..
한번쯤 <기독경>을 뒤집어 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