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이면 경기도 안산에서는 단원 김홍도 축제가 열린다. 단원 김홍도는 안견(安堅), 장승업(張承業)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이며, 우리 강산과 우리 풍속의 아름다움과 멋을 그림에 담아낸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꼽힌다. 때문에 그의 그림들은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머니가 없었다면 그의 재능과 천재성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단원 김홍도에게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의 힘이 없었다면 과연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1745년에 태어난 김홍도의 생부모와 형제 및 가족 관계에 대한 자료들은 그의 다른 자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는 평소 단원을 존경하여 그에 관한 것을 기록한 조회룡의 저서 「호산외사(壺山外史)」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단원의 집안인 김해(金海) 김씨(金氏)가 당시의 사회에서는 서민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이 자랑스럽지 못해 의도적으로 피한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이 단원의 그림에 서민의 삶이 녹아날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석무(金錫武)는 어린 홍도가 공부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이런 아들을 아버지는 꾸짖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의 재능을 키워주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아들의 꿈을 이루어 주고자 아들에게 화원이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여기에는 어머니 인동장씨 집안의 영향력도 컸다.
단원 김홍도의 어머니 장씨 집안은 대대로 유명한 화원의 집안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장필주와 외삼촌 장옥산이 당대 화원으로 활동하고 있어 어머니 인동장씨는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고 보고 느끼는 예술적 환경에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인동 장씨는 아들의 소질을 일찍 알아볼 수 있었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밑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후 김홍도는 외삼촌의 천거로 화원으로 상의원 별제를 지내고 있던 김응환을 만난다. 단원의 재주를 알아본 김응환은 그를 다시 표암 강세황과 만나게 해주어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또한 강세황의 도움으로 와세손(후에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고 훗날 정조 때 왕의 초상화를 그리며 당대 유명한 화원으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결국 화원으로의 첫 출발은 어머니로터 시작된 것이다.
김홍도는 풍속화를 즐겨 그렸으며, 중국 그림을 흉내 내던 당시의 화풍과는 달리 자신만의 그림, 우리의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선도병풍·소림명월도·쌍치도·군선도 등이 그의 유명한 작품이며, 서당·씨름·대장간 등과 같은 해학과 풍자를 조화시킨 서민적인 그림을 남겼다. 김홍도가 세상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단원 김홍도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의 사랑을 받는 화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그 재능과 꿈을 키워준 어머니 인동장씨의 사랑과 교육의 힘이 컸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첫댓글아~~ 저도 어릴적에 그림을 잘 그려 전국 대회에서 최고상도 받고 저희 사촌도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답니다. 형편이 되질 않아 이어 나가진 못했지만 제 동생도 그림을 못 그리는편이 아니져... 현재 저희 아들도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답니다. 남편의 집안 영향력도 있지만 외가쪽도 무시 못하겠네요...ㅎㅎㅎ
첫댓글 아~~ 저도 어릴적에 그림을 잘 그려 전국 대회에서 최고상도 받고 저희 사촌도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답니다. 형편이 되질 않아 이어 나가진 못했지만 제 동생도 그림을 못 그리는편이 아니져... 현재 저희 아들도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답니다. 남편의 집안 영향력도 있지만 외가쪽도 무시 못하겠네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