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거성(巨星)의 추락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유사이래 천하에는 무(武)를 숭상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인물들을 중심으로 모여 무림(武林)이라는 곳을 만들었고 급기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력다툼을 하기 시작했다. 무림은 강자존(强者尊)의 원칙에 따라 철저히 약육강식(弱肉强食)이 통용되었다. 하여 일반 무인들이 익히는 정공(正功)보다 강한 무공을 익히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공을 익히는 무리가 생겼으니 바로 마도(魔道)와 사도(邪道)무리가 그 범주에 속해있었다. 마도와 사도의 무공은 속성(速成)의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나타났으며 시대별로 가장 뛰어난 영웅호걸들이 무림에 군림하였다. 그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한마디는 무인에게는 황명(皇命)보다 더 우선적으로 이행해야하는 법과도 같았다. 물론 모사꾼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난 통치자도 있었고, 불과 하루만에 절대자의 권좌에서 쫓겨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한 시대를 풍미한다는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연합하여 무림을 차지한 후 중원을 나눠 통치한 인물들도 있었으나 군림제일좌는 오직 일인(一人)만을 위한 자리였기에 그들의 통치는 오래 갈 리가 없었다. 수천 년 간 무림의 군림제일좌(君臨第一座)에 오르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그치질 않았고, 시대마다 군림을 꿈꾸던 무인들은 골육상쟁(骨肉相爭)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정도와 마도, 사도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며 무림을 통치하기를 원하였고 그들의 염원대로 각 시대를 거치면서 수 차례 통치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군림제일좌에 오른 세력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점차 세월이 흐르면 나태해지기 마련이었고, 빼앗긴 군림제일좌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무예를 닦은 나머지 세력의 공격으로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수많은 신흥방파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으나 거대방파로 세인들의 기억에 남는 방파는 정도를 대표하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을 비롯하여 불과 삼십여 개 안팎이었다. 오늘날에도 무림에는 꿈을 쫓는 무인들이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고있었으며 그들은 점화된 도화선에 연결된 화약통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 * * 칠십 년 전 강호에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비슷한 또래의 아홉 마두와 만든 극천마궁(極天魔宮)이란 신흥방파가 나타났었다. 그들은 당시 무림을 장악한 정도무림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당시 구파일방을 비롯한 장파는 더 이상 강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들의 가공(可恐)할 마공은 정도의 무공보다 한 수 위였다. 궁주(宮主)인 제천마존(帝天魔尊) 여무황(呂武皇)과 그를 따르는 절대구마존(絶代九魔尊)의 마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있어 세상을 경악하게 하였다. 지난 오백 년 간 무림을 통치하던 정도무림의 인물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며 그들을 조롱하였으나, 그들의 가공할 마공을 막기엔 역부족임을 느끼고 처참히 패퇴하여야 하였다. 당시 절대구마존은 이십대 후반의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공력은 자그마치 삼 갑자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들 개개인은 각기 한 방면에서 독보적인 절대마공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별호에 그것을 드러냈다. 서열 일위 검마존(劍魔尊) 탁불수(倬 秀) 서열 이위 도마존(刀魔尊) 정찬휘(鄭燦輝) 서열 삼위 장마존(掌魔尊) 신도현(申燾賢) 서열 사위 독마존(毒魔尊) 임종연(林琮延) 서열 오위 비마존(飛魔尊) 우범모(羽汎瑁) 서열 육위 귀마존(鬼魔尊) 전경환(全敬奐) 서열 칠위 살마존(殺魔尊) 한사인(漢士認) 서열 팔위 동마존(童魔尊) 선재혁(宣宰赫) 서열 구위 색마존(色魔尊) 양재헌(楊財軒) 절대구마존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독창적인 마공을 익힌 탓에 구파일방의 장문인(掌門人)들조차 그들 개개인과 대적하였을 때 십초지적(十招之敵)이 되지 않았으니 대경실색할 일이었다. 채 달포도 지나기 전에 구파일방의 현판(懸板)이 떼어지고, 제천마존의 면전에 무릎을 꿇은 장문인들은 분루(忿淚)를 삼키며 오십 년 간 봉문(封門)한다는 약속을 해야했다. 어깨에 한 자루의 보도(寶刀)를 걸치고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날리며 무림에 등장한 제천마존 여무황은 가공스런 마공을 지닌 절대구마존 덕택에 도갑(刀匣)에서 애병(愛兵)을 꺼내보지도 않고 군림지존좌에 앉을 수 있었다. 세인들은 제천마존의 마공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하였는데 어느 날 절대구마존이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절대구마존 전원이 합세하여 공격하더라도 궁주의 일초지적이 되지 못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문을 흘렸던 것이다. 제천마존의 도가 뽑히는 것을 본 인물은 예외 없이 염라부(閻羅府)로 직행한다는 소문에 감히 반기를 들기는커녕 너나없이 극천마궁에 가입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극천마궁에 대항하여 후세에 위명(威名)이 전해지는 것보다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에 시원한 나무그늘 속에 기어들어 편안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무림은 반년이 흐르기도 전에 그들에 의해 일통(一統)되었고 결국 모든 것은 극천마궁의 기치(旗幟)아래에 움직였다.
중원의 중심인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인 무한(武漢)에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졌고 사방 백 리의 거대한 성곽이 세워졌다.
사통팔달(四通八達)한 교통의 요충지였고 장강(長江)의 수로(水路)까지 닿아 있어 삽시간에 각지방에서 전해오는 온갖 건축자재로 화려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건축되었다. 구중천(九重天)인 자금성(紫禁城)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건축된 철옹성(鐵甕城)인 극천마궁이 개파대전을 여는 날 정, 사, 마의 모든 방파의 지존들은 광장에 무릎을 꿇고 축하를 해야했다. 제천마존 여무황은 극마지공(極魔之功)을 대성하여 마인(魔人)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실제 그가 흉악(凶惡)한 행위를 한 적이 없었기에 정도의 인물들은 내심 그가 겉모습처럼 지내주기를 기대하였다. 마공을 익혔으되 공명정대하였던 제천마존은 정도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나 철저히 탄압하였다. 마인들을 교육시켜 양민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였으나 작은 씨앗이 땅속에 묻혀 싹을 뻗어내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고 드러나지 않은 뿌리가 지면 아래에 퍼지는 것처럼 극천마궁에 반기를 들 인물들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도와 사도 각파의 진산비급을 모조리 진상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말이 법이고 따르지 않는 자는 수급을 바쳐야했다.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처음에는 말들이 많았으나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각파에 소장되어있던 비급을 울며 겨자 먹기로 모조리 내주어야했다. 제천마존은 무(武)를 숭상한 인물이었기에 각파의 절기가 실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엄청난 크기의 지하 장서고(藏書庫)에 모두 보관하였고 철저히 지키게 하였다. 군림하는 곳이 한 곳 뿐이라 무림은 점차 안정되어갔다. 마공을 익히느라 여인을 품어보지도 못한 궁주를 위해 절대구마존이 앞장서서 주모를 구한다는 방을 내걸었다. 전국 각지에서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들이 뽑혀 진상되었는데 제천마존은 천여 명의 미녀(美女)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해남도주(海南島主)의 여식 산호낭낭(珊瑚娘朗) 지희연(芝喜燕)을 처(妻)로 맞이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은 산호낭낭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규수였는데 강제로 끌려온 탓에 마도의 우두머리가 자신을 지목하자 경악하여 혼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었건만 눈물을 흘리며 혼례식을 마친 산호낭낭은 신혼초야를 맞이하였는데 나이는 들었지만 해남도에선 볼 수 없었던 준수한 용모를 지닌 제천마존의 실제모습을 대하고 내심 동요하였다. 어느 여인이나 혼기(婚期)에 들면 자신이 섬길 남편의 모습을 상상해보기 마련이고 제천마존은 그녀가 꿈꿔오던 용모와 체격을 지닌 절세미남이었던 것이다. 합환주(合歡酒)를 마시고 상을 물린 그는 난생처음 여인을 안는지라 초야를 치르는 일이 서툴기 짝이 없었는데 산호낭낭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파과(破瓜)의 고통을 인내하며 자신의 순결(純潔)을 바쳐야했다. 여인을 처음 안아본 제천마존의 정력은 실로 대단하여 그 날 밤 침상이 부셔졌을 정도로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녀는 말로만 듣던 운우지락이 이런 것인가 할 정도로 쾌락에 겨워해야했다. 그들 부부는 그 날 이후 서로 떨어져 자본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고 자신들에게 다가온 행복을 만끽하며 지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그들 부부에게도 단 한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극정성으로 기원했던 탓인지 혼례를 올린 지 무려 십오 년 만에 산호낭낭의 배가 불러왔다. 제천마존이 그녀에게 각지에서 진상된 온갖 영약을 복용하게 하고 세심히 보살핀 탓인지 건강한 남아(男兒)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을 여추량(呂秋亮)이라 지은 제천마존은 태어난 아이를 벌모세수(伐毛洗髓)시켜주었고 희귀한 영단을 구해 먹였다. 늘그막에 태어난 자식은 그들의 부부의 애정을 듬뿍 받고 황자(皇子) 못지 않게 귀하게 길어졌는데 소년기에 접어들자 무공을 익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여추량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신분이었기에 힘들게 무공을 익히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세인들이 경멸하는 마공을 익히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극천마궁은 보이지 않는 분열이 생겨났다. 제천마존이 자식을 절대자로 키우기 위해 회유하고 있을 때만해도 절대구마존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으나 암중에 각자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크게 키워갔다. 강자존의 무림에서 무공이 약한 주군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천마존은 웬일인지 그들을 수수방관하였다. 극천마궁을 이끌 차기 궁주가 무공이 약하다면 무림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현재 군림제일좌에 앉아있는 그가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여추량을 극천마궁에서 내쫓았다. 일 년간 고생을 하다보면 마음이 바뀔 것이란 생각에서 행하였지만 극천마궁에서 쫓겨난 여추량은 몰래 도와주는 절대구마존 덕택에 호화호식을 하며 편히 지냈고 일 년 후 다시 불려갔을 때도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모친인 산호낭랑이 갑자기 중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한 때였다. 제천마존이 슬픔을 잊기 위해 술만 마시며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히자 절대구마존이 극천마궁을 이끌기 시작하였고 여추량을 대하는 태도가 돌변했던 것이다. 여추량은 부친을 찾아가 자청하여 연공관으로 들어갔고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나이 사십이 된 중년의 모습이었다. 절대강자가 되지 못한다면 지금과 같은 향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부친의 성명 석자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무공연마에 전념했던 것이다. 어릴 때 많은 양의 영단을 복용한 탓에 그의 내공은 무려 팔 갑자에 육박했고 부친의 마공을 대성한 그는 예전의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엄청난 신위를 초절정 고수가 되어 있었다. 부친과 모친의 용모를 반반씩 닮은 그는 사십이 되어서도 준수한 용모와 듬직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고, 감히 두 눈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뇌전처럼 강한 안광을 쏘아내고 있었다. 제천마존은 그때까지 항상 취한 상태로 허울뿐인 궁주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지존전(至尊殿)에서 자식의 출관(出關)을 기뻐하였으나 권력을 손에 쥔 절대구마존과 그의 자식들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제천마존은 아들에게 궁주직을 이양하려하였으나 극천마궁을 둘러본 여추량은 이를 거부하고 누구든 일 대 일로 도전하여 자신을 이기면 군말 없이 극천마궁을 떠나겠다고 선포하였다. 절대구마존의 자식들이 쾌소를 지으며 연이어 도전하였으나 그를 상대로 십초(十招)도 받아내지 못하였고 심지어 뒤로 물러섰던 절대구마존도 십 초만에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이상하였던 것은 그 날 대결에서 절대구마존이 자신의 무공을 십이 성 발휘하지 않았는데 극천마궁의 궁도들은 그것이 충성심의 발로라고 판단하고 그들이 패하였음에도 유쾌히 받아들였다. 그 날 극천마황(極天魔皇)의 별호를 얻고 극천마궁의 궁주로 등극한 여추량은 절대강자의 면모를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무림에 존재할 수 없었고 부친보다 막강한 영도력을 보였던 것이다. 헌데 권력을 맛본 절대구마존은 그의 앞에선 비굴한 웃음을 짓다가도 돌아서면 다시 자신들의 야망을 불태웠다. 늦었지만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손자를 안겨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극천마황은 혼례를 서둘렀고 돌아가신 모친과 거의 흡사하게 닮은 아름다운 규수를 맞이했다. 그녀는 복건성(福建省)의 남단 장주현( 州縣)에 위치한 이미 수백 년 전에 몰락하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정도세가인 동방가(東方家)의 후손 동방추련(東方秋蓮)이었다. 그녀 역시 무공을 전혀 익히지 못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벙어리 하인 하나만 달랑 데리고 입궁(入宮)하여 혼례식을 치렀다. 그녀는 차디찬 냉혈을 지녔다고 소문이 난 극천마황을 대하고 소문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그의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은 따사로웠고 겁에 질린 그녀를 편안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초야를 치르던 극천마황은 현숙한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가 자신의 율동에 요녀처럼 격렬히 반응하자 쾌락의 극치를 맛보았다. 그들 부부는 밤마다 서로에게 애정을 쏟아 부며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겼고 좀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예로부터 여씨 가문에 손이 귀한 탓인지 그녀 역시 회임을 하지 못하였는데 합방한지 오 년 만에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녀의 배가 불러올수록 절대구마존은 조바심을 냈다. 자신의 자식은 물론 손자까지 대를 이어 극천마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한다는 것이 그들을 견디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비록 권력이 핵심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꿈틀거리는 욕망은 그들을 영원히 이인자로 머물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눈이 멀어버려 군림에 등한시하던 극천마황 몰래 극비리에 회합을 열어 이 문제를 토의하였다. 절대구천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짧은 시간만에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들은 기약할 수는 없지만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제천마존이 죽은 후 거사를 행하기로 피를 나눠 마시며 혈맹(血盟)하였는데 독마존은 자신의 독혈(毒血)이 모두 중독시킬 수 있었기에 피를 섞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연로(年老)한 제천마존이었지만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마공을 지닌 탓에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반란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암중에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실 제천마존은 지병에 의해 벌써 죽을 목숨이었다. 그의 저승길을 제지한 것은 영약이 아니라 손주를 보고 싶다는 일념뿐이었고 그것이 그의 끊어질 듯한 생명 한 가닥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
첫댓글 잘봅니다.
감사...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잘봐요!
감사 드립니다
ㄳ
즐감
감사합니다.
재밌게 즐감합니다^^
즐.독. 하고.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