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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일(극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예부터 우리나라는 이름과 관련된 유래담이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음식이름은 발음이 비슷해서 붙여
진 것이 많다. 설렁탕이 대표적인 사례다. 설렁탕은 조선
시대 선농당(현재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선농제를 지낸 후 소를 잡아 국을 끓여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선농당의 발음이 설렁탕으로 변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울릉도의 특산품인 명이나물도 마찬가지다. 울릉도 개척시에 식량이 부족해 긴 겨울이 지나고 나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눈이 녹기 시작할 때쯤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다고 한다. 명이라는 이름은
‘명(命)을 이어간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4편은 울릉도 명이나물에 대한 이야기다. 명이나물이 산마늘인 점에 착안해 마늘과 쑥을 소재로
한 단군신화의 호랑이 이야기를 일부 차용했다. 명이나물의 유래담은 울릉군지 등을 통해 실제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지만,
호랑이와 쥐의 이야기는 스토리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픽션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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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는 미네랄과 비타민이 풍부해 김치<위>, 장아찌 등에 많이 이용된다. |
Story Memo
이것은 호왕(虎王)의 이야기다. 울릉의 주인이며
울릉 서씨(鬱陵鼠氏)의 은혜로운 왕이었던 우리
호랑이왕.
왕은 늦은 가을에 왔다고 전한다. 달빛이 희고
맑게 퍼진 찬바다를 건너왔다. 울릉군 서면 태하
리 앞바다. 거친 바위에 올라 포효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놀라 잠에서 깨었
다 한다. 우리 서씨 큰어른 서생원이 학식이 높아
곧 호랑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무슨 서러운 일이
있는지 호랑이는 밤새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발톱을 세워 바위를 치니 불꽃이 일었고, 그것을
보고 섬에 있던 모든 쥐들이 두려워했다. 서생원
이 한숨을 쉬며 하는 말.
“바다에 사는 삼공주가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야단
인데, 이제 산에 사는 호랑이가 나타나서 우리
서씨 일족은 꼼짝없이 죽게 생겼구나.”
“한입거리도 안 되는 우릴 어떻게야 하겠어요?”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누가 한 말을 그냥 넘겨
듣지 못하고 또 누군가 받아치는 말.
“한입거리도 안 되니 문제지요. 한입으로 차지
않으니 호씨(虎氏)가 서씨(鼠氏)를 줄줄이 뱃속
에 집어넣을 것 아닙니까.”
그날 이후, 쥐들은 납작 엎드려 지냈다고 한다.
호랑이를 피해 다니며 몰래 나무열매를 따고
잎을 말려 겨울을 대비했다. 호랑이는 황토구미
에 자리를 잡았고, 섬 이곳저곳을 누비는 모습이
때때로 목격됐다. 다행히 누구도 호랑이의 눈에
들키지는 않았다.
또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고 전한다. 맹수
가 먹을 변변한 짐승이 섬에는 없고, 새들은 날쌨
다. 서씨들은 호랑이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궁금
했지만 가서 확인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서리를
훑어먹고 눈을 녹여먹고 흙을 한줌 먹는 걸 누가
보았다 했다. 두 눈이 반짝였는데 혹여 눈물을
흘린 게 아니었나 싶다고도 했다. 잘못 보았을
거라며 다들 믿지 않았다.
폭설이 내린 뒤로는 호랑이를 봤다는 쥐가 없었다. 굶어 죽었나보다고,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차츰 날이 풀려 ‘명이(茗荑)순’이
돋을 즈음에 이르러 모두 굴에서 나왔다. 황토구미 쪽에 명이가 많아 그곳에 모여 눈을 헤쳐 가며 새순을 찾을 때였다. 갑자기
눈 쌓인 땅이 떠들썩해지더니 호랑이가 튀어나왔다. 서씨들은 덫에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기절하는 쥐도
있었다. 호랑이는 처음 봤을 때보다 수척했는데, 첫마디가 의외였다.
“제가 놀라게 했나 보군요. 미안합니다.”
모두 숨이 멎은 듯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때, 서생원 어른이 다가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호랑이도 정중하게 답을
보냈다. 가까이서 보는 호랑이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호랑이가 섬에 오게 된 사연을 듣고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나직한 목소리로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백년도 더 된 일이었단다. 곰 한마리와 함께 백두산에서 살 때였는데, 어느 날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세상에 내려왔다.
호랑이와 곰이 환웅을 찾아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환웅은 쑥 한다발과 마늘 스무개를 주며 ‘이것을 먹되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단다. 쑥은 어떻게든 먹었다.
그런데 마늘은 도저히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원래 매운 것을 즐기지 않는 데다 환웅의 마늘은 너무 맵더란다. 호랑이는 처음
하나만 먹고 마늘 열아홉개는 땅에 묻었다. 그래도 어쩌면 하는 생각에 동굴 속에서 백일을 있어봤는데, 곰은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호랑이 그대로였다. 곰이 환웅과 혼인하던 날, 호랑이는 참을성 없는 자신이 부끄러워 백두산에서 나왔고, 이곳
저곳을 떠돌다 목숨을 버리려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눈을 감았다 떠보니 울릉도였단다.
“지금이라면 마늘 스무개가 아니라 마늘 천개라도 먹겠습니다. 오래 전 일이지만 돌아보면 언제든 부끄럽고 후회가 됩니다”
하며 호랑이는 낯을 붉혔다.
“이대로 영영 눈을 감아버리자 결심했는데, 갑자기 코가 매워 정신이 들었습니다. 찬바람이 든 탓이겠지 생각하다가 점점 매운
기운이 짙어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뛰쳐나왔더니 여러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명이라예.”
젊은 처자 하나가 쑥스러운 손길로 명이를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뿔명이라예.”
“그렇게 말하면 모르지. 산마늘입니다. 우리가 명이라고 부르는 나물입니다. 또 이른 봄, 이렇게 눈을 뚫고 얼굴을 내미는
어린 순을 뿔명이라 합니다. 아마 이것이 코를 맵게 했나 봅니다.”
서생원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명이!”
“지금은 먹을 것 구하기가 힘든 시기, 이것을 먹고 우리가 명을 이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이 ‘명이’입니다.
생잎을 그냥 먹고, 초무침으로 해 먹고, 나물 무쳐 먹고, 국에도 넣고, 장아찌 담가 먹고, 물김치를 만들어 먹습니다.”
호랑이는 처자가 건넨 뿔명이를 먹었다. 곧 표정이 변하더니 ‘후아 후아, 맵다 맵다’며 날뛰었다. 그것을 보고 서씨들이
한바탕 웃었고, 무서워하던 마음은 대번에 사라졌다.
“머리털이 한꺼번에 일어섭니다. 사람이 돼볼까 하고 마늘을 먹던 그때 생각이 새롭습니다. 명이가 환웅의 마늘과 같다면,
제가 다시 사람이 될 것도 같습니다.”
호랑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 한 여인의 울음이 터졌다. 명이 초무침을 잘 먹던 죽은 자식을 떠올리고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자 아이를 가진 여인들이
따라 울었다. 호랑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고 서생원이 가슴 아픈 얘기를 꺼냈다.
“용왕의 셋째 따님인 삼공주가 쥐고기를 좋아해 해마다 서씨 아이들 중 하나를 제물로 바치고 있습니다. 명이가 올라와 잎이
등짝만하게 커지면 그때가 삼공주의 생일. 그러면 자라 선생이 서씨촌에 와서 삼공주의 생일상에 올릴 아이를 골라 용궁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여 명이 잎이 넓어져 가는 것이 서씨들에게는 무서운 일이 되었습니다.”
호랑이가 서생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자신이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했다. 산에서야 무서울 게 없다지만, 호랑이가
무슨 수로 바다와 대적하겠는가. 서씨들은 말이라도 고맙게 여겼다. 그리고 모두 호랑이 앞에 엎드려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
했다.
왕은 사치를 몰랐고 소식했다. 하루에 명이 이파리 스무장을 먹는 게 다였다. 서씨들은 왕의 안위를 걱정했고, 호랑이는 고기를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한 처자가 자신의 꼬리를 잘라 바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서로 자기 꼬리를 자르겠다고 다투
었다. 왕이 알고 달려와 꾸짖었다.
“우리 몸에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있습니까? 짐승에게 꼬리가 없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자기 꼬리를 고아 먹여 어미 병을
낫게 했다는 노루의 효행이 전하고는 있지만, 저는 병도 없고 생잎을 먹는 데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제가 삼키지 못한 마늘
열아홉개를 생각하면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답니다. 그러니 어찌 서씨의 꼬리를 먹겠습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꼬리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왕의 말에 감동하지 않는 쥐가 없었으며, 왕의 뜻이 강고한 것을 알고 두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명이 잎이 등짝만큼 넓어지자 용궁사자 자라 선생이 태하리에 나타났다. 그가 서씨 아이들을 세워놓고 좋은 고기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왕이 바람처럼 뛰어들어 포효하니, 산은 쩌렁쩌렁 울리고 자라의 딱딱한 등껍질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자라
선생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서씨들은 과연 산왕(山王)이다 하며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자라 선생이 깨어나자
왕은 그를 앞세우고 용궁으로 갔다.
용궁에서의 자세한 일은 알 길이 없으나, 떠도는 말들을 모으면 왕은 용왕에게 부당함을 따지고 직접 삼공주를 만나 설득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삼공주는 쥐를 안 먹는 대가로 자신의 신랑이 되어 줄 것을 요구했고, 그리하여 왕은 용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씨들은 드디어 무서운 일에서 벗어난 것을 알고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곧이어 서씨들을 살리기 위해 왕이 삼공주와 혼인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해했다. 혼기에 차 있던 울릉 서씨 처자들의 상실감이 대단했다고 하니 그 품은 정을 짐작할 수 있다.
용왕이 궁궐에 머물러 살기를 권하였지만, 왕은 화려한 생활이 몸에 익지 않다며 울릉으로 돌아왔다. 섬에 온 뒤로 줄곧 거처로
삼았던 황토구미에 공주와 살림을 차렸다. 금실 또한 좋아서 부부의 본을 보인 것은 물론이다. 곧 삼공주가 잉태하였는데,
입덧이 심했다. 역시 입맛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쥐를 쳐다보는 삼공주의 눈빛이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서씨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왕이 염려되는 바가 있었다. 왕은 삼공주를 데리고 용궁으로 떠나겠다고 했다. 친정에서
출산을 하는 게 낫지 싶어 내린 결정이라 설명했지만, 서씨들은 왕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고마움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왕이 서씨들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수중생활을 하게 됐으니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었다. 서씨들은 명이 잎을 스무자루
따서 담았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나물입니다. 울릉도 명이 맛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명이를 먹고 꼭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이 말을 남기고 삼공주와 함께 태하리 앞 물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왕을 보는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그 뒤부터 우리 서씨는 명이를 먹지 않는다. 대왕이 아끼던 나물이라 해서 특별히 사랑하여, 비록 굶는 한이 있어도 먹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울릉도에 사람이 들어와 지금에 이른다. 요즘 사람들을 보면, 왕이 말하던 그때의 사람과는 다른 것이라 우리
서씨는 믿고 있다. 그래도 명이를 즐겨먹는 사람을 보면 혹시 우리 왕이 아닌가 해서 돌아보게 된다.
아, 사람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대체 뭐기에 왕은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려 했는가.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존재라면 대왕은
벌써 스무번도 넘게 사람이 되었다. 이미 사람답다 하겠다!
명이에 대해 기록해 둘 만한 사실 하나.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기근이 심해 우리는 사람들이 숨겨둔 곡식까지 모두
먹어치웠다. 사람이 사는 마을과 울릉의 산에 남아난 것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가 명이만은 건드리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살아
남았다. 우리를 저주하면서 어려운 겨울을 넘기고, 이른 봄이 되어 명이를 찾아 삶아 먹을 수 있었다. 명이를 먹고 명을 이었다
하여 사람들도 그때부터 명이라 부르는가본데, 우연치고는 참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우리 울릉 서씨는 지금도 왕을 기다린다. 왕을 향한 그리움이 절절할 때마다 나는 황토구미에 간다. 오늘 가보았더니 명이가
군락을 이루었다. 맵고 푸르른 잎이 찰랑거리는 것을 보니 문득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온종일 왕을 추억하다 서투른 문장으로
짧은 소회를 남긴다.
공동기획 : pride Gyeong 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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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의 대표 특산품인 명이나물. 울릉도 개척 당시 굶주림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명이를 캐서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다고
한다. ‘명(命)을 이어간다’고 해서 이름이 ‘명이’라고 붙여졌다. <울릉군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