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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
천도교현대사_사건과 인물
이상향을 찾아서(1)
- 공진항 전 교령
심국보 _ 편집주간, 진주시교구
개성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공진항(1900~1972)은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서울로 와
보성고보를 거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유럽으로 건너간다. 런던대학, 소르본대학 등
유럽에서 7년을 넘게 유학하고 포덕 73(1932)년
귀국한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가업을 다시 일으키고
만주로 진출하여 대농장을 건설했다.
해방이후 공진항은 농림부장관, 초대 농협중앙회회장
등을 역임했고
천도교 교령(1955.1~1960.5)도 지냈다.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천도교에 입교
포덕 24(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공진항은
와세다 대학에 수학하고 있었다. 관동대지진으로
6천명이 넘는 재일동포가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공진항은 민족의식에 본격적으로 눈뜨고 천도교에
입교하게 되고, 또한 일본을 떠나
유럽으로 유학하게 된다.
“나는 우리 동포들과 학생들을 학살하는
일본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현대문명의 발상지인 구라파에 가서 공부하기로 했다.
동경대지진사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나는
비로소 나라를 찾게 됐다. 우연히 야뢰 이돈화 선생
저술인 「인내천요의」가 입수됐다. 밤새 읽고 나서
신앙과 민족혼을
천도교에서 찾아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해 겨울
한국으로 귀국길에 천도교회를 찾았고 그 후
일연 조기간 선생의 지도로 고향의
어떤 자그마한 초가에서 밤에 입교식을 가졌다.
내가 그 후 얼마나 교회에 열중했나함은
구라파 유학 길에 중국 상해에서 잠시
여운형, 김두봉 씨 등의 집에서 기숙할 당시
엄항섭 씨 등 십여 명의 인사들과, 구라파에서 자주
접촉하던 분들을 입교시켰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프랑스에서는 애독하는 「동경대전」을 모두
외어버렸다.” (공진항,『이상향을 찾아서』)
공진항 전 교령은 해외에서 20년 가까운
학창생활을 마치고 고향 개성으로 귀향한 후
소감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여러 해 만에 고국에 돌아와 보니 조선의 현실은
내가 스스로 그리어오며 바라던 것과는
너무 틀리더이다. 나를 낸 이 사회가 그렇게
멸망으로 들어가며 나를 길러낸 가정이 이다지도
부패하고 나와 벗하던 동무들이 그같이도
타락할 수 있을까함이 가슴 저린 감상이외다.
산에는 나무가 시들었고 내에는 흐름이 말랐고
시골에는 다 죽어가는 백성이 드렁에 누어있고
서울에는 미친 계집들이 치맛자락을 들척이며
날뛰더이다.”(「신인간」1932.10)
귀국한 공진항은 식민지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낙담하였고,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던 공진항은 십 수 년을 해외에서 지내며 배운 학문적 성취를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귀국하자 공진항이 매달린 것은 파산직전의 가업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개성갑부였던 부친 공성학이 벌여놓았던 사업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부친은 신막자동차회사, 서선무역공사(가마니생산), 해산물취급점포, 황해도와 개성 양조장, 서울에는 개성상회라는 한약상, 인삼경작 등의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인삼경작과 개성상회는 이익을 냈으나 다른 모든 사업은 손해를 보아 30여만 원의 빚으로 파산직전이었다.
공진항은 직접 통제할 수 없는 일체의 사업은 정리하고, 돈이 되는 인삼경작을 주업으로 하고 양조업은 개성과 서울 간에 있는 모든 양조권을 매수하여 대량생산으로 제품의 질을 높이고 이익을 높인다. 3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파산상태에 직면한 가업을 구출하고 기반위에 세우게 되고 이상향 건설을 꿈꾸며 만주로 진출하여 대농장을 건설한다.
“나는 이 동안에 세상의 물정을 알게 된 한편 다만 이윤추구의 사업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실생활과 연관되며 우리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상태 가운데서만 참다운 환희와 행복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때에 나는 어떤 자연적 환경 가운데 자유롭게 생산하며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을 탐구하였다. 만주 진출은 말하자면, 이러한 사상적 공허를 채우기 위한 시도였고, 보수주의에 대한 반항적 표현이었다.” (공진항,『이상향을 찾아서』)
이상향을 찾아 만주로 진출하다
공진항은 스스로 만주 진출을 ‘사상적 공허를 채우기 위한 시도’, ‘보수주의에 대한 반항적 표현’이었다고 술회하였고, 개성 출신의 소설가 박완서는 공진항의 만주진출을 이렇게 묘사했다.
“개성갑부 공성학이의 아들 공진항이가 만주 벌판에 대농장을 개척한 얘기는 그곳 상공회의소뿐 아니라 개성 바닥에 소문이 자자했다. 드물게 통이 큰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그 발단이 극적이었다. 부친을 잘 만난 덕으로 구라파 유학까지 남달리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시베리아를 거쳐 만주 평야를 지나면서 가도 가도 지평선만 보이는 그 광대무변함에 한없이 매혹 당했다고 한다.
당초의 매혹은 그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할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다분히 상업적인 영감이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많이 피폐해진 농촌과 남부여대 유랑길을 떠나는 농민들의 참상을 보고는 장삿속보다는 자신의 교양에 맞는 이상향 건설을 꿈꾸게 되었다.” (대하소설『미망』)
공진항은 포덕 35(1934)년 7월 12일 이응진과 함께 요하강변의 오가자 농장을 시찰하면서 대농장 건설에 착수한다. 이곳은 십여 년 전부터 한국농민들이 들어와서 수전(水田)을 개척한 곳으로, 고국을 떠나 정처 없이 유랑해온 동포들은 언제 어떻게 또다시 이동하게 될지도 모르는 운명으로 장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도 없이 그때그때를 보낼 따름이었다.
공진항의 표현에 따르면 만주의 동포들은 “아무 때라도 떠날 수 있는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어서 떨어진 의복일망정 궤짝에라도 넣어두는 법이 없었다. 오직 그들은 물이 흐르는 지역을 따라 수전을 경영할 수 있는 기술과 생활력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기술과 생활력은 만주대륙의 각지에 산재한 이백만 동포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인 동시에 민족의식을 잃어버리지 않게 한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만몽산업주식회사 설립
만주를 시찰하며 유랑하는 동포들의 정경을 목격한 공진항은 농장을 건설하여 그들에게 자작 농가를 창립하는 일이 보람 있는 일임을 절감하였고 오가자 농장(뒤에 고려농장이라 개칭)과 정미공장에 10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다. 20만평이나 되는 오가자 농장이었지만 몰려드는 동포들을 수용하기에는 규모가 작았다.
공진항은 1935년 2월 고향의 유지 수십 명을 개성 집으로 초대하여 만주진출을 설명하고 3월에는 십여 명의 시찰단을 이끌고 만주각지를 둘러보고, 이들의 투자를 받아 1935년 8월 50만원의 자본금으로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창립한다. 자본금 50만의 반은 공진항이 내고 나머지는 이선근이 끌어들인 이진교, 이홍근 등이 냈다. 이진교가 전무, 식산은행 개성지점 간부로 있던 홍이표와 이선근의 맏형이 상무, 이홍근과 이선근이 평이사였다.
화살표가 안가농장 일대
오가자 농장에 이어 북만주의 호란하(呼蘭河, 송화강의 지류) 근처에 있는 평안참(平安站)에 농지 2천여 정보를 개간하였고, 또 그곳에서 하얼빈을 향하는 중간지점인 안가(安家)에 사방 둘레가 20리 거리나 되고 5천 정보에 이르는 광대한 평야를 확보하여 농장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만주사업을 시작하여 이미 백만 원 이상의 자본을 투자하였지만 7년이 되도록 자본투자에 대하여 한번도 배당해 본 일이 없고 계속적인 투자만 하게 되어 만몽주식회사와 모체가 되는 춘포사는 많은 빚을 지게 된다. 자금난에 봉착한 공진항은 고민하다가 심신수련에 의한 신념의 강화를 통해 ‘혼연 천인합일의 경지’에 달하였고 한다. 당시의 상황을 공진항은 아래와 같이 술회하였다.
“우리가 현재 부딪치고 있는 난관은 반드시 어딘가에 원인이 있으므로, 그 원인을 밝힌 뒤에 동기가 잘못되었다면 그 원인을 제거해 버리고 새 방면으로 전환하여야 하며, 만약 동기는 선하고 바른 데도 불구하고 그 난관에 봉착하였다면, 일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는 길 밖에 없다.
나는 만주에 와서 처음으로 소금물에 적신 후 깻잎으로 싼 주먹밥 두덩이를 전대에 넣어서 허리에 차고 돌아다닐 수 있는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밥은 체온을 받아서 언제나 따스하였고, 몸에 식량을 다니는 감상은 개척생활에 안도감을 주었다. 이때부터 나는 최소한도의 생활 확보정신을 배웠고, 언제나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의 지조를 지킬 것을 맹서하였다.”(공진항,『이상향을 찾아서』)
때마침 만몽산업주식회사는 만척(滿拓)과의 협상이 성사되면서 2천 정보의 수전을 개간하여 5백여 호의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게 되고, ‘자유식 자작농 제도’를 도입하여 경영혁신을 꾀하고 위기를 벗어난다.
‘자유식 자작농 제도’는 만몽산업주식회사가 더 이상 투자할 여력도 없고 지탱할 능력이 없어지면서 자금회수를 위한 묘안으로 공진항이 내세운 것이었다. 이 제도에 의하면 농민은 누구든지 연한의 제한 없이 언제나 토지에 대한 지가를 지불하면 그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안가농장은 대풍을 이루었는데 추수 때에 이 제도를 발표한 결과 농민 총수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가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대금을 완납하는 기적적인 현상을 나타냈다. 공진항은 성공 원인을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토지대금이 쌌다는 것으로, 일등지가 평당 30전에 불과하였다. 본래 공사비가 면적에 비하여 얼마 들지 않았고, 만몽주식회사는 특별한 이익을 고려치 않고 자금의 조속한 회수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안가농장에 있어서 농민의 경작면적을 1호당 2만평까지 인정하여 생산방식을 기업화하도록 조장했다. 이 제도는 대농들로 하여금 생산의욕을 발휘시켜 고도의 능률이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셋째, 이곳은 원래 토지가 비옥하였다.
협동조합과 학교 설립
만몽주식회사는 투자의 회수와 동시에 철수하게 되므로 공진항은 농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자신이 처리하는’ 자치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협동조합을 조직한다. 협동조합은 농장전체의 수리시설 관리와 운영을 비롯하여 생산물의 공동판매, 소비품의 공동구입은 물론 부대사업인 도정, 병원, 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20만 원에 해당하는 토지를 재단으로 하는 2년제의 농사학교를 설립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소년에게 농업기술과 농민도를 습득케 함으로써 장래 전진하는 농민이 되도록 기획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안가농장은 만주에서 가장 유명한 ‘이상촌’이 되었고 농민들의 마음은 영주의 안정감에 흐뭇했고 겨울에는 새끼꼬기와 가마니 치기로 부업을 삼아서 농가의 수입은 점점 늘어갔다. 안가농장의 성공담은 개성바닥에 곧장 퍼진다. 작가 박완서는 공진항의 성공담을 이렇게 묘사했다.
만몽산업주식회사를 기사화한 동일일보기사(1937.8.12)
“그래 그래 참 개성에서 인물 났더구만.”
“아무럼 큰 인물이구말구요.”
“구라파 유학 가서 하두 안 돌아 오길래 노랑머리 얻어서 아들 손주 꺼정 거느리고 올라나덜 쑤근대더니만...하여튼 우리네 우물 안 개구리덜은 꿈도 못 꿀 큰일을 저질렀더구먼.”
“큰 인물이 마침 큰 땅을 만난 게지요. 농장 규모가 9백만 평이나 된다니 만주 땅이나 되니까 있는 일지지 이 코딱지만 국토 안에서야 아무리 통 큰 사람이래두 별 수 있었겠시니까”
상담을 나누던 소장 장사꾼이 참견을 한다.
‘코딱지만 헌 땅이서락두 쫓겨나지나 말았으며 좋겠네. 작년에 삼남에 가뭄이 들러니만 올해 봉천이나 회령으로 가는 삼등 기차간 보게. 맨 누덕누덕한 보따리에 바가지 매달구 고향 땅 등지는 식구덜이라니까.“
“그겁니다. 바루 그게 공진항 씨가 만주 땅을 개척한 포부라니까요. 많은 인총이 이 좁은 땅에서만 복작거릴 게 아니구나 허는 게 공진항 씨가 구라파에서 시베리아 철도 타구 넓으나 넓은 러시아 땅 만주 벌판을 거치면서 느낀 거라지 않던감요.”
“그럼 자넨 우리 백성이 쪽박 차고 쫓겨나는 게 잘됐단 소린가 뭔가.”
“쫓겨나는 게 아니라 뻗어가는 거라니까요.”
“뻗어? 누구 맘대로 뻗어. 왜놈덜이 쥐고 있는 땅에서 조선 사람이 뻗어봤댔자 그놈들 손바닥 안 놀음이지.”
“그렇게 치면 조선 땅이 더허죠. 이 땅은 일본 땅 아닌감요. 쫓겨나구 말구두 읎는 거야요.”
“저 사람 말하는 것 보게. 젊은 사람 소견머리가 저리니 나라 꼴이 요 모양 요 꼴이지.”
“자네 왜 이러나, 별것도 아닌 걸 갖고 언성을 높이고 그래. 시방 우리한테 나라가 어디메 있다고.”
워낙 통 크게 벌인 사업이라 우리 고장에서 큰 인물 났다고 믿고 싶은 소박한 마음들이 미화시킨 얘긴지는 몰라도 하여튼 공진항의 성공담은 어디가나 화젯거리였다. 물론 칭송의 소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소작 부쳐먹구 사는 신센 어디서나 마찬가지지 공진항이 땅 소작 부쳐 먹는다구 어느 하세월에 제 땅 맨들어 준답니까?” (대하소설『미망』)
34세부터 45세 되는 8.15 해방일까지 약 10년간 만주의 광야에서 황무지를 개척하고 정처없이 유랑하는 동포들을 모아서 마을을 이룩하며 그 곳에서 쌀 생산을 주농으로 하는 이상촌을 만들려 했던 공진항의 노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제의 패망에 따른 정치환경의 변화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