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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1]
동학소설
고요히 흐르는 금강
이상면 _작가, 전 서울대 교수
제5화 신양동에서 함께 살았다
이종만은 솔면이에 와서
비로소 생의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취운정(翠雲亭) 활터에서
무사들이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바라보며
언제나 한번 그렇게 해보나 생각하곤 했는데,
솔면이에 와서 그 꿈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 이규성이 보기에도
유년기 능주에서 그리 잘 놀던 종만이가
서울에서는 놀 곳조차 없어 걱정을 했는데,
솔면이에 와서는 무술을 연마하며
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낙향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세 식구는 가끔 말을 타고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용하다는 지관을 만나 풍수지리를 논하기도 했고, 비결이나 육효학(六爻學)에 능한 도사를 찾아가 나라의 운수를 묻기도 했다. 다들 나라가 내리막(下元甲)에 처했다고 해도 어디선가 희망을 찾고 싶었다.
종만은 틈이 나면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갔다. 꿩도 잡고 산토끼도 잡아와 집에 고기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보다 식생활이 한결 윤택해진 것 같았다.
뻐꾸기가 울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늦은 봄, 종만은 춘흥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영산홍에 봄바람···.’ 콧노래를 부르며 활을 메고 나갔다. 몇 시간 후 문밖에서,
“아버지, 노루예요. 노루 잡았어요.”
“그 큰 걸 어떻게 잡았니···. 대단하구나,”
”아버지, 노루 피 좀 드세요. 아직 따뜻해요.”
초로에 기력이 쇠한 이규성은 노루피를 마시고 회춘하는 기분을 느꼈다. 친구와 함께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노루를 잡아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풍물을 치자 논밭에서 일하던 이들이 일손을 놓고 몰려들었다. 이집 저집에서 찬거리를 가져오고 막걸리도 가져왔다. 다들 설 지나고 고기 한 점 먹어보지 못한 듯, 가마솥에서 노루고기가 익자 입맛을 다시며 떠들어댔다.
“그 날랜 노루를 어떻게 잡았댜?”
“송아지만 한 걸, 어떻게 메고 왔는고?”
‘맨날 사냥을 해서 포식했으니, 힘이 나지 않겠는가···.’ 보릿고개에 허기진 이들이 쌀밥에 노루고기 국을 먹고 술에 취해 풍물을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종만은 모처럼 이상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늘 갇혀있는 느낌이었는데, 솔면이에서는 마음 놓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잘 지내고 있소. 십승지지라 도인들이 더러 있어 배울 게 많아요. 비결에 통한 분도 있고, 풍수를 잘 하는 이도 있고, 육효학(六爻學)에 통달해 운수를 점치는 도사도 있어요. 어디서 이인이 나타났다고 하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곤 한답니다.
도학도 좀 접하지만, 무술을 연습할 겸 가끔 사냥을 나갑니다. 일전에 노루를 한 마리 잡아서 부친께 녹혈을 드렸더니, 한결 기력이 좋아지시는 것 같더군요. 노루가 어찌나 크던지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였답니다. 가까이 있으면 한 준(樽) 술에 세상을 논할 텐데.”
가을이 끝날 무렵, 이상설한테서 편지가 왔다.
“친구들과 설악산 신흥사(新興寺)에 가서 오래 있다 오니, 대부 편지가 기다리고 있데요. 무술을 배우고 사냥도 하신다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풍수와 도참도 접하시고 육효학(六爻學)도 배우신다니, 도사의 면모가 보일듯합니다. 신흥사에서 영어와 산학을 선생도 없이 깨우치려다보니 무척 힘이 들더군요. 서양이 판치는 세상에 신학문을 익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는 길이 분야는 좀 다르지만 목표는 같아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지요.“
*
해가 바뀌어 병술(1886)년. 다시 봄이 왔다.
솔면이는 어디를 보아도 그림이었다.
산이란 산엔 진달래와 벚꽃이 만발했다. 동네마다 복숭아꽃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문경에 이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세 식구가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진천 이상설 가에서 보낸 하인이 달려왔다. 보자기에 싼 옛날 책을 건네주었다. 그 속에 화선지에 싼 안부 편지에 시가 한 수 들어있었다.
小臉白溪流 산골 물가에 어여쁜 여자가 있기에
熱照摸谷問 열띤 눈으로 골을 살펴 물어봤더니
轉頭不答留 머리 돌려 답 안 하고 그냥 있는데
紅顔裏姿現 달아오른 얼굴에 속 자태가 보이데
한시는 근사했으나 평소 근엄하던 이상설답지 않았다. ‘그가 이런 시를 써서 보낸 데에는 필경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 속뜻을 곰곰이 새겨보았다. ‘냇가에 백옥 같은 미인이 있어, 열띤 눈빛에 골을 살펴 물어봤더니, 달아오른 얼굴에 속 자태가 드러난다?’
‘옳지, 옳지.’ 종만은 무릎을 쳤다.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편지를 싼 화선지를 펴서 향롯불에 쪼여보았다. 과연 붉은 글씨가 서서히 드러났다.
“대부, 얼마 전 저동(苧洞,明洞) 이시영(李始榮,1869-1953)네 옆집으로 이사했어요. 최근 정시(庭試)가 있었나본데, 대원군 장손 이준용(李埈鎔,1870-1917)이 문과에 급제했답니다. 원세개(袁世凱)가 대원군에게 축하 난을 보냈고 대원군도 화선지에 난을 쳐서 화답했답니다. 대원군은 임오군란 직후 청국에 끌려갔다가 작년 말에 귀국했으니, 유감이 상당할 텐데, 갑자기 친밀해지니 민중전(閔中殿) 눈초리가 어떻겠습니까? 관에서 저동 일대를 살피고 있습니다. 시영 부친이 준용의 부친 이재면(李載冕)과 친하고, 생전에 저의 양부와도 막역한 사이였지요. 대부 엄친께서도 승문원에 계실 때 그들과 잘 통하는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준용과 우리가 갑장이라 공연히 신경을 쓰는 자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몸이 쇠약해져 엽사(獵師)를 데리고 강원도로 가려고 합니다. 노루 피를 먹으면 나아질까 해서요. 누가 저를 찾다가 혹시 대부가 있는 곳을 지목하면 어쩌나 염려되오니, 당분간 어디 좀 한적한 곳에 가서 계시며 세상을 살피시면 어떻겠습니까?”
‘대원군과 원세개가 역모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아버지 이규성도 깜짝 놀랐다.
“허, 심상치 않구나. 솔면이는 문경 땅이라 괴산 관아에서 찾는 일이 없고, 문경 관아에서도 80리 떨어진 솔면이에 오는 일이 별로 없지만, 국사와 관련된 일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일단 이곳을 떠나야겠다.”
“아버지, 근사한 곳이 하나 생각나네요. 앞산 너머 용해(龍海,龍華) 초입에 양짓말(陽洞)이라고···, 화전민 촌인데 지대가 좀 높고 규모가 여기보다 작지만,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정남향으로 경치가 좋습니다. 선유동에 버금가는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 어디 한번 가보자.”
그날 오후 세 식구가 앞산을 넘었다. 남으로 안개 깔린 용해분지가 고봉준령에 둘러싸여 호수 같이 아름다웠다. 개천을 따라 내려가니 동쪽에서 흘러나오는 냇물과 합수하는 곳이 있었다. 화전민 집이 더러 보였다. 아늑한 산기슭에서 목수가 인부 몇을 데리고 집을 짓고 있었다.
“집터가 좋아 보입니다. 여기서 살려고 그러세요?”
“저는 저기 양짓말(陽洞)에 사는 목수인데,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아서요.”
“목수니까 집을 또 지어도 되겠구만. 혹시 내가 이 집을 사고 싶다면 파시겠소?”
“여기는 화전민 촌이라 땅값은 없고요, 그저 저희들 품이나 후하게 쳐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찬바람이 날 무렵 새양짓말(新陽洞)로 이사했다. 솔면이는 지대가 낮아 좀 음침했는데, 이곳은 앞이 탁 틔어서 양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새벽에 말을 타고 분지에 내려가 무술을 연마하기에도 솔면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진란 때 왜적을 물리친 정기현(鄭岐鉉) 장군이 활동하던 데가 아닌가. 한바탕 기창(騎槍) 연습을 하고나서, 분지 가운데 있는 노천온천 연못에 가서 따순 물에 목욕을 하면 기분이 하늘을 날 것 같았다.
*
정해(1887)년 봄 개나리 진달래가 곱게 피는 날, 보은 장내리 신사 본부인 댁에서 장한주(藏漢柱)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둘째부인 안동김씨가 별세했다는 것이었다. ‘정월 보름날 아들 덕기(德基)의 혼사가 있었는데, 한 달여 만에 어찌 이런 일이···.’
이종만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화서면 앞재마을(前城村,鳳村里)로 조문을 가기로 했다.
“얼마나 망극하십니까? 얼마 전에 아드님 혼사가 있었는데, 갑자기---.”
열 살 최윤은 종만을 보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얼마나 놀랐니. 나도 네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단다. 너의 심정을 알 것 같구나.”
불과 2-3년 전 이사할 때만 해도, 종만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그리 좋아하던 최윤. 종만이 밖으로 나오자,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왔다.
종만이 눈인사를 하고 말에 오르자, 최윤이 울음을 터뜨렸다. 종만이 말 위에서 한 손으로 안장 손잡이를 잡고 몸을 한껏 기울여 다른 손으로 최윤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종만이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다시 올게···. 어머님 잘 모시고···.”
최윤은 눈물방울 사이로 종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도 채 안 되어 신사의 생신을 알리는 기별이 또 왔다. ‘상배한지 달 만에 회갑잔치라니···.’ 이종만은 다시 아버지를 대신해 말을 달려 보은 장내리로 하례 인사를 하러 갔다. 신사 댁에는 서장옥 손천민 손병희 김연국 등 여러 두령들이 모여 있었다. 해월이 종만의 하례인사를 받고, 둘러앉은 두령들에게 소개를 했다.
“이 청년은 이규성 동덕의 자제요. 지금 무과 공부를 하고 있어요.”
“4-5년 전에 그 분을 청주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나와는 인연이 깊어요. 계해(1863)년 가을에 저 산 너머 동관리(東觀里)에서 만났어요.”
이종만이 신사와 두령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자, 최윤이 방실방실 웃으며 따라 나왔다.
“무얼 좀 드시지요”
최윤은 종만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안채 골방으로 들어가잔다.
손님상을 차리던 동네 여인들이 한마디 씩 한다.
“아이구, 웬 미남 청년여? 윤이가 신랑감을 데리고 왔구먼?”
최윤은 킥킥 웃으며 개다리소반에 고기전과 다과를 국밥에 곁들여 가져왔다. 최윤이 무릎을 꿇고 이종만에게 술잔을 올리자, 동네 여인들이 또 한마디씩 한다.
“계집은 크나 작으나 그저 제 사내밖에 모른다니까···.”
“여자가 남자에게 술잔을 바치는 건, 몸을 바치는 거나 마찬가지여.”
*
그해 10월 이종만은 무과 초시를 치르러 상경했다.
“아유, 대부 늠름하이, 장군 같구려.”
“어, 3년 만일세. 그 동안 우리가 많이 자랐군. 지난 번 초시 잘 치렀지? 축하해.”
벌써 변성기, 둘이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그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노루 피가 좋더라구. 엽사(獵師)를 데리고 강원도 산간을 좀 돌아다녔지···.”
훈련원에서 열린 초시에 이상설이 동행했다. 종만은 3년 전과 달리 실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다. 큰활(正兩弓)을 쏘아 240보를 훌쩍 넘겨 만점을 받았다. 철전(鐵箭)도 과녁을 맞혔고, 편전(片箭)도 130보를 날아 갑옷을 꿰뚫었다.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는 기사(騎射)는 사냥을 많이 해본 종만에게는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말을 달리며 창을 쓰는 기창(騎槍)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총은 연습이 부족한 탓에 좀 서툴었으나 그런대로 해냈다.
“대부, 축하해. 3년 전보다 장족의 발전이 있었구먼···.”
다음 날 둘이서는 북촌에 놀러가기로 했다. 5년 전 임오군란을 구경했고, 3년 전 갑신정변을 지켜봤으니, 그 현장을 다시 보자는 것이었다. 저동(苧洞,明洞) 언덕을 내려가 주차대신(駐箚大臣) 원세개(袁世凱)의 공관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남대문 쪽에서 난데없이 큰 소동이 벌어졌다. 한 떼의 청국인이 조선 관원의 행차를 막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돈도 없는데 어디를 가?”
“워싱턴에 잠시 갔다가 온다니까요.”
“대국에서 다 돌보아 줄 터인데, 무슨 걱정인고?”
“미국 공사와 약조가 있어서···.”
‘남의 나라 관원이 어디를 가던 청국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청국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조선은 속방이라서 청국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관원 일행은 청인들한테 떠밀려 수표교를 건너 궁궐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신희(趙臣熙) 주구공사(駐歐公使)는 용케도 서소문을 빠져나가 마포로 가서 나룻배를 타고 제물포로 가서 홍콩행 화륜선을 탔다고 했다. 박정양(朴定陽) 주미공사는 의젓하게 남대문을 통해 마포로 가려다가 청국 관원한테 잡힌 것이었다.
각국 공사들이 원세개(袁世凱)에게 항의를 했다지만,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이 항복을 했기 때문이지···.”
“대부한테 기대가 크오. ······. 내년 봄 복시(覆試) 때 다시 만나.”
이종만은 상설의 전송을 받으며 초시 합격패를 품고 용해로 말을 달렸다.
이규성은 아들이 무과 초시에 합격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나도 문과 초시에 여러 번 합격을 했으나 복시의 벽을 넘지 못했다. 너는 해내기 바란다.”
복시 과목에는 무술 외에도 병서와 경전과 전사(戰史)가 있었는데, 각 분야 명저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문제를 받아 논술을 쓰는 것이었다. 3년 전 초시 낙방에 충격을 받아 무술연마에 집중을 해와 무술은 만점을 받았지만, 정작 논술이 문제였다. 그렇게도 하기 싫던 글공부. 복시를 불과 몇 달을 앞두고 갑자기 한다고 실력이 붙겠는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경전(經典) 중에서는 공부를 좀 해본 맹자(孟子)를 택하기로 했다. 병서(兵書) 중에는 손자(孫子)를 택하기로 했고, 전사(戰史)에서는 역대병요(歷代兵要)가 좀 수월할 것 같았다. 정도사한테서 그 대강을 배우면서, 문리를 익히고 글 쓰는 연습은 집에서 하기로 했다.
*
이듬해 3월 훈련원에서 복시가 열렸다. 300명 초시 합격자가 모여들었다. 초장(初場) 궁술(弓術)에서는 종만이 남보다 뒤질 것이 없었다. 중장(中場)의 기사(騎射)와 기창(騎槍)도 마찬가지였다. 조총(鳥銃)은 그런대로 해냈는데, 격구(擊毬)와 편추(鞭芻)가 어려웠다. 격구는 말을 몰며 뭉치를 낚아채 던지는 것이었고, 편추는 채가 짧은 쇠도리깨로 대련을 하는 것이었다.
종장(終場)에서는 모두 다 논술이었다. 맹자에서는 ‘천지인(天地人)’을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공손축장(公孫丑章)에 나오는 대로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 가운데 인화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지리고 세 번째가 천시라고 답을 썼다.
손자병법에서는 지피지기(知彼知己)를 논하라는 것이었다. 손자병법 제10장 지형(地形) 끝에 나오는 대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는 위태롭지 않고(勝乃不殆), 천시(天時)와 지리(地利)까지 알면(知天知地), 승리는 온전할 수 있다(勝乃可全)고 썼다.
역대병요에서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개연성이 나왔다. 손자병법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사지(死地)의 예를 들어 앙숙인 두 나라도 위난에 처하면 연합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썼다.
답안은 지식이 좀 있다고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진서(眞書)로 쓰는 글 솜씨가 중요했다.
다음 날, 이종만과 이상설은 저동(苧洞,明洞) 원세개(袁世凱) 공관 앞을 지나며 작년 가을 청국 관원이 박정양(朴定陽) 공사 일행의 미국행을 막던 이야기를 했다.
“연말에 청국이 열강의 압력으로 조선공사를 미국에 보내기로 했는데, 조선은 청국이 요구한 3단(三端)을 수락해야 했대. 삼단이란 (1) 임지에 가서 청국공사관을 먼저 방문하고, (2) 청국공사의 안내로 백악관에 가서 신임장을 증정하고, (3) 모든 의전행사에서 조선공사는 청국공사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었대. 그런데 박 공사는 현지에 가서 3단을 따르지 않았다누만···.”
“그런대로 잘 한 것이지만, 청국이 박정양 공사를 불러들이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을까?”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삼전도(三田渡) 수항단(受降檀)에 가보기로 했다. 왕십리에서 살곶이다리(箭串橋)를 건너 뚝섬에 가서 나룻배를 타고 하중도(河中島)를 지나 삼전도(三田渡)로 갔다. 강가 언덕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우뚝 서 있었다.
“조선왕이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대청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을 맹세한다···.”
“오랑캐라고 깔보고 명분만 찾다가 결국 항복해서 대대로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이구먼.”
귀로에 훈련원에 들렀다. 급제자 28명 중에 이종만의 이름은 없었다. 글이 짧은 탓이었다.
용해로 돌아오며 이종만은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고 글공부를 소홀히 한 것을 수없이 뉘우쳤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을까? 신양동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잘못을 빌고 지금부터라도 글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사서도 다시 읽고, 병서도 손자(孫子)뿐만 아니라 오자(吳子)도 보고 육도삼략(六韜三略)도 공부하기로 했다. 역사서도 통감(通鑑)을 다시 읽고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탐독하기로 했다. 아버지 밑에서 문장을 짓고 글씨 쓰는 연습도 하기로 했다.
*
기축(1889)년 7월 보름날 저녁 때, 해가 낙영산(落影山)에 기울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규성이 책을 보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사립문에 해월 신사가 허름한 옷차림에 봇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규성이 깜짝 놀라 뛰어나갔다.
“각중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금 관에서 지목이 심해서요.”
“잘 오셨어요. 여기는 괴산 땅이지만 상주와 문경의 접경이고 화전민촌이라 무난합니다.”
“새로 얻은 소실(小室)과 돌아간 소실의 딸을 데리고 왔어요.”
“저도 능주에서 상처하고 우리 애 서모(庶母)와 함께 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사냥 나갔던 종만이 꿩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해월 신사께 절을 했다. 종만과 최윤은 어른들 틈에서 서로 눈인사를 했다. 종만이 밖으로 나가자 최윤이 따라 나갔다.
서모가 쌀을 안치자, 종만이 물을 끊여 꿩 털을 뽑고 요리하기 좋게 칼질을 척척 해냈다. 최윤이 텃밭에서 오이 호박 고추를 따오고 깻잎과 상추를 뜯어다 씻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그 위에 상을 차리고 둘러앉으니, 어느 새 보름달이 뜨고 있었다. 각중에 차린 손님상이었지만, 꿩고기까지 있어 어느 잔칫상에 못지않을 것 같았다.
“사방에 경치가 참 좋습니다. 모기 한 마리 없네요.”
“예, 좌우로 산삼 썩은 물이 흘러서 그렇다는 설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 이렇게 오셨으니, 다른 데 가실 생각 마시고 오래오래 계세요. 양가 댁이 비슷한 연배시니 친하게 지내시구요.”
이튿날 이종만은 최윤을 안아 말에 태우고 용해 분지로 나갔다.
“여기가 도인들이 많이 사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우복동(牛腹洞)이다.”
“우복동(又福洞)이라구요? 복이 또 생긴다는 뜻인가요?”
종만은 최윤의 배를 손으로 툭툭 치며,
“배 복(腹)자다. 소의 뱃대기처럼 푸근하여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이란다. 만무일상(萬無一傷) 십승지지(十勝之地)라 난리도 피해가고, 설사 난리가 나더라도 만 명 중에 하나가 다칠까말까 한 곳이란다.”
“어머나, 저기 좀 보세요. 연못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네요?”
“온천이다. 피부에 참 좋단다. 함박눈이 내릴 적에 목욕을 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천국이네요. 여기서 살고 싶어요. ······.”
10월 29일 저녁 때, 누가 헐레벌떡 신양동 집에 찾아들었다. 손천민이 몸을 떨며 들어섰다.
“야단났습니다. 서장옥이 강한형 정현섭 등과 서울에 갔다가 잡혀갔습니다. 청주 제 집에도 관아에서 들이닥쳐 방문 중인 서숙(庶叔) 손병희를 잡아갔답니다. 시방 전국에서 야단입니다. 여기도 안전하지 못할 겁니다. 어서 먼 북녘으로 피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의 오빠가 잡혀갔어요? 이를 어떡해···.”
달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날이 밝는 대로 북으로 떠나기로 했다.
소실 손씨가 친척이 있는 음성 되자니(都孱里)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치를 보니, ‘남 집에 전실 자식까지 데리고 가요?’ 신사가 단박에 눈치를 채고,
“윤이야, 너 외가에 가 있을래?”
최윤이 대답을 안 하고 있자. 이종만이 냉큼 자원한다.
“제가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최윤은 이종만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간다는 생각에 싱글벙글 좋아한다.
*
이튿날 아침 이종만은 최윤을 안아 말에 태우고 북으로 향했다.
“외갓집에 가는 길에 저의 고향 단양에 한번 가보면 어때요?”
그녀가 태어나 4년 전까지 산 곳은 단양현 남면 장정리. 읍내서 남쪽 산골청으로 한참 들어가니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빠끔한 곳에 서너 동네가 옹기종기 있었다.
“저기 새두둑(鳥阜) 느티나무 아래 큰집이 보이죠? 제가 태어나 자라난 곳예요. 4살 때 저 건너 여(呂)씨네 집에서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찍어냈어요.”
골짜기를 빠져나와 단양 읍내를 거쳐 남한강을 따라 말을 달려 영춘(永春)으로 갔다. 마침 장날이라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남쪽으로 가파른 고개를 넘으니 의풍분지(儀豊盆地)가 나타났다. 저녁연기에 안개가 깔린 듯, 커다란 호수 같았다. 그 건너 우뚝 솟은 삼도봉(三道峯)이 저녁햇살에 상서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용해와 비슷했다. 비탈길로 한참 내려가니 계곡. 실개천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깨진 옹기를 지붕에 얹은 허름한 집들이 몇 채 보였다. 외갓집 동네 사기막골.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오더니, 외손녀를 단박에 알아본다.
“윤이야, 웬 일이냐? 그 동안 많이 자랐구나.”
외사촌 내외는 옹기 팔러 영춘장에 갔다고 했다.
윤이가 할머니를 도와 저녁상을 차렸다. 오곡밥에 담북장, 그리고 가지가지 산채···.
식사 후, 이종만이 그만 가보겠다고 일어서자, 할머니와 최윤이 한사코 말린다.
“옹기를 굽고 있어 따뜻햐, 헛간 불가마 앞에 멍석 깔고 자도 되어. 우리 애도 그렇게 혀.”
최윤이 종만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나가잔다.
밤하늘엔 수천만 개의 별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실낱같은 그믐달이 걸려있었다.
“예쁘구나, 꼭 네 눈썹 같구나.”
“제 눈썹이 저렇게 예뻐요? 흐흐···.”
최윤이 춥다며 종만에게 앙증스레 접근했다. 잠시 후 그의 엄지손가락을 잡아끌고, 불가마 앞 헛간으로 가잔다. 멍석을 깔고 이부자리를 펴더니, 냉큼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제가 따뜻하게 해드리려고요. 흐흐···. 옛날얘기 좀 해주실래요?”
종만이 은하수를 가리키며 견우직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어머나, 별들도 결혼을 해요?”
“그럼, ······.”
별나라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다보니, 어느 새 최윤이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