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윤동주시문학상 당선작입니다.
윤동주 시문학상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공모입니다.
연세대 홈페이지에 당선작이 발표되었네요.
공부 삼아서 함께 감상해보도록 합시다.
[당선작] 점자도서관에서 모래 佛 만나다
윤수미(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3년)
반쯤 열린 창으로 휙 부는 바람이
<서유기> 점자책 한권
사막처럼 펼쳐놓고 달아난다.
더듬더듬 눈을 감고 만져보는
책 속에 깊이 박힌 점자들
풀 한포기, 바람 한 조각, 새 소리
눈을 감으면서 더욱 느껴지는
까칠까칠하고 딱딱한 소리들이
지문으로 더듬을 때마다
끝없는 사막 같은 내 안에서
어찔어찔 모래 佛 하나 일어선다.
부끄러움으로 눈을 감은 모습이며 색깔이며
잔뜩 등 웅크린 낙타의 울음 들려온다
길고 긴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발자국 따라서,
소나무 향기 가득한 숲길을 지나
외줄 타듯 막막한 점자책 속을 횡단하는
모래알갱이같은 점자들,
길을 만들고 길을 이끌고 가는
눈 먼 점자 하나
멀고 먼 사막 한권 다 넘긴
점자책 속에서 모래 佛 하나 우뚝 일어섰다
[가작] 회전목마
홍지연(대전대 문예창작학전공 2년)
음악이 흐르고 있어요
음악이 멈추면 말들의 달림도 멈출까요
중심 바깥쪽으로 달리는 말을 타고 싶어요
혹시 멀리 튕겨지는 건 아니겠죠
고삐가 없어도 멈출 수 있나요
이 길은 언젠가 와 봤던 길 같아요
아무리 애써도 앞선 사람과의 간격을 좁힐 수 없네요
남들이 벌써 지난 길을 내가 달려가요
하지만 앞으로 달려도 결국 제자리네요
달린 만큼 뒷걸음질하는 배경들이 추억이 될까요
검은 태양은 소리 없이 지고 말았고요
하늘엔 각기 다른 색의 별이 낮은 촉광으로 떠 있네요
자꾸 흔들거려요
떨어지지 않으려면 꼭 붙들고 있어야 할까봐요
아무에게도 간섭받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바람은 왜 자꾸 뒷덜미를 낚아채는 거죠
음악 좀 제발 꺼 주세요
늘 같은 음악이라 조금 싫증이 나네요
새파랗게 질린 아이들 비명 지르며 튀어 올라요
한 바퀴 돌 때마다 조금씩 늙어 가는 것 같아요
참, 시간 빌릴 돈은 가지고 오셨나요
[가작] 파리지옥풀
송섬별(부산대 불어불문학과 1년)
8반 아이들이 사다 놓은 파리지옥풀은
파리만 잡아 잡숫는 것이 아녔다
줄 치고 저만한 파리 잡아먹던 풀색 거미가
천수관음처럼 많은 손발 꿇고 기어들었다
죄 많은 제 몸 스스로 공양하려는가
오래 잠잠한 그 지옥을 들여다보자니
연꽃처럼 잔뜩 부푼 파리지옥풀 앞에
똑같이 죄진 내 손, 그만 부끄러워
그냥 거두고 만다
빈 거미줄에 달라붙은 목숨들도
하나, 하나 방생하려다
거미가 돌아올 이승조차 찢어 없애고 만다
거민 극락왕생하려나
살아 남을 죄던 실 풀어
흰 가사 지어 입고 성불하려나
지나간 죄 모두 맑게 씻기어 사해지려나
그러다 여름을 보내도록
물 한 모금 보시 못 한 내 죄는 또 어떡하려나
잔뜩 말라 바스락 소리가 나는 파리지옥풀은
저 혼자만 지옥인 것이 아녔다
거미가 죽지 않고 살았는지
혹 씻어야 할 죄 아직 많아
이번 생에도 거미로 화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