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부터 1970년대 최종기 까지를 포함하는 시기로 포크음악이 점점 빛을 잃어가는 시기다. 그러나 그 명맥을 이어온 몇몇 아티스트들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포크음악을 지키려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꺼져가는 불꽃이지만 그 명맥은 숭고하게 이어졌다.
울고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
포크음악이 완전한 침체기로 접어들었덜때 포크음악의 초창기부터 활약해 온 우리의 음유시인 조동진이 드디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포크음악의 단절기에도 조동진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레오나드 코헨처럼 조용하면서도 심오한 그의 음악세계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의 큰 수확이었다.
배가 있었네. 작은 배가 있었네.
아주 작은 배가 있었네.
라라라 라라라
작은 배로는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작은 배)
TV 한번 나오지 않고 라디오 전파를 많이 타지도 않은 그였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진 그의 메시지는 폭발적이거나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 수록 우리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크음악의 발전을 방해했던 외부요소가 뿌리 박혔던 이 시대의 그의 음악도 '작은 배'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슬픈 현실이었다. 이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던 노래중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밤배'가 널리 불렸던 것은 이런 현실에 대한 무의식의 반영이었을지도 모른다.
검은 빛 바다위를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밤배)
볼 사람 찾는 이 없던 우리 포크음악의 침체기에 일부 포크싱어들은 포크음악과 우리의 전통음악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이것은 참된 의미의 포크음악의 정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일부에서는 포크음악이 아닌 국악을 이용한 상업가요라고 비난도 했었지만, 어찌 기타만 이용한 음악만이 포크음악이라 할 수 있는가? 이런 음악이 발표됐다는 것은 이 시기의 값진 수확이었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 갈래 깊은 산속 헤멨나?
밤벌레의 울음계곡 별빛 곱게 내려 앉나니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가보세
(송학사)
우리는 곁에 있는 포크음악을 보지 못하고, 너무나도 허공을 헤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김태곤의 공로는 크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송창식등 기성가수들도 우리의 전통을 되살려 이것을 현대음악화 하는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이러한 작업의 도화선이 됐던 작품중에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은 태산처럼 우뚝솟은 걸작이었다.
창문을 열고 내다봐요
저 높은 곳에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
당신의 부푼 가슴으로 불어오는
맑은 한줄기 산들바람
살며시 눈감고 들어봐요
먼 대지위를 달리는 사나운 말처럼
당신의 고요한 가슴으로 닥쳐오는
숨가쁜 자연의 생명의 소리
누가 내게 따뜻한 사랑 건네주리오
내 작은 가슴 달래주리오
누가 내게 생명의 장단 쳐 주리오
그 장단에 춤추게 하리오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사색의 시인이라면 좋겠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시인의 마을)
이 시기에는 대학가의 가요들이 본격적으로 상업화 되기 시작하였던 때였다. 그 계기가 된 것은 각 방송국의 대학생 가요제로 그 중에는 뛰어난 작품도 상당히 많아 포크음악의 활력소가 됐던 것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뛰어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미처 성숙되기도 전에 메스컴이라는 상업화의 괴물의 마수에 걸려들면서 못다핀 꽃 한송이로 전락되어가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이 상에 기쁜 꽃 있으니, 가득한 사랑의 눈을 내리고
우리 사랑에 노래 있다면, 아름다운 생 찾으리다.
이 상에 슬픈 꿈 있으니, 외로운 마음에 비를 내리고
우리 그리움에 날개 있다면 상념의 방랑자 되리라
이 내 마음 다하도록 사랑한다면, 슬픔과 이별 뿐이네.
이 내 온정 다하도록 사랑한다면, 진실과 믿음 뿐이네.
내가 말 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에 돌이 되겠오
내가 님 찾는 떠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겠오
(내가)
이런 음악중 가장 포크적이면서도 메시지 있는 가사와 카타르시스적인 멜러디로 큰 인기를 모았던 걸작 '내가'는 대학가 가요중 가장 대표적인 포크음악 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 외에도 포크의 전통을 지켜온 이정선등과 혼성듀오의 전통을 이어온 논두렁 밭두렁, 아름다운 멜러디를 잘 만들었던 오준영 등이 외롭게 통기타를 지키면서 활동했던 시기였다. 그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현재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시대구분과 평가를 뒤로 미룰 수 밖에 없다. 요즘의 음악중 TV 나 방송등 전파매체를 타지 않고도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포크음악을 한 곡 소개 한다. 동요풍의 이 곡은 포크송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단적으로 지적해 주는 곡이기도 하다.
화창한 봄날에 코끼리 아저씨가
가랑잎 타고서 태평양 건너갈 때에
고래 아가씨 코끼리 아저씨 보고
첫 눈에 반해 스리살짝 윙크 했대요.
당신은 육지 멋쟁이, 나는 바다 이쁜이
천생연분 결혼 합시다.
예식작은 용궁예식장, 주례는 문어 아저씨
피아노는 오징어, 예물은 조개 껍데기
(코끼리 아저씨)
에필로그
<포크음악의 새 바람의 기대하며>
우리의 포크음악의 중흥을 위하여 몇가지 제언을 해 본다.
첫째, 포크가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포크가수인 것이다. 포크음악은 듣은 음악이 아니라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격언이 포크음악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도록 좋은 음악이 나왔을 때 우리 모두 박수로 성원해 주자.
둘째, 프로테스트를 강조하는 것만이 포크음악은 아니다. 프로테스트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전통을 잇는 멜러디와 가사를 개발하여 우리의 희망과 정서를 담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가도록 하자. 그렇다고 외국의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의 것만을 고집해서도 안될것이다. 지나침은 못미침만 못하다는 옛말을 잊지 말자. 그리고 이렇구 저렇구 어줍쟎은 변명은 이제 그만두고 앨범 하나에 그야말로 혼신을 다하는 진정한 아티스트가 되도록 우리의 포크가수들 노력 좀 하자.
세째, 이제 더 이상 가수들의 스캔들이나 뒷 얘기로 신문이나 잡지의 값진 지면을 낭비하지 말자. 물론 그런 기사도 복잡한 세상에 이야기거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우리의 음악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쓰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자. 우리의 음악을 발전시킬 사람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말자.
<이야기를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대중문화를 정리하는 일에 그동안 너무나 인색했던 것 같다. 외국의 대중음악을 정리할 때 보이는 그 많은 자료도 우리의 음악을 정리하는 데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록 대중문화라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작업은 이제부터라도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단순한 곡의 나열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글이지만, 우리의 대중문화를 정리하는 작업의 촉진에 조그만 힘이 되고 우리의 정서를 듬뿍 담은 포크음악이 널리 불려지는데 자그마한 도움이 됐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바쁜 와중에서도 도움 말씀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우리 포크음악의 대명사인 '행복의 나라로'를 소개한다. 다음 이런 기회에는 보다 더 우리의 정신이 물씬 풍기는 음악들이 열거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겠다.
장막을 거둬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 바람을 한번 또 느껴 보나.
가벼운 풀밭으로 나를 걷게 해 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행복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