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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화엄사승가대학......... 종곡
승조의 물불천론(物不遷論)으로 본 무아
목차
서문......................................3
1.물불천론으로 본 무아...........4
2.은산철벽(銀山鐵壁)..............10
3.수행법(정혜쌍수).................13
4.깨닫고 난 후 보림..............18
5.결론..................................19
승조의 물불천론(物不遷論)으로 본 무아
서문
해탈이 무엇인지 알기위해선 물불천류(物不遷流)의 입장에서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 쉽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세세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천류’라는 것은 변화하며 움직인다는 뜻이니 ‘예’로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이 바로 천류다. 그런데 왜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다고 할까? 움직인다는 것은 비교대상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인데 비교대상이 없으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길이 있을까? 가령 테두리가 없이 끝없는 텅 빈 허공 가운데를 자동차가 달린다고 할 때 그것을 보는 자가 없고 또 비교대상이 없다면, 누가 그 자동차를 움직인다고 판단할 것인가.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말한다면 아직 이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움직인다는 것도 보는 자가 있어야하고 비교대상이 있어야한다. 가령 아공(我空), 법공(法空)에 의해 내 몸과 마음이 사라지고나면, 예를 들어 하나의 책상을 볼 때에도, 책상이라는 나의 주관적 관점이 사라지고 없으면 객관적인 그 책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책상은 모양이 사각형이고 높이는 한자며 길이는 석자다, 과연 이러한 분석은 올바른 것일까? 그리고 내 마음(과거의 정보)을 떠나서 이 세상에 사각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즉 삼각형이나 동그라미라는 비교대상을 떠나서 사각형을 인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책상도 보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사람이 보면 모가 난 책상으로 보이지만 개미가 보면 넓은 광장으로 보일 것이고, 사람보다 큰 사천왕 같은 천인이 보면, 책상은 너무 작아 먼지처럼 보일 것이니 세모인지 둥근지 구별할 수 가 없어 관심이 없을 것이고, 먼지 같이 미세한 진드기가 보면, 나무의 세포까지 다 보일테니 이리저리 얽혀있는 밀림의 숲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책상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자기의 업(축적된 과거의 정보)대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사각형이라는 독립된 자성을 가진 물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 물체를 알아볼 길이 없을 것이다. 자기의 고유한 자성을 가진 것을 무슨 수로 알아볼 수 있겠는가! 자기만의 고유의 자성을 가졌다는 것은 연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홀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자신의 실체를 가지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가 탄생하거나 깨어지거나 또는 깨어지지 않건 관계없이 그것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비교 없이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판단하거나 분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비교에 의한 과거에 저장된 정보대로만 판단할 뿐이므로 이 정보 바깥에 그 무엇도 알 길이 없다. 뒤집어 말해 그것이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조차 판단 할 길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태풍이 몰아칠 때, 이것에 대한 나의 주관적 관점(상대적 비교로 통해서 인식하는 방법)이 빠지면 이 현상은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그래도 움직임이 있을까? 아니다! 당연히 움직이는 모습(遷流)이 사라질 것이며, 천지를 뒤집으며 몰아치는 그 모습도 그냥 그대로 조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라보는 나의 주관적 관점이 없으면 현상은 조용하고 움직임이 없다. 태풍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사라지면 (즉 내가 없어서 두렵거나 경계해야 할 필요가 없으면), 그 나타난 대상은 아무 의미가 없어 그냥 텅 비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설령 처형장 망나니의 칼날일지라도 그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칼날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즉 죽을 내가 없으면 칼날은 허공과 같아 움직여도 움직임이 없는 것이다. 마치 태풍의 휘몰아침도 내가 없으면 조용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없듯이, 모든 것이 그렇게 편안하고 흔적이 없는 것이다. 결국 움직이지만 움직임이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이 무아의 도리이며, 미움과 원망 속에서도 미움과 원망이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바로 자유며 해탈이다.
1.물불천론物不遷論으로 본 무아無我
1).움직이지(遷流) 않는 이유
이 글은 수행이론에 관한 글이다. 여태까지의 수많은 수행서를 통해서 각가지 방법들을 제시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 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해는 알음알이라고 여겨 모든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경기(驚氣)를 일으키지만(특히 선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깊은 이해(信解)야 말로 체험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체험한 자는 자신이 무엇을 체험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그것을 남에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뒤집어 말하면 정확한 이해는 곧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가 완벽하여 백퍼센트가 된다면 그 즉시 관점이 바뀌어 고요한 사마타와 함께 바로 실제적 체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완벽한 이해는 체험 그 자체라는 견해를 가지고, 이 논리를 시작한다.
조론(肇論)에서 사물은 천류(움직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사물은 천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이유는 전적으로 ‘나라는 자아가 있어서 내 입장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라고 단정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 입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이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리라. 가령 여기 연필 한 자루가 있다고 하자. 이 연필을 볼 때에도 보는 자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필로 보지만, 사람이 아닌 개미가 본다면 개미의 입장에선 그것을 큰 기둥으로 볼 것이요, 또 그 보다 더 작은 ‘이불진드기’가 보면 그것은 넓고 넓은 광대한 삶의 대지(大地)로 비쳐질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 각자의 입장마다 각각 다른 현상을 나타내므로 그것의 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해 진다. 그 이유는 현상세계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어서, 단지 각자의 업식(과거정보) 대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움직임이라는 것도 그 움직임이라는 것이 실재 존재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각자의 업식에 의해서 “움직이는 모습으로 가장(假裝)하고 내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식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구조는 너무나 편협되고 착각으로 구성되어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가상적인 업식(과거정보)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사라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앞에서도 전제 했지만 이 모든 것은 단적으로 내가 있어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반대로 만약 나라는 자아가 없다면 사물이 내 눈에 어떤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가령 큰 폭우가 쏟아진 후 산골짝 계곡에는 홍수가 내리고 그것이 산더미 같은 폭류가 되어 계곡 밑으로 쏟아질 때, 그 앞에 서면 누구나 두려움으로 몸이 굳어지고 사지가 떨린다. 이처럼 엄연히 움직이고 흘러가는 모습이 눈앞에 명확히 나타난다. 그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 움직임이 나라는 자아를 먹고 살기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만약 “자아를 없애는 방법의 하나로” 살려고 하는 집착을 내려놓으면 폭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사물이 천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가 죽지(손상되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데도(중생상)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는 생각에 의해 가상적인 중심을 만들어 놓은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 중심이 바로 나의 자아가 된다. 자아가 있게 되면 현상은 필연적으로 앞뒤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식구조다. 앞뒤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살려는 내가 있다는 증거고 내가 없으면 정반대로 앞뒤는 나누어질 수 없어서 공간은 전체가 통째로 하나가 되고 만다. 전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 속에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고, 그런데도 움직인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다. 움직이려면 나아 갈 앞이 있어야 하고 물러날 뒤가 있어야한다. 그러나 가운데 중심점이 없으면 어디서 올 것이며 어디로 갈 것인가! 가운데 점은 나라는 집착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나의 집착을 놓아버리면 그 점인 “내 자아는” 어디 붙을 곳이 없어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중생들의 현실은 엄연히 내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것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는 가상적인 자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살펴보자. 나라는 것은 사대 오온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속에 특별한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오랜 습에 의해서 나라는 것을 가상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 자신을 묶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탄생과정을 가지고 내가 없다는 것을 살펴보자.
2).세포
의학에선 하나의 세포가 고환의 벽을 통과하면서 꼬리가 달린 정자로 변신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자는 난자와 서로 결합해서 하나의 결합체가 되고, 그것에 물, 공기, 태양의 에너지, 흙이라는 4대 원소를 몸속에 저장을 하므로 해서 점차 자라서 사람이 된다. 이것이 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속을 뜯어보면 처음의 세포 한 개 속엔 나라고 하는 구체적인 자아가 없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몸은 약 100조개의 세포가 모여서 떼를 지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각각의 세포는 모두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각자가 다른 생명체들이다. 그 속에 누구를 나라고 할 것인가? 하나의 예로 백혈구라는 세포는 피 속을 독립적으로 돌아다니면서 세균을 잡아먹고 산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의 업이다. 이렇게 우리의 몸은 각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구체적인 자아가 없다. 그런데 성장을 하면서 업식에 의해서 점차 나라는 개념을 만들어놓고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가상적인 내가 만들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 나를 매개로 한 크기와 넓이 라는 개념들이 만들어진다.
3).사물의 크기
원래 사물에게는 크기와 넓이가 없다. 그런데도 인간 스스로가 그것을 만들어서 있다고 착각한다. 가령 우주에 생명이 생기기 전에 하나의 물체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그 물체가 돌(石)이라면, 그 돌 자체만 가지고는 그것의 크기와 부피를 모를 것이다. 당연히 그것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제3의 생명체가 없다면 그것이 큰지 작은지 알 길이 없다. 설령 다음에 제3의 생명체가 탄생해서 그것을 분석한다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제4의 생명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제4의 생명체는 제3의 생명체와는 몸의 크기도 살아가는 환경도 다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을 보는 척도도 다르다, 그들 모두 자기의 입장에서 본 것 일 뿐 객관적인 타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생명체들이 각자 자기 손익에 따라, 대상에 대해서 자신 만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살기 때문에 크기와 부피를 다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두 자기의 업식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지, 누구나 다 인정하는 표준모델 같은 영구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영구불변의 표준이 있다 해도 그것은 비교 대상이 아니고 또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인식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중생은 모두 상대적인 평가(비교에 의한 평가)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상대성을 떠나 절대적인 평가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神)의 영역일 뿐이다.
4).이불진드기
가령 이불진드기를 예를 들어보자. 진드기는 가로 세로 십 센티 넓이에 1천 ~ 4천 마리가 있다. 이들 진드기와 인간이 사물을 판단하는 방법을 비교해 보면 서로가 상당한 차이가 날 것이다. 크기가 다르기 때문에 보이는 시각이 다르니 평가가 같을 수 없다, 이불이나 카페트 같은 침구를 볼 때 인간은 폭신폭신하고 안락한 느낌을 받지만 이불진드기는 그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서로 각축을 벌리는 삶의 현장으로 볼 것이다. 포식자들이 곳곳에서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고 있고, 빽빽한 밀림 속에 각가지의 장애물과 수많은 먹거리들 그리고 가족과 동료들, 이들이 사는 삶의 애환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그냥 단순한 포근한 이불이며 카페트 깔개라고 여기고 있다. 또 하루살이 같은 벌레의 시간개념과 인간의 시간개념이 서로 다르듯이 모두 각자의 개체 마다 평가가 다르다. 그러면 과연 옳은 정답은 무엇일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들 각자의 업식에 의해 자기식의 평가를 내릴 뿐이다. 각자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평가를 내리고는 그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다만 자기의 업식에 따라 정확하다고 할 뿐 그 어느 것도 정해진 기준대가 없다.
5).애기
가령 애기를 한 번 보자. 갓난 애기 때는 비교 할 수 있는 정보가 뇌 속에 미리 저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번에 엄마와 눈 맞춤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엄마의 눈과 천정에 있는 형광등이 서로 다른 것을 구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기에겐 사각형, 삼각형, 동그라미가 처음부터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애기는 뇌 속에 경험의 정보가 미리 들어있지 않은 백지 상태기 때문에 높이와 길이를 모른다. 그랬던 것이 성장해 가면서 거듭되는 연습에 의해서 형광등과 엄마의 눈이 다르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엄마의 눈은 형광등과 완전히 다른, 바로 내 엄마의 눈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엄마의 눈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즉 뇌 속에 비교대상이 되는 정보가 생겼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비교라는 것은 자성을 가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허상이란 뜻이다. 그런 허상을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컴퓨터에 정보가 미리 깔려 있지 않으면 단번에 화면 가득히 정보를 펼쳐내지 못하는 이치와 동일하다. 컴퓨터도 처음에는 하나하나 타자를 찍어서 정보를 넣지만 그것을 찾을 땐 단 한 번의 클릭만으로 화면 가득히 정보가 나오지 않는가! 그것처럼 애기들의 정보도 그와 동일한 과정을 거쳐서 나오지만 그 정보는 진실이 아니라 인간의 업이 만든 가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정보를 사실 그대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업식을 바탕으로 한 자신들이 만든 뒤바뀐 정보를 주입시키기 때문에 전부 거짓들이다. 가령 형광등을 주입시킬 때 그 형광등의 모양과 크기는 생명체 마다 각각 다르다. 개미가 보는 크기와 인간이 보는 크기가 다르고, 또 개미가 보는 용도와 인간이 보는 용도도 다르다. 그러니까 개미는 개미식의 크기를 가장 올바르다고 할 것이고 인간은 인간식의 크기를 가장 올바르다고 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의 활용도도 각자가 다르다. 또 다른 예로, 빛의 경우에도 인간에겐 빛이란 사물을 찾는데 쓰지만 박쥐는 눈이 없으니까 빛을 내는 형광등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돌맹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청각에 의해서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의 정보라는 것은 모두가 편협하고 거짓된 것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세계에서 “현상의 겉모습”이 아닌 참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인간에겐 엄마의 눈이요 또 형광등이지만 그 판단은 정확하지 않다. 그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놓은 자기의 틀에 불과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정해진 올바른 기준의 틀”은 없다. 각자 자기의 업식대로 세상을 만들어서 볼 뿐이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에서 그 현상의 “참모습”은 누구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엄마의 눈”은 원래부터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든 가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달마는 ‘알지 못 한다(不識)’고 했던 것이다.
6).움직임의 예
사물이 움직이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르게 평가한다. 가령 지구는 자전 속도가 시속 약 천 킬로미터지만 공전 속도는 시속 약 십만 킬로미터라 한다. 그것은 총알의 속도보다 약 40배나 빠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자신의 땅이 움직인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다. 물론 지구 바깥의 고정된 기준점에서 본다면 지구의 속도는 엄청나게 느껴질 것이지만, 실제 지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실감하지 못한다. 또 우리 인간의 속눈썹 속에 붙어 있는 미생물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눈꺼풀이 한 번씩 깜박일 때 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상하(上下)로 움직이는 데도 그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느낀다면 그렇게 한가히 속눈썹에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니까. 왜냐하면 지구에 붙어있는 우리 인간도 속도를 느끼는 감각에 대해선 저 미생물 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도 우주에서 보면 먼지 보다 작은 크기인데 그 먼지 같은 지구 속에 땅을 파먹고 사는 인간의 크기는 오히려 미생물 보다 더 작을 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 정해진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움직인다는 기준은 무엇에 근거할까. 움직임도 과거의 기억정보가 있어야 현재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과거의 정보가 없으면 현재도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일 때 과거의 정보를 잃어버리면 현재의 움직임을 알 길이 없다. 현재가 움직인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회상 해 봐야 과거에서 현재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지나온 과거 시간을 잊어버리면 현재의 자기위치가 어디인줄 모르는 법이다. 예를 들어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갈 때도 마찬가지다. 보고 있는 현재의 시간대에서는 태양은 정지 해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태양이 서쪽으로 많이 옮겨 간 것이 보인다. 그것은 과거 기억 속에 있는 오전의 태양 위치와 오후 현재의 태양 위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과거기억을 회상해서 그 둘을 비교 해 봄으로써 알아지는 것이다. 즉 과거정보가 있어야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정보는 모두 비교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적인 허상들인데 그 가상적인 허상을 가지고 우리는 판단의 기준대로 삼는다.
7).확신
그러므로 움직임이라는 것도 인간의 업식이(과거정보) 만든 가상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불변하는 진리”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폭우로 휘몰아치는 폭류를 사람들은 움직인다고 보지만 그것도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허무맹랑한 자기 견해에 불과하다. 그러면 그 움직임의 진실은 뭘까? 우리는 그 진실에 접근하려면 먼저 자기의 관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라는 것은 모두 허상임이 판명됐기 때문에, 그 거짓된 정보를 가지고 진실에 접근한다고 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그것부터 먼저 내려놓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진실에 접근하려면 자신의 업식의 틀을 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기의 틀은 모두가 자기가 죽지 않고 살려는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 집착을 깨뜨리면 나를 붙들고 있던 가상적 자아는 사라지기 때문에 나 없이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바탕 속에서라야 비로소 사물은 움직임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내가 있어야” 내가 만든 기준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로 움직여 가는 모습이 진행 될 텐데 내가 없으면 움직임의 근거가 되는 공간과 시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사물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이 움직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옛날(1) 선을 닦던 한 스님은 혼침(惽沈)으로 고생했는데, 늘 좌복 위에서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모험적인 방법을 써 보기로 결심하고 어느 절벽 가장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내가 졸면 추락사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깨어 있겠지.” 그럼에도 갈수록 졸음이 왔고, 결국 졸다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는 아래로 떨어질 때 깨어났고,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아직 절벽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순간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즉 방금 전의 기억을 잊어버리면 자신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재는 움직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움직임이란 비교라는 가상적인 허상에 기준해서 판단되는 허무맹랑한 것이다.
(1.성엄선사. 마음의 노래. 대성옮김.291쪽)
(2.감산스님, 조론약주, 송찬우옮김. 경서원)
2.은산철벽(銀山鐵壁)이란 무엇인가?
1) 의문
사물이 천류하지 않는다는 이치를 이해하는데 선문에서 사용하는 은산철벽의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여기서 함께 다뤄보겠다.
수행 중에 “은산철벽(3)이 되라!” 라고 한다. 그러면 은산철벽이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자. 물론 이 뜻은 중생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벽을 허물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가령 여기에 책이 한 권 있다. 이 책은 사각형이다. 누구나 여기에 의문을 제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책은 사각형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또 정확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이점에 대해 의문을 품어 봤을까? 성인이라면 당연히 의문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5살짜리 아이들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그땐 어떤 애들이라도 이것에 대해서 무궁한 궁금증을 낸다. “엄마 왜 사각형이야?” “형! 왜 사각형이야?” 하고 엄청나게 사람을 괴롭히며 끝없이 종알거리며 묻는다. 그러다가 형한테 꿀밤을 한 대 얻어맞고 “왜 그런 걸 귀찮게 묻는 거냐! 그것은 그냥 사각형이야!”하고 핀잔을 받기 시작하면서 애기들은 묻고 싶은 물음을 강제로 체념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물어도 해답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기 시작했고,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와 동시에 우리의 편견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수행 하는 사람들은 의단(疑團)이라는 것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한다. 이 때 그 의단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그냥 궁금증을 계속 일으키면 저절로 만들어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풀어보면 원래 사각형이라는 것은 없다. 사각형뿐만 아니라 삼각형, 동그라미, 높고 낮음, 크고 작음, 너와 나. ..... 등등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만약 사각형이 진짜 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의 자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런 자성이 있는 것은 우리의 눈에 발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뇌 속에 있는 과거정보에 의해서 바깥사물을 판단하는데 자성이 있다는 것은 비교에 의하지 않아도 발견된다는 뜻이므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된다고 하면, 한번 실험을 해보자. 우주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 “사각형”만은 영원불멸하게 존재해 왔다는 의미인데 과연 그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비교에 의해 아는데 비교 없이 어떻게 그것이 사각형인지 삼각형인지 그리고 넓은지 좁은지 알 수 있단 말인가? 애기들도 태어나서 과거정보가 없으면 사물을 판단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자성이 있다면 그것은 비교 없이도 또 인식하는 자가 없어도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그것을 보는 자는 누구나 동일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들이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로 들어 개미가 봐도 동일한 사각형이고 이불진드기가 봐도 동일한 사각형이고 사천왕이 봐도 동일한 사각형이라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또 사각형이 삼각형과 다르다는 것을 비교에 의하지 않으면 그 둘을 구별할 수 없을 텐데 비교하지 않고도 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래도 그것이 있다고 하면 우리 인간은 그것을 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설령 눈앞에 있다고 해도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비교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있는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예로 들어 학의 긴 다리와 뱁새의 짧은 다리는 평등하지 않고 차이가 난다. 그 차이를 무엇으로 구별할까 당연히 둘을 비교해 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비교하지 않으면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이 있어 비교 없이 (자기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사각형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상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보자, 이런 가상적인 환영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 만들어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붙여서 실재하는 사물인 냥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모두 거짓들이고 환영들이다. 이런 거짓을 깨지 않으면 진실에 접근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가상적인 틀을 깨야하고 또 깬 그 속에서라야 비로소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각형이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삼각형과의 비교에 의해 존재하는 허무한 허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냥 사각형이라고 부르고 또 이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지도 모른다. 이 말은 이런 거짓된 각가지 틀을 가지고 진실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점이다. 마치 정신병자가 정상적인 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는 것과 같이 모순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모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때 우리는 새삼스레 의문에 부딪치고 사각형이라는 것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모든 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이 증폭된다. 사각형은 사각형이 아니라면 그러면 삼각형은 진짜 삼각형일까? 그리고 높은 것은 정말 높은 것일까, 또 넓다 좁다는 것은 사실일까? 크고 작은 것 옳고 그른 것은 정말일까? 이렇게 모든 것에서 모순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의문에 잠긴다. 마치 5살짜리 아이처럼 모든 것에서 모순을 발견하고는 하루 종일 종알거리면 “형! 왜 사각형이야?”, “엄마! 왜 사각형이야?” 하고 묻던 것처럼 무엇이 모순인지 비로소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이 가진 틀들이 비로소 거짓이라는 것을 눈치 채게 되고 그 거짓의 틀을 깨려고 시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온 몸을 던져 “왜 사각형인지” 궁금해 할 때 우리는 기존의 틀이 점차 깨져가는 것이다. 사각형이 왜 사각형인지 모르겠고 또 삼각형이 왜 삼각형인지 모르겠고.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 이고 무엇을 보고 천장이라고 하고 무엇을 보고 방바닥이라고 하며 참은 무엇이며 거짓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또 더 나아가 거짓을 왜 거짓이라 하는지도 모르는 이런 멍청이가 될 때, 비로소 오랜 기간 최면을 걸어 사각형이라고 굳게 외워두었던 가상적인 틀이 깨져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확연히 진실을 알게 된다. 모든 틀이 깨진 자유를 말이다.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는 해탈을... 그리고 천류(움직임)도 나의 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2) 틀이 깨지는 과정
틀이 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몰입이라는 집중력과 간절함이 우리의 의식을 날카롭게 날을 세워주면 관찰과 분석력이 사각형이라는 개념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해체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이 지, 수, 화, 풍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 때 몸의 집착이 사라져가듯이 사각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개념인가가 분석될 때 그것 또한 같은 이치로 사라지는 것이다. 몸을 지탱하는 것은 개념이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을 철저히 파괴하는 관찰을 할 때마다 우리의 몸은 안개처럼 허물어지려고 하며, 나라는 개념들이 자꾸 흐려지는 것이다. 여태까진 나라는 개념이 너무나 또렷해서 명확히 구분되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투명해져 가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될까?
옛날 부처님이나 선사들이 제자를 깨우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개념의 틀을 깨도록 유도하는 설법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무아와 무상과 고를 설명할 때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틀과 세상 모든 개념의 틀이 얼마나 모순이며 잘못된 가치관들인지를 낱낱이 지적해 준다. 그러면 제자들을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냥 듣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다 바쳐서 그 말씀 속에 동화되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뼈 속을 파고들 때 “마치 옛날 달에 옥토끼가 있다는 전설이 아폴로 우주선에 의해서 여지없이 깨지듯이” 그렇게 단단했던 고정관념도 밝은이치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무너졌던 것이다. 이처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혜가 쌍수로 작동할 때인 것이다. 이것이 난해하고 어려운가하면 아니다. 너무나 쉬운 것 일 수 있다.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을 내려놓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는 이 자세가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 부처님의 법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잣대를 내려놓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강하게 습관들인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이라는 위대한 성인이 출현하시면 이 문제는 죽 먹기보다 쉬울 수 있다. (이 점을 유의해서 보자 부처님 같은 성인이 출현하면 나의 틀을 쉽게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말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의 틀을 해체하고 깸으로서 내려놓지만은, 위대한 분 앞에선 자동으로 내려진다는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 이것이 수행을 최극단으로 단축시키는 핵심일 수 있다. 이 점은 옛 선사들의 법거량 속에서도 무수히 발견된다.) 자신의 고집을 무방비 상태로 내려놓게 할 우상이 출현하면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세우지 못하고 성인의 발밑에 오체투지하고 그 분의 말씀에 동화되어 온 몸을 다 바쳐 듣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에 몰입되어 모든 것을 잊고 마치 자신이 이야기 속에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이런 자세가 되면 이미 그는 99퍼센트가 완성됐다고 봐야한다. 자신의 틀을 내려놓은 순수한 마음 자세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만 되면, 순식간에 내가 없는 이치가 가슴 가득히 들어와 마음은 텅 빈 무방비 상태로 변하면서 너와 내가 둘 아닌 이치가 저절로 체험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들을 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이런 마음가짐만 된다면 시간을 끌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깨달음인 수다원과인 것이다.
(3.고봉화상. 선요. 보련각 )
3. 수행법(정혜쌍수)
앞의 본론에서 설명한 몇 가지의 예를 통해서 나의 시각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이해를 넘어선 확신으로 전환되게 하는 수행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행은 믿음이 없으면 안 된다. 이 세상이 모두 내가 만든 허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나야 그 다음인 내 몸과 마음을 해체하는 수행을 잘 따라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 안되어 있으면 끝까지 자신의 집착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1).준비
올바른 수행이란 몰입(선정-간절함)과 지혜의 강도에 의해 결정된다. 즉 몰입이 깊고 정확할수록 지혜의 힘도 따라서 정확해지므로 서로가 도와주면서 힘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정혜쌍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의 정확한 의미를 안다고 하면 수행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므로 이 둘의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선정은 몰입이며 집중이고. 둘째 지혜란 분석이며 해체이다. 이 둘의 적용되는 전후 순서는 따로 고정돼 있지 않고 서로 보완하면서 진행된다. 다시 말해 선정이 먼저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지혜가 먼저인지의 구별은 정해진 것이 없고 상항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것들이 실제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우리가 뭔가에 집착을 할 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올바른 지혜를 갖지 못한 것은, 일어나는 감정 속에 빠져 헤매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정확한 분석이 안됐기 때문에 그렇다. 집착이란 크게 나눠서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이다.
그 중에 몸에 대한 집착이란,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착각이고, 마음에 대한 집착은, 몸을 나라고 하는 집착을 근본으로 해서 몸을 지키려는 명예심 자존심등으로 좀 더 확대된 것을 말한다. 그러면 첫째 몸에 대한 집착부터 보면, 비록 우리가 몸을 나라고 하지만 실제 이 몸이 나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몸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면 되는 것이니 이제 그 내막을 헤쳐보자. 먼저 나의 몸이 내가 아니라는 근본이치를 알고 이것을 해체하여 그 속에 묻어있는 착각들이 무엇인지 명백히 드러내면 된다.
2).몸 마음의 집착 버리기(4)(5)(6)
(이 수행은 상상으로 하되 실제처럼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참고 문헌은 대념처경의 부정관. 화엄경 십회향품의 몸 마음 버리기. 해심밀경의 사마타로 떠오르는 영상을 관찰로서 제거하는 법 등을 바탕으로 해서 구성된 것이다.)
방법에 들어가서, 내 몸의 부분을 제거해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을 대강 나눠보면 눈, 심장, 콩팥 그리고 한쪽 팔, 한쪽 다리를 잘라내어 보자. 이것들은 두 개씩 쌍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남은 하나를 제거해도 사람은 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 보는 것이다. 눈은 누구나 두 개씩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는 빼도 되고, 심장은 내 것을 남에게 보시하고 대신 인공심장으로 바꾸고, 콩팥도 두 개니까 하나는 빼내고, 팔 다리도 한 쪽씩 잘라내어 본다. 이 정도면 내 몸에서 잘라낼 만한 것은 다 잘라내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 다음 순서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을 버려보고 그 뒤를 이어 명예와 자존심과 또 인정받으려는 마음 등등을 하나하나 버려본다. 이제 이것들을 다 버리고 나면 나에겐 남겨진 명예나 자존심이 없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인간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은 전 과정을 조금도 허술함 없이 실제처럼 수행한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보자. 현실적으로 남겨진 집이 없으니 바깥에 나앉을 것이요, 먹을 것이 없으니 길바닥에서 밥을 구걸 할 것이요, 옷이 없으니 떨어진 넝마를 입을 것이고, 손발과 눈도 한쪽만 있는 병신이니 당연히 남들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길거리에 앉아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리적거린다고 발로 차버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낮은 자존감으로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이 아등바등 사는 이유는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며 남에게 인정받는 재미로 사는 것인데 이처럼 비천하고 낮아지면 버티고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진다.---그러면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하고 한 번 실험을 해보자.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와서 묻기를 “땅 밑의 탄광 속에 들어가 죽을 때 까지 바깥에도 나오지 못하고 오직 탄만 캐면서 살 수 있겠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아니요!” 한다면, 그는 아직도 지켜야할 명예와 자존심이 더 남아있다는 뜻이므로 놓아야 할 것이 많고, 만약 반대로 “예” 하고 대답한다면 그 말과 함께 즉시 그는 자신의 몸에 집착이 사라질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갱도 속에 들어가 탄을 캐다가 죽어도 괜찮고 또 몸살이 나서 열이 펄펄 나고 병신이 되도 괜찮고 또 바깥세상에 대한 그리움도 버려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더 이상의 두려움도 미련도 없게 되면, 마음엔 갑작스럽게 큰 변화가 생긴다. 내 몸과 마음에서 나라는 집착을 더 이상 붙들 필요가 없어서 세상에 대해 부여한 갖가지 의미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붙들고 있던 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집착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몸이 사라진다는 뜻은 몸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있어도 몸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몸이 없다는 느낌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철저히 “마음이 죽은 자”가 되면 우리는 이 몸과 바깥세상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남기지 않기에 몸은 반작용에 의해서 사라지고 대상도 모두 텅 비게 될 뿐만 아니라, 사물의 움직임도 또 의미도 사라져, 움직임 속에서 움직인다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착의 에너지가 소멸되면 그것에 의미를 붙이고 붙어 있던 “내 과거정보”가 더 이상 에너지를 보충 받을 수 가 없어서, 애착의 에너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움직임이란 전적으로 내가 만든 허상이지 실재 그런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그렇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선정의 힘인 몰입(간절함)의 역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몰입을 통해 실제상황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놓여 진 것이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실제상황으로 몰아가는 몰입(간절함)이 매우 중요하다고할 수 있다. 물론 관찰과 분석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4. 대념처경....부정관) (5. 해심밀경...10가지 영상제거법) (6.화엄경 십회향품,,,몸 마음 재산을 보시로 회향)
3).선정과 지혜
선정이라 하면 보통 사마타의 고요함을 연상한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텅 비어 우주와 내가 통째로 하나 된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것을 무색계 제5선인 공무변처정이라 하고, 제6 식무변처정은 의식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어 온 우주가 내 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제7,제8선 등등... 물론 이런 깊은 선정이 아니더라도 색계선정이라든지 낮은 단계의 수많은 선정들이 있다. 이런 선정의 역할 중에 번거롭고 시끄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도 사마타의 중요한 요소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행 상에서의 집중과 몰입이다. 덧붙이자면 선정이라 하면 일체가 끊어진 적막한 고요를 생각하지만 그것만 선정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선정에는 수많은 기능들이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수학문제를 풀 때도 선정이라는 몰입이 필요하다. 몰입이라는 집중력이 없고 산만하면 수학문제가 핵심에서 겉돌고 풀리지 않는다. 또 반대로 몰입이라는 집중력은 있는데 분석과 관찰력이 없으면 아둔해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집중력과 관찰력이 쌍으로 잘 어울려야 수학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것처럼 선정과 지혜는 떨어져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채택하는 선정이라는 몰입(간절함)의 역할은 내 몸을 해체하고 마음을 해체 할 때에 사용되는 집중력을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일반적으로 수행할 때 사람들은 이런 해체를 대충하고 마는데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실제상황처럼 되고 그것이 정말 백퍼센트 되면 반드시 반응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안 나타난다면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이것을 드라마의 예로서 설명해 보자. 안방 드라마에 빠져들면 그 속의 주인공이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나와 하나가 되어, 주인공이 슬픔에 빠지면 마치 그것이 내 현실을 말하는 것 같아 나도 주인공과 함께 울고, 주인공이 기뻐하면 마치 내 현실과 같아 같이 기뻐하는 것처럼 수행에서도 이처럼 몰입되어 사실과 하나가 됐을 때 수행의 핵심은 극대화된다. 이런 이유로 수행에 있어서 선정이라는 몰입역할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된다. 실제상황처럼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상황이란 말뜻은 한 마디로 진짜 내가 ‘거지’가 되고 ‘죽은 자’가 되어 한 치의 속임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수행에서 필요한 사마타의 정확한 역할이지만 사마타엔 이처럼 실제상황처럼 몰입해 들어가는 기능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도피와 같은 기능도 있다. 두려운 현실을 바로 맞대응을 할 수 없어 현실을 차단하는 것도 사마타의 기능이다. 예를 들어 안데르센의 동화에 성냥팔이소녀의 얘기가 나온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마주 선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이라는 하나의 매체를 통해 현실의 모든 것을 잊고, 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살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 속으로 되돌아가 꿈꾸듯이 잠겨있는 이야기다. 이것을 분석해 보면, 삼매는 성냥불 속에 잠겨 있는 순간을 말한다. 이 속에 있으면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행복 속에 잠기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을 잊어버리고 고요와 평안함에 잠기는 것이 사마타의 특징이다. 이런 특징도 뒤집어보면 도리어 결점이 되는데 사마타의 결점은 현실과 마주서지 못하고 도망간다는 점이다. 이 소녀가 현실이라는 높은 벽을 극복하고 그 고통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회피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되므로 해서 행복을 느꼈던 것이다. 뒤집어 말해서 행복하려면 차가운 현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처럼 사마타는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지혜는 사마타와 어떤 다른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자. 지혜는 사마타와 달리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 고통을 직시하면서 관찰하여 무엇이 고통인지 원인을 분석하고 해체하여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현상에서 무엇을 착각하고 또 어떤 잘못된 시각에 빠져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자면 지혜란 다름 아니라 사마타로 몰입되어 나타난 현상에 대해 정밀히 분석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도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처럼 분석하고 해체하면서 백퍼센트 진짜 상황처럼 될 때 정확한 효과가 나타나는데, 그 백퍼센트란 지혜 스스로가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선정이라는 몰입이 얼마나 실전과 같이 적나라하게 됐는가에 달려있다. 그래서 선정과 지혜는 떨어져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또 한편 지식과 지혜라는 두 가지 기능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지식은 분석을 대충하여 결론이 허망하게 나타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지적해 지식이라 하고,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이 둘의 차이는 결론에 있는 것이지 분석하는 과정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둘 다 동일한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마타가 얼마나 적재적소에 관여하여 몰입이 잘됐는지에 따라 지식이 되기도 하고 지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4).정혜쌍수
정과 혜가 어떻게 서로 보완하면서 진행되는지 에 관해서 살펴본다.
몸과 마음을 해체하거나 또는 하나하나 떼어내고 집착을 버릴 때도 정말 진짜처럼 하고 있는가이다. 대충 “했다 치고!” 이런 방법이 아니라 실제상황처럼 한다면 “죽은 자의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미련을 다 버렸기 때문에 숙연한 마음이 되어 모든 근육은 다 풀어지고 죽은 시체처럼 허물어질 것이고, 눈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기 때문에 죽은 자의 체념과 포기가 서려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사람에게 무슨 미련이 있어서 세상에 의미를 두겠는가! 그래서 내 몸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나가고 세상의 각가지 의미에 대해서 아무 미련이 없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을 더 이상 붙들 수 없어서 몸과 대상은 모두 사라지고 그 대신 새로운 관점이 열리는 것이다(텅 비면서 모두 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상태). 이 때 진짜처럼 집중하는 것이 사마타의 몰입에 해당되고, “몸은 모두 허상”이라고 철저히 분석해 내는 것이 지혜에 해당된다. 이 둘이 서로 도와주어야 극대화 된다. 몰입이 잘 안되려고 하면 분석을 더 실감 있게 하여 흐트러지려는 몰입을 도와주어 더 깊게 들어가게 하고, 또 분석이 흐트러지려면 몰입이 도와주어 분석을 더 실감나게 하므로 해서 문제의 핵심을 극대화 하는 것이 정혜쌍수다. ---
앞에서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냐 하면. 몸이 있어도 몸에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몸이 없다는 느낌,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느낌, 앞뒤가 없어 통째로 하나 된 느낌. 일체가 텅 비어서 “없지만 모두 그대로 있는” 느낌. 오고 감이 없고, 움직여도 움직임이 없는 느낌..... 이러한 느낌은 전적으로 나의 틀이 완전히 깨졌다는 증거가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라는 틀이 굳건히 버티고 있어서 너와 나를 완벽하게 나눠놨는데 지금은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반작용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상태와 또 하나 된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느낌도 우리가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반작용으로 잠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고, 이것 또한 집착하면 마구니에 떨어지는 함정일 뿐이라는 것을, 어느 것 하나라도 설령 그것이 천상의 좋은 것이라도, 일단 마음에 머무르면(머물리면) 독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느낌들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알아지는 것은 폭류가 되어 흘러갈 때 폭류의 흐름이 환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흐름 속에서 흐름이 없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식론(8)에 비겨서 말하면, 의타기성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아뢰야식의 종자에서 펼쳐진 현상세계가 오직 식이 만든 환영이라는 것을 이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에 집착하여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변계소집성이고, 또 이것이 식이 만든 환인 줄 정확히 알 때, 그것에 속지 않고 또 묶이지 않을 때, 자유가 생기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이것을 영화관에 비유하면 스크린위에 펼쳐진 전쟁영화가 의타기성이다. 그것은 실제상황이 아닌(필름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가상적인 스토리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상황으로 보고 그 속에 빠져서,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는 살벌한 현장을 진짜라고 믿고 진저리를 치는 것이 변계소집성이고, 그것이 모두 영화인줄 정확히 알고 평정심으로 감상을 하면서 그 영화를 즐기는 것이 원성실성이다. 또 일상생활의 현실 속에 적용시켜보면, 미움과 원망을 볼 때 그 미움과 원망이라는 대상 속에 미움과 원망의 변화(천류)가 없음을 알아차려서 그 속에 속지 않는 것이 물불천류의 핵심이 된다. 그래서 “일체가 허상이지만 우리의 업으론 모두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실재한다고 속아주면서 그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쓰는 것이 깨달은 자의 일상적 삶이라는 것을 깨우칠 수 있다.
(8.김동화. 유식철학. 보련각 )
4. 깨닫고 난 후 보림(7)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깨달을 땐 사마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나 없는 상태가 유지되어 번뇌가 없지만 사마타로부터 다시 깨어나면 번뇌는 다시 생긴다. 그 이유는 깨달았기 때문에 번뇌가 공한 줄은 알았지만 오랜 습관은 하루아침에 전부 조절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마타라는 것은 나를 놓아버리면 자동으로 생긴다. 일부러 사마타를 닦지 않아도 “나를 놓는” 그 순간 일체의 번뇌가 고요해진 사마타의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사마타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또 다시 지혜만 남는다.
사마타라는 것은 몰입에 의해 생긴 것인데 현실로 되돌아오면 그 강력했던 몰입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지혜만 남고 사마타는 걷혀진다. 왜 이어지지 않냐하면 몰입을 통해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죽은 상태로 몰아갔는데 지금은 죽음 상태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사마타가 걷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소에도 자신을 “죽음과 같은 마음”상태를 만들어서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있어야 되지만, 이것이 습관이 덜 들어서 자꾸 잊어버리고 현실의 습관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렇다. 보림이란 이런 것을 자꾸 길들여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죽음”이 유지되어 두 번 다시 중생심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 보림의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지혜가 힘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지혜는 중생일 때의 지식과는 다르다. 이제 완전하게 내가 없는 줄 알고, 또 세상이 꿈이고 환 인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옛날처럼 그렇게 부딪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습관은 남아있어서 제어가 순조롭게 안 될 때도 있게 된다. 이 때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이 봤던 그 깨달았을 때의 상태를 기억해 보고 그것에 따라 실천하면 된다.
그 자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부정되어 조금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자리다. 그래서 무소득(無所得), 무소주(無所住) 무일물(無一物)이라고 했다. 이 자리는 모든 번뇌가 저절로 녹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만사에 대처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깨달음 후 습을 닦는 것은 더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것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깨달았던 추억은 다 도망가고 다시 중생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이것이 완벽한 아라한의 경지까지 들어가서 두 번 다시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의 죽음” 상태가 항상 유지 돼야한다. 처음 깨달음인 수다원과에서는 이것을 한 번 맛보는 상태라서 사마타의 기운이 그 때만 있고 계속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나” 라는 습관이 나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의 절박함 속에선 죽은 자의 마음이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체도 원래 처음에는 누구나 죽은 자의 마음이 유지되 있었지만 나라는 자아를 지키려는 후천적 습관에 의해서 그것이 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길들이면 당연히 처음처럼 항상 유지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이 보림이고 습을 길들이는 과정이다.
(7. 보조국사. 진심직설. 심재열역. 보성문화사 )
5.결론
물불천류의 이치를 통달하여 정확한 이해가 있으면 수행은 쉽게 완성되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봤고, 또 실제적으로 어떻게 수행하며 어떻게 성취되는지의 과정을 단적으로 분석 해 봤다. 우리에겐 분명한 길이 있을 텐데 그 길을 찾지 못하니까 헤매는 것이지 그 길을 찾으면 방황할 것이 없이 바로 깨달음에 들어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진행했고 그 과정은 이해와 몰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모든 현상은 움직인다. 그렇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비를 하면서도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 시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를 하면서도 그 시비에 끌려가지 않으면 항상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비가 허상인줄 아는데 왜 끌려가겠는가! 그것이 환영이고 꿈 인줄 정확히 안다면 눈앞에서 자존심이 상해도 그것이 과거의 내 업식 인줄 알면 마음은 고요하다. 시비가 죽 끓듯이 일어나고 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 혼란의 천류(움직임) 속에서도 나는 항상 고요하다. 그 살벌함을 관조하는 구경꾼일 뿐이다. 참여자가 아니다. 그러니 시비를 멈추려하거나 도망갈 필요가 없다. 얼마나 재미있는가! 나의 업식을 이렇게 재미나게 구경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 재미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짜증날 때 해수욕장으로 순간 이동한다면 금방 기분이 전환되어 즐거워질 것이다. 무료하고 짜증날 때, 순간 이동하여 영화관에 가고, 또 금강산으로, 해수욕장으로, 친한 동무와 함께하고..... 그렇게 해도 “그것을 아는 지금 이 자리”는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자리를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있는데도 눈앞은 꿈속처럼 갖가지로 변화 한다. 그래서 알 수 있는 것이... 지금 이 자리는 짜증도 아니요, 영화관도 아니요, 해수욕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이 고요함, 짜증, 해수욕장을 연기에 의해서 만들어 낼 뿐이다. 그렇다고 이 짜증이 없어지고 고요함을 얻는 것이 도(道)인가 하면 아니다. 고요함도 번뇌다. 고요함이라는 자성은 없기 때문이다. 도란 그 짜증이 원래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 모든 번뇌가 없어져서 일체가 끊어져 아무 작동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흑산 귀굴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번거로운 현상세계를 버리고 고요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번거로운 현상세계 그 자체가 바로 고요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갑갑하고 짜증나고 심심하면 그것을 인정하고 위로하라. 갑갑할 때 저항하지 말고 인정하라. 나의 업식이 또 발작을 일으키는구나 하고. 그러고는 그것을 봐줘라. 그러면 고요해진다. 그것과 맞싸워 다투지 말라. 허상과 다퉈 뭣하겠는가! 그리고 ‘피곤하고 힘든 일을 하기위해 출발할 때’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그 마음이 원래 고요한 마음이라는 것. ‘피곤한마음’ ‘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마음’을 억지로 끌고 힘든 노역장에 가면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 마음은 고요해지고 편안해진다. 원래부터 가기 싫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기 싫은 것은 내 자아가 만든 허상일 뿐이고, 그 자리는 항상 고요하고 깨끗하다. 비록 짜증이 나서 가기 싫어했지만 말이다... 이 점을 깨닫는 것이다.
참고문헌
(1.성엄스님. 마음의 노래. 대성역 탐구사)
(2.감산스님. 조론약주 . 송찬우역. 경서원 )
(3.고봉화상. 선요. 보련각)
(4.대념처경...부정관. 묘원역. 행복한숲)
(5.해심밀경... 지운역. 연꽃호수)
(6.화엄경-십회향품. 무비역. 민족사 )
(7.보조국사. 진심직설. 심재열역. 보성문화사 )
(8.김동화. 유식철학. 보련각 )
첫댓글 스님의 이 깨달음과 수행법 논문을 사흘동안 잠깐씩 나눠서 마침내 지금 1독 완독했습니다. 그동안 했던 수행법과 원리의 채워지지 않던 빈틈이 세밀하게 채워지는 느낌입니다.
틈틈이 정독을 하면서 완전히 익히고 실행해보겠습니다.
귀한 논문을 열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늘 정진합시다.
스님께서 강의때 자주 - 승조대사가 망나니의 칼끝이 봄바람과 같다 -고 물룰천론을 인용하시기에
언젠가는 이 책을 가지고 법문을 하지 않으실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참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되어있어서 어찌 읽었는지도 모르게 잘읽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성이 있는것이 없음을 더 확실하게 알았읍니다
스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