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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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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聖師일대기
일기자(一記者)
의암성사 환원 100주년을 맞이하며, 의암 손병희 성사가 환원하고 장례식을 앞둔 1922년에 6월에 ‘임시호’로 발행된
『천도교회월보』(1922.6.2)에 게재된, 「성사 일대기」(일기자)는 의암성사의 최초의 전기라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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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 일사(一事)
성사聖師 영면하셨도다.
소낙비 우수수 내리고, 새날의 암흑이 오히려 동대문 밖 상춘원을 포위한 5월 19일 오전 3시에 성사는 영면하셨다 합니다. 상춘원의 신록의 엽엽이 그대로 청신하고, 새소리의 곡곡이 그대로 화명和鳴하거늘, 다만 성사의 숨소리뿐이 호올로 고요하였으며, 성사의 눈동자뿐이 호올로 감겼다 합니다.
“내가 죽을 줄 생각하는가. 죽어도 관계가 없겠는가….”
그의 말끝 못 맺던 말씀이 이 글 쓰려는 기자의 귀에도 오히려 있거늘, 소리쳐 우노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머리를 동東으로 돌이킬 때에, 다만 운천雲天이 막막할 뿐이로다. 성사의 일생을 간기簡記해 볼까 하여, 이제 붓을 들었다. 그러나 붓을 내리기 전에 먼저 감루[感淚]로다. 아아, 나의 마음이 이렇게 감상(感傷)되어서 어떻게 기록을 마칠까.
- 신유(辛酉, 1922) 5월 25일. 성사의 환원한 지 제6일 되는 날에 일기자.
성사의 이름은 병희秉熙요, 부친은 의조懿祖요, 모친은 최씨요, 의암義菴은 해월신사로부터 받은 도호이니, 지금부터 61년 전 신유(辛酉, 1862) 4월 8일, 충북 청주군 대주리(大周里)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청주의 상민으로, 일찍이 이방의 말직에 재임하여, 분울불만(憤鬱不滿; 분하고 억울하여 불만에 가득찬)의 가운데서 일생을 마쳤으며, 모친 최씨에 관해서는 별로 전하는 바가 없으나, 손씨 집안의 서실된 점으로써 추정하면 그 역시 일개 여자로의 다소 특이한 성격을 포지(抱持)하였으며, 수많은 복잡한 경우에 봉착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성사의 그 특수한 천품도 그 양친에게서 전수함이 많은 것 같다.
성사는 다수의 사람이 직접 본 바와 같이 그 모습이 웅걸하며 기상이 영매하여, 어려서부터 그 빛나는 눈빛이 주위의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나, 가문이 변변치 못하고 그중에서 서출이었으므로, 들어오면 가정에서부터 그를 천대하고, 나가면 이웃사람, 동네 사람들이 그를 용인치 아니하여 그 천성의 감정은 이로 인하여 더욱 사납게 날뛰게 되었으며, 어렸을 때에 잠시 한문을 수학하였으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이에 팽개쳐 버리고 점점 성장함에 따라 그 호방하여 구애되지 않는 성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음주와 투전에 그 몸을 맡기고, 온갖 싸움질과 왈패질로 어언 20세의 나이를 지나게 되었다.
평상시에 성사와 더불어 어울려 다니던 고향 친구의 구전에 의하면 성사의 20세 전후의 생활은 그와 같이 방랑하였으나, 방랑한 그중에서도 가히 범치 못할 무엇이 있는 듯하여 술을 마치면 술로 이기고, 잡기를 행하면 잡기로써 이기며, 몸 싸움을 하면 여력과 기백으로 이겼으며, 뿐만 아니라 술자리에 있으면 술친구를 제압하고, 잡기장에 있으면 건달을 제압하여 그 이기고 제압하는 두 가지 특징은 성사가 마주치는 크고 작은 경우를 통틀어 그때마다 볼 수 있었다 한다. 이제 그때 남겨 놓은 일화 몇 가지를 가려서 기록하여 당시의 성사의 심정과 행사의 윤곽을 보이고자 한다.
성사가 12세 되던 임신(壬申, 1872)에 그 가형이 성사에게 엽전 40냥을 꺼내서 관청에 납부케 하였더니, 성사가 도중에 사람이 얼어서 거의 사경에 이르렀음을 보고 곧 그를 스스로 들쳐 메고 주막에 이르러 따뜻한 방에 눕게 하고 이어서 소지하고 있는 돈을 주어서 주인으로 하여금 치료케 한바, 집안사람들이 그 의로운 구원의 마음이 강한 것에 놀랐다고 한다.
17세 되는 정축(丁丑, 1877)에 성사가 괴산군 삼가리에 이르렀더니, 이때 수신사가 이르렀는데, 말 뒤에 역인을 매달아 유혈이 흩뿌리거늘, 성사가 꾸짖어 말하길 “사람이 사람을 학대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하고 곧 목봉으로 말 부리던 종을 타격하여 그 줄을 풀게 하고, 수신사의 유서통을 빼앗아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한다.
성사가 다시 이웃 고을을 지나갈 때, 동네 사람이 빙 둘러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거늘, 성사가 그 말을 들은즉 그 동네의 어떤 사람 집에 가족 5명이 있었던바, 전염병으로 인하여 온 식구가 몰사하여 5, 6일이 지났는데, 동네 사람이 두려워서 오히려 수습치 못하고 그 선후책을 논의하는지라, 성사가 개탄하되, “사람이 사람의 죽음을 구하지 아니하면 누가 구하리오.” 하고 직접 5, 6인의 사체를 염습한 후 동네 사람과 같이 매장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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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의 성사의 신생新生- 22세에 처음으로 동학에 입도하다
20세 전후 당시는 성사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 그가 한낱의 뜻을 얻지 못한 일민이 되어 쾌락에 젖어서 사는 비참한 모습으로 일생을 마칠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등에 만리경萬里鏡을 짊어지고 손에 불평도를 들고 성을 침략하고 부자를 약탈하는 한 무리의 의적이 될 것인가, 그 그렇지도 아니마면 이것저것을 다 모르는 한탄 시골 왈패가 되어 일생을 초목과 함께 썩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와 같은 몇 가지의 억측은 당시의 어른들이 당시의 성사를 평가하던 바이었을 것이다.
과연 20세 전후 당시에는 성사로서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뜻은 크지만 포덕布德할 도道가 없고, 용기는 건장하지만 발휘할 기회가 없었으며, 탐관오리의 횡포, 사회전통의 추악함은 보면 눈이 거슬리고, 생각하면 기운에 거슬리지만,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성사의 기는 막혔을 것이며, 마음은 어지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한 줄기 새로운 삶[新生]의 서광은 성사에게로 향하였다.
22세 되던 때이다. 동학의 신자인 어떤 사람이 성사의 입도를 권유하였다. 삼재팔란을 면한다는 권유의 말 같은 것은 성사의 의지를 설득하기에는 너무 천박하였으나, 보국안민, 광제창생의 실제 이치가 그 가운데 포용되어 있다는 설법은 매우 성사의 심정을 감동케 하였다. 이에 성사는 단호한 결심으로써 곧 입도하였다. 이로써 성사의 심기는 크게 바뀌었으며, 성사의 생활은 크게 새로워졌다. 종래의 자유분방한 생활은 자기의 심성을 잘못되게 함이 다대한 것을 묵묵히 알아차렸으며, 대사大事의 성취는 먼저 그 일을 경영하는 주인공의 건전한 성격으로부터 산생産生되는 것을 마음으로 확신하였다. 선생은 이에 문을 닫아걸고, 자리에 꿇어앉아 동학의 수도 절차에 의하여 수심정기에 전력하였다. 이때의 선생이 그 심성을 수련하기에 얼마나 열심히 한 것은, 당시의 전도인으로부터 동학 선생 최 해월이 가까운 곳에 온다는 것을 듣고 선생으로 하여금 배알의 예를 행하게 하고자 할 때에 “내가 소방䜹放한 마음을 고친 후가 아니면 선생을 배견할 수 없다”고 한 한 가지의 사실로써 가히 추측할 수 있다.
24세 되던 갑신년(甲申, 1884)에 선생이 처음으로 동학의 제2세 교주 최 해월의 문하에 배알한 후 사제의 의義를 중맹하고 최 선생의 지도에 한결같이 따라서 덕업을 대성하기로 할 때, 이로부터는 최 선생의 옆을 떠나지 않고 휴척을 함께하되, 출입할 때에는 선생의 가마를 매고 지숙할 때는 선생의 문호를 지켜, 시종이 여일하였다.
30세 되던 경인년(庚寅, 1890)에는 선생이 진천군에 머물며 수도의 절차를 정하고, 21일을 일기로 하여 주문 백만 독을 외울 때, 눕지 않고 잠자지 않고 흘공하니 이 해에 이와 같이 하기를 모두 3차였으며, 매일 2쌍의 짚신을 삼기로써 일과를 삼아 한결같이 하니 당시 사람들이 칭송하여 ‘손학자’라고 하였다.
요컨대 선생이 22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34세 되는 계사(癸巳, 1893)에 이르기까지 범 13년의 기간은 먼저 마음을 양養하고 성품을 수련하여, 20세 전후의 방랑 생활로부터 유치된 상처를 보완하기에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자기의 소신을 주위의 많은 다중에게 전하여 적지 않은 도제를 얻는 동시에 특히 선생의 천품의 탁월과 신심의 정독은 그 스승 최 해월의 신임을 얻는 바 되어 동학의 차세대 지도자가 될 기초가 그 사에 지어짐과 같은 것은 이때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그 사이에 지나온 선생의 행적을 두어 가지의 일사(逸事)로써 대신 말하리라.
29세 때의 일이다. 이때에 동학에 대한 지목이 나날이 심해지는 중, 동학의 두목으로 또 선생의 종질되는 손천민이 또한 지목을 피하여 그 집에 들어오지 않는데, 교졸이 그 아내를 체포하므로, 이때 선생이 마침 옆에 있다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그 처를 체포하는 것이 그 숙부를 체포하는 것과 어떠한고. 나는 천민의 숙부이로라” 한대, 교졸이 이에 선생의 체포하거늘, 선생이 청주군 주성점에 이르러서는 술 여덟 잔를 연달아 마시고 말하기를 “내가 대취하여 걸어가지 못할지니, 너희는 나를 업고 가라.” 하고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니 교졸이 할 수 없이 선생을 업고 청주 진영에 가두어 고문할 때, 최 해월의 주소를 물은즉, 말하기를 “내 스스로 잡혀서 생사을 결심한 이상, 다시 선생의 소재를 토설할 리가 있으리오.” 하고 정색하며 움직이지 아니한즉, 영장이 그 의풍에 감동하여, 곧 석방하였다.
32세 때의 일이다. 선생이 길을 가던 중에 날이 저물어하여 어떤 주막에 머무니 주막 주인은 한 여자뿐이요, 그 남편은 출타하였더라. 야심에 주모가 술을 내오거늘,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술을 끊었노라” 하였다. 또 담배를 내오거늘 “내가 이미 담배를 끊었노라.” 하였다. 다시 미모로써 유혹하거늘 "내가 이미 금욕하였노라.“ 한대. 주모 실망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심하니이까.“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의 할 일이 있어서 독심계지한 지 이미 오래되었니 술을 마시면 이에 해롭고 고기를 먹으면 이에 해롭고 담배를 피우면 이에 해로우며 여인을 가까이 하면 이에 해로운지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노라.“ 하였다 한다. 그 결심의 굳음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때의 소위 양반 같은 부류가 동학의 금지를 표방하고 도인의 재산을 강탈하기로 일삼을 때 도인 한영석이 돈 3천 냥과 소 1마리를 권용철에게 약탈당한지라, 선생이 곧 권에게 달려가서 그 불의함을 꾸짖고 그 재산과 소를 돌려받아 한에게 주니 이와 같은 일은 자못 그 횟수를 만큼 많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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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의 혁명과 선생의 분전
선생의 흉중에는 오직 민중을 위하는 열혈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의 폭정, 열등의 제도, 괴악의 습관은 선생의 심정을 자극하였으며 계속해서 고부에서 봉기한 민중의 봉기는 선생의 의분을 폭발케 하였다.
34세 되던 갑오(1894) 10월이라. 선생은 동학의 제2세 교주 최 해월의 동의를 얻어 고부, 옥구, 정읍, 태인, 만경, 김제, 금구, 고창, 무장, 무안, 임실, 남원, 순창, 무주, 부안, 장흥, 담양, 창평, 익산, 장성, 능주, 광주, 보성, 나주, 강진, 해남, 장수, 영광, 여산, 고산, 진산, 금산, 곡성 전주, 순천, 광주, 청주, 충주, 안성, 여주, 양근, 지평, 원주, 횡성, 홍천, 서산, 덕산, 당진, 태안, 안면도, 감포, 진주, 곤양, 하동, 남해, 단성, 사천, 해주, 송화, 신천, 재령, 풍천, 장연, 문화, 안악 등지의 손천민, 김연국, 이용구, 박인호, 김개남 외 315두령의 기포로 이루어진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먼저 전봉준과 더불어 공주에 회집하여 정치를 맑게하고 , 민권옹호의 기치 하에서 혁명의 횃불을 들었다.
이에 앞서 동학을 닦는 수만의 도중은 선사 최수운의 무죄취륙을 해원하기를 원하며 탐관오리의 난법횡포를 분개하여 정의의 깃발 들려 하기 여러 차례였으나, 스승 최해월께서 오히려 그 기미가 성숙하지 아니하였음을 염려하고 단결의 공고를 우려하여 때가 오고 바람이 불 날을 기다리던 중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때가 이르고 민중이 합하여 건곤일척의 민중운동을 일으키니 선생은 당시의 전봉준과 서로 힘을 합쳐 일어난 이 일의 유일한 지도자였으며 단신으로 총포의 사이에 선 용장한 선봉이었다(甲午의 役에 關하야는 本誌의 第22號, 23號에 <甲午의 革新運動>이란 題下에서 그 梗槪가 略述한 것이 有함으로 이에 上述치 아니함).
이때의 농민군은 분격하여 일어났으나 조련이 없고 또 공주의 역役은 제1회의 대전이었으므로 어떠한 경험이 없어서 그만 관군에게 이기지 못하고 논산으로 후퇴하였다가 선생은 다시 익산, 전주, 금구, 태인, 정읍, 고부, 장성, 순창, 임실 등지를 두루 지나 무주에서 이응백의 민보군을 대파하고 다시 영동군 용산시에 이르러 관군과 서로 만났는데 이때에 짙은 안개가 가득하고 관군이 이미 몇 겹으로 포위하여 그 형세가 위급하더니 선생이 결사結社의 도중(道衆)을 지휘하여 역전격퇴(力戰擊退)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유탄이 선생의 두루마기를 뚫어 선생의 운명이 실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선생은 이로부터 다시 그 동학군을 청주, 충주 등지로 옮기며 때로 싸우고 때로 휴식하였으나 때가 을미(乙未, 1895)에 들어서며 당시의 정부는 병사를 이미 일본에서 빌려 대규모의 토벌을 행하므로, 군대의 훈련이 없는 도인군이 이를 대적치 못하여 도처에서 붕괴하는 중 먼저 김개남이 전주에서 피살되고, 전봉준이 경성으로 체포되매 대세가 이미 아닌지라. 선생은 잔여의 도중과 더불어 후일의 권토중래를 약속하고 강원도를 거쳐 원산에 이르러 가지고 있던 안경 1개를 팔아서 양식과 의복을 준비하고 산간의 행상을 가장하여 그 몸을 중국 지방에 잠시 피하였다.(乙未 6月의 事).
그 후 병인년(丙申, 1896)에 들어와 관군의 출몰이 그치고 남쪽 길이 소통되는지라 선생은 이에 스승인 최 해월의 지도에 의하여 각지의 도인에 대한 수습에 전념할 때, 괴악한 지목과 험난한 포우 중에서 능히 성실하며, 능히 분투하여 도처에 실적을 거둔바 그 스승 최 해월이 특히 선생의 신의를 칭찬하여, “손 모의 신의信義는 천하에 무쌍”이라 하고 이어 의암義菴도호를 내렸으며 그 다음해 정유(丁酉, 1898)에는 다시 해월 선생의 도통을 받아 동학의 제3세 교조가 되니 이때 선생의 나이는 37세였다.
34세 때로부터 41세에 이르기까지의 범 8년간의 선생은 갑오혁명의 촉성과 이의 수습으로써 분주하였다. 일의 결국 실패는 이것이 시운이며 기세라 (달리) 말할 것이 없거니와 여하간 선생으로는 그 할 바를 다하였다. 이제 그 사에 나타난 일화 몇 개 기록하여 기록의 두찬(杜撰)을 보충하리라.
갑오의 일 가운데, 공주로부터 논산에 후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논산에 둔취한 여러 도인이 서로 시끄럽게 떠들며 말하기를, “여러 두령은 조화도 없이 민중으로 하여금 난에 빠지게 하니 이를 먼저 죽임만 같지 못하다” 하여 그 기세가 창궐하거늘 선생이 문득 언덕에 올라야 군중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조화를 불신(不信)하거든 일제히 나에게 발사하라” 하여 군중이 모두 부복하였다 한다(註, 當時의 道衆의 多數는 頭目의 造化 뿐을 信하엿다).
을미년(1895)의 일이다. 선생이 해월을 모시고 인제군 최영서 가에 있었는데 영서가 집이 가난하여 여러 사람을 먹이기 어려운지라 선생이 이에 그 동생 병흠과 함께 상인을 가장하여 간성군 압진리 이 모의 객점에 이르렀는데, 주머니에 1전의 가진 것이 없었다. 이때에 마침 그 근처에 사는 윤규칠이라는 사람이 선생의 의표에 감동하여 곧바로 천금을 빌펴 주기를 자청하고 천 냥의 표를 끊어 원산 객주에서 이를 추심케 하거늘, 선생이 고사한즉 윤씨가 역시 듣지 않고 그대로 귀가한지라. 이때에 병흠이 말하기를 “우리가 윤 군과 평소의 친의가 없거늘 그가 이와 같이 후애함은 이것이 실로 한울님 뜻에서 나온 것이라. 받아서 신사(神師=崔海月)에게 드리는 것이 어떠할까” 하므로 선생이 불가하다고 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조선의 민중을 수화水火중에서 구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수십만의 양민으로 하여금 포화와 검두劒頭의 혼魂이 되게 하였으니 우리가 비록 풍찬노숙할지라도 가히 구차히 안신하기를 도모치 못할지라. 내가 어찌 이 돈을 받으리오.” 하고 그 밤에 글을 써서 전표를 그 주인에게 보내고 단신으로 원산으로 향하였다 한다.
이 또한 난중의 일이다. 선생이 논산을 지나 청산을 통과할 때 따르는 이가 고하기를 “선생의 가족이 이곳에 있으니 잠시 들어가 만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누가 가족에 대한 큰 정이 없으리오. 그러나 이제 여러 사람의 가족이 난중에 흩어져 생사를 알지 못하거니 내가 어찌 홀로 처자를 만나리오.” 하고 문 앞을 지나치며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갑오(1894)의 운동에 실패를 본 선생은 그 후에 곧 도중의 수습에 전력하여 권토중래의 내일을 기약하였으나 그리할 딴 기회는 쉽게 오지 아니하였다. 그뿐 아니라 한번 난을 지난 이후의 지방 관청은 동학의 무리를 가일층 질시 또는 경시하여 학대가 나날이 가혹하므로, 동학의 2세 교주 최해월은 무술년(戊戌, 1898)의 여름에 경성에서 교수형되고, 그 여파로 동학에 대한 학대가 오히려 더 심하매, 선생은 당분간 국내에서 일할 수 없음을 알았을 뿐 아니라, 구미의 문명풍조가 동방에 유입되며 동양의 국면이 장차 크게 새롭게 되고 크게 변할 것을 통찰하고 먼저 자기가 한번 천하를 유력遊歷하여 근대문명의 성질과 세계 대세의 여하를 직접으로 관찰한 연후에 다시 기회를 타고 일을 일으키리리라 하고 도중道中의 대소사는 본국의 여러 두목에게 일임한 후 이상헌으로 변명(變名)하여 먼저 미국을 향하고자 일본의 나가사끼로 향하니 때는 신축(辛丑, 1901)3월이었다.
그러나 여비의 부족으로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잠시 일본에 체류할 때, 조정에서 칙령으로 불러들이는 형편이 있는지라 다시 몸을 상해로 숨기니 조선의 국사범 박영호, 권동진, 조희연, 이진호 등과 그 글을 통하기는 모두 이때의 일이다. 선구자의 자리가 어찌 따뜻할 수 있으며, 풍운아의 방바닥이 어찌 따뜻할 수 있으리오. 가지가지로 하여 좌불안석의 선생은 이해 10월에 다시 원산항으로 환국하였다가 이듬해 임인(壬寅, 1902)에 유학생 24인과 동반하여 일본에 이르러 그들을 각각 취학케 한 후 은은히 동양의 풍운을 감찰하며 본국의 교도를 단속하였다.
때는 계사년(癸卯, 1903) 여름(明治 36年)이라. 당시의 조선 정부는 수구 편이요 또 친러당인 이윤용 일파가 장악[用事]하여 국정이 나날이 나빠지고, 일본 조야[上下]에서는 러시아의 극동 침략을 걱정하고 분개하여 대러시아 전쟁을 준비함과 같은바 실로 동아시아에 큰 일이 벌어지는의 가을이라. 선생이 스스로 생각하되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은 대세로서 면할 수 없는 일이요, 충돌한다면 동아시아의 장래를 위하여 일본이 그 승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다 하여 반드시 조선 자체의 이익이 될 것이 아닌즉 이 기회에 그 계기를 먼저 하되 먼저 일본과 협력하여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과 협동 등의 일로써 조선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 동서의 국면을 정하리라 하고 선생은 이를 권동진, 조희연과 의논하였으며 권, 두 사람은 이 뜻을 당시 일본의 참모총장 다무라[田村怡與助]에게 통하였으며 다무라은 곧 관계당국의 승인을 얻어 선생과 상회(相會)하야 전후의 대계를 암정(暗定)하니 그 계책의 요지는 대개 아래와 같다.
즉 먼저 일본 병사로 하여금 상인으로 변장하여 비밀리에 불통상항(不通商港)에 들어갔다가 동학의 도중(道衆)과 더불어 일제히 봉기하여 곧장 서울을 점령하여 당시 정부의 친러당을 제거하고 제거한 후에는 한편으로 내정(內政)을 혁신하고 한편으로 대군(大軍)을 출병하여 일본과 함께 러시아를 격퇴하자 하는 것이다. 이때에 일본 측으로부터도 만일 이와 같이 조선과 그 힘을 합하여 러시아를 제거하면 전후의 이공(利功)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치 아니함도 아니었을 것이나 당시의 정형은 일본에서 러시아의 부강을 심히 두려워한 동시에 전승을 확신하지 못하였으며, 더욱 이 사이에 조선 전국의 일본에 대한 향배 여하는 자기 나라의 최종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가 되므로 그들은 전후의 이익을 전유치 못할 것을 각오하였음에 불구하고 조선의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큰 계획을 확정한 선생은 동생 병흠을 본국에 보내 여차여차하게 할 계책을 주고 전국의 도인에게 그 뜻을 전하여 일거에 분응(奮應)할 준비를 선행하게 하였다.
오호라. 조선의 복이 없음인가 아니면 선생이 복이 없음인가. 이 해 8월 3일에 이상 모의의 주모자이며 또 실행자인 손병흠이 급질로 부산에서 사망하고 8월 5일에는 다무라가 또 사망하여 조전이 일시에 함께 당도하니 선생이 방성통곡하고 3일을 식음전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로 절망치 아니하고 단지 말하기를 “일이 바르고 이치에 따르면 반드시 이룰 날이 있을 것이요,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최후까지 노력할 뿐이라.” 하고 다시 뜻을 새롭게 하여 계속하였다.
그 이듬해(1904) 갑진에 이인숙으로 하여금 글을 본국의 여러 두목에 전하여, 그윽이 민회(民會)를 조직케 하며 한편으로 긴 글을 당시의 정부 대신 이용헌에게 보내 비정(秕政)을 탄핵하고 그해 4월에 문도 박인호, 홍병기를 일본으로 오게 하여 다시 대의를 들 준비로써 먼저 지방 도인이 일제히 단발할 뜻을 명하고 다시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등과 더불어 도인 회집의 계획을 의논할 때, 회명을 진보회(進步會=一國의 민으로 하야 步步齊進하야 文明의 域에 共躋하자는 意)라 하고 그의 취지와 강령과 규칙을 제정하여 이용구, 박인호, 홍병기, 나용환, 이종훈, 박형채, 국길현 등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케 하고, 그해 가을 9월에 전국을 통하여 개회하니 이에 앞서서 지방 도인으로 일제히 그 머리카락을 잘라, 죽음으로 맹세한 사람이 실로 16만 명 다수에 이르렀으며, 그때 혹 지방의 형편 여하에 의해서는 포화의 위협을 받는 바가 되었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 무난히 그 목적을 이루었더라.
이때에 진보회가 다시 4강령으로 세상에 포명하며 한층 그 활동을 왕성히 하며 그해 11월에 진보회가 다시 일진회(一進會=是에 先하야 宋秉畯, 尹始炳 一派의 政客으로 成한 者)와 합세하니 그 세가 더욱 확장하였다.
보충[補記] : 당시 진보회의 4강령이라 함은 1. 독립(獨立)의 기초를 공고코 함이오 2. 정부(政府)를 개선(改繕)함이오 3. 생명, 재산을 보호케 함이요, 4. 군정(軍政) 재정(財政)을 정리함이다.
슬프다 한낱의 사업을 성취하기가 어쩌면 그렇게 힘이 들며, 몇 명의 사람을 신임하기가 어쩌면 그렇게도 어려울까. 그 행사의 시비선악을 고사물론(姑舍勿論)하고 일진회의 당시 간부 이용구 이외 몇 사람은 멀리 일본에서 지도의 채칙을 잡은 선생의 본의를 위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취하여 대세대사는 이미 걸러버렸다.
선생은 부득이 최후의 정리책으로 그 디음 해 을사(乙巳, 1905) 겨울에 천도교(天道敎)의 이름으로써 교회[천도敎와 일진會]의 분리를 천하에 포고하며 그 이듬해 1906년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천도교 대도주의 직무를 친히 관장하며 교회의 면목과 내용을 일신케 할 때, 교회의 헌칙(憲則=天道敎大憲)을 제정하여 경성에는 중앙총부,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하여 시일, 성미의 제도를 실행케 하며, 다시 일진회 두령 이용구, 송병준 등 62인을 출교하고 교무의 확장에 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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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감한 선생의 만년, 그 위업을 채 이루기 전에 그 몸이 먼저 죽다
국면은 급전(急轉)하였다. 경술(庚戌, 1910) 이후의 선생은 안으로 자신의 수련과 교도의 단속과 밖으로 문화 사업의 진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갑오 이후의 선생, 특히 계묘(癸卯, 1903)년 이후의 선생은 극도로 낙심도 하였으며 흥분도 되었다. 음풍의 아침에 흙비를 맞으며, 저녁에 상심의 눈물을 뿌리기도 여러 차례였으며, 격분의 정을 금치 못한 적도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평소의 수양과 시련(試煉)과 또 천품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그러한 경우에 견뎌내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생각건대 선생은 먼저 자기의 심신에 대한 수양의 필요를 느낀 것 같으며 다시 일반 교도의 수양의 필요를 절감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곧 대도주의 직을 현 교주 박인호에게 전장케 하고 주로 정신적 방면의 건설에 전무할 때, 무신(戊申, 1909) 10월에는 양산 통도사의 내원암에 들어가 머물면서 49일의 기도를 행하고 <무체법경>과 <후경>을 친제(親制)하여 교도의 영량을 준비하며, 신유(辛酉, 1911)에는 현 교주 박인호 이하 여러 총부 직원과 함께 경주의 성지에 가서 천도교 제1세 교조 최수운과 제2세 교주 최해월의 구지를 배관하고 그후 을묘(乙卯, 1915)에는 105일의 기도를 또 행하여 전후 10년의 사이에 선생의 덕업이 대성하고 심기가 온화함을 갖추었으니 이제 이 사이에 지은 시 몇 구와 이적[異事] 하나를 기록하여 덕업의 대성(大成)을 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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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의 공부를 흘(訖)한 후에 읊은[吟] 시(詩)에 왈,
道過三天心自昏, 風動細波空作喧. 白雲以上白雲下, 上以也聽下以論.
又曰 遍踏法界故家歸, 五色花葉簷外飛. 淸虛月色澹泊味, 空使主翁自足肥.
又曰 世法百年苦, 聖法萬年愁
그리고 갑인(甲寅, 1914) 11월 7일(時年 54)에는 선생이 밥상을 받는데, 그때 마침 문을 개방하였더니 참새 100여 마리가 날아들어 와 선생을 둘러싸는지라 선생이 밥을 나누어 주니 새 무리가 혹은 무릎에 앉고 혹은 손에 올라 밥을 받아먹었으며, 그 다음날 아침 일찍에는 산 꿩 10여 마리가 뜰 안에 날아들어 와 2시간가량을 놀다가 돌아간바 선생의 화기가 새에게도 미친 것과 같았다.
다시 교도에 대한 수양으로는 21일, 49일, 105일 기도 등을 때때로 봉행케 하였으며 특히 지방의 주요 두목을 한 자리에 모아서 한적한 곳[處-우이동 봉황각을 말함-역자 주] 택하여 여러 차례의 특별기도를 행케 하였으며, 그리고 매년에 1차씩은 지방교도 다수를 집합하게 하여 이신환성설, 대신사 성령출세설, 인문개벽설, 신앙통일, 규모일치 등 여러 법설을 강연하며, 때로는 특히 지방교도를 순방하여 일반교인의 자립적 신앙을 확립하며, 사회적 단결을 일이키기에 분주한 등 암암리 다음날의 활동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문화사업으로는 교회경제가 허락하는 극한까지 학교를 경영하여 하등의 교회적 색채를 더하지 아니하고, 순전히 사회적 교육을 시행케 하였으며, 교회 내로 여러 강습소를 설치하여 응급적으로 교회 자제의 사회적 교육을 시행하게 하였나니, 물론 이로 만족한 바는 아니나, 선생으로서 할 바는 다하였다.
지금부터 3년 전 기미(己未, 1919) 3월 1일에 선생이 조선민족대표 32인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에 영어의 몸이 된 것은 일반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말할 것이 없고, 선생은 옥중에서 뇌연화(腦軟化) 겸 동맥경화증을 얻어서, 재작년 경신(庚申, 1920) 10월에 병의 위독으로 보석되어, 동대문 밖 별저(別邸=賞春園)에서 치료 중이던바 약석(藥石)이 무효하여, 지난 5월 19일 오전 3시로써 환원[棄世]하니 향년이 62세이었다.
이 기록의 불완전한 점을 보충하는 뜻으로 천도교주 박인호 씨가 찬(撰)한 바 선생의 묘지명(墓誌銘)을 병기(幷記)한다.
天道敎 3世敎主 義菴聖師 秘室記
聖師諱秉熙字應九姓孫氏貫密陽父諱懿祖
•辛酉[1862]四月八日誕生于淸州大周里實布德第二年也
•壬午[1882]聞道於第二世敎祖海月神師乃大悟爲高足甲午承師命率道衆力扶民權累起而累失績
•丙申[1896]神師賜道號曰義菴
•丁酉[1897]乃承道統爲第三世敎主
•辛丑[1902]東渡觀天下大勢非蓄材相機不可乃養成靑年
•癸卯[1903]日露戰役起聖師以東洋平和此其時矣遂贊謀日廷當局而亦無成
•甲辰[1904]痛韓政日非移書議政大臣尹容善而顧不能用於是命敎徒斷髮使李容九等設會于韓京革虐政以張民權
•乙巳[1905]遵第一世敎祖水雲大神師遺旨命敎名曰天道布告天下
•丙午[1906]歸國定大憲先是李容九不用命而大誤時事聖師發宗令黜其黨與五十九人而敎與會廓乎其分離矣
•戊申[1908]授大道主職于朴寅浩作无體法經自是道益高而德益邵亦不自睱逸眷眷誨人使信仰而統一規模井井尤用心於啓發文化而立機關焉
•庚戌[1910]日韓遂合倂矣後十年己未三月一日聖師與民族代表三十二人宣言朝鮮獨立被拘監獄翌年十月疾劇保釋竟以
•壬戌[1922]五月十九日還元春秋六十二葬于高陽郡崇仁面牛耳洞盖杖屨盤施之所也 夫人郭氏洪氏五女適李寬泳鄭廣朝方定煥餘未行外孫男女七人 鳴呼我聖師應天而降早入宗門以一身自任乎宇宙之大而其苦衷竟未就則命也 若夫名聲洋溢乎六洲而其道之顯互乎五萬斯年者特盛德之光輝耳小子何敢形容其萬一哉 謹書大槪如此納之幽室以徵夫無窮云
布德六十三年五月 日 門人 朴寅浩 謹撰
덧붙이는 말 : 기자는 지금 선생의 법체(法體)가 오히려 식지 아니한 금일에 있어 삼가 선생의 일생을 말하노라 하였다. 기자는 불행히 그동안 선생을 자주 대하지 못하여 선생의 진면을 말할 자격이 없으며 선생과 자못 시종을 같이한 많은 노숙이 없는 바는 아니나 바야흐로 선생의 상중에 있어 그의 경위를 문의할 수도 없으므로 아직 이렇게 기술하여 후일의 정정 완성을 기약하며, 더욱이 선생의 일생을 논평하는 점에 이르러서는 기자가 감히 할 바 못 되므로, 이 점에는 일필을 불염(不染)하고 우선 그 역사를 간략히 기록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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