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로운 사람 (고후4:7-10)
이 시간에 “보배로운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보배로운 사람일까요?
1. 보배로운 사람은 예수를 모신 사람입니다.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했는데 본문을 잘 읽어보면 질그릇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우리들이고 보배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자신이 멸망할 죄인이며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기 부족을 아는 사람이 예수를 바로 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2:3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예수님에게 온갖 보배가 가득하다. 즉 예수님이 보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은 보배를 품은 사람입니다.
세상이 그 어떤 것을 가졌어도 예수님 없으면 빈 검불을 가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생을 얻으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1:30-31에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했습니다. 이런 보배는 예수 말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예수를 모시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찬송가 94장에 이런 찬송이 있지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예수님은 천국 비유에서 밭에 감취인 보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밭의 보화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세상에 맘 빼앗기지 말고 내 마음의 전부를 바쳐야 비로소 주님 안의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진실로 형식적인 신앙을 청산하고 진심에 돌아오지 않는 그 보배를 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2. 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8-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시면 어려움을 당해도 조금도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몸이 따뜻한 사람은 추원도 춥게 느껴지지 않고 몸이 추운 사람은 더워도 덥게 느껴지지 않은 것처럼 마음에서 다 이겨집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다 이겨집니다. 그 무엇도 다 이기는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감리교 선교사로 유명한 스탠리 존스가 아프리카 정글로 들어갔습니다. 오늘은 이 골짜기, 내일은 저 골짜기로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어느 곳에 갔더니 큰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부족 중에 유명한 망나니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보통 망나니가 아니었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을 사정없이 패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그야말로 개망나니였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과감하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망나니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말이 달라졌습니다.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한 일을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망나니에게 스탠리 존스가 별명 하나를 붙여 주었습니다. “after”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었습니다. “후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믿어 성령을 받은 후에 변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구든지 after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이 찬양을 나의 찬양으로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
골3:10에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보배 되신 예수를 성령으로 입으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령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보배로운 사람이 됩니다.
모세에게 성령이 임하자 민족을 구원할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드온 삼손 드보라 에훗 에스더 다윗 베드로 요한 바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참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3.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당시 사형 제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사형 가운데는 사형수에게 죽은 시체를 묶어 시체와 함께 썩어져 죽게 했습니다. 그 독한 악취와 시체의 물이 사형수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나를 위해 고난 받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님을 늘 생각하고 바라보며 묵상하면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세상에 대해 죽어지며 주님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늘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며 묵상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옛 마음도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새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히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늘 생각하고 묵상하자는 말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고난의 주님을 묵상하다가 손과 발 옆구리에 고난의 상처가 생겼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프란시스가 보배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불평하고 그 무엇을 날 위해 살며 그 무엇을 두려하겠습니까?
학창시절 즐겨 읽었던 노벨문학상을 받은 “대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대지의 작가가 펄벅(Pearl S. Buck) 여사인데 그의 어머니 캐롤라인의 이야기입니다. 펄벅의 어머니 캐롤라인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왔을 때 남편은 다른 곳으로 전도를 떠나 혼자 있을 때 그 동네 중국인 남자 둘이 이 가뭄이 서양인들 때문이라면서 오늘밤 선교사 가족을 죽여 우리의 신에게 바치도록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정말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캐롤라인은 가정부를 시켜 차와 케익을 준비하게 하고 무슨 큰 손님이 오는 것처럼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좋은 옷을 입혀 노래하면서 놀게 했습니다. 마침내 몇 명의 중국인들이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들어오셔서 차와 다과를 나눕시다."
친절한 캐롤라인 때문에 그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다과를 함께 나누던 중국인들은 이것저것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행패를 부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캐롤라인은 피아노를 치면서 중국말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송이 끝날 때쯤 방안은 조용했습니다. 그들이 찬양 중에 하나 둘 집에서 나가고 집에는 평안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캐롤라인이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굳게 믿고 기도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어려워도 감사합시다. 욕을 당해도 억울해 마십시다. 주님이 나를 고난을 당하셨는데 죄인인 우리야 당연하다고 생각하십시다. 예루살렘 초대 교인들도 자신을 고난 받기 합당한 자로 여겼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고 감사하며 지역복음화 세계선교의 교회의 남은 십자가를 지고 수고하며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명자가 하나님 보실 때 보배로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질그릇 같이 천하지만 보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배롭게 여기시는 하나님 대문입니다. 보배 되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시기 바랍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자기 십자가,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없어서는 안 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보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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