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콤 달콤 새콤한 맛 집에 얽힌 사람 이야기(10)
시인 이성교李姓敎와 인사동 한식집 <여자만(汝自灣)>
김승환
‘온유(溫柔)’라는 말은 부르기 좋고 듣기도 좋다.
사람도 이와 같은 이가 있으니 시인 이성교가 그러하다. 그의 인품과 시세계가 온유 그 자체다.
1953년. 당시 인기 높던 월간 <수험생> 문예란에 강릉상고 2년생이던 그의 시 <남매>가 당선되어 한 해 전에 당선된 강릉사범의 신봉승과 함께 관동 문학청년계의 스타가 되었다. 알다시피 <수험생>은 월간<학원>(54' 제1회 학원 문학상 발표)이 나오기 전의 전국 유일의 고교생의 등용문이었던 학습지다.
<수험생>은 이성교에 있어 문단 등용의 동아줄이었으니 같이 당선한 이성환李星煥(1936~1966)의 소개로 미당(未堂) 서정주를 만나게 된다. 삼척 태생의 국학대 신입생이던 그는 서라벌예술학교 1년생 이성환의 권유로 이 학교에서 미당의 강의를 도강(盜講)하고 미당을 소개 받고 나중에 공덕동 미당 댁을 방문하게 된다.
요 지음 우리 외교가에서는 ‘관시(關係)’라는 중국어가 일상용어가 되다시피 했지만 ‘사람과의 관계’(人脈)는 그쪽 땅이나 여기나 매우 중요하다. 온유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됨됨이와 뛰어 난 시적 자질은 미당의 품에서 사랑 받고 키워진 한 떨기 국화였다. 2002년 10월에 발족한 <미당시맥회(未堂詩脈會)>의 초대 회장에 이성교가 뽑힌 것도 이런 것에 기인한다.
1956년 미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윤회(輪廻)>가 실린다.
네 손마디를 / 곰곰이 헤어보면 / 마구 꽃잎이 / 싱싱이 살아 오른다. //
손바닥을 / 돌에 갈 듯이 / 서러운 얼굴로 / 먼 산 바라던 곳은 / 이제는 환한 별이 드나보다. //<윤회(輪禍)> (이하 생략)
이후 <혼사>, <노을>이 추천되어 1957년에 시인이라는 계관(桂冠)을 쓴다. 요새는 시인이 흔해 제 대접을 못 받지만 그때만 해도 추천작가는 장원급제만큼이나 어려웠다. 문단 인구 2백 여명에 시인이라야 1백 명 안팎이었던 시절 애기다.
명동이 아직 폐허의 잿더미에 있을 56년 무렵, 이성교는 시인 이성환에 이끌려 당시 문학청년들의 보금자리 격인 명동으로 진출, 다방 ‘갈채’에서 소설문학계의 수장이던 김동리를 비롯한 기성 문인과의 교류가 싹텄다. ‘갈채’는 ‘문예살롱’이 문을 닫자 한국문협의 사랑방 격이어서 박화성, 최정희, 손소희, 서정주, 황순원,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김윤성, 이종환, 조연현 제씨가 여기서 원고를 청탁 받고 건네 주기도 했다.
자유문협 사람들은 그 아지트를 ‘동방살롱’으로 삼았으니, 모윤숙, 백철, 이헌구, 김광섭, 이무영, 김송, 노천명, 정비석, 김용호, 이봉래, 박인환 제씨가 출입 했다.
또한 명동은 문학 지망생들의 집결지였으니, 여기서 마시고 여가서 취하고 여기서 그 열기를 발산하기도 했다.
서울대의 송영택, 이일, 유종호, 이어령, 천상병, 황명걸이 모이고 동국대의 황명, 신기선, 최재복, 이창대, 남구봉, 임수종, 이현우, 송혁, 강민, 조한길, 황갑주, 신경림, 낭승만, 최휘림, 연세대의 박희연, 유창경, 정공채, 중앙대의 박성룡, 권용태, 최진우, 성균관대의 정인영, 최남백, 김여정, 강계순, 성춘복, 배기열 서라벌예대의 김종후, 이열, 심우성, 박용숙, 이시철, 강성모, 함동선, 김승환, 김춘배, 김종원, 이추림, 박정희와 고려대의 임종국, 박희진, 인태성, 현재훈, 이종석, 이문희, 그리고 이경남, 구자운, 백시걸, 민영, 박은국, 김관식, 박봉우, 송기동, 송병수, 신봉승, 구혜영, 이화여대의 정연희, 김혜숙, 김선영, 최희숙 등과 사귀고 친구가 되었다.
이 젊은이들이 자주 찾던 술집으로는 ‘은성’, ‘할머니집’, ‘몽파르나스’, ‘쌍과부집’, ‘송도’, ‘송림’, 등이 꼽을만하고, 다방으로는 ‘음악회관’, ‘돌체’ ‘엠프렌스’, ‘청산’, ‘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56년부터 58년에 걸쳐 거리는 서서히 전쟁 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하고 청년들은 저마다의 직장을 찾아 발길을 옮겨 명동의 낭만을 시들게 했다.
김관식은 경기상업 교사로, 천상병은 부산 시청으로, 이현우는 남대문 양아치의 정신적 오야붕으로, 그밖에는 잡지사로, 출판사로, 학교로 뿔뿔이 떠나갔다.
1958년, 텅 빈 명동에서 이성교가 택한 것은 군입대였다. 매사에 반듯한 이성교로서는 애당초부터 병역기피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논산훈련소에서 이성교는 소설가 이문희를 다시 만나고 그의 천재적(?) 대중가요 가창 실력 덕분에 군대생활에서 숨쉴 틈을 얻을 수 있었고 이어서 훈련소 본부 정훈참모부에서 발행하는 <진중신문>이라는 훈련소 소식신문에 동대 국문과의 조익연과 함께 입사하면서 책도 읽을 여가가 생겼다.
그는 1960년, 이성교는 성신여고에서 첫 월급을 타자마자 미아리에 사글세로 사는 이문희 집에 쌀 가마니를 들여 놓아 주었다. 이후 그는 중앙대 대학원을 나와 성신여대에서 내리 30년을 봉직 했다.
지금도 성신여대 도서관에는 시집 4천의 컬렉션으로 빛나는 월천문고(月川文庫)가 자랑인데 월천은 이성교의 아호다. 이 문고는 특히 초판본이 많기로도 유명한데, 지금도 아쉬운 것은 관철동에서 박재삼과의 술자리에서 1932년 재판본인 파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잠시 보고 준다는 고은의 말을 믿고 건네준 바보짓(?)이다.
도서 수집에는 삼치(三痴)를 경계하고 있으니, 곧 빌려 달라는 것과, 빌려 주는 것, 그리고 돌려 주는 세 가지를 못난 짓으로 치는데, 이 철칙을 잊고 말아 <월천 문고>에 파인의 <국경의 밤>이 결본이 되고 말았다.
그는 <육십연대사화집(六十年代詞華集)>의 동인이기도 하다. 동인 중 이경남, 박희진, 이희철, 박재삼, 신기선, 박성룡, 인태성 등과 잘 어울렸는데, 특히 중앙일보에 재직하던 인태성과는 날 새는 줄을 모르고 술잔을 놓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주사를 모르는 얌전한 술꾼이었다.
1964년, 그는 사랑하는 둘째 딸을 다섯 살 나이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 절절한 슬픔을 현대문학에 <밤비>라는 시로 발표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아픔 속에 있던 그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당시 서대문에 있던 순복음 중앙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신앙생활의 역사를 보면, 그는 모태신앙으로 방황하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195!), 어머니가 유행하던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난 다음, 강릉에서 교회에서 들리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스스로 강릉 중앙감리교회를 찾아 들어 간 것이 신앙 생활의 첫걸음이었다.
이후, 서울에서 사는 동안은 그의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나일론’이었다. 그의 신앙생활은 순복음교회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1984년에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지금은 원로 장로다. 1960년에 결혼한 부인 김갑순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둔 가장으로 지금껏 연로한 장모를 모시고 산다.
<가을 운동회>라는 이성교의 시가 문교부 국정교과서(중학 국어 2ㅡ1)에 10년(70년대)이나 실렸다.
둥둥 북소리에 / 만국기가 오르면 /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 청군 이겨라 /
백군 이겨라 / 연신 터지는 / 출발 신호에 / 땅이 흔들린다 // 차일 친 골목엔 /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 떡 타령을 잊었다 //(이하 생략)
금년 팔순 나이에 시력(詩歷) 54년을 기념하는 시집이 그의 시우(詩友) 성춘복의 솜씨로 엮어져 나왔으니 <끝없는 해안선 그 파도를 따라>(2011 / 마음)다.
성춘복과의 인연은 그의 첫 시집 <산음가(山吟歌)>(1965 / 문학사 대표 최응표)를 펴 낼 때부터 맺었으니, 어언 반세기가 가깝다.
제2 시집 <겨울 바다>(1971 / 한국시인협회), 제3 시집 <보리 필 무렵>(1974 / 창원사), 제4 시집 <눈 오는날 저녁>(1979 / 창원사), 제5 시집 <남행길>(1986 / 청문사), 제6 시집<강원도 바람>(1992 / 문학세계사), 제7 시집 <동해안>(1996 / 형설출판사), 제8 시집<운두령을 넘으며>(2001 / 태학사), 제9 시집 <싸리꽃 영가>(2008 / 창조문예사), 그리고 열 번째 시집이 이번에 나온<끝없는 해안선 그 파도를 따라>인데 사실은 시선집 <대관령을 넘으며>(1984 / 맥밀란), 신앙시집 <하늘 가는 길>(1989 / 종로서적), 시전집 <이성교 시전집>1997 / 형설출판사)를 합치면 열 세 권이나 되는 다작 시인이다.
ㅡ김소월이 평안도를, 박목월이 경상도를, 서정주가 전라도를 각각 노래했다면 이성교는 강원도를 노래했다ㅡ 윤병로(문학평론가)
ㅡ 이성교 시인은 비정한 문화의 세기의 진정한 예언자, 작품에 대한 충실하고 개방적인 중재자, 그리고 존귀하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임에 틀림 없다.ㅡ 엄창섭(관동대 명예교수)
(전략) 해변의 정기精氣로 살은 / 삼척 사람들 / 모두 다 버스 속에서 / 온갖 시름을 보따리 속에 묻어둔 채 / 지긋이 눈을 감고 바다를 그리고 있다. // <三陟 사람들>에서
그는 옛 친구를 만나면, 영화감독 출신 이미례 씨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남도음식점 <여자만>(02/723ㅡ1238)에 가서 바다 냄새 물씬한 고등어 김치찌개를 시킨다. 그리고는 꼭 이런 말을 잊지 않는다.
“먹어 봐, 고등어에서 내 고향 삼척 바다 냄새가 나.”
첫댓글 실로 오랜만에 동오재를 빛나게 하셨구려. 고맙소, 김형.
이성교선생님은 제 어린시절 돈암동에서 가까이 뵙던 분이셨지요. 가끔씩 다녀가시며 코흘리개였던 제게 거하다 싶은 용돈을 쥐어주곤 하셨지요..가난한 선배시인의 아내인 어머니께 대신 건네시는 깊은 뜻이었다는 걸 몇 년이나 지난 후 알았습니다. 어린 저는 그분의 맑고 깨끗하신 모습에서 선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김승환선생님께서 먼 시절 그때의 추억을 넉넉하고 따뜻하게 불러내주셔서 비오는 저녁이 하나도 쓸쓸하지않습니다...
쓰느라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네. 아무래도 그와의 酒食 편력을 끄집어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오. 그래도 그의 이력을 잘도 찾아내었소. 그런데 <학원>은 <수험생> 후가 아니라 먼저였으며(한국전쟁 때 대구 피난지에서 창간), 그때도 함께 나오고 있었을 거요.
창간은 1952년 11월 1일자고 , 제1회 문학상 발표는 54년 1월호였소.(최덕교 한국잡지백년3)
교과서 같은 글인데도 참 재미있고 군침이 도는 글, 그러면서도 국사책을 읽는 듯한 기분, 참 좋아요, 탱큐야요,ㅎㅎㅎ
역시 선생님의 글이 올라와야 동오재는 문학의 사랑방이 됩니다. 그동안 많이 목 말랐습니다.
아이고 늙느라고 그래요. 힘들겠지만 이쁘게 봐 줘요.
기록영화를 보듯 새롭게 떠오르는 지난날이 숨김없이 나옵니다. 용량이 큰 디스크에 입력되어 있는 값긴 보물입니다.
맛 집에 얽힌 넉넉하고 맛갈스런 이야기..잘 읽었습니다. 어느덧 녹음의 계절로 접어드네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글에 언급된 선생님들의 함자에서조차 그리움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