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것이라고 본다.
한 편에선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화민국 침략, 1939년 3월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결과로 한국, 타이완 등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였다.
전사자는 약 2500만 명, 민간인 희생자도 약 3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1938년부터 일본인을 비롯한 조선인, 중국인, 동남 아시아인 등 여러 나라의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하였으며,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또한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고,
영국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전쟁은 크게 서부 유럽 전선, 동부 유럽 전선과 중일 전쟁·태평양 전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편집] 전쟁 배경[편집] 서부 유럽영국, 프랑스 등 열강 세력은 방대한 식민지를 확보하고, 이들 식민지와의 무역을 독점하는 블록화된 경제체제를 구축하였다.
반면, 오랜 기간 동안 분열 되어 있다가 새로이 통일된 근대 민족국가로 태어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19세기에야 문호를 개방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일본 등 자본주의 후발 국가들은 식민지가 충분치 않아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의 무역에 의존한 경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1929년 ~ 1933년의 세계경제대공황 이후 각국이 폐쇄적인 경제정책을 도입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취함에 따라 이들 자본주의 후발 국가들은 큰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한편 1차 세계대전으로 알자스·로렌 지방과 폴란드 지역 등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막대한 전쟁보상금과 이를 갚기 위한 무리한 통화팽창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과, 제 1차 세계 대전 승전국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에 밀려 아무런 이권을 얻지 못한 이탈리아 등에서는 파시즘이라는 배타적 국가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이에 러시아 혁명 이후 위협적으로 성장하는 소련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경계심과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 열강에 대한 반발심,
배타적인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공통점으로 하는 독일의 나치당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이 집권하였는데, 이들이 집권하기 전인 1929년에 전 세계에 닥쳐온 경제공황으로 경제상황이 매우 어려워지자 기존 열강들이 중심이 된 경제체제 하에서 마땅히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던 이들 국가들은 전쟁을 통한 식민지 확보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하게 되어 기존 열강들과의 갈등관계를 심화시켰다.
베르사유조약 파기를 주장하며 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독일이 재무장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부·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국제연맹과 집단 안전 보장 체제가 붕괴되면서 더 이상 다른 국가들이 독일을 견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후에는 체코 지역을 합병하고 슬로바키아를 위성 국가로 편입시키자, 동유럽과 발칸반도는 긴장감이 심해지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뒤 집권하여 친독일, 친이탈리아 전체주의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공격하여 합병하고, 알바니아도 합병하는 등 파시즘 세력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1939년 8월말 히틀러는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음으로써 동, 서 양쪽에서 독일을 압박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의표를 찌른다. 그리고 곧바로 소련과 연합하여 폴란드를 공격하게 된다.
이에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돌입한다. 폴란드는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동서 양쪽에서 독일과 소련이 밀고 들어오자 맥없이 무너졌다. 폴란드를 쉽게 함락한 히틀러는 곧 덴마크, 노르웨이 등을 차례로 공격하여 쉽게 빼앗고 영국, 프랑스와 대치하게 된다. [편집] 동부 유럽제 1차 세계 대전 후 러시아 혁명을 겪은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는 보다 안정된 다른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소련은 발트 3국을 합병하고, 베라사리바와 북부 부코비나를 점령하는 등 동유럽에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한편, 발칸반도에서는 두 번의 발칸 전쟁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과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된 여러 발칸반도의 나라들은 각기 민족주의를 내놓으면서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이미 제2차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났었기에 서로 간에 별 다른 문제 없이 지켜 왔지만, 나치 독일이 1937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데에 동부유럽에는 긴장감이 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1939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데 이어, 육군강국이었던 폴란드를 공격해 폴란드가 결국 맥없이 무너지고,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에 가입하길 거부하자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하고, 이로 인해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추축국에 가담하게 하였다.
그 후,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과시킨 히틀러는 소련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나타내고, 동부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편집] 아시아
그리고 일본은 프랑스가 무너지고 비시 프랑스가 세워지자 비시 프랑스령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미국은 주요 원자재인 석유와 비금속 재료를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하자, 공업국이었던 일본은 급격히 생산률이 떨어지게 되고, 원자재의 필요성으로 인해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등지를 침략하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편집] 경과[편집]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유럽 전선에서 초기에 독일은 전선의 취약한 곳을 기갑부대로 붕괴시킨 후 적의 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는 전격전의 개념을 도입하여 큰 효과를 본다.
독일은 백색 작전(폴란드 점령 작전), 황색 작전(프랑스 점령 작전), 낫질 작전(베네룩스 점령 작전), 베저 작전(덴마크·노르웨이 점령 작전)을 성공시켜,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의 일부를 점령하였다.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의 허를 찌르며 기갑부대가 아르덴느삼림을 통과하면서 스당에 나타나며 영·프연합군을 포위한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양분되어 고립되어 가는데도 덩케르크에서 이르러 내려진 독일의 진격 중단 명령으로, 덩케르크에 포위된 영·프연합군은 덩케르크 해안에서 방어선을 형성하고 영국으로 탈출을 감행하여 많은 병력이 빠져나갔으나 대부분의 중장비를 잃는다.
이 때 빠져나간 프랑스군은 다시 노르망디 지역에 투입되고, 프랑스가 항복하자 드골의 자유프랑스의 일원이 되어 이후 독일과 싸우게 된다. 덩케르크에서 주력부대를 모조리 잃은 프랑스는 먼저 폭격당한 로테르담이나 바르샤바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파리는 무방비 상태임을 발표하고, 독일에게 쉽게 항복해 버려 알자스·로렌 지역은 합병하고, 프랑스 북부는 직접 점령하고, 남부에는 비시프랑스라는 괴뢰정부를 세운다.
그리고 이탈리아도 샤르데나 섬을 점령하고 니시를 점령하였다. 그 외의 식민지는 자유 프랑스를 따르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시프랑스 정부를 따라 전 세계에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높아졌다.
그 후 영국만 혼자 서부유럽에서 남겨지자 독일 공군사령관 괴링은 공군을 이용하여 영국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으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한다. 이후 영국에 육군을 상륙시키려 했던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된다.
한편, 영국의 수상함대와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던 독일 해군은 U보트라 불리는 잠수함을 투입하여 연합군 상선을 무차별 공격하였다. 피해가 극심하자 호송선단을 만들고, 구축함을 대거 투입하는 등 대응책을 내놓아 피해가 줄어들긴 했으나 전쟁 내내 U보트는 대서양과 지중해, 북해 등지에서 맹 활약 하였다.
바다사자작전이 취소된 이후 나치 독일은 동쪽으로 관심을 돌려 1941년 이탈리아가 점령하지 못한 그리스와 독일과의 동맹에 반대하는 정변이 발생한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하여 침공하여 발칸 반도를 모두 점령하고,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동맹국으로 삼았다.
그리고 1941년 6월 22일, 약 3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여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기습공격은 크게 성공하여 소련군은 개전 초기에 엄청난 병력을 손실하고 빠르게 패퇴하였다. 하지만, 독일은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보급의 부족과 겨울의 시작으로 인해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한다.
1942년에는 코카서스와 카스피 해 연안의 석유 자원 및 드네프르 공업지대의 확보를 위해 이른바 청색 작전을 입안하여 볼가 강 남부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이끄는 6군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우라누스 작전)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하였고, 코카서스로 진격했던 군대들도 카프카스 산맥에서 후퇴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독일은 하리코프 공방전을 통해 소련에 반격을 가해 큰 타격을 주었으나 영국과 미국의 막대한 전쟁물자 지원과 함께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전한 소련의 공업시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 소련의 전력은 급속히 강화되어 서로의 세력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독일은 티이거,판터등 신형전차를 전선에 보충하고 치타델 작전을 발동하여 소련의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으나 이미 독일의 정보망을 꿰뚫고 있던 소련은 독일의 공세에 충분히 대비해 놓고 있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은 90만명 이상에 달하는 병력과 3천여대의 전차, 2천기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하며 승리를 장담하였으나 소련측의 병력은 독일의 예상치보다 훨씬 신속하게 불어나서 그보다 강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 소련 양측은 서로 막대한 전력을 소진하였는데, 소련은 이를 쉽게 복구하였으나 독일은 그렇지 못하였고 그 뒤로 소련에게 패퇴하기 시작한다.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독일의 중부집단군을 괴멸시키고, 동부 유럽을 수복하자 독일은 동부전선이 급속히 무너지며 빠르게 서쪽으로 쫓겨나기 시작한다.
영국과 미국은 개전초부터 항속거리가 긴 4발 중폭격기를 사용하여 독일의 주요공업지대와 주요 도시들을 전략폭격한다. 특히 소련침공 후 루프트바페가 소련과 독일본토로 분산되자 공습은 더욱 용이해진다. 영국은 폭장량이 많은 랭카스터 같은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공습을, 미국은 정교한 폭격조준장치와 여러 정의 엄호기관총을 가진 B-17, B-24등의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간공습을 주로 담당하였다. 특히 P-51 머스탱의 등장 이후에는 독일 본토까지 엄호전투기를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독일은 V-1, V-2 등 로켓무기를 개발하여 영국으로 끊임없이 발사하였으나 무유도 병기여서 그다지 효율은 높지 않았다.
한편,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부족한 병력과 병참 지원에도 불구하고 에르빈 롬멜 장군과 북 아프리카 군단 (DAK)이 선전하였으나, 몰타 섬에 위치한 영국 공군과 지중해 함대의 활약으로 보급선이 끊겨 나날이 강화되는 영국군에게 전력상 열세에 놓인다. 이에 영국군의 몽고메리장군은 횃불 작전을 통해 독일군을 밀어내고, 독일군은 1943년 초 튀니지에서 항복하면서 완전히 아프리카에서 축출된다.
이후 연합군은 시실리 및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 본토로 연합군이 상륙하자 이탈리아 정부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다.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독일은 플란데 작전을 발동,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를 복귀시킨 후, 사실상 점령군 행세를 하며 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이 이탈리아 전선은 유례없는 산악전으로 진행되면서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독일의 괴뢰정부의 수장을 맡았으나 살로공화국(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은 사실상 아무 힘도 없었다.
한편 독일은 영국과 미국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대서양 해안을 따라 1942년부터 소위 대서양 방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에는 수많은 외국 포로가 동원되었으며 프랑스로부터 네덜란드까지 연결되었다.
미군과 영국군은 1942년의 디에프 기습에서 얻은 전훈을 참고하여 1944년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으로 연합군은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격 속도에 비해 보급시설이 미약하고 긴 보급선으로 인해 느려지고, 독일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해 지그프리트 라인으로 집결해 다시 전투를 재개하자 이를 타개하고 싶고 독일군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연합군은 네덜란드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마켓가든 작전을 실시하나 예상 외로 네덜란드에 독일 기갑사단이 출몰하고, 독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다리인 아름험 대교를 수복하지 못하여 이 작전은 실패하고 만다.
독일 내에서는 동부전선의 급속한 붕괴에 따른 소련군의 빠른 진격과 서부전선에서의 불리한 전황 등에 따라 전쟁이 패했음을 깨닫고 히틀러를 암살하고 새로운 정권을 세워 연합군과 강화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
이들은 매우 치밀하게 조직되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의 회의실에서 폭탄을 터뜨렸으나 히틀러는 살아 남았고, 쿠데타 세력은 곧 진압되었다. 이 와중에 쿠데타 세력과 연루 혐의를 받은 롬멜, 클루게 등 유능한 지휘관들이 숙청 되었다.
한편, 미군은 독일로 진격 중 회담에서 소련의 영토로 인정된 엘베 강 서부의 공장에서 V-2로켓을 개발하는 공장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종이클립 작전을 발동한 미국은 그 곳에 있는 모든 로켓에 관한 정보를 모으게 된다.
독일군은 서부에서 흔히 벌지 대전투로 불리는 라인 강 수비 작전으로 전세의 재역전을 노렸으나, 작전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동쪽에서 소련군은 계속 진군하여 핀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추축국들이 소련에 항복한다. 결국 5월 1일, 소련군은 총공세를 취해 베를린을 점령하고, 히틀러는 해군제독 되니츠에게 총통자리를 넘긴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뒤 측근들에 의해 불에 태워진다.
영·미연합군과 소련군은 엘베 강의 토르가우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독일은 1945년 5월 8일 서부 연합군에 항복하고, 5월 9일에는 동부의 소련군에게 항복하였다.
한편 무솔리니는 가망이 없는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탈출을 감행하지만 빨치산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게 된다.
독일군은 2차대전 내내 나치스의 인종주의 이론에 따라 수백만의 유태인, 집시족 등을 아우슈비츠 등 여러 수용소에 수용하여 대량 학살하거나 강제노동을 시켰다. 또 소련 등 점령지에서도 대거 인종청소를 감행하였다. 이에 나중에 독일본토로 진격해 들어온 소련군도 독일 민간인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하는 등 민간인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편집] 아시아와 태평양 전선태평양 전선은 애초에 일본이 국민당과의 중일 전쟁이 진행 중에 있었고 전쟁 기간 중에 비시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는 등 교전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중화민국과 장개석 정권을 지지해 왔던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자 이른바 ABCD 포위망을 구축하고 나아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광의 수출 제한을 발동하면서 일본을 고립시켰다.
그러자 자원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일본은 경제 위기의 초래를 우려하였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영국령 말레이 반도, 버마,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자원 산지들과 나아가 인도, 태평양의 섬들을 장악해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일본을 중심으로 돌리려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제창하였다.
강경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미국의 경제 제재가 심화되자 결국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항공모함을 동원하여 미국 태평양함대의 본거지인 하와이 주의 진주만을 기습 폭격하면서 영국,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태평양 함대에 심각한 손실을 입힌 일본군은 공백기간을 이용하여 빠르게 기습을 가하여 필리핀에 상륙하여 맥아더휘하의 미군을 압박하고 맥아더는 호주로 탈출하며 필리핀을 빼앗긴다.
이어 일본군은 홍콩, 싱가포르, 미얀마의 식민지 주둔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영국은 최신형 전함 프린스오브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즈, 구축함들로 구성된 Z함대를 파견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궤멸 당하고 홍콩, 싱가포르,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전체를 일본에 빼앗긴다.
일본군은 이어 서부 뉴기니 섬,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동남아 대부분과 솔로몬 제도까지의 모든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초기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령 남 뉴기니의 주요 항구인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해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를 노리려 하였으나 육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패전하였고 해전에서도 미국 항공모함 기동대와 벌인 산호해 해전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에 의해 둘리틀 공습(1942년 4월 18일)으로 주요 도시가 최초로 미국 공군의 공습을 받았고, 이런 일련의 사태로 일본은 미국 항공모함 부대의 격멸과 태평양에서의 재해권 완전 장악을 위해 미드웨이 섬과 산호해 제도에 대한 공세에 나섰지만 미드웨이 해전과 산호해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 숙련된 조종사 등을 대거 잃는다.
그리고 미국의 거대한 산업이 전시체제로 가동되자 무수히 많은 탱크, 전투기, 군함, 전쟁물자를 쏟아 냈고, 곧 일본군은 질적, 숫적 열세에 놓이게 된다.
일본은 과달카날 해전, 마리아나 전투 등등 남태평양의 섬들에서 벌어진 육전 및 해전에서 참패하였고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한 필리핀마저 상실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벌어진 레이테 해전에서 보유 해군의 대다수를 상실하였다.
또 중국으로 들어가는 영·미연합군의 물자지원 루트를 끊기 위하여 미얀마 서부를 거쳐 인도로 진격하는 임팔작전을 개시하였으나 밀림에서 보급부족과 항공전력의 열세로 참패하였다.
결국 일본은 한반도의 제주도와 일본 열도의 규슈, 오키나와 섬을 최후의 방어전장으로 설정하고 항전하려 하였다.
미군은 괌, 사이판에 기지를 두고 B-29폭격기를 이용하여 일본에 지속적으로 융단폭격을 가했고 필리핀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하는 항공기와 잠수함 등으로 동남아에서 일본 본토로 가는 자원보급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1945년 3월 10일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15만이 넘는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6월 23일 수개월간 참혹한 전투 끝에 일본이 끝까지 사수하려 했던 오키나와가 미군에 함락되었으며,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 공격을 받고 1945년 8월 8일 그동안 일소불가침조약에 따라 중립을 지키던 소련이 조약을 깨고 진격하여 만주국을 멸망시키고, 38도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자 1945년 8월 15일에 항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함께 대일전쟁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병력이 많지 않아 장제스는 처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시 했으나 김구의 지시를 받은 윤봉길이 상하이를 점령하고 훙커우공원에서 승전기념식을 거행하던 일본군 장군들을 대거 살상한 의거 이후 큰 감명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도와 주었다.
특히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고 영·미 연합군을 설득하여 한국은 얄타회담에서 전후 독립을 보장 받게 된 유일한 국가가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버마, 중국 내륙 등에서 포로심문, 게릴라공격, 첩보활동 등에서 맹 활약 하였다. [편집] 기타아르헨티나는 연합군의 군수지원국을 자처하며 특히 연합군의 군량을 조달하는 역할을 담당한 탓에 나치 독일에서 파견된 자살폭탄테러단에 시달려야 했다. [편집] 종전[편집] 유럽독일은 1945년 8월 8일 베를린 공방전에서 패하고, 히틀러도 자살하자 무조건 항복한 독일군은 포츠담 회담, 얄타 회담 등의 조건들을 모두 수락하게 된다. [편집] 아시아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소련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는 않았으나, 8월 폭풍 작전으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은 멸망하고 만다. 또한 과거 러일 전쟁의 패배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에 할양하였던 사할린 섬 남부와 쿠릴 열도를 탈환하였다.
1945년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은 일본의 전권대사였던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와 미국 측의 맥아더 원수가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한 미 해군 미주리 호의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하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편집] 결과[편집] 유럽과 아프리카유럽에서는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오데르-나이세 선을 지정하여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 서쪽에 있는 프로이센 지방을 잃고, 병합했던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독일인 추방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제 연합이 창설되고, 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또, 당시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냉전이 시작되게 된다. [편집] 아시아아시아에서는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대한민국, 베트남 등 태평양 전쟁 당시 점령했던 영토를 돌려받고, 소련은 8월 폭풍 작전으로 만주국과 한반도 북쪽을 점령하였다.
당시 항복하기 위해 쓴 핵폭탄이라는 무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후, 이 전쟁은 유일무이한 핵전쟁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도 독립 열풍이 불어 여러 나라들이 독립하게 되는데,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같은 유혈충돌도 발생하게 되었다. [편집] 연표[편집] 1939년
[편집] 1940년
[편집] 1941년
[편집] 1942년
[편집] 1943년
[편집] 1944년
[편집] 1945년
[편집] 사용된 무기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무기 개발 금지와 국방군 제한 등을 당하였으므로, 다수의 무기 개발이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소련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는데, 히틀러의 집권 이후 공공연하게 베르사유 체제의 철폐가 주장되고 히틀러의 반공 정책으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협력 관계가 청산되었다. [편집] 2차 대전 관련 주요 학살 사건
[편집] 참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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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마음의 보석상자 원문보기 글쓴이: 대륙철도횡단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