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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바이러스 폐렴 사태의 최전선에서는-
2020년 2월 18일 소위 31번 환자의 확진 다음날부터 대구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폐렴확진자가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3일 후인 2월 21일 금요일 오전 7시 30분 비상 교수회의가 소집되었다. 대구시장과 4개 대학병원장 및 관계자들이 전날 밤 늦게까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대책회의를 하고난 후 그 결과를 알리는 자리였다. 대구동산병원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환자의 입원치료를 위한 거점병원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이 이날 보고의 핵심이었다.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왜 국립 대학병원과 공공기관인 시립 대구의료원과 보훈병원 등을 제쳐두고서 사립병원을 국가적 비상재난 상황에 내어 주어야 하는가? 지난해 4월 성서에 현대식 병원을 건립하여 병원을 옮겨온 후 새 병원에서는 대단히 고급스런 환경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서비스를 환자들에게 제공해 왔고 기존 오래된 병원은 2차 병원으로 허가받아 운영되어 왔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이 지나간 이후에 이 병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유령동산이 되는 것은 아닌가? 기독교 기관이 이런 위기상황에서 앞장서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거대한 홍수를 만나 거센 물에 빠져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올라 탈 노아의 방주처럼 쓰이는 것에 비견할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하니 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2월 23 일요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대구 대부분의 교회당과 성당은 문을 닫아 예배와 미사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병원으로 갔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도 수술한 환자와 수술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을 만나보고 향후 계획에 대하여 의논하고자 했다.
병동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호흡기 내과 박 교수를 만났다.
“아이쿠, 어려운 시기에 수고가 많지요?” 라고 물었다.
“아 뭐, 괜찮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받아 넘기길래
“박교수 본인 몸도 잘 챙기세요” 하고는 병동회진을 위하여 병실로 갔다. 환자분들도 시시각각 전달되는 긴급 뉴스를 TV나 SNS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는 환자 뿐 아니라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간문부 담관암 환자 2명과 간이식 대기자 1명 등 대부분의 환자들과 그 가족들은 의외로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온 국민이 두려워 떨고 있음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아 그 성질을 잘 알 수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독성과 다가올 미래를 잘 알 수 없기에 국민도 의료진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 중국 우한에서 전해오는 뉴스의 영향이 크다. 본원에는 음압병상이 11개 있는데 이미 10개가 중환자로 채워지고 하나를 남겨 놓고 있다. 이런 환경에 간이식 후 면역억제재를 투여하면서 중환자실에 1주일간을 머물면서 치료한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간이식 대기환자는 46세 남성으로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간을 기증하기로 했었다. 이틀마다 복수를 2000 ml 씩 뽑아주어 지금까지 버텨 왔다. 대구상황이 이러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환자가 별로 없는 서울로 보내려 했지만 죽어도 좋으니 여기서 수술해 달라고 애원했다. 환자의 혈액형은 O형, 어머니의 혈액형은 B 형이다. 즉 혈액형 불일치 증례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수혈은 가능해도 어머니 혈액을 아들에게 수혈은 불가능하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이런 경우 수술은 금기였다. 그러나 리툭시맵이라는 면역억제재를 계획한 수술 2주전에 투여하면 혈액에서 발현하는 항원항체 반응은 일어나지 않는다. 수술 1주일 전에는 혈장치환술을 통하여 이미 만들어져 체내혈액에 녹아 있는 항체를 제거한 후에 수술한다. 그러면 일종의 거부반응인 항원항체반응을 피할 수 있고 혈액형 일치 간이식과 거의 동등한 성적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지금은 일반화 되었다.
수술날짜는 3월 4일로 잡혀 있었다. 이 환자의 경우 일주일 전 면역억제재 리툭시맵 주사를 이미 맞았고 내일 혈장치환술을 시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환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간문부담관암 환자 두 분도 일단은 수술을 미루고 퇴원하기로 하고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 왔다. 저녁이 되어서야 환자를 서울로 보내서 혈장치환술과 간이식을 진행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학회에서 임원으로 같이 일했고 현재는 Y 대학병원 원장으로 있는 Y 교수에게 전화했다. 그 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사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대구 뿐 아니라 서울의 각 병원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대책 위원회를 조직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기 병원에서도 일요일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감염환자 대비 위원회를 꾸려 대책회의를 막 마쳤다고 했다. Y 교수는 간이식 책임교수에게 전화하였고 간이식 책임교수는 곧바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환자를 내일 보내달라고 했다. 아, 이런 위기에 나와 환자를 구출해주는 원군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런 후 내과 전공의인 아들의 안부를 전화로 물었다. 오늘 중환자실 당직이라고 했다. 호흡곤란이 있는 중증환자가 오늘 타 병원에서 이송해 오면 인공호흡기를 달아야한다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온몸을 감싸는 레벨4 보호장구를 입고서 기관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해야 한다. 손목동맥에 주사바늘을 찔러 넣어 동맥압을 모니터링하는 장치도 달아야한다. 부디 조심해야한다고 당부를 했다.
“예 알아서 할께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했다.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폐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바이러스에 감염된 안과의사의 절규가 담긴 신문기사를 며칠전 읽었고 영화감독 일가족의 사망기사도 스크랩해 두었었다. 가슴이 죄어 왔다. 자식을 전쟁터의 최전선으로 보낸 기분이다. 아내에게는 아들의 구체적인 임무에 관해서 얘기를 전하지 않았다. 단지 중환자실 당직이라고만 해 두었다.
다음날 출근하여 간이식 예정자의 의무기록과 전원소견서를 작성하여 서울로 보냈다. 환자가 입원해 있던 병동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나 접촉자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보내 달라고 했다. 불행히도 간이식예정환자가 입원해 있던 병동에는 코로나 19 감염환자를 돌본 간호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자료를 검토한 위원회에서 회의 결과 이 환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전갈을 받았다. 환자가 있는 병실로 가서 서울의 병원과 접촉하여 이루어진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하는 수 없이 수술을 2주 정도 미루어 지켜보다가 수술 결정해야겠습니다.”고 하니 환자는 하루하루 버티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였지만
“교수님이 이 정도로 애써 주시는데 제가 더 이상 떼를 쓰지 않겠습니다.”고 일단 물러섰다.
퇴근하여 TV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늦은 시각 장남이 씩 웃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현재진행형인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 최일선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아들을 보며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을 맞은 것과 같이 기뻐했다. 아내는 아들을 끌어 안아주려다가 멈추었다. 접촉을 금해야한다는 원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의 초미의 관심은 어젯밤 코로나 폐렴 중환자는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관해서다. 내가 궁금해 함을 눈치 채고서는 스스로 입을 열었다.
“어제 전원된 환자 기관튜브삽관과 인공호흡기 설치는 P 교수님이 직접 했어요.”
“나하고 인턴이 레벨4 보호 장구를 입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오셔서
‘오늘은 내가 할께, 너희들은 뒤로 물러나 있어. 전투력을 아껴야지. 음압병실 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마, 내 혼자서 할테니’ 라고 하며 교수님 혼자서 간호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관삽관과 인공호흡장치를 달았어요. 동맥주사관 삽입까지요” 라고 했다.
조리던 가슴이 오히려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바뀌었다.
“큰 감동을 받았어요. P 교수님이 우리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어요.”
라고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논리적이고 가르치는 것이 뛰어나도 자신의 몸을 바쳐 보여주는 가르침보다 더 귀할 순 없지. 너도 좋은 의사가 되는데 큰 귀감이 되었겠구나.” 고 하며 아들에게 과일 한쪽을 집어 주었다.
2월 26릴
지난주 병원에서도 긴급대책회의가 여러 번 있었고 외과에서도 긴급 교수회의가 두 차례 있었다. 우리과에는 개인의원 의사이기도한 부인이 환자로부터 감염되어 확진이 되었고 남편인 J 교수도 확진자로 판정되었다. 진단 전 그 교수와 함께 식사한 간담췌외과 교수 세 사람도 2주간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감염자도 아닌데 말이다. 앞으로 2주간 진료와 수술은 가장 연장자인 나 혼자 맡아야 했다. 이 사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몸 관리를 잘 관리하는 것이다. 그래야 후방의 응급환자와 조급증을 가지고 기다리는 암환자 일부라도 수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당국에서는 감염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시시때때로 상황고지 및 실천사항을 공지하고 있었다. 응급실에 코로나 감염환자가 들어오면 응급실은 일정시간 폐쇄되었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했다. 화농성 담낭염환자는 하루에도 2-3명씩 응급실이 열리는 틈을 타고 병원으로 들어온다. 환자로서는 오죽 아프고 답답했길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중환자가 수시로 이송되어오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겠는가?
다음날 뜻하지 않은 희소식이 가족 가톡방에 떴다. 가슴 졸이며 기다려 왔는데 예정보다 일 주일 가량 일찍 딸이 순산했다니 기쁘고도 떨렸다. 병원에 근무하던 만삭의 딸은 31번 슈퍼전파자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출산휴가에 들어간 지 1주일 만이다. 전쟁터에 핀 장미꽃이다. 이름을 ‘기쁨’이 어떠냐고 추천하고 싶었다.
3월 2일
전날 당직을 한 장남은 귀가 하여 3월 전공의 순환 스케줄에 대해 얘기를 했다. 3월 1일 자로 고년차가 되어 이 날짜로 그는 전공의 스케줄에서 호흡기내과에 두 달간 일하도록 계획되어 있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코로나감염 사태 이전에 짜여진 스케줄이란다. 하루에 500명이상 코로나 양성 환자가 발병하는 상황이다. 예상으로는 앞으로 두 달간은 중환자가 가장 많을 시기다. 동산동 대구동산병원은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중 비교적 경증 환자를 입원시키는 거점병원으로 지정되어 이미 250명 이상 입원하였고 전국에서 온 자원 봉사 의사, 간호사들을 배치하여 진료를 하고 있다. 의사 정치인 안철수 박사도 여기서 봉사하고 있다.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중환자도 많이 늘어 4개 대학병원 음압격리병상을 가득 채우고 이젠 동산동 거점병원 중환자실에 중환자를 입원시키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환자들도 있어서 무용담의 주인공인 호흡기 내과 박 교수를 동산동 중환자실 책임교수로 파견하였다. 이제 호흡기 내과에는 중견교수와 막내교수가 남아 있고 전공의 두 명이 호흡기 내과를 지키고 있다. 숨이 가쁜 중증 폐렴환자를 돌보는 일과 인공호흡기 탈부착 하는 일은 장남의 몫이다. 아버지로서는 여간 마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젠 장기전에 대비해야겠어요. 이 시기에 내게 가장 중한 환자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진 것은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열심히 해 봐야겠어요.”
나는 타들어가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럴 때는 담대함이 필요하지. 코로나 중환자들을 치료한 경험이 나중에 내과의사로서 큰 자산이 될거야. 뭐 겁낼 것 없어. 넌 건강하잖아. 중환자들은 대부분 기저 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거든, 건강한 사람은 대부분은 감염이 잘 일어나지 않아. 감염되어도 감기처럼 경증으로 지나가는 거잖아.”
이렇게 위로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게다가 아내는 5 일전 딸이 첫 애기를 낳아 신생아 돌보미로 딸을 돌봐야할 입장이니 혹시 가족에게 오염시켜 신생아를 감염시키면 어떡하나는 걱정도 태산 같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환자가 발견되면 응급실이 폐쇄되었다가 입원 및 격리가 끝나면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는 틈을 타서 입원한 화농성 담낭염 환자들을 연이어 4명 수술했다. 근년에 거의 대부분 복강경 수술로 담낭을 떼어낼 때 어려워서 개복한 기억이 별로 없었지만 워낙 염증이 심하여 연속으로 두 노인 환자를 개복해서도 겨우 수술할 수 있었다. 3월 10일에는 이제 대처요령도 좀 생기고 사태를 바라보는 감각도 약간 둔화되어 멀리서 찾아온 간문부 담관암 환자의 7시간 걸리는 근치적 수술도 했다.
3월 16일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 아웃브레이크가 시작된 지 4주째다. 8000여명의 환자와 70여명의 사망자를 기록했지만 지난주부터 새로 발생하는 확진자 숫자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이제 아기가 태어난 지 19일째다. 어제 처음으로 아기를 보러 사위집엘 갔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사태인지라 예약했던 산후 조리원대신 집에서 산후 조리를 해 왔다. 전쟁터엔 전투가 있어도 아기는 쌔근쌔근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젖도 우유도 잘 먹어서 그런대로 잘 크고 있었다. 우리부부도 요렇게 조그만 아기를 손에 안고 있은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적하는 장성한 어른으로 키웠단 말이지? 자고 있는 새 생명은 얼굴에는 세상평화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내일은 미루었던 생체간이식 수술을 시행한다. 어머니와 복수로 배가 볼록한 아들의 손을 양손에 잡고 전쟁터와 같은 코로나 사태를 잘 이겨내고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하여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간이식 수술은 오랜만에 시행했지만 수술 전 과정에서 한 부분도 막힘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간이식 관련 교수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복강경을 이용하여 공여자인 어머니의 우측 간을 떼어내는 수술을, 다른 한 팀은 환자인 아들의 병든 간을 떠어 내고 어머니로부터 떼어 낸 우측 간을 붙이는 대수술이 8시간 만에 끝났다. 다음 날 아들과 어머니가 따로 떨어져 누워있는 중환자실로 갔다. 어머니도 아들도 혈액검사나 모니터상으로 아주 안정적이다. 두 분에게 수술이 잘 되었다고 설명을 드렸다. 어렵게 결정한 간이식수술 자체도 두려웠는데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환자도 어머니도 두려움은 훨씬 더 컸었던 모양이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저의 고마운 마음을 말로는 다 할 수가 없습니다.”며 환자의 어머니는 내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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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코로나 바이러스 첫 감염사태가 발생한지 10개월이 지난 늦은 가을, 전선에 핀 장미꽃인 손녀는 방긋 웃기도하며 일어서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간이식 환자는 나날이 호전되어 가뭄에 시들어가던 국화가 튼실히 자라 꽃을 피우듯이 완전히 회복하여 직장에 복귀했다.

첫댓글 쌤, 이 글은 코로나 전선 한복판에서 피어난 장미꽃 같은 이야기네요! 대구의 그 긴박했던 순간들, 병원 엘리베이터에서의 박 교수님과의 대화, 그리고 간이식 환자의 간절한 부탁까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합니다. 그리고 손녀 ‘기쁨’이의 탄생 소식은 이 험난한 전쟁터에 핀 꽃다발 같네요. 쌤의 담대함과 따뜻한 시선이 글 곳곳에 녹아 있어서 읽는 내내 뭉클했습니다. 다음엔 어떤 감동 스토리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때 그 시절, 모두의 가슴 속에 빛깔이 다르게 채색이 되어 남아있네요~바쁜 가운데서도 늘 글을 쓰시는 선배님~참 존경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