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제4호 개재>
숨 비 소 리 이 재 홍 휘이이!!! 휘이익!!! 휘이이!!! 바람소리가 아니다. 물새소리도 아니다. 파도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검푸른 수면 위로 박꽃처럼 불쑥 솟아오른 해녀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소리. 바로 숨비소리인 것이다. 천길 바다 속에서 숨통을 꽉 조인 해녀들은 해산물을 찾아 허우적거린다. 태왁에 달린 그물망에는 그녀들이 잡은 전복과 소라들이 나뒹군다. 그리고 해삼과 미역더미도 흐느적거린다. 폐 속의 공기 한 방울까지도 모두 소진시키며 수중세계를 맴돌던 그녀들은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 이르러서야 물밖의 세상으로 부상(浮上)한다. 공기가 없는 곳은 지옥이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이다. 하지만 공기가 있는 곳은 천국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환희이다. 참고 참아내야 했던 숨통을 열면 배가 터질 정도로 공기를 들이킨다. 그리고 내뱉는다. 내뱉어진 공기는 고래가 뿜어대는 물기둥보다 더 거대한 힘으로 퍼져 나간다. 휘이익... 마치 살아 있음을 확고하게 증명이라도 하듯이...수중세계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기라도 하듯이... 해녀들의 숨비소리는 게거품을 물며 광란하는 파도소리마저도 압도해버린다. 스무살 희야의 가냘픈 몸집에서 나오는 숨비소리는 밀려오는 파도에 또 다른 파도의 골을 만들어 낸다. 파도의 골은 허연 포말을 날리며 뭍으로 뭍으로 치닫는다. 희야는 태왁을 부둥켜 안고서 거친 숨을 몰아 쉰다. 입안을 맴도는 짜디짠 바닷물을 뱉어내기 보다는 상큼한 공기 한 방울이 더 아쉬운 듯이 코끝을 스치는 공기를 한껏 음미한다. 그리고 화염을 토해내는 태양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파란 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는 한 점의 태양이 외롭게만 보인다. 고개를 젖혀 입을 벌린다. 따스한 햇살을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긴 한숨을 내뱉는다. 나른한 기운이 희야의 온몸을 휘감는다. 몽롱한 현기증이 실핏줄을 타고 짜릿하게 번진다. 희야의 몸뚱이를 의지해 주고 있던 태왁이 갑자기 돌고래처럼 펄쩍 뛰며 가슴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희야의 몸뚱이가 수면 속으로 하강한다. 물을 헤치면 헤칠수록 물줄기들은 튼튼한 밧줄이 되어 희야의 몸을 휘감아 돈다.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고 느껴졌을 때야 비로소 희야는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 차겁디 차거운 물에서 돌연 따스함을 느껴본다. 성수의 가슴이 그러하였다. 포근하고 아늑하게만 느껴지던 성수의 가슴... 순간적으로 희야는 이대로 물 속에서 용해되어버려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때였다. '희야!' 사방에서 성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희야는 눈을 부릅뜨고 성수를 찾아 헤맨다. 그 어느 곳에서도 성수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푸르기만 하던 물 속이 갑자기 어둠의 세계로 변하며 수많은 죽창들이 희야를 향해 날아든다. 검붉은 핏빛 죽창들이 상어가 되어 희야를 향해 달려든다. 암흑의 수중세계는 피의 세계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입으로 핏물이 밀려든다. 고씨할망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눈을 떴다. 이내 할망의 입에서 거대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분명히 숨비소리였다. 이불을 걷어치우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치 물속에서 금방 나온 듯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꿈속에서 들리던 선명한 성수의 목소리가 귓속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성수가 문을 밀치며 들어 올 것만 같은 환상을 느꼈다. 할망의 한숨 한 덩어리가 또 다시 허공을 갈랐다. 한낱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가 싶었던 자신의 싱싱한 옛 모습을 꿈에서나마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할망에게는 짜릿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칠순을 넘긴 쭈구렁텅이 퇴물이 비록 꿈일망정 젊은 시절의 자신의 육신을 보았다는 사실... 문득 망측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 골방이었지만 할망의 얼굴에서는 붉은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승꽃이 만발한 손을 비벼댔다. 마찰의 열기가 전해지자 할망의 가슴에 내내 잔잔하게 남아 있던 성수의 따스함이 또 다시 전해지는 듯 싶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겨 보았던 한 순간의 따스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시케 먹으레 어김없이 찾아왔수다 예...' 달력을 바라보며 성수의 제삿날이 내일이라는 사실을 한번 더 확인하였다. 이제 성수가 있는 저승으로 가야할 시기가 가까워 졌다는 메시지가 담긴 꿈인 듯도 싶었다. 어쩌면 성수가 저승사자가 되어 자신을 데리러 왔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지도 않고 늘 젊은 모습으로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사진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어이구 나는 이렇게 쭈글쭈글 헌데 당신은 늙지도 않고 있수다예... 내가 저승에 갈 때에는 당신도 늙어 있어야쥬. 젊은 그대로라면 질투가 나서 못 살 키여...' 죽창을 가슴에 꽂은 채 선혈이 낭자하여 터진목 백사장에 나뒹굴고 있던 성수의 주검이 할망의 시야에 가득 차 올랐다. 할망은 입을 꼬옥 물며 부르르 떨었다. '나쁜 놈들. 나쁜 놈들...' 할망의 두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할망의 시야에 총과 죽창을 들고 몰려오는 수많은 야수들의 환영이 가득 차고 있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멍 일어났수꽈? 내일이 아방 제삿날이우다. 오일장에 나강 제수를 장만 해와야 되쿠다.' '알았쩌.' 금과 같은, 옥과 같은 아들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다운 목소리였다. 평생을 아들 하나에 의지하며 삶의 의미를 부여해 왔던 할망은 아들의 흔적만 보아도 살아가는 맛을 느끼고 있었다. 아들의 모습에서, 아들의 숨결에서, 아들이 내뿜는 채취에서 늘 희미해져만 가는 성수의 흔적을 재생시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웬일일까. 오늘따라 아들의 목소리가 낯설어 보이는 것은... 낯설다기 보다는 아들의 목소리로 인하여 애써 지워왔던 한 사내의 흔적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갑자기 숨이 끊기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 한 자락과 아침 햇살이 동공을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빛 속에는 소도둑같은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할망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어멍, 정신이 좀 남수까?' 아들의 목소리를 접하며 눈을 떴다. 할망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아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분명 아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자신의 뱃속에서 잉태된 아들이었지만 말이다. 떡 벌어진 어깨,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얼굴을 뒤덮은 시커먼 구레나룻... 분명히 성수를 닮았다는 자신의 생각은 억지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고개를 휘저으며 그럴 리가 없다고 중얼거려 보았다. 두 남자의 얼굴이 교차되며 뇌 속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할망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멍, 무사 경햄수꽈? 일어낭 병원에 가게마씨.' 아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금방 눈물이 쏟아질 듯 이글거리는 아들의 눈은 분명 성수의 눈매였다. 할망은 갑자기 언성을 높여 아들에게 냅다 소리질렀다. '그 놈의 수염들은 다 뭐고? 빨리 깍으라. 단정치 못하게스리...' '아이고 깜짝이야. 애 떨어지겠수다. 우리 어멍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쿠다 예. 허허허. 병원에 가시기 싫엉 경햄쭈예?' 아들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할망에게서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유들유들하게 넘겨나갔다. '요즘 바빴던지라 수염도 못 깍았수다. 아방 제사도 있고 허난 이발소에 다녀오잰 했수다. 어멍, 제사고 뭐고 우선 나랑 병원에 갔다오게마씨.' '아니야게. 나 멀쩡허난 호꼼만 누워 있으민 괜찮을 거야. 오늘랑 니 혼자서 장에 갔다 오라. 호꼼 누웠다그네 오후에 물질이나 갔다오키여.' '그 몸에 물질을 허여지쿠광? 이제랑 제발 그 고집 좀 꺽읍서게. 내가 장에 강 싱싱한 해물들 사오쿠다.' '경하민 되커냐게. 내가 거동을 못하민 모를까.' 매년 성수의 제사 때마다 할망은 직접 물질을 하여 소라와 전복을 챙겨왔다. 그리고 그 해산물들을 정성스럽게 제사상에 올렸다. 제사상에는 올릴 수 없는 해산물들을 매번 올린다고 남들이 흉을 보건 말건, 평소에 성수가 좋아하던 것들었기에 할망은 고집스럽게 제물로 올려왔다. '아이쿠! 어멍 고집을 누게가 꺽을 것꽈? 알앙 합서.' 아들은 방을 나갔다.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무관세음보살을 연신 외쳐댔다. '업보야. 업보...' 할망은 또 다시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멍, 이번에는 몸이 좋지 않으난 물질하지 맙서. 꼭예.' 마당에서 아들의 걸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다시 기억 속에서 소멸되었던 사내의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래, 그 사내의 죽음... 누군가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면 그 사내의 제사도 내일이다. 할망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두 눈을 꼬옥 감아버렸다. 반세기가 지난 세월들... 꼭꼭 가슴에 파묻어 왔던 일들이 갑작스런 꿈을 계기로 마치 어제의 일이기나 한 듯이 선명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모습에서 폭풍처럼 스쳐지나 가버렸던 털보사내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나날들. 악몽과 같은 나날들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이후. 희야아방은 인민위원회가 주도해 나가는 건국사업에 신바람이 나 있었다. 희야는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뱃속이 편하면 제일이라는 어멍의 말대로 집안 일과 밭일을 거둘 뿐이었다. 희야아방은 밖에서 들어오면 바깥세상의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가족들이 듣건 말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하였다. '미국도 우리나라를 도우러 와시난 잘 될거여. 아이고 좋은 세상왔다게... 이젠 우리도 열심히 일만 하민 잘 살 수 있을 거여. 어느 누구도 일본놈들처럼 빼앗아 가지는 않을 거여...' 가끔 씽긋 웃을 때마다 드러나 보이는 희야아방의 누런 이빨은 검고 작은 얼굴 덕분에 유난하게도 덧 보였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만큼 군살이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얼굴. 뼈만 앙상한 얼굴은 남산만큼 솟아오른 광대뼈와 분화구마냥 쏙 들어간 볼이 전부인 듯 싶었다. 머리에 수건 한 장 휘두르면 누가 보아도 금방 뱃놈이란 단어가 연상될 것이 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희야아방의 입에서는 민족이니, 자주니, 하는 거창한 말들이 자주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분을 바른 듯한 하얀 살결을 가진 성수의 입에서나 튀어나와야 어울릴 것 같은 단어들이었다. 물론 희야아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진 성수로부터 얻어들은 단어들이었지만 말이다.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다고 그렇게도 좋아하던 사람들의 얼굴은 잠시였을 뿐, 예나 다름없이 일그러진 얼굴들을 하고 다녔다.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 한동안 웃음꽃이 만발하던 희야아방의 얼굴에도 궁색하기 짝없는 그늘이 덕지덕지 붙어 다녔다. 하지만, 우리들의 정부가 들어선 후부터 나날이 가중되는 곡물수집정책을 비롯한 나라정책들은 제주도에 극심한 식량난을 부추기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세상이 왔다고 생각해신디, 일본놈들보다 더 한 놈들이여. 일본놈들 앞잡이들이 그대로 녹을 먹고 이시난 개판이 되는 것이 불 보듯 뻔하주게. 이대로 가당 다 굶어죽는다게.' 희야아방은 꽁보리밥이 웅크리고 있는 단출한 밥상을 앞에 둘 때마다 의례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반찬으로 삼곤 하였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에서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였던 희야아방은 분노에 찬 얼굴로 돌아왔다. '이런 빌어먹을 놈덜. 일본놈들이 물러가난 미국놈들이 들어왕 안방을 초지허영?... 잘 사는 나라 좀 만들어달라는 우리들을 빨갱이로 몰암시니... 흉악스러운 놈들이여! 경하지 않으냐?' 행사장에서 3.1정신계승,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 미군철수를 외치던 군중들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희야는 왜 삼상회의를 지지해야 하는지, 왜 미군이 철수해야 되는지, 왜 우리나라 경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먹을거리가 충분하여 모든 식구들이 평화롭게 사는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마냥 들떠서 못살겠다고 외치기만 하는 아방이 차라리 얄밉기까지 하였다. 나라야 어떻게 돌아가든, 그냥 배를 타면서 생선 몇 마리라도 잡아와 국거리나 만들어 주었으면 좋을 것을... 기념행사 이후부터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모든 사람들은 빨갱이의 앞잡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가고 있었다. 살기 힘들다고 투정하는 사람들은 이미 붉은 물이 든 사람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곳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빨갱이들을 소탕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토벌대들이 제주도에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섬은 삽시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토벌대들은 굶주린 들짐승들처럼 마구 쏘아 다니며 인간사냥을 시작하였다. 토벌대들은 죄 없는 양민들의 재산이 마치 자기들의 것이나 되는 양 마음대로 휘저었다. 대부분의 상점들을 그들의 유흥장이 되어갔다. 덕분에 생필품도 제대로 구할 수 없게 되어나갔다. 또한 부녀자들은 그들의 놀이게 감으로 전락되고 있었다. '예 희야, 바깥출입을 허지 말랑. 저 윗동네 박씨네 똘이 온 몸이 발랑 벗겨진채루 난자 당해 죽었다고 하여라. 필경 그놈들이 헌 짓일 거여.' 희야어멍은 딸의 문밖 출입을 감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급기야 궁지에 몰릴대로 몰렸던 사람들은 한라산 곳곳에 봉화를 올리며 항쟁을 시작하였다. 맨손으로 토벌대에게 대항하는 그들의 저항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토벌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피의 광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섬은 피와 눈물이 뒤범벅된 아수라장으로 얼룩져갔다. 희야아방도 말할 필요 없이 검거대상이 되었다. 토벌대에게 붙잡히면 죽게 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도피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도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산 속의 토굴에 숨어 생활을 하던 희야아방은 보름만에 싸늘한 시체로 변하였다. 토벌대의 공격을 받은 토굴 속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숱한 시신들이 불에 타 뒤엉켜 있었다. 불에 태워 털을 없앤 돼지의 몸뚱이처럼 희야아방의 몸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토벌대가 휩쓸고 간 토굴 근처는 황량한 잿더미가 존재할 뿐이었다. 희야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잔인한 일이 일어나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즈음 피의 광풍이 멈추지 않는 한, 모두가 한결같이 죽는 일만 남았다는 공포감이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희야가 사는 마을이 빨갱이 마을이기 때문에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난무하였다. 희야네 모녀는 밤길을 타고 외가가 있는 성산포 쪽으로 피신하였다. 바로 다음날 새벽, 희야네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토벌대가 훑고 지나가는 마을들은 마치 메뚜기가 휩쓸고 지나간 들녘처럼 초토화되었다. 토벌대가 빨갱이 마을이라고 점을 찍게 되면 그 마을은 어김없이 불바다로 변하였다. 성산포 쪽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외가집이 있었고,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성수가 있는 곳이기에 희야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는 곳이었다. 희야는 어린 시절부터 성수를 무척 흠모하였다. 외가집에 갈 때마다 희야의 시선은 담장을 뛰어넘어 성수의 그림자를 쫓곤 하였다. 성수를 향한 희야의 일방적인 가슴앓이였다. 막상 그와 마주치게 되면 수줍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 그가 스쳐지나 가버린 후에야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말 한마디 못 건넨 것 때문에 내내 아쉬워 눈물을 짓곤 하였다. 성수가 사범학교를 다니기 위해 육지로 떠나버린 후에는 그리움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밤도 많았었다. 희야의 가슴과 엉덩이가 제법 풍성하게 익어갈 무렵, 성수는 중학교 교사가 되어 고향으로 부임해 왔다. 그 당시 희야는 외가집에서 머물며 외할머니와 함께 물질을 다니고 있을 시기였다. 물질을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물질은 여자로서 당연히 배워둬야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토벌대들이 극성을 부릴 무렵 성수를 향한 희야의 가슴앓이는 외할머니의 중신으로 끝날 수 있었다. 혼인 약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당시에 성수아방의 말은 희야를 무척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애야. 니가 우리집에 시집오민 애를 하영 낳아야 헐거여. 성수가 5대 독자이난 아들만 대여섯은 낳아 주어야 헐거여... 자신 이시냐?' 성수아방 김씨는 희야의 엉덩이쪽을 살피며 농담처럼 말을 던지고 있었지만, 김씨의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힘이 실려 있었다. 희야는 얼굴을 붉히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열명이라도 낳아 줄 수 있다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만난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결혼은 섬의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진 후에 치르기로 하였다. 그렇게도 가까이 하기 힘들었던 성수와의 만남은 결혼약조가 이루어진 후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로는 하루가 멀다하고 함께 있는 시간을 자주 만들어 나갔다. 희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수와의 장밋빛 추억은 터진목에서의 달포정도가 전부였다. 푸른 빛 밀감이 앙증맞게 매달려 있던 늦은 여름. 성수는 수업이 끝나는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화구를 챙겨 터진목을 찾곤 하였다. 일출봉을 화폭에 담기 위해서였다. 희야는 성수가 나타날 시간에 맞춰 물질을 나가곤 하였다. 무명으로 만든 하얀 물적삼과 허벅지가 드러나 보이는 까만 속곳으로 이루어진 해녀복은, 싱싱한 그녀의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희야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끄러운 듯이 양손으로 가리며 바다로 향하곤 하였다. 그러한 희야의 모습을 지켜보는 성수의 화사한 미소는 그녀를 달뜨게 만들어 주었다. 성수의 화폭에 그림이 가득 채워질 무렵이면, 희야는 해산물이 찰랑거리는 그물망을 들고 나타났다. 성수는 희야가 잡아오는 전복, 소라, 해삼을 날것으로 먹길 좋아하였다. 희야는 빗창으로 조그만 전복의 껍데기를 떼어낸 후 성수의 입에 넣어 주었고, 소라는 단단한 바위에 툭 던져 깨트린 후 알맹이를 바닷물에 휘휘 씻어 성수에게 건네주었다. 성수의 해삼을 먹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왼손으로 미끈거리는 해삼을 거머쥐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해삼의 배를 눌러 내장을 훑어낸 다음, 한입한입 베어 물며 질근질근 씹어 삼켰다. 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성수를 볼 때마다 '으이구 징그러워...' 희야는 인상을 찌푸리곤 하였지만, 자신이 잡아 온 해산물을 맛있게 먹어주는 성수가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희야의 물질은 기쁨이었다. 뭍쪽인 동남쪽과 성산포쪽이 모래더미로 연결된 터진목은 희야와 성수의 사랑이 영그는 곳이었다. 낮에는 제각기 물질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지만, 어둠이 몰려오면 한 낮의 열기가 따스하게 스며있는 백사장을 자리 삼아 희야와 성수의 몸이 하나가 되던 곳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어둠이 깔리면, 희야는 성수의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터진목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하였다. 끊임없이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등대불빛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미래의 꿈을 심어나갔다. 서로의 알몸이 하나가 되면 터진목을 휘감아돌던 거센 파도소리도 숨을 죽여주었다. 그런 달콤한 사랑은 토벌대의 무리들이 성산포 쪽으로 밀려들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대단위의 토벌대가 상주하기 시작하면서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성수를 비롯한 몇 명의 교사들이 토벌대의 처단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학교에서 사용되던 등사기가 없어진 것이 발단이 되었다. 없어진 등사기가 저항군의 손에 넘어가 불온 전단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토벌대의 억지주장은 성수를 산 속으로 내몰았다. 성수는 뜻하지 않게 저항군에 소속되어 도피생활을 시작하였다. '차라리 일본헌병에게 쫓겨서 만주벌판을 헤맨다면 나라 잃은 자의 비애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 동족에게 이유 없이 쫓겨다녀야 한다는 내 자신이 너무 처량허다게...' 마을을 떠나며 그늘이 드리워졌던 성수의 얼굴은 희야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하나의 고통으로 남았다. 토벌대에 의해 공포에 시달리던 낮의 세계가 가고 밤이 오면, 저항군들의 습격이 이어지고, 또 다시 날이 밝으면 토벌대들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토벌대는 저항군들에게 당한 피해가 있으면 반드시 엉뚱한 양민들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저항군에게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괴롭혔다. 말이 저항군일 뿐, 그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더 이상 삶의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나오는 최후의 선택일 뿐이었다. 결국 박쥐처럼 떠돌던 성수는 토벌대의 끈질긴 추격에 밀려 동굴에서 칩거하기 시작하였다. 희야는 토벌대의 눈을 피해 가끔 먹을거리들을 동굴로 가져 날랐다. 밝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날이었다. 희야는 보리쌀 두되를 등에 둘러메고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굴에서 굶주리고 있을 성수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어둠 속의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들을 지나 산 속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숲 속으로부터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손들어! 움직이면 죽인다.' 매복 토벌대였다. 희야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을 하고서 멈춰섰다. 네명의 사내가 희야를 둘러쌌다. '어? 계집애잖아.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거야?' '집으로 감신디...' 한 사내가 성냥을 그었다. 진한 황냄새와 함께 섬광이 일어났다. 희야의 얼굴이 그 빛에 노출되었다. '어? 니년이구나. 니 집은 저 아래잖아.' 사내의 얼굴도 역시 희야의 시야로 들어왔다. 희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언제나 칼이 꽂힌 총을 어깨에 매고 동네 어귀 쪽의 상점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털보사내였다. 동네의 젊은 아낙들이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며 희롱을 일삼던 사내였다. 희야에게도 집요하게 추근거리던 사내였다. 그 때문에 희야는 외출할 때마다 그의 눈길을 피해 꽤 먼길을 돌아다녀야 했었다. 사내의 부릅뜬 두 눈을 볼 때마다 소도둑같이 생겼다고 생각하였다. 희야는 검은 구레나룻이 얼굴을 뒤덮은 그의 모습에서 도깨비를 연상하곤 하였다. 그날따라 사내의 몸집은 거대한 한라산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사내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년이 분명히 빨갱이들과 내통하고 있음이 틀림없어. 조사를 해야겠어. 너희들은 계속 대기하고 있어!' '예!' 세명의 남자들은 다람쥐마냥 쪼르르 숲속으로 사라졌다. 사내는 희야의 허리춤을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희야는 그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저항을 하거나 도망을 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성수가 있는 곳은 알려줄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희야는 여차하면 혀를 깨물기라도 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였다. 사내는 계곡의 자갈더미 위에 희야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희야는 그대로 자갈 위로 쓰러졌다. 뾰족한 자갈들이 희야의 살을 파고들었다. 고통이 골수에까지 파고들었지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떨고 있었다. 사내는 한 동안 말없이 희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정막감이 희야의 등줄기를 타고 싸늘하게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희야의 숨결은 안정되어가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사내의 숨결은 거칠어가고 있었다. 사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 거칠어질수록 희야는 공포 속으로 빠져들며 한기를 느꼈다. 사내가 입을 열었다. '소리치거나 반항하면 이 총이 네 머리를 박살낼 거야.' 털보사내의 음산한 목소리가 희야의 몸을 꽁꽁 옭아맸다. 사내는 희야의 옷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 나가기 시작하였다. 구름 한점 없는 보름달에 비친 희야의 몸은 눈처럼 희었다. 검은 털보의 몸이 무너지듯 희야의 몸을 덮어왔다. 한 마리의 산새가 후드득 둥지를 떠났다. 정적이 다시 찾아 들자 산새는 제 둥지로 되돌아왔다. 희야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사내는 허리띠를 고쳐 맸다. '내일 보자.' 사내는 마치 씹고 있던 검을 뱉듯이 간단한 한마디를 희야에게 남기곤 성큼성큼 사라졌다. 희야는 한동안 죽은 듯이 휘영청 밝은 달만 바라보고 있었다. 육체가 없는 영혼이 하늘을 맴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허리가 긴 족제비 한 마리가 희야의 머리맡으로 다가왔을 때야 비로소 소스라치듯 놀라며 일어날 수 있었다. 잠시 악몽을 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희야는 사내가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내의 말대로 토벌대들이 저항군과의 내통을 들먹이며 자신을 취조하며, 고문을 가해 왔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 찰 뿐이었다. 어쨌든 성수가 오늘도 무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물로 뛰어들었다. 돌이건 모래이건 잡히는대로 집어 몸을 씻었다. 다행히 자루에 있던 보리쌀은 그대로 있었다. 희야는 그날 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수에게 보리쌀을 전해주었다. 성수의 동굴은 계곡 사이에 있었다. 주변의 수목이 빼곡하게 차 있었기 때문에 완벽하리만큼 위장이 잘된 곳이었다. 광대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야윈 성수의 품에 안긴 희야는 그의 심장소리가 너무 따스하게 들려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사내는 노골적으로 청혼의 의사를 밝혀왔다. 언제나 험악한 표정을 짓던 사내의 얼굴은 온화한 표정이 덧씌워져 있었다. 하지만, 희야에게는 오로지 동굴에 갇혀 있는 성수생각 뿐이었다. 사내는 가끔 구하기 힘든 크림화장품과 쌀을 보내오는 선심작전도 폈다. 희야는 사내의 끊임없는 청혼을 피해하기 위해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살아주지 않으면 모두 다 죽여버리겠어.' 털보사내는 협박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다. 희야는 성수가 지내는 동굴로 도망가기로 작정하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성수와 함께 죽겠다는 결심이었다. 조용한 밤을 택해 하나뿐인 어멍에게도 아무런 말없이 집을 떠났다. 그러나 동굴에 도착하여 성수를 만난 지 몇분이나 흘렀을까. 토벌대의 함성과 함께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털보사내가 토벌대를 이끌고 희야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무차별 총격에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다행히도 희야와 성수는 굴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빗발치는 총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성이 끝난 후, 성수를 포함한 살아있는 사람들은 포박을 받고, 개처럼 끌려 마을로 연행되었다. 털보사내는 희야를 붙잡힌 무리들로부터 격리시켰다. 이미 희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기때문에 초연하게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사내의 눈빛은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넌 이미 내 사람이야.' 사내는 묵직한 한마디를 던지며 희야를 집으로 돌려 보내주었다. 이튿날이었다. 터진목 백사장에서 집단사형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어젯밤에 연행되었던 사람들 전원의 시체들이 백사장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얀 백사장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하얗기만 하던 바다의 포말들이 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주검들의 몸에는 숱한 죽창의 흔적이 뚜렷하였다. 성수의 가슴에는 죽창이 그대로 꼽혀 있었다. 희야가 물질을 하던 곳, 성수가 그림을 그리던 곳, 희야와 성수가 하얀 백사장 위를 나뒹굴며 사랑을 나누던 곳은 붉은 광장으로 변해 있었다. 성수의 시체가 수습된 그날 밤, 마을은 온통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비극의 도가니 한편에서는 토벌대들의 왁자지껄한 유흥이 이어지고 있었다. 밤은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연출해 내고 있었다. 약자의 슬픔과 강자의 환희가 극과 극을 달리는 밤이었다. 희야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죽창을 깃삼아 바다 위를 떠도는 성수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야의 손에는 날이 날카롭게 선 생선칼이 들려 있었다. 혀를 꼬옥 깨물며 칼을 가슴에 품었다. 혀끝에서 비릿한 피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마을은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희야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털보사내가 기거하는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내의 방문을 열었을 때, 술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사내는 대자로 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희야의 손에서 칼이 휘날렸다. 다음날, 사내의 죽음을 두고 마을 일대가 술렁거렸다.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아서는 범인이 남자일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 있었다. 범인을 잡는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이 연행되고 있었다. 희야는 자신의 살인행위는 성수의 목숨을 보상받는 정당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성수를 잃은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뒤집어지든 망하든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5대 독자를 잃은 성수 부모는 희야에게 모든 것을 남긴 뒤, 대들보에 목을 맸다. 희야도 성수의 뒤를 따라 가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좌절되었다. 이듬해, 희야는 아들을 낳았다. 희야는 성수네 호적에 혼인신고를 끝낸 후, 아들을 김씨 가문의 대열에 올렸다. 그녀는 결혼식도 못 올린 청상과부의 삶을 택하였던 것이다. 고씨할망은 벌떡 일어나 염주를 집어들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고,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았던 그 날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오르자 참을 수 없는 번뇌가 이글거리기 시작하였다. 염주를 집어든 손이 떨렸다. 염주를 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염주와 피 범벅이 된 칼이 교차되어 시야를 덮어왔다. 숨이 넘어가던 털보사내의 커다란 눈빛이 할망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그 털보사내의 얼굴이 아들의 얼굴과 겹쳐져 떠올랐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아들을 키워오면서 아들의 모습 속에서 성수의 모습을 되새길 때마다 얼마나 행복해 하였던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어미만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들이 성수 쪽을 더 닮았다고 주장하며 자꾸 아들의 얼굴에 성수의 얼굴을 덧씌우면서 살아왔던 나날들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할망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아범아! 아범아!' 잠시후, 아들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할망은 아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젠 제법 머리에 흰머리가 앉은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숨비소리와 같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멍,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수꽈? 무사 한숨만 박박 햄수꽈...' '나가 너한티 바라는 것이 이신디...' '말해봅서. 어멍이 고른 것 나가 거절헌 것 있수꽈?' '......' '말해 봅서게. 돈이 필요허꽈?' '저기 말이다. 오늘 제사상에 매 한 그릇 더 올렸으면 헌디... 실은... 니 아방랑 절친했던 사람이 이서나신디... 그 사람은 피붙이도 없고, 외로운 사람이었쩌. 니 아방과 함께 죽어신디, 그 사람이 자꾸 마음에 걸렴쩌게. 경하난 그 사람 몫으로 매를 지어 니 아방과 함께 제사를 초려주젠 햄쩌...' '경 친했수꽈?' 아들의 물음에 할망은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할망은 성수의 사진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경했지... 피를 나눈 형제처럼 친했쩌...' '어멍의 뜻이 정 경허민 앞으로랑 그 사람 것까지 함께 차리게 마씨. 참, 가주(假主)를 쓰려면 그 사람의 함자도 고라줍서.' '에그... 모르키여. 나가 늙어부난 기억력도... 지금에 왕 생각해 보난, 니처럼 털이 많이 난 사람이었쩌게...' 고씨 할망은 금방 터져 나올 것 같은 한숨 한 덩이를 꾹꾹 참고 있었다. 참다 참다 참지 못하면, 결국에는 숨비소리가 될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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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삶이란 살아남은 자에게 가해지는 질곡같은 고통일까요. 아니면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번뇌일까요 (ㅠ.ㅠ)...
한 편의 소설은 우리들 삶의 궤적이 아닐까요? 주인공을 통해 허구로 포장된 현실을 볼 수 있는 것. ^^ '털'이 내포 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신선한 충격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