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강문수, 예명인 남인수는 1936년 말 오케레코드에 입사하여 강사랑(작사,작곡가)의 권유로 사용하기 시작 하였음. 본적; 경남 진주시 하촌동(드무실) 194번지 생몰연도; 출생-1918,10,18.-1962,6,26.타계(45세) 학력; 제2공립심상소학교(현재의 봉래초등학교)졸업 외에 정확한 기록이 없음. 다만, 일본에서 야간학교에 다녔다는 말도 있음. 데뷔곡; 1936년‘눈물의해협’(씨에론레코드사)으로 데뷔하였으나 큰 반응이 없자 1938년에‘애수의소야곡’으로 개사하여 발표. 이 노래는 크게 히트하여 대형가수로 자리매김 하였음. 1) 그 후 해방전까지‘꼬집힌풋사랑’'항구마다괄세드라'‘감격시대’ ‘항구의청춘시’ ‘울며헤진부산항’‘눈오는네온가’청춘항구‘’낙화 유수‘’청년고향‘’남아일생‘’서귀포 칠십리‘ 등, 수 많은 히트곡과 중국,일본으로의 해외공연도 많이 다니면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위문공연를 많이 하였음. 특히 일본에서의 인기는 대단 했다고 전해지고 있음. 2) 해방 후‘가거라삼팔선’‘달도하나해도하나’‘ 전쟁 후’향수‘’청춘무성‘’이별의부산 정거장‘’추억의소야곡‘’청춘고백‘’고향의그림자‘’고향은내사랑‘’기다리겠어요‘’산 유화‘’무정열차‘ 50년대 말에’무너진사랑탑‘’울리는경부선‘’한많은내청춘‘ 60년대 이후 건강이 많이 나빠졌으나 ’불효자는떠납니다‘’사월의깃발‘ 병상에서 취입했다 는’눈감아드리오리‘ 등, 약 1,000여곡을 불렀다고 하나 현재 음원이 전해지는 곡 은 300곡이 채 안된다 함. 20여년간을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하였기에 가요황제 라 는 존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타고난 목소리(신이내린)로 타의 추종을 불허 하였음. 3) 일본의 침략말기인 1943년 전후, 기예증 발급과 징용을 미끼로 군국가요을 강요 하였는데, 그때 반야월,박시춘을 비롯한 대중가요 종사자들이 수난을 당하고 가요 황제께서도 징용을 피하는 기예증 발급이라는, 생존을 담보로한 협박과 강압에 못이겨 군국가요 두세곡을 부르게 되고 이것이 친일인명사전에 불명예스러운 이름 을 올리게 함으로써 민족가수로서의 업적은 사라지고 분별 없는 집단의 일방적 고함소리에 고향에서조차 비난을 받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음. 그때 집중적으로 강압을 받던 사람은 남인수,백년설,장세정,이난영 등, 그 당시를 대표 하던 연예인이라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임.
o.짧은 생애와 추모 열기; 최고 인기가수의 갑작스런 죽음은 큰 충격이었으며 조계사에서 행해진 영결식은 모여든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함. 연예협회장으로 장레를 치루고 고향인 강씨문중 선산(진주 새미골)에 묻혔음. 그후 2004년에 팬클럽회원들 이 묘소 단장도 하고 묘비석도 세웠음. 추모열기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가수 신해성을 주축으로 1980년에 ‘예도 매미회’ 가 결성되었고 더욱 발전하여 ‘가요황 제 남인수 기념사업회’로 정착하여 가요제 개최, 동상 건립(2001년도) 등, 지금도 매월 모임을 갖고 가요황제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음. 또 하나의 조직인 팬클럽 (전승보전회)은 남인영 회장을 중심으로 출발은 다소 늦었으나(2000 년도) 매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매년 4월달에 묘소 참배를 위해 전국에서 진주를 찾고 있음. 회원도 많고 조직도 전국적이고, 놀랄만큼 애정이 깊은 사람들의 모임임. 향후 우리 추모사업회도 위의 두 단체와 우호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어야 할 것임.
o.기타 참고사항; 무분별한 모창가수들 때문에 가요황제의 명예가 매우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어 앞으로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임.(방송국, 음악싸이트에 문서로 강력통보 등. ) 가족은 미국에 사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 (부인 김은하여사와 2남2녀를 두었음) 지금도 노래방반주기에는(금영,태진) 25곡 이상의 노래반주가 실려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