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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송 천태 요원장로(贈送天台了圓長老)-안진(安震)
시냇가에 자리잡은 낡은 집 / 老屋開溪上
장마 뒤 모래 위에 길이 났네 / 經霖路出沙
선사의 지팡이를 영접하니 / 相邀禪者杖
귀인의 수레를 만난 듯 / 似遇貴人車
탑을 내려 이야기가 깊어지자 / 下榻談初穩
산으로 돌아갈 먼 생각이로세 / 還山意已賖
일후에 용상이 되어 / 他年作龍象
법우로 농삿집에 있는 나를 축축히 적셔 주소 / 法雨潤農家
天台了圓長老[주C-001]원 천태(圓天台) :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고승(高僧)이었던 천태 도대 선사(天台都大禪師) 요원(了圓)을 가리킨다.
[주D-001]탑(榻)을 내려 : 한(漢)나라 진번(陳蕃)이 예장태수(豫章太守)로 있을 때에, 서치(徐穉)가 오면 탑(榻)을 내려서 앉게 하고, 그가 가고 나면 다시 그 탑을 달아두며 서치가 또 오기를 기다렸다.
고전번역서 >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9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동문선 제9권-오언율시(五言律詩)
贈送天台了圓長老[安震]
老屋開溪上。經霖路出沙。相邀禪者杖。似遇貴人車。下榻談初穩。還山意已賖。他年作龍象。法雨潤農家。
국학원전 > 동문선(東文選) > 東文選卷之九 > 五言律詩 >
次安謹齋題竹院(차안근재제죽원)-安震(안진)
안근재의 제죽원을 차운하다-安震(안진)
西堂多後學(서당다후학) : 서당에 후학들이 많고
風味亦依前(풍미역의전) : 풍기는 멋, 다정함이 옛날 같구나
挽袖爭添酒(만수쟁첨주) : 소매를 당기며 서로 술을 권하지만
何輸昔少年(하수석소년) : 어떻게 어릴 적 기분을 내어볼꺼나
安謹齋(안근재) -[주C-001]안근재(安謹齋) : 근재(謹齋)는 안축(安軸 : 1287〜1348)의 호(號)이다.
안근재의 죽원에 제한 시에 차운하여[次安謹齋題竹院]-안진(安震)
서당에 후학이 많아 / 西堂多後學
풍미 또한 예전과 같다 / 風味亦依前
소매를 이끌어 술 권하기를 다투니 / 挽袖爭添酒
어찌 옛 소년에게 질소냐 / 何輸昔少年
고전번역서 > 동문선 > 동문선 제19권 > 오언절구(五言絶句) > 국학원전 > 동문선 > 東文選卷之十九 > 五言絶句 >
동문선(東文選) 안진(安震)
푸른 시냇가에 성대하게 차려 놓은 송별 자리 / 祖席高張碧澗濱
서쪽 교외에 날 저물며 황사 먼지 자욱해라 / 西郊日薄藹黃塵
올해는 눈이 한식까지 계속해서 내리는데 / 今年雨雪連寒食
곳곳마다 불을 피워 명절 맛이 나지 않네 / 觸處煙火阻令辰
방초도 떠나는 말을 머무르게 할 수 없는데 / 芳草未堪留去馬
푸른 버들이 어떻게 가는 사람을 매어 두랴 / 綠楊豈解繫行人
남아는 사방을 경영할 뜻을 가져야 하는 법 / 男兒自有四方志
갈림길에서 그토록 상심할 것이 뭐 있으랴 / 安用臨岐苦愴神
창정(昌定) 안진(安震) 지음
송봉사 이중부환조서(送奉使李中父還朝序)-최해(崔瀣)/이곡(李穀) 가정잡록(稼亭雜錄)/이곡(李穀)-동문선 제84권
送詩[安震]
祖席高張碧澗濱。西郊日薄藹黃塵。今年雨雪連寒食。觸處烟火阻令辰。芳草未堪留去馬。綠楊豈解繫行人。男兒自有四方志。安用臨歧苦愴神。
昌定安震
안진(安震){1}에 대하여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상헌(常軒). 1313년(충숙왕 즉위년)급제하여 1317년에 예문검열(藝文檢閱), 1318년에는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고려로 돌아와 예문응교에 임명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밀직부사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안산군(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1346년에는 이제현(李齊賢) 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원나라에서 왕을 잘 보좌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된 조일신(趙日新)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의 일파가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동(銅)을 바치게 하였다. 뒤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李貞信〉 [고려문과] 충선왕(忠宣王) 5년 (1313) 계축(癸丑) 충선왕 5년 계축방(忠宣王 五年 癸丑榜) 관직-정당문학(政堂文學) 《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乙酉忠穆王元年[주:至正五年] [주:乙酉]忠穆王元年[주:至正五年]正月地震二日○罷王煦 職[주:煦寵政房復科田故爲貪姦所惡而罷時人觖望] 丙戌二年[주:至正六年] [주:丙戌]二年[주:至正六年]祔大行王于太廟○命修國史[주:忠宣王命閔漬修編年綱目尙多闕漏乃命府院君李齊賢賛成事安頔韓山君李穀安山君安震提學李仁復撰進]○元命前政丞王煦入朝 기사메타 府院君安山君安頔安震王煦李穀李仁復李齊賢政丞提學忠宣王韓山君賛成事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관직전고(官職典故)-과거 Ⅰ 중국의 과거에 응시한 일. 자제의 중국 유학을 중국에서 허락하지 않은 일 당 나라 장경(長慶) 초년에 김운경(金雲卿)이란 자가 처음으로 신라의 빈공(賓貢)으로서 두사례(杜師禮)의 방(榜)에 이름이 올랐으며, 당 나라 말기까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자는 58명이었고 오대(五代) 시대에 후량(後梁)ㆍ후당(後唐)에 가서 또 31명이 급제하였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역시 송 나라에 빈공을 보내었는데, 김행성(金行成)ㆍ왕림(王琳)ㆍ최한(崔罕)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김단(金端)ㆍ조석(趙奭)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라는 것은 매양 따로 시험을 보여 그 이름을 방(榜) 끝에 붙였는데, 원(元) 나라 이후에는 중국인과 함께 시험을 보아 금방(金榜)에 이름을 같이 썼다고 한다. 최해(崔瀣)의 기록 ○ 신라 때에 당 나라에 가서 급제한 사람으로 성명을 알 수 있는 자는, 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박인범(朴仁範)ㆍ김악(金渥)뿐이다. 최해(崔瀣)의 기록 ○ 고려 시대에 원(元) 나라 과거에 급제한 자는 안진(安震)ㆍ최해(崔瀣)ㆍ안축(安軸)ㆍ이곡(李穀)ㆍ이인복(李仁復)ㆍ안보(安輔)ㆍ윤안지(尹安之)ㆍ이색(李穡)이었다. 《문헌비고》 [주D-001]빈공(賓貢) : 외국에서 선비를 중국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자에는 안진(安震) 연우 5년(1318)에 제과(制科)의 제 삼갑(三甲) 15등에 합격하였다. 勅授將仕郞匡靖大夫檢校都僉議參理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安山君安震撰 公諱佐字子華姓朴氏咸陽郡人也曾王父諱臣蕤大府卿致仕王父諱之彬衛(1313)第爲賀□□□官朝京師 안진(安震)은 안산인(安山人)으로 1313년 근재(謹齋)안축(安軸)선생과 동년(同年)이었다. 안진(安震)의 함벽루기(涵碧樓記) 1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수친하고 조정으로 돌아가는 어사 최백연을 보내며[崔御史伯淵壽親還朝] 안진(安震) 1968년
목은시고 제25권 시(詩) - 《목은집(牧隱集)》 목은(牧隱)이색(李穡, 1328~1396) 역대 과거(科擧)의 장원(壯元)이 연회(讌會)를 베푸는 것을 용두회(龍頭會)라 하는데, 모든 영접하고 전별하고 경하하고 위문하는 일에 있어 예(禮)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요행히도 상헌(常軒) 선생이 수년 동안 무양(無恙)하셨으나 일찍이 한번도 연회를 마련한 적이 없었는데, 염동정(廉東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연석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동정이 과시(科試)를 주관한 뒤에 그의 좌주(座主)인 송 선생 밀직(宋先生密直)의 부름을 받고 가서 동정이 수상(壽觴)을 올리고 이것을 용두회라 이름했으니, 실상은 영친(榮親)의 관례인 것이다. 지금 순중(純仲)은 회장(會長)인 동정의 전(前) 문생(門生)인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나와 동정 및 정 판서(鄭判書), 윤 부령(尹副令), 정 정언(鄭正言)이 각각 주과(酒果)를 가지고 모여서 그를 전별하였는바, 회장은 바로 가장 높은 이라서 각기 한 잔씩을 올리고 파하였으니, 그 한아(閑雅)한 풍류는 또한 한 시대의 성사(盛事)라 하겠다. 나는 병든 지 오랜 몸으로 이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집에 돌아와서는 그대로 자고 명일에 한 수를 읊어 이루어서 회장 좌하(座下)에 기록하여 바치는 바이다. 우문의 한 소리 천둥에 고기들 뛰어라 / 禹門魚躍一聲雷 [주C-001]상헌(常軒) : 안진(安震)의 호이다. 그는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원(元)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안산군(安山君)에 봉해지고, 공민왕 때에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고전번역서 > 목은집 > 목은시고 제25권 > 시(詩) >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0-21-0000 九月戊子朔賜安震等及第.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4-28-1317 戊戌遣藝 檢閱安震應擧于元. #高麗史34卷-世家34-忠肅王1-05-28-1318 丁巳以尹莘傑知密直司事宋英同知密直司事. 以藝文檢閱安震中制科擢爲藝文應敎摠 部直郞
#高麗史37卷-世家37-忠穆王-02-24-1346
동사강목 제14상 경진 고려 충혜왕 후 원년부터 계묘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24년간 병술년 충목왕 2년(원 순제 지정 6, 1346) 동10월 이제현(李齊賢) 등에게 국사(國史)를 중수(重修)하도록 명하였다. 왕이 민지(閔漬)가 찬(撰)한 《편년강목(編年綱目)》에 빠뜨린 것이 많다 하여 이제현ㆍ안축(安軸)ㆍ이곡ㆍ안진(安震)ㆍ이인복(李仁復) 등에게 명해서 다시 찬하여 들이게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忠穆王) 병술 2년, 원 지정 6년 ○ 겨울 10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태조(太祖)께서 개국한 지 4백 29년인데, 그 사이의 법전과 문화와 좋은 말씀과 훌륭한 행실을 숨기고 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후세에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충선왕(忠宣王)께서 민지(閔漬)에게 명하여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수찬하게 하였으나 아직도 빠진 것이 많으니, 마땅히 내용을 보태어 찬술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라." 하고, 곧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찬성사 안축(安軸), 한산군(韓山君) 이곡(李穀),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 제학(提學)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편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안진(安震) 김광철(金光轍)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男 : 女 : 1 總 :
김광철(金光轍)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김광철 ◆ 배우자 : ◆ 자 녀 : 김(金)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男 : 1 女 : 1 總 :
김(金)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김 ◆ 배우자 : ◆ 자 녀 : 안목(安牧)의 인적관계 상세정보
男 : 1 女 : 1 總 :
안목(安牧)의 8고조도 1대 2대 3대 4대 안목 ◆ 배우자 : ◆ 자 녀 : 史書에 나타난 유명 인사인 데도 족보에 누락되는 경우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재상이었던 安震(안진)이라는 인물이 있다. 본관이「순흥」인 그는 진주 촉석루를 재건한 인물이었다. 安山君(안산군)이라는 封號(봉호)를 받을 정도로 당대에는 유명한 인사였다. 그는 鄭仲夫의 경우처럼 逆臣(역신)도 아니었는 데도, 그의 이름은 웬일인지 순흥 안씨 족보에서 보이지 않는다.
2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증송 천태 요원장로(贈送天台了圓長老) 안진(安震) 1968년
3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당(堂)자 운으로 원나라로 조회가는 신예 원외를 보내며[得堂字送辛裔員外朝元] 안진(安震) 1968년
4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근친하고 학당으로 돌아가는 생원 민중옥을 보내며[送閔生員仲玉璿覲親還學] 안진(安震) 1968년
5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상국(上國)에 가는 이가정(李稼亭)을 보내며[送李稼亭之上國] 안진(安震) 1968년
6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하 부학사 안판서축[賀副學士安判書軸] 안진(安震) 1968년
7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계림군공 왕정승 만사(鷄林君公王政丞 挽詞) 안진(安震) 1968년
8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안근재의 죽원에 제한 시에 차운하여[次安謹齋題竹院] 안진(安震) 1968년
9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임궁(琳宮) 안진(安震) 1968년
10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김집의 성용 서당(金執義成用書堂) 안진(安震) 1968년
11 고전번역서 동문선(東文選) 함벽루 기(涵碧樓記) 안진(安震) 1968년
높이 올라서 뭇 용으로 변화하여 왔네 / 矯矯羣龍變化來
높낮이 가지고 두미만 정했을 뿐이지 / 只把高低比頭尾
영이함 논하자면 근본을 같이했고말고 / 若論靈異共胚胎
밭에 있으니 문명한 운을 만나려니와 / 在田政値文明運
만물에 은택 입힘은 음양 섭리 같으리 / 澤物還同燮理才
가장 기쁜 건 병든 몸이 이 모임 참여해 / 最喜病餘參此會
예전의 풍류를 눈으로 다시 보게 됨일세 / 風流往事眼中回
[주C-002]순중(純仲) : 김자수(金子粹)의 자이다. 그는 공민왕 23년 갑인년(1374)에, 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이 주관한 문과에 장원하였고,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주D-001]우문(禹門)의 …… 왔네 : 우문은 황하(黃河)의 상류에 위치한 용문(龍門)의 폭포(瀑布)를 가리키는데, 하우씨(夏禹氏)가 개착(開鑿)한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다. 이곳의 폭포는 세 단계로 이루어져서 매우 급하게 쏟아져 내리기 때문에, 강해(江海)의 대어(大魚) 수천 마리가 그 밑에 모여서 그 위로 뛰어올라간 놈은 용(龍)이 된다고 하므로, 과거(科擧)의 급제자를 여기에 비유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밭에 …… 만나려니와 :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음이니, 대인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 하였는데, 그 문언전(文言傳)에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는 것은 천하가 문명하다는 것이다.[見龍在田 天下文明]”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비록 야(野)에 있지만 이미 대인(大人)의 덕(德)을 갖춘 인재를 비유한 것이다.
안자유(安子由)
안산(安山)
안산(安山)
1342년 전 군부판서 안자유(安子由) [《고려사》 제36권 - 충혜왕 임오 후 3년(1342)]/ 1347년 6월 갑술일에 참리(叅理) 안자유(安子由)를 원나라에 보내 모시베를 바치게 하였다. [고려사 충목왕 정해 3년(1347)]
증보문헌비고: 안산 안씨(安山安氏) 시조(始祖) 안자유(安子由)〔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안산(安山)
1314년 "9월 초하루 무자일에 안진(安震, ?-1360) 등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九月 戊子 朔賜安震等及第/《고려사》 제34권 - 세가 제34 충숙왕 1] 한중연 인명사전에는 순흥안씨로 나오나, 순흥보에는 없고, 안산군(安山君)에 봉해졌으므로 안산(安山) 안씨로 추정됨.
姓 名
김광철(金光轍)
性 別
남 (男)
本 貫
광주 (光州)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高麗 忠定王 1年 6月
最終官職
화평군 (化平君)
出仕方法
文科
出 仕 日
高麗 忠烈王 31年
子 女
異 名
號
둔헌 (鈍軒)
字
諡 號
문민 (文敏)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인적관계
氏族源流
197
호
氏族源流
197
시호
金台鉉 妻 王氏墓誌銘
기본
金光載墓誌銘
기본
金台鉉墓誌銘
기본
高麗史節要
기본
高麗史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자녀
씨족원류 : 2남4녀
金光轍
姓 名
김 (金)
性 別
여 (女)
本 貫
광주 (光州)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最終官職
出仕方法
無出仕
出 仕 日
子 女
異 名
號
字
諡 號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金台鉉妻金氏墓誌銘
기본
金台鉉墓誌銘
기본
高麗史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金
안목(安牧)
姓 名
안목(安牧)
性 別
남 (男)
本 貫
순흥 (順興)
職 役
관직자
出 生 日
死 亡 日
高麗 恭愍王 9年
最終官職
정당문학 (政堂文學)
出仕方法
文科
出 仕 日
子 女
異 名
號
겸재 (謙齋)
字
익지 (益之)
諡 號
문숙공 (文淑公)
典 據
典據對象
典 據
페이지
기본
金台鉉妻王氏墓誌銘
기본
金台鉉墓誌銘
기본
高麗史
기본
安于器墓誌銘
기본
氏族源流
379
기본
文化柳氏嘉靖譜
7
備 考
參考對象
參考內容
安牧
김(金)
안(安)
안원숭(安元崇)
常軒 安震
□□□相 광주光州 김공金公 태현台鉉은 일찍이 문장과 학문으로 … 전례典禮 … 죽은 뒤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으셨다. 이 분이 아드님 네 분을 두었으니 공의 행장에 ‘나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정공을 따라 천수성절天壽聖節(成宗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원元으로 들어갔다. 근로하기 사천리에 힘들고 험한 경험을 하고’ 하였다.
처음에 도□□□판관都□□□判官이 되었다. □□□□?검교전객승檢校典客丞?□정언正言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헌납獻納에 제배되었다가, 나가서 양광도楊廣道를 안무하게 하니 지방 관리는 두려워하되 백성은 편안하게 되었다. 처음에 □정□正이 … 이 도道 삼십관풍三十觀風이 … 집정執政 … 나아가 선주善州를 지키다가 복주판관福州判官으로 옮겼다. 세 번 전직하여 개성소윤開城少尹이 되었다. □□전리이총랑□□典理二摠郞을 거쳐 성균관좨주成均祭酒에 제배되었다. 전법사典法司지신사知申事와 □전의판도판서判典儀版圖判書를 거쳐 랑성郞城 … 상호군上護君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다시 밀직사密直使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이 되었을 때 어떤 일에 연좌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품계品階는 통사랑通仕郞으로부터 시작하여 아홉 번을 … 중대광重大匡에 올랐다. 지정至正무자戊子에 명릉明陵 … 나라 사람들이 … 말하기를 공이 근면한 선비로 … 추대되자 … 왕조王朝가 …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생년生年이 □□세였다.
그달 갑□일甲□日에 덕수현德水縣 동쪽 언덕에 장사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공의 휘諱는 광철光轍, 자는 중신仲申이다. 증조부의 휘諱는 경량鏡亮으로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수須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고 여러 차례 증직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왕王씨로 신호위랑장神護衛郞將을 지낸 정단丁旦의 따님인데,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에 봉해졌고, 왕족王族이 되신다. 공 이하 세 아들이 왕씨 소생으로 모두가 과거에 급제한 까닭으로 나라에서 해마다 곡식 20곡二十斛이 지급되었다.
공의 부인은 □씨로 찬성사贊成事 관灌의 따님인데, 평원군부인平原郡夫人에 봉해졌으며,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승조承祖로 천우위별장天牛衛別將으로 있고, 차남은 회조懷祖로 감문위록사참군監門衛錄事參軍이 되었다.
장녀는 자섬부사資贍副使 최충손崔沖孫에게 시집을 갔다. 차녀는 합포만호合浦萬戶로 현성군玄城君에 봉해진 권용權鏞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는 유혜손柳惠孫에게 시집갔다. 사녀는 중랑장中郞將 홍인호洪仁浩에게 시집갔다.
공이 운명을 하며 둘째 사위에게 부탁하기를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이 반드시 왕위에 오를 것이니 너희들은 이심二心을 품지 말라! 나는 … 하여 섬기지를 못하노라.”고 하였다.
(후략)
지정至正 11년(1351년) 신묘辛卯 □월 길일吉日
<번역 최규성(상명대학교 명예교수, 역사문화기록연구소 소장)>
원부(元傅)
(1220-1287)
- 원관(元瓘)
(1247~1316)
- 원충(元忠)
(1290-1337)
- 원호(元顥)
( ?-1356)
- 원선(元宣)
(배 안복종 녀)
- 녀: 기유걸
- 녀: 김승용(金承用)
- 녀: 박거실(朴居實)
- 녀: 이제현
- 녀: 민적(閔頔)
- 민사평(閔思平)
- 민유(閔愉)
: 안목(安牧)사위
- 민변(閔抃)
- 민제(閔霽)
- 원경왕후
- 녀: 김광철(金光轍)
- 김회조
- 원경(元卿)
(?∼1302)
- 원선지(元善之)
(1281~1330)
- 녀: 유보발
(1304-1340)
- 녀 : 안원숭(安元崇)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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