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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14리 ❏문화재지정: 강원도유형문화재 제27호(1971.12.16지정) ❏배향인물: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 개(李 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박심문(朴審問) 엄흥도(嚴興道) 10분 배향 ❏창건연도: 1685년(숙종 11) ❏사액연도: 1699년(숙종 25) ❏향 사 일: 음력 2월 8월 중정일(中丁日) |
창절서원은 1685년(숙종 11)에 창건되었으며,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 25)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던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서원의 명칭인 창절(彰節)은 불의에 항거하고 대의에 따라 비장하게 최후를 마친 충신의 절개를 길이 표창한다는 의미이다.
1685년(숙종 11) 창건 당시에는 강원감사 홍만종(洪萬鍾)과 군수 조이한(趙爾翰)에 의해 육신사(六臣祠)로 시작되었는데, 1705년(숙종31) 육신사를 밖으로 이건하면서 창절사(彰節祠)로 개칭하였으며, 1788년(영조 12)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791년(정조 15)에는 김시습(金時習)과 남효온(南孝溫)을, 1828년(순조 28)에 박심문(朴審問)을, 1833년(순조 33)에 엄흥도(嚴興道)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서재는 한말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육신사는 강학 공간인 강당을 지나 사우인 창절사로 들어가는 문이며, 창절사는 정면 5칸·측면 2칸의 부연이 있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절사의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있다. 지금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박팽년(朴彭年, 1417~1456)
박팽년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며, 본관은 순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1434년(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뒤 그를 형조 참판으로 임명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김질의 변절로 탄로나 처형되었다.
숙종 때 누명을 벗고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2)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박팽년·최항·이개·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 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삼고·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성삼문이 죽음을 당한 후 집을 몰수하여 뒤졌을 때 1455년 이후 나라에서 준 쌀은 하나도 먹지 않고 녹(祿)이라고 써서 붙인 채 창고에 쌓아 놓기만 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논산 지방에는 본 서원 외에 금곡서원에 제향처가 있고 가야곡면에 성삼문 사당이 따로 세워졌으며 또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는 성삼문의 일지체(一肢體)가 묻혀있는 묘소가 있다.
3)이개(李塏, 1417~1456)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1436년(세종 18)에 등재, 1447년(세종29)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들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피살되었다. 당시 이개가 읊은 시는 충절을 잘 드러낸 명시로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평소 숙부인 이계전(李季甸)이 세조에게 내왕함을 항상 경계하였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1758년(영조 38)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4)유성원(柳誠源, ?~1456)
유성원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1444년(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에 합격, 집현전에 뽑혀 이름을 떨쳤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교서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고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다고 한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변절로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결했다. 숙종 때 시호를 절의(節義)라 내렸고, 영조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다.
5)하위지(河緯地, 1387~1456)
하위지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라 하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45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經筵)에 왕을 모시며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의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편찬에 착수했는데 당시 수양대군이 이를 총재(總裁)했었다. 이 책이 1453년(단종 1)본에 이르러 간행되니 수양대군이 왕에게 청하여 편찬에 공로가 많은 신하들에게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하위지는 당시 집의(執義)로 중직(重職)에 승진했으나 이를 굳게 사양하며, 임금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위태로운데 왕족(수양대군)이 조신(朝臣)들을 농락하면 안된다고 간하였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 사간(前 司諫)의 자격을 가진 채 선산(善山)에 물러가 있었다. 그 후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5년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하위지를 예조참판으로 누차 부르자 마지못해 취임은 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녹을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 두었다 한다.
1456년에는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탄로나 체포되었다.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세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 은밀하게 그가 모의한 사실만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6)유응부(兪應孚, ?~1456)
자는 신지(信之) 또는 선장(善長)이고, 호는 벽량(碧梁)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체격이 좋아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평안도 절제사를 지냈고, 1455년(세조 1) 동지중추원사로 정 2품에 올랐다.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 장소에서 직접 세조를 살해하는 임무까지 맡았으나 김질의 배신으로 잡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학문에 뛰어나 당시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충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7)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 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 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그의 선대는 원성왕의 아우 김주원(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태현(台鉉)로 전하고 있으나 ≪매월당집≫의 세계도에 의하면 인존(仁存)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정속(正俗)≫, ≪유학자설(幼學字說)≫, ≪소학(小學)≫을 배운 후 5세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 때에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고, 이후 13세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에게서 ≪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尹祥)에게서 ≪주역≫·≪예기≫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김시습은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매월당집≫에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고 적었다.
26세(1460) 때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을 엮었고, 29세(1463)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여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鄭昌孫)이 영의정이고, 김수온(金守溫)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유금오록 遊金鰲錄≫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柳自漢)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양양·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 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 關東日錄≫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屠)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 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숙종 33년(1707)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동 8년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많은 시가 유실되었으나 그의 문집은 중종 때에 정부관료들에 의해서 그의 시가 좋다고 하여 편찬이 논의되었고, 이자(李耔)에 의하여 10여 년 동안 수집하여 겨우 3권으로 모아졌으며, 윤춘년·박상이 문집 자료를 모아 1583년 선조의 명에 의하여 이이가 전을 지어 교서관에서 개주 갑인자로 23권이 간행되었다. 일본 봉좌문고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8)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세조때 김종서, 황보인을 제거한 공로로 정인지 등 29명에게 내린 훈호(勳號))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9)박심문(朴審問, 1408∼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할아버지는 침(甚)이고, 아버지는 강생(剛生)이며, 어머니는 윤승경(尹承慶)의 딸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47년에 평안도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에 도체찰사(道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과 왕래하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0)엄흥도(嚴興道,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지사(志士). 본관은 영월(寧越).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다가 시해되자, 그는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이튿날 옥가(獄街)를 오가며 통곡하고 관을 마련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지냈다.
1585년(선조 18) 종손인 정병(正兵) 엄한례(嚴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노산군의 묘역을 수호(守護)하게 하였고,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주청으로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영조 때 정문(旌門)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서원 중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 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창절사(彰節祠)·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다.
내삼문(內三門)에는 「六臣祠(육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을 통해 사당으로 들어가면 정면 5間, 측면 2間의 맞배지붕의 창절사와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사육신을 비롯하여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가 배향되어 있다. 경내에 있는 문루인 배학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앞면 3칸에 모두 문을 설치하였고, 2층은 누각으로 되어있다. 강원도에 있는 사당이나 서원 중 대문이 문루인 곳은 이곳뿐이다.
창절사는 현재 남아있는 강원도 내의 사당이나 서원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지어졌을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참고-영월군지편찬위원회,≪영월군지≫,1992.
문화재청홈페이지 http://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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