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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동포법을 전면 시행하여야 한다"
ㅡ 이젠 중국동포 모두에게 재외동포(Fㅡ 4)비자를 발급해줄 때이다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위원)
한국생활 10년 기념문집 '거꾸로 흐르는 압록강' 출간(도서출판 동포세계,2015), 1943년생, 길림성 용정시, 1970년 동북림업대학 림업기계과 졸업(할빈), 2003년 길림성 화룡림업국에서 정년 퇴직, 한중도시우호교류협회 고문
일전에 대림동과 가리봉동을 지나면서 길가 전선주에 지저분하게 달려있는 전단지를 살펴보았다. 내용인즉 버섯기능사, 세탁기능사, 관광가이드, 피부미용기능사, 정보처리기능사( 컴퓨터), 한식/중식(조리기능사), 플라스틱 창호기능사 기술학습으로, 책도 보지않고(不用看書), 한국말을 몰라도(不會韓國語) 합격률이 97%이고 버섯학습 비용은 40만인데 Fㅡ4로 변경하여 준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며, 책도 보지 않고도 대한민국 인테리어들도 따기 어려 운 자격증을 중국동포가 돈 40만원만 내면 가져올 수 있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국에 세탁소와 버섯농장이 얼마나 있길래 몇 천명 아니, 몇 만명이 이 업종 기능사자격증을 얻으려 하는지?! 자격증은 있지만 말도 몰라 일을 할 수가 있겠는지?! 또 사장님들이 그들을 채용하기라도 하겠는지?! 현재 3대 자유가 기본상 시행된 이 시점에서 또 조선족이 절반 이상으로 한국에 나와 있는 현실에서, 2004년 2월에 개정된 재외동포법을 전면 시행하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바람이다.
땅이 작고 인구가 적은 한반도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세의 강탈 때문으로 북한, 한국, 중국에 갈라지게 되었다. 동서독일도, 남북 베트남도 모두 통일하였건만 유일하게 한국만은 아니다. 200만 중국동포도 한품에 안지 못하고, 2200만을 통일하겠다고?! 이스라엘, 일본, 독일은 오직 동족이라면 만사불고하고 본 국민으로 받아들였다. 재외동포법 전면 시행을 기대하여 본다.
一: 조선족의 절반 이상이 한국에 왔다.
1992년 한중 수교로부터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서 인파는 밀물처럼 서로 쓸어 들어가고 쓸어 들어오고 있다. 중국에 들어간 “신조선족”(삼성, 현대 등 그릅과 그들의 계렬사 밑 기타 한국의 기업인들)은 100만이라 일각에서는 말하고, 거주하는 동포는 258만5993명(조선족과 한국인 포함)으로 718만 재외동포의 36.0%로 집계되었다.(2014년 말 집계)
지금 재한 중국동포는 80만이라 한다. 그 외에도 영주권 8만, 한국국적 회복동포와 귀화 동포 14만, 모두 102만으로 100만을 초과하였다. 한국계 조선인은 얼마였던가?! 1945년 일제가 투항하기 직전 조선인 수는 216만 5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 한 이후 적지 않은 조선인들은 한국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에 돌아 가다가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어서야 인구유동이 기본상 온정 되었다. 1953년 전국 제일차 인구조사(普査) 때 조선족 인구는 111.1만이고.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조선족 인구는 192만5천명에 달하고 35가구 이상의 조선족 마을도 2천 678개가 존재하였다. 지금 2010년의 집계로 조선족 인구는 160만 1천명. 실제 거주인구는 85만1천명이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되어 주덕해가 제일 주석이 되었고, 조선족이란 민족이 중국에서 탄생하였으며, 1955년 12월에 다시 성급 단위에서 지구급 단위인 자치주로 개칭되었다. 그 때 조선족 인구를 200만으로 집계하였는데 지금까지 관성으로 200만이라 한다. 하여튼 어느 집계를 기준으로 하였든지, 중국동포는 이미 절반 이상이 한국에 나왔다.
二 : 법무부의 노고, 정직한 한국 종교인들의 항쟁, 재한조선족의 눈물로 오늘의 준 3대 자유가 어렵게 이루어졌다.
한국 법무부의 노고로 C3. H2. F4, 전산 추첨 기술 교육생, 특히 2014년 4월부터 시작한 동포방문 비자를 통해 사실상 입국규제는 없어진거나 다름이 없고, 3대 자유도 기본상 실현되었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을 것같다. 80만 동포가 한국에 들어 올수 있게 한 가장 큰 사건은 2007년 중국, 구소련 동포에 대한 방문취업제도 신설을 들수 있다.
지금 재한동포 중 80% 이상이 H2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이슈는 입국을 목적으로 한 기술교육제도이다.
법무부에서는 더 많은 동포를 입국시키기 위하여, 기술교육이라는 명목으로 30대. 40대 청장년들을 기술교육생으로 입국시켰다. 50대도 이 부류에 속하기도 한다. 동포 젊은이들 중 절대 다수는 기술교육생으로 들어왔다. 동포교육지원단이 2010년 7월에 출범한 이래 방문취업희망자를 대상으로 12만 명의 기술교육 수료생을 배출하였고, 사회통합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귀한동포 현지 정착지원 사업도 하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기술교육제도는 시비도 많았다. 그렇지만 600개에 육박한 기술교육기관과 95개 기술종목은 중국동포의 한국 정착에 큰 기여를 한것만은 간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한중수교 23년 만에 동포사회에서 획기적인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자유왕래가 기본상 실현 되었고 3대 자유도 기본상 실현된 것이다. 이 개벽을 누가 만들어 주었을까?! 물론 정부와 법무부의 노고가 처음 순위이지만 민간단체의 노력이 촉매작용을 한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바로 최화제(催化濟)작용이다. 한국의 종교인들ㅡ 김해성 목사, 서경석 목사, 서영희 목사들은 자신들의 몸과 마음. 생명까지도 불사하면서, 중국동포를 위하여 한 생을 이바지하고 있다. 열 차례에 가까운 서경석 목사의 금식과 농성. 불법체류동포를 실은 경찰차 밑으로 뛰어들어간, 온몸이 성한 데 없이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김해성 목사, 2013년 5월 5일부터 5월 26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통합 1만 2000여명이 참가한 “위명 여권 사면” . “3대 자유”. “불법체류자 사면”을 위한 구로동 구로리공원에서 있은 집회농성과 거리행진 앞줄에 선 서영희 목사, 김해성 목사, 서경석 목사. 법무부지정 ㅡ한중사랑지원센터(서영희 대표) 색소폰팀의 “타향의 봄” 선율에 맞추어 ‘봄이 왔다고 제비들은 고향에 갔으련만 고향으로 가고파도 갈 수 없는 이내 사연, 그 누가 알아주랴?! 안타까운 이 내 심정을......’ 부를 때 3000여명의 흐느낌 소리와 울음소리. 목 터지게 <<3대 자유를 시행하라>>를 외치고 있는 고함소리, 동북아신문(이동열 대표), 동포세계신문(김용필 대표) (기타 신문은 참가하지 않았다) 사장과 기자팀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회억하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위명여권과 불법체류로 농성에 동참했던 사람이라면 지금의 “3대 자유”가 어떤 아픔을 딛고 찾아왔는지 실감이 갈 것이다.
三 : 조선족은 한국의 중국진출과 한국경제생활에서 간과할 수 없는 노력을 하였다.
조선족은 누구인가?! 200만 중국동포는 중국에서 항일 전쟁과 해방 전쟁에 참가하여 무수한 피와 생명을 바쳐 정치적 입지가 아주 높다. 56개 민족 중에서 교육제일 문화제일. 체육제일인 군체이다. 떳떳하고 당당하다. 한국에서의 입지는 어떠할까?! 역시 당당하고 떳떳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을 위하여 조선족은 피와 땀, 생명(노동현장에서)까지 불사하였다.
(1) 중일외교관계는 1972년이고 중한외교 관계는 1992년이다. 상해, 북경 천진 등 성시 개발구를 돌아보면 한국보다 20년 먼저 들어온 일본기업은 얼마 보이지 않고 기본상 한국기업이다. 조선족의 참여가 관건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천진의 한국인은 5만 여명이고, 조선족은 3만이다. 한국기업 3000여개 중에서 부장 이상 중견 관리인원 6000 여명이 전부 조선족이고, 기타 기능직원도 대부분 조선족이다. 알다시피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과 기업 진흥에 결정적 역할은 그래도 조선족이라 할 것이다. 80만 중국동포가 한국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존재란 일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2)자가용 구매를 포함한 의식주 구매는 한국 내수 소비시장을 활성화 하였다.
(3)80만 동포의 유입으로 GDP 기본 요소인 부동산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4)한국인들이 꺼리는 3D업체 간병인(한국인을 제외하고 조선족이 유일). 가정부(한국인을 제외하고 조선족이 유일), 건축업, 제조업, 농장, 축산, 식품가공업, 조선족 참여가 없는 한국사회와 경제는 어뗳게 변할까?! 상상하기도 무섭다.
(5)중국의 북경대학, 청화대학 등을 필업한 박사, 교수들이 한중국교건립과 중국문화전파를 위하여 한국 유명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강광문(북경대 졸업, 정치법율과 전문. 석사. 교수, 도교 대학 박사. 서울대 교수), 예동근(부경대 교수. 박사. 부산). 양오진(덕성여대 교수. 서울), 김진무(서울대 교수), 정인갑(북경대학 졸업, 청화대 교수), 장경률(연변일보 편집국장), 이문호(전 요녕성조선족작가협회 주석) 등 중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한국 대학에서 교수직으로 있는 명인들이 부정확한 통계에 의하면 몇십명에 이른다고 한다.
(6) 재한동포문인협회(이동열 회장)의 산하 시인과 작가들은 100여명을 아우른다. 예로 동포문학3호 “뿌리 바다에로 흐르다”에 발표된 시인은 49명이고. 수필, 소설, 역사기행 등 발표한 작가들이 30명이다. 동포문학에 수록되지 않은 문학 애호가는 1000여명을 넘지 않을가 하는 추측이다. 그 외에도 여러 명 작가들이 시집, 칼럼집, 소설집을 냈다.
(7)조선족은 남북한 모두에게 서로 교류할 수 있고, 왕래할 수 있고, 인맥도 통하는 보귀한 존재이다. 남북통일의 교량이다.
(8)1910년 한일합방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섬나라 오랑캐를 몰아내고 빼앗긴 내 나라를 찾으려, 시베리아 북풍이 몰아치는 만주로 떠난 독립군의 후예들이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의 2000여명 대원, 동년 10월에 있은 청산리대첩 3000여명, 상해임시정부 산하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 여러 곳에 성립된 육군사관학교. 중러 국경지 흑하에서 서일 장군이 거느린 자유시 사변에서 살아남은 6000여명 대원들!!! 그들의 후예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조선족이다.
(9)한중도시우호교류협회(김용필 회장)의 주관으로 서울시 시청광장과 안산시에서 진행되는 중한 문예인들의 연출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한중 여러 분야의 회사들이 동참하여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상호경제 계약서도 체결하였다.
중국에서 온 손님들은 세 차례에 걸쳐 110여명이다. 예를 들어 11월 16일부텨 19일까지 진행된 서울전시회 (서울 금천구 현대아울렛 6층 전시회 행사장에서 진행) 기간 17일에는 28명의 통역, 18일에는 20명이 동원 되어 중국측 7개 회사와 한국측 19개 회사의 통역을 보았다. 통합 48명의 통역이고 가이드도 6명이다. 통역과 가이드는 조선족 아무나 다 하는 일이 아니다. 연예인처럼 인물과 체격이 출중하여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각자 중국과 한국에서 대학 졸업증은 필수이고, 유창하게 중국어와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혹자는 영어와 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통역이 있으니 한중우호는 날에 날 마다 더 가깝게 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10)조선족이 사장으로 되어있는 음식점, 마트들이 가리봉동, 대림동 등에 뭇별처럼 가득하다. 우마길조선족상회는 지난 추석날 가리봉 조선족상우회는 첫 노래자랑대회까지 개최하였다. 부동산업계, 유통업계의 조선족 거물들도 한국에 출마하였다.
필자가 이상에서 이야기하려는 주목적은 2014년 4월부터 시작한 동포방문 비자를 통해 사실상 입국 규제는 없어진거나 다름이 없는 지금 이 시각, 재한 중국동포들은 환호하여야 할 것이며, 가슴을 꿋꿋이 쭈욱 펴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四. 중국동포에게 재외동포법을 전면 시행하여야 한다.
재외동포 체류자격(F-4)은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 의해 부여되는 체류자격으로, 재외동포법 제정 취지는 외국으로 이주해 그 나라 국적을 취득한 동포에게 대한민국 국민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재외동포법에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외국으로 이주한 동포로 한정하였기에 그 이전에 중국으로 이주한 중국 조선족과 구소련 고려인은 제외되었다.
이에 한국 체류 중국동포들과 한국의 민간단체, 여러 정직한 김해성, 서경석 등과 같은 교회 목사들의 개정운동으로 2004년 2월 중국동포나 구 소련동포도 포함시키는 재외동포법으로 개정되었다. 하지만 준 3대 자유가 법무부의 노고로 실현된 오늘 지금까지 집행하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한(韓)민족의 렬근성(8000만 모두 포함)에 있다. 한(韓)민족 948차 외세 침략의 뼈아픈 역사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한(恨)이 많은 민족으로 탈락되어, 외래 족속에게 경계심을 누추지 않고 있으며. 배타주의로 이어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된다.
인구 절반이 해외이주민으로 구성된 기시와 멸시가 없는 영국 런던과는 천차만별이라 하겠다. 물론 조선족도 한국의 질서와 법을 지키고, 자신들의 자질도 높여야 하는 것은 불보듯 환한 일이다. 지금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의 감정적, 문화적, 언어역, 생활역에서의 동질성이 날로 커가고 있다. 누가 누군지 분별하기도 쉽지 않다.
五 : 점수지은, 용천상보(點水之恩 涌泉相報)
중국의 속담에 “한 방울의 물 은혜를 받았다면, 솟아오르는 샘물로 보답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재한조선족은 어느 정부에서 법무부 어느 누가 중국동포를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 들을 가슴에 품고 있다. 중국동포들은 지금도 석00, 곽00(Hㅡ2) 등 여러 분들을 기억하고 있다.
2009년 8월~2011년 8월까지 석동현 본부장이 법무부외국인정책본부장으로 재임하다가 2011년 8월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할 때 법무부 강당에서 이직하는 환송회가 있었다. 그 날 강당 밖에는 100여명의 동포들이 모두 꽃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나 석 본부장이 복도에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모든 동포들은 그를 에워싸고 눈물을 흘리면서 준비하였던 꽃을 주는가하면, 또, “중국동포는 본부장님을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써 있는 전단지와 프랜카드를 건네주었다.
@ 2015.11.21 동포세계신문
첫댓글 글 잘 읽엇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당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