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 30분 33간당을 떠나 도쿄국립박물관에 도착했다. 1시 45분에 입장하여 2시 40분에 밖으로 나왔다. 도쿄박물관은 헤이안시대 부터 에도시대까지 만들어진 교토의 문화재를 수집 보관 전시하는 공간이다. 교토박물관은 유럽식 검축물로 루부르의 프랑스 르네상스와 바로크양식을 조합하여 지었으며 루부르의 지붕을 닮은 만사드지붕을 얹었다. 그러나 일본의 전형적인 양식도 조합하여 절충주의 양식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고 한다. 그런데 고풍스러운 교토에서 이 건물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내부는 역시 사진 촬영이 되지않아 전시물들은 눈에 담아 왔다. 2시 40분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미미즈카(귀무덤)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4분 쯤 걸어가니 미미즈카에 도착했다. 미미즈카를 보며 또 한번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을 떠 올려야했다. 이 곳에는 12만 6000명의 조선인이 묻혀있다. 참배를 하면서 그 분들의 명복을 빌어 보았다. 미미즈카로 가는 입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덤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가 있다. 이 곳에 올라가 풍신수길을 보고 싶었지만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어 돌아 나왔다. 우리는 다시 버스로 청수사(기요미즈테라)로 갔다. 올라가는 길은 얕은 경사길 이었으며 길 양편으로 많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가이드가 내려오는 길에 천천히 구경하면서 사진 찍을 시간이 있다고 부지런히 올라 가자고 하였다. 청수사는 경치도 아름답고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하여 이 곳에 오르면 교토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그래서 교토를 찾는 관광객과 일본인들에게 인기 관광지로 손 꼽힌다.
교토 국립박물관(京都国立博物館)은 독립 행정 법인 국립 문화재 기구가 운영하는 박물관
1897년 5월에 개관하였다. 주로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교토의 문화재를
수집, 보관, 전시 하고 있다. 그 밖에 특별전시회가 한 해에 한 두차례씩 열리고 있다.
소장품중에서는 국보 27점, 중요 문화재 181점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 건물 자체도 본관과 정문이 구 제국 교토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1969년에 문화재 지정이 되었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미미즈카(귀무덤)
귀무덤( 耳塚 미미즈카)은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무덤으로,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구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건너편 공원에 방치돼 있다.
일본 사람의 “귀”를 묻은 무덤을 뜻하나,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군과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일본군 장수들은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면 코 영수증을 써주고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냈다.
그런다음 일본 온나라를 자랑스레 순회한 뒤 교토에 묻었는데
지금도 일본 쿄토에 가면 이 때 베어간 코무덤이 있다.
이 코무덤은 '귀무덤'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에도시대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무덤'이라고 하자 하여 지금까지 귀무덤으로 알려졌다.
현재 교토시가 세운 코무덤 설명 팻말에는 '귀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코무덤'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무덤'으로 바꿔 불러 지금까지 귀무덤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코무덤'이다.
이 코무덤에는 조선인 12만 6000명 분의 코가 묻혀 있다.
일부는 사천시로 옮겨갔으나 완전한 이장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도 별도의 관리 예산이 지원되지 않고, 한국에서도 전혀 별도의 예산 지원이 되지 않아서 3대째 이 무덤을 관리하는 개인이 유지하고 있다.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599년 시신을 유언에 따라 호코지(方広寺)에 가까운
아미다 산정에 매장한다. 그 기슭에 도요쿠니 신사를 창건한다.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정1위의 신위와 호코쿠 다이묘진(豊国大明神/풍국대명신)이라는 신호를 받아 신으로 모셔지게 된다.
그러나, 1615년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문되었고,
막부로부터 신호가 폐지되었으며, 신사가 소유한 땅은 몰수 되었다.
이에 신위는 신하요시 신궁으로 은밀히 이전되어 모셔졌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의 오사카 행행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했으면서도 막부를 열지 않은 점을 들어 임금을 받들 줄 아는 공신으로 추켜세워 신사를 재건했다.
1873년 관사로 승격되어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1880년 호코지 대불전터였던 현재의 땅에 신사 건물이 완공되어 신위가 옮겨졌다.
일본 신사에는 에마(えま,絵馬)라고
자신의 소원을 직접 적어서 걸어 놓는답니다.
실제 소원을 빌면서 적을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과 추억을 위해 적기도 한답니다.
청수사(기요미즈테라)
780년에 나라에서 온 승려 엔친이 세운 사찰로 알려져 있다.
기요미즈[淸水]는 '성스러운 물'을 뜻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물을 마시기 위해 찾아온다.
깍아지른 절벽 위로 돌출되어 있는 본당의 툇마루
'기요미즈노부타이[淸水の舞台]'에서는 교토 시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노타키폭포에서는 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데,
왼쪽의 폭포수는 지혜·중간은 사랑·오른쪽은 장수에 좋다고 한다.
밝은 주황 빛깔의 삼증탑이 인상적이다
기요미즈사 오노타키폭포
기요미즈[淸水]는 '성스러운 물'이라는 뜻이다.
오노타키폭포는 기요미즈사에서 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맨 왼쪽의 폭포는 지혜, 중간은 사랑, 오른쪽이 장수에 좋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