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立本?州人,用成其衣?之美也。 3월 정묘삭,계유일,청주절도사 왕건을 소의군 절도사로 삼다. 나아가 한왕에 봉하다.요주 심주로 나누고
2개주를 소의군에 속하게 하다.왕건은 요주사람으로 비단옷을 입은 모습이 아름다왔다.
六月 丙午,高??王王建加?府 ?同三司、?校太?,食邑一万?。 6월병오일 고려국왕 왕건을 개봉부에 가입시키고 동3사로 하여금 검교태사로 삼고 식읍일만호를 주다.
少帝?一 開運2年 (AD 945) 冬十月丁丑,高?遣使?方物。庚辰,以前延州?度使王令???州?度使 겨울10월 정축일 고려가 사신으로 하여금 물건을 보내다.전 연주절도사 왕령온으로 하여금 영주절도사
로 삼다.
十一月戊戌,以?知高??事王武??校太保、使持?、玄?州都督,充大??使,封高??王。
11월 무술일 고려국사왕무를 겸교태보로하고 절도사로하며 현토주도독 충대의군사 고려국왕으로 봉하다.
十二月庚辰,命使?高??王王武。 12월 경진일 고려국왕에 왕무(정종)를 명하다.
3.증거자료 <金史> 기록
금사의 주된 내용을 보면 건국초기 부터 같은 조상이라고 거란족일부와 발해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세를 규합하여 大遼(거란)을 공격합니다.발해를 망가트렸던 요(거란)는 금나라에게 망하게됩니다. 이후에 같은 조상을 가진 고려와는 거의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지 않고 한차례 전투만 합니다. 즉 나중에 이른바 <낙타餓死사건>으로 촉발된 元나라 사신을 죽인 저고여 사건... 고려가 대륙에 있지
않았다면 낙타사건이 발생할 수 없고 元과의 즉각적 전투를 할수 없었을거라는 필자의 견해입니다.
金은 元에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고조선의 일족끼리 물고물리는 동북아 정세 볼만합니다. 아래 元나라 승상 脫脫이 기록한 < 金 史 >의 기록을 봅니다. ( 금사.jpg파일 참조)
金나라는 宋의 싹을 없애기위해 西安을 정벌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그리고 성공햇습니다.1041년 南宋의
흠종과 휘종이 金에 잡혀가 있으매 宋이 金에 복수하기위해 고려에 길을 비켜달라고 하는데 金史에 보면
金의 南쪽 邊境이 淮河(화이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증거자료 <元史> 기록
元史 卷 208 外夷傳 第 95편에 보면 고려에 대한 위치가 나타납니다.그 원문을 보기로 합니다.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토를 받은땅이다.부여와 다른 종족으로 그 땅에 살고 있었다. 동쪽에 신라,남쪽에 백제가 있으며 큰 바다(황하)서북을 건너 遼水에 접한 瀛州에 말갈과 북쪽에 같이 있다.그 나라의 수도는 평양성 즉 漢의 낙랑군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천산)으로 흐르는 물이 있어 압록강이라 하는데...
옛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통일한 후 땅이 넓어졌다. 그나라의 주성은 고씨인데 당나라 건봉 초(AD666) 나라를 세워 같이 손을 맞잡은 이래 자손들은 그 땅에서 다시 봉토를 받은 후 五代時代에 主人으로 일어섰다. 그 나라는 왕건으로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모두 27왕을 세웠으며 사백년이 넘었다.
원사에서 고려의 위치를 표시한 글귀를 보면 ,고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다 했으며 남으로는 백제가 있고 큰바다 (여기서 큰 바다라 함은 황하를 일컫는 것) 서북을 건너 요수에 접한 營州 에 말갈 과 같이 있다 하므로 지금 식민역사서에 기록된 바 라면 경상도와 백제의 윗 부분인 충청,경기 도 부근에 고려가 있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게된다.
즉 신라, 백제는 적어도 말기 고려를 중심으로 할때 하북성 영주를 중심으로 남과 동에 위치한 것이 되는것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북에 위치 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고려는 고려사에 나타나 있는 만리지국이라는 문구가 틀림이 없을것이다.
위의 송나라 추리도를 보면 영주는 바로 황하이북 하북성의 갈석산과 같은 지역위치로서 고려는 한반도 고려가 될수가 없는것 이다. 또한 고려를 오대시대에 흥기하여 주인으로 일어섰다라는 글귀로 보아 대륙의 상당한 지역을 점거하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5.증거자료 <明史>기록
明史 - 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 明玉珍 (홍건적의 난 기록들 )
아래글중 명사원본에 보면 원말 <<<명옥진>>>의 무리가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 지금같은 한반도의 고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內陸 사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그와 그의
아들<명승사>가 배를 타고 반도고려로 간다? 넌센스이지요. 분명히 徒라고 돼있군요.
진우량 [陳友諒, 1316~1363] 후베이성[湖北省]의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현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서수휘(徐壽輝)가 반란을 일으키
자 그 휘하에 들어갔고, 곧 부장(部將) 예문준(倪文俊)의 서기가 되어 점차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길러나
갔다. 1357년 예문준을 죽이고 그 병력을 모은 다음, 이듬해 양쯔강[揚子江]을 따라 내려가 안후이성
[安徽省] 남부에 기반을 굳혔다. 이어 1359년에는 황제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국호를 '대한(大漢)'이라고 하였다. 장저우
[江州:江西省 九江]에 도읍하고 한때 장시[江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를 세력 아래 두고 주원장
(朱元璋: 明의 태조)과 빈번히 싸웠으나, 1363년 포양호[?陽湖]의 결전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장사성 [張士誠, 1321~1367] 본래 태주(泰州:江蘇省 泰縣)의 염전인 백구장(白駒場)에 적을 둔 소금 중개인이었다. 1353년 염장(鹽場)
관리와 염정(鹽丁) 사이의 분쟁이 일어난 것을 틈타 염정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태주와 고우(高郵)를
점령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성왕(誠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정하였다. 한때 원나라 군사에게 패한 적도 있었으나, 1356년 양쯔강[揚子江] 하류 삼각주지대의 중심지인 장쑤성
[江蘇省] 쑤저우[蘇州]를 함락시키고 '오국(吳國)'이라 칭하였다. 한때 세력이 장쑤성에서 저장성
[浙江省] 일대에 미쳤으나, 난징[南京]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주원장(朱元璋)과의 오랜 항쟁 끝에 1367
년 서달(徐達) 등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의 총공격에 대패, 포로가 되자 자살하였다.
방국진 [方國珍, 1319~1374] 황옌[黃巖: 浙江省黃岩縣] 출생. 원래 소금 행상이었으나, 1348년 해적(海賊)의 난(亂)에 편승, 형제와
더불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운조선(運漕船)을 약탈하였다. 어떤 때는 원나라에 반항하고 어떤 때는
귀순(歸順)하는 등 변덕을 부렸으나, 식량의 해상수송에 종사한 일도 있어 원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얻어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뒤 명나라의 태조에게도 반항과 귀순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1367년 명나라 원정군에게 쫓겨 해상으로
피하였으나, 곧 항복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도 벼슬을 얻고, 그의 아들도 벼슬에 올랐다.
명옥진 [明玉珍, 1331~1366] 후베이성 쑤이저우[隨州] 출생. 처음에 서수휘(徐壽輝)의 무장(武將)이 되어 원군(元軍)과 싸웠으며,
충칭[重慶]을 함락시켜 그 곳을 근거로 쓰촨[四川] 지방을 평정하였다. 1360년 서수휘가 부하에게 살해
되자, 1362년에 자립하여 ‘촉왕(蜀王)’이라 칭하고 대하(大夏)를 세웠다. 나라를 8도(道)로 나누고, 주제
(周制)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두었으며, 세금을 경감하고 과거를 시행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애썼으나,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명승(明昇)이 그 뒤를 이었으나, 부장(部將)들 사이에 분쟁
이 그치지 않아 국력이 기울어지다가, 명나라 태조(太祖)가 된 주원장(朱元璋)에게 항복하였다.
서수휘 [徐壽輝, ?~1360] 별명 정일(貞一). 호 홍건(紅巾). 원래는 면포판매를 업으로 하였으나, 원말에 요승(妖僧)인 팽형옥
(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紅巾)을 호(號)로 삼고, 1351년에 후베이성[湖北省]을 함락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치평(治平)이라 건원(建元)하였다. 후난[湖南]·후베이·장시[江西]의
각지를 함락시켜 한때는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후에 부장(部將)인 진우량(陳友諒)에게 피살되었다.
建立本?州人,用成其衣?之美也。 3월 정묘삭,계유일,청주절도사 왕건을 소의군 절도사로 삼다. 나아가 한왕에 봉하다.요주 심주로 나누고
2개주를 소의군에 속하게 하다.왕건은 요주사람으로 비단옷을 입은 모습이 아름다왔다.
六月 丙午,高??王王建加?府 ?同三司、?校太?,食邑一万?。 6월병오일 고려국왕 왕건을 개봉부에 가입시키고 동3사로 하여금 검교태사로 삼고 식읍일만호를 주다.
少帝?一 開運2年 (AD 945) 冬十月丁丑,高?遣使?方物。庚辰,以前延州?度使王令???州?度使 겨울10월 정축일 고려가 사신으로 하여금 물건을 보내다.전 연주절도사 왕령온으로 하여금 영주절도사
로 삼다.
十一月戊戌,以?知高??事王武??校太保、使持?、玄?州都督,充大??使,封高??王。
11월 무술일 고려국사왕무를 겸교태보로하고 절도사로하며 현토주도독 충대의군사 고려국왕으로 봉하다.
十二月庚辰,命使?高??王王武。 12월 경진일 고려국왕에 왕무(정종)를 명하다.
3.증거자료 <金史> 기록
금사의 주된 내용을 보면 건국초기 부터 같은 조상이라고 거란족일부와 발해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세를 규합하여 大遼(거란)을 공격합니다.발해를 망가트렸던 요(거란)는 금나라에게 망하게됩니다. 이후에 같은 조상을 가진 고려와는 거의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지 않고 한차례 전투만 합니다. 즉 나중에 이른바 <낙타餓死사건>으로 촉발된 元나라 사신을 죽인 저고여 사건... 고려가 대륙에 있지
않았다면 낙타사건이 발생할 수 없고 元과의 즉각적 전투를 할수 없었을거라는 필자의 견해입니다.
金은 元에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고조선의 일족끼리 물고물리는 동북아 정세 볼만합니다. 아래 元나라 승상 脫脫이 기록한 < 金 史 >의 기록을 봅니다. ( 금사.jpg파일 참조)
金나라는 宋의 싹을 없애기위해 西安을 정벌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그리고 성공햇습니다.1041년 南宋의
흠종과 휘종이 金에 잡혀가 있으매 宋이 金에 복수하기위해 고려에 길을 비켜달라고 하는데 金史에 보면
金의 南쪽 邊境이 淮河(화이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증거자료 <元史> 기록
元史 卷 208 外夷傳 第 95편에 보면 고려에 대한 위치가 나타납니다.그 원문을 보기로 합니다.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토를 받은땅이다.부여와 다른 종족으로 그 땅에 살고 있었다. 동쪽에 신라,남쪽에 백제가 있으며 큰 바다(황하)서북을 건너 遼水에 접한 瀛州에 말갈과 북쪽에 같이 있다.그 나라의 수도는 평양성 즉 漢의 낙랑군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천산)으로 흐르는 물이 있어 압록강이라 하는데...
옛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통일한 후 땅이 넓어졌다. 그나라의 주성은 고씨인데 당나라 건봉 초(AD666) 나라를 세워 같이 손을 맞잡은 이래 자손들은 그 땅에서 다시 봉토를 받은 후 五代時代에 主人으로 일어섰다. 그 나라는 왕건으로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모두 27왕을 세웠으며 사백년이 넘었다.
원사에서 고려의 위치를 표시한 글귀를 보면 ,고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다 했으며 남으로는 백제가 있고 큰바다 (여기서 큰 바다라 함은 황하를 일컫는 것) 서북을 건너 요수에 접한 營州 에 말갈 과 같이 있다 하므로 지금 식민역사서에 기록된 바 라면 경상도와 백제의 윗 부분인 충청,경기 도 부근에 고려가 있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게된다.
즉 신라, 백제는 적어도 말기 고려를 중심으로 할때 하북성 영주를 중심으로 남과 동에 위치한 것이 되는것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북에 위치 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지역을 포함하는 고려는 고려사에 나타나 있는 만리지국이라는 문구가 틀림이 없을것이다.
위의 송나라 추리도를 보면 영주는 바로 황하이북 하북성의 갈석산과 같은 지역위치로서 고려는 한반도 고려가 될수가 없는것 이다. 또한 고려를 오대시대에 흥기하여 주인으로 일어섰다라는 글귀로 보아 대륙의 상당한 지역을 점거하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5.증거자료 <明史>기록
明史 - 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 明玉珍 (홍건적의 난 기록들 )
아래글중 명사원본에 보면 원말 <<<명옥진>>>의 무리가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 지금같은 한반도의 고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內陸 사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그와 그의
아들<명승사>가 배를 타고 반도고려로 간다? 넌센스이지요. 분명히 徒라고 돼있군요.
진우량 [陳友諒, 1316~1363] 후베이성[湖北省]의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현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서수휘(徐壽輝)가 반란을 일으키
자 그 휘하에 들어갔고, 곧 부장(部將) 예문준(倪文俊)의 서기가 되어 점차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길러나
갔다. 1357년 예문준을 죽이고 그 병력을 모은 다음, 이듬해 양쯔강[揚子江]을 따라 내려가 안후이성
[安徽省] 남부에 기반을 굳혔다. 이어 1359년에는 황제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국호를 '대한(大漢)'이라고 하였다. 장저우
[江州:江西省 九江]에 도읍하고 한때 장시[江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를 세력 아래 두고 주원장
(朱元璋: 明의 태조)과 빈번히 싸웠으나, 1363년 포양호[?陽湖]의 결전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장사성 [張士誠, 1321~1367] 본래 태주(泰州:江蘇省 泰縣)의 염전인 백구장(白駒場)에 적을 둔 소금 중개인이었다. 1353년 염장(鹽場)
관리와 염정(鹽丁) 사이의 분쟁이 일어난 것을 틈타 염정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태주와 고우(高郵)를
점령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성왕(誠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정하였다. 한때 원나라 군사에게 패한 적도 있었으나, 1356년 양쯔강[揚子江] 하류 삼각주지대의 중심지인 장쑤성
[江蘇省] 쑤저우[蘇州]를 함락시키고 '오국(吳國)'이라 칭하였다. 한때 세력이 장쑤성에서 저장성
[浙江省] 일대에 미쳤으나, 난징[南京]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주원장(朱元璋)과의 오랜 항쟁 끝에 1367
년 서달(徐達) 등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의 총공격에 대패, 포로가 되자 자살하였다.
방국진 [方國珍, 1319~1374] 황옌[黃巖: 浙江省黃岩縣] 출생. 원래 소금 행상이었으나, 1348년 해적(海賊)의 난(亂)에 편승, 형제와
더불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운조선(運漕船)을 약탈하였다. 어떤 때는 원나라에 반항하고 어떤 때는
귀순(歸順)하는 등 변덕을 부렸으나, 식량의 해상수송에 종사한 일도 있어 원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얻어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뒤 명나라의 태조에게도 반항과 귀순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1367년 명나라 원정군에게 쫓겨 해상으로
피하였으나, 곧 항복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도 벼슬을 얻고, 그의 아들도 벼슬에 올랐다.
명옥진 [明玉珍, 1331~1366] 후베이성 쑤이저우[隨州] 출생. 처음에 서수휘(徐壽輝)의 무장(武將)이 되어 원군(元軍)과 싸웠으며,
충칭[重慶]을 함락시켜 그 곳을 근거로 쓰촨[四川] 지방을 평정하였다. 1360년 서수휘가 부하에게 살해
되자, 1362년에 자립하여 ‘촉왕(蜀王)’이라 칭하고 대하(大夏)를 세웠다. 나라를 8도(道)로 나누고, 주제
(周制)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두었으며, 세금을 경감하고 과거를 시행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애썼으나,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명승(明昇)이 그 뒤를 이었으나, 부장(部將)들 사이에 분쟁
이 그치지 않아 국력이 기울어지다가, 명나라 태조(太祖)가 된 주원장(朱元璋)에게 항복하였다.
서수휘 [徐壽輝, ?~1360] 별명 정일(貞一). 호 홍건(紅巾). 원래는 면포판매를 업으로 하였으나, 원말에 요승(妖僧)인 팽형옥
(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紅巾)을 호(號)로 삼고, 1351년에 후베이성[湖北省]을 함락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치평(治平)이라 건원(建元)하였다. 후난[湖南]·후베이·장시[江西]의
각지를 함락시켜 한때는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후에 부장(部將)인 진우량(陳友諒)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