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2차 방문 시(2002.9.20-24) 후지산에서 시바다다까오 교장과 함께
시바다 교장은 먼길을 직접 운전하여 우리에게 후지산 관광을 시켜 주셨다. 그 고마움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姉妹学校訪問記
#上の写真-2次訪問時(2002.9.20-24) 富士山からシバダダカオ校長とともに
柴田校長は長道を直接運転して 私たちに富士山観光をさせてくださった. その有難みを永遠に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
세계로, 꿈을!
-岡崎 市立 矢作北中學校(오까자끼 시립 야하기기타중학교)와의 교류로 새 지평을 열다.-
2001.12 12(수) 지난 8월에 추진하다 교과서왜곡과 일본 총리 신사 참배 문제로 중단되었던 岡崎 市立 矢作北中學校(오까자끼 시립 야하기기타중학교)와의 교류가 오늘에 사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난번에 신청한 학생을 중심으로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을 중심으로 다시 선발하는 일이 조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동안 매니저 역할을 했던 LEC WORLD 호텔과 연락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관광여행사를 중간에 넣어 추진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와 직접 전화하여 추진하면 쉽겠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여의치 못했다. 많은 곡절 끝에 드디어 오늘 이제 야하기기타중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11시 20분 발 나고야 행 대한항공기는 정확하게 출발하였다. 우리 아이들 중에는 해외 나들이가 처음인 학생이 대부분이었고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학생도 상당수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서서히 미끄러져 속력을 가하더니 드디어 이륙하기 시작하였다. 비행기가 부산항을 멀리하면서 날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창밖에 하얀 해안선이 나타났다.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렇게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는데 오기가 그렇게 어렵더란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잠깐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일본의 반대편 해안선이 또 나타났다. 일본이란 나라가 이렇게 좁은 나라란 말인가! 학생 18명과 교장, 인솔교사 2명, 모두 21명의 방문단은 약 한 시간반가량의 비행 끝에 나고야 공항에 도착하였다. 렉 월드의 강기진씨가 선생님 두 분과 함께 ‘新都中學校’란 팻말을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나고야에서 오까자끼까지는 약 한 시간 반의 거리다. 바로 야하기기타중학교로 향했다.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었다. 나고야에서 오까자끼까지는 시가지가 거의 연결되어 있었다. 야하기기타중학교는 주변이 한산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흔히 우리는 어디를 가면 상상했던 것하고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야하기기타중학교는 내가 상상하던 그 자리에 거의 그 모습대로 있었다. 그래서 더욱 정겨움을 느꼈다.
학교에 도착하니 우리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柴田隆夫(시바타타까오) 교장선생님과 교감 그리고 여러 선생님들이 반가이 맞아 주었고 우리 아이들이 차에서 내리자 많은 학생들이 창밖을 내다 보며 "안녕 하세요"를 연발하며 환영했다. 우리 아이들은 일본말로 인사할 줄 몰라 빙긋이 웃으며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이 학교에서는 8월에 올 것을 대비하여 한국말을 익히기 시작했고 우리를 알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으나 사실 우리들은 교과서 문제와 신사 참배만 성토하다 아무 준비 없이 왔기 때문에 일본말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교문입구의 동산에는 “환영, 용도야 말로 오셨습니다. 신도중학교, 본교 방문”이란 환영 입간판이 있었고 교문에서 바로 보이는 2층 창문에는 아주 큰 글씨로 학생들이 직접 그리고 쓴 환영 플랜카드가 창문을 온통 도배하고 있었다. 입간판의 ‘용도야 말로 오셨습니다’란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교장 선생님 왈 ‘정말로 잘 오셨습니다’를 번역하여 쓴다고 한 것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모두 박장대소 한바탕 웃었다. 아이들은 도서실로 가고 우리들은 교장실로 안내되었다. 교장실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응접탁자 위에 어깨동무 하듯이 정답게 나란히 꽂혀있는 태극기와 일장기였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낯익은 액자가 눈에 들어 왔다. 지난번 교감 선생 일행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내가 직접 써서 표구하여 선물한 ‘좋은 만남 서로 발전’이란 액자였다. 그 때 우연히 생각하여 쓴 이 글이 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멋지고 의미 있는 것이란 생각과 함께 여기서 이 액자를 대하니 시집보낸 딸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 때 이걸 가지고 오면서 깰까봐 몹시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너무 부담스런 선물로 하여 고생시킨 것 같아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도서실로 자리를 옮겨 홈 스테이 학생과의 상면식을 했다. 학생과 학부모가 같이 오셨다. 柴田隆夫 교장의 환영 인사에 이은 나의 인사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의 역사가 있었으나 이 어린 아이들의 세대에서는 이제 정말로 가까운 나라로서의 우정을 다져나가야 한다고 인사했다. 이어 홈 스테이 짝끼리 부모를 함께 소개하면서 서로 손을 잡으면서 첫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상면식이 끝난 후 교장의 인도로 ‘후레아이 네이쳐 랜드’로 갔다. 건물 옆 빈터를 이용하여 만든 동산인데 동산 입구에 아름답고 규모있는 아취문이 있는데 그 문 위에 ‘후레아이 네이쳐 랜드’라고 되어있고 반대 쪽에는 ‘꿈이 영그는 학교 조성, 후레아이 擴大計劃21’라고 멋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산에는 작고 아름다운 인공 호수가 조성되어 있고 물이 계속 회전하기도 하고 바닥에서 솟아오르게도 되어 있었다. 물은 옥상의 빗물이 모여서 탱크에 저장이 되고 그 탱크의 물이 자동적으로 이 인공 호수에 흘러들도록 되어 있으며 펌프로 계속 회전하도록 되어 있었다. 호수 가에는 사람의 머리만한 몽돌에 학생들이 그림과 글로 자기의 꿈을 그려서 촘촘히 줄지어 배치해 두었는데 이것을 stone art라고 했다. 그리고 이 동상의 가장 중심부에 하나의 조그마한 아름다운 비석을 만들어 세웠는데 이 비석의 제막식을 이 시간에 하는 것이었다. 하얀 천을 씌워 두었는데 양교 학생들의 박수 속에 제막을 하였다. 그 비석에는 ‘좋은 만남, 서로 발전’이란 표어가 일본어로 새겨져 있고 그 바로 밑에 또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내가 우연히 생각해서 써 준 이 ‘좋은 만남, 서로 발전’이란 표어가 여기서 이런 모양으로 발전한 것을 보니 정말로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비석 주위에는 내일 우리 아이들과 일본 친구들이 같이 stone art를 제작하여 놓도록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이 동산은 자연을 이용한 자매결연 기념 동산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조성했다고 했다.
제막식 후 아이들은 각 가정으로 가고 우리 일행은 오까자끼 교육청을 방문했다. 교육청 당국은 우리와의 자매결연 방문을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교육청 건물이 따로 없고 복지회관 건물의 일부분을 쓰고 있었다. 물론 정문도 없었다. 제법 큰 방에 모두 같이 앉아 있었고 과별 팻말만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니 모두가 친절히 인사를 했다. 일본인들은 친절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교육장실은 매우 작은 방이었고 방안에는 쇼파 같은 것이 없고 사무용 책상과 책장 그리고 회의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육장은 명찰을 달고 있었다. 직원들도 모두 명찰을 달고 있었다. 교육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관계자 몇이 문 입구에서 두 손을 앞에 공손히 모우고 서서 경청하고 있었다. 교육장은 우리의 교류를 매우 기뻐하고 있었고 우리 학교의 오케스트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물었다. 표정이 매우 밝고 진취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였다. 우리 학교 신문 한 부와 인삼차를 선물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학교에서 베푸는 만찬장으로 갔다. 교장, 교감, kondou선생, 그리고 먼저 번에 왔던 한 분과, 교무주임, stone art 지도 교사인 鈴木선생 이렇게 교직원 6명과 교사학부모회 회장, 부회장, 그리고 회원 3명, 이렇게 해서 모두 11명이 참석했다. 말은 잘 통하진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정서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름이 없음을 실감했다. 柴田隆夫교장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도 차를 두고 갔다. 일본에는 음주운전 단속은 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음주운전을 하지 않고 스스로 지킨다고 한다. 남의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남에게 폐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12. 13(목) 아침 일찍 선생님 한 분이 차를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호텔로 왔다. 학교로 가면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더러 보았다. 비가 약간 오는데도 학생들이 비닐 우의를 입고 자전거로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전거 핸들 위의 시장 바구니에 책가방을 싣고 다녔다. 길은 매우 좁은 편인데도 인도 겸 자전거 도로를 확보해 두었다. 일본은 차가 모두 좌측 통행이었다. 좌회전일 경우에도 빨간불일 때는 정지하는 것이 독특했다. 8:20부터 자매 결연식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약간 늦게 도착했다. 아이들은 홈 스테이 가정에서 벌써 와 있었다. 체육관에는 전교생이 질서 정연하게 집합해 있었다. 40여명의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는 우렁찬 마취와 전교생의 열렬한 박수 속에 입장했다. 무대 위 천정에는 학생들이 직접 그린 듯한 찬란한 환영 플랜카드가 가로로 걸려 있었다. 그 왼쪽에는 태극기가 오른쪽에는 일장기가 붙어 있었다. 우리 21명이 단상에 앉은 후 식이 시작되었다. 맨 먼저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모두 태극기를 향했다. 이어 기미가요가 연주되었다. 역시 모두 일장기를 향했다. 브라스 밴드의 애국가 연주는 매우 훌륭했다. 다음으로 柴田隆夫 교장의 환영사에 이어 나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가깝고도 먼 나라로서의 역사가 있었으나 이제 우리는 정말 가까운 나라로서의 우정을 다져 나가자고 인사했다. 그리고 ‘좋은 만남으로 서로 발전’하자고 했다.
다음으로 학생회장 稻葉正太군의 환영사가 있었다. 일본의 유명한 사람을 많이 아느냐고 했다. 아는 사람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매우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누구누구를 아느냐고 물었고 우리 아이들이 안다고 대답했다. 또 누구를 아느냐고 했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자 난데없이 선생님 한 분이 나와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해서 한바탕 웃겼다. 다음으로 선물 교환이 있었는데 후레아이 네이쳐랜드 동산 중앙에 있는 ‘좋은 만남 서로 발전’이라 쓴 비석을 작게 축소하여 돌에 새겨 만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어 矢北中 브라스밴드의 환영 연주가 있었는데 매우 훌륭한 연주였다. 행진곡이었는데 짜임새 있는 좋은 사운드였다. 악기 편성이 매우 좋았다. 일본에는 거의 모든 학교에 브라스 밴드가 있다고 한다. 부강한 나라의 표징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 브라스 밴드가 있으면 정말 좋다는 것을 직접 보고 느꼈다. 악기 편성은 피콜로1, 플륫2, 클라리넷9, S앨토 클라리넷1, 베이스 클라리넷1, 바슨1, 앨트 색스폰2, 테너 색스폰2, 트럼펫5, 호른4, 유포니움1, 튜바2, 베이스 드럼, 사이드 드럼, 팀파니4 등 아주 훌륭한 악기 편성이었다. 이 웅장한 밴드가 체육대회나 각종 행사에서 방방 울린다고 한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다음에 우리의 연주가 이어졌다. 맨 먼저 배중석 군의 피아노 독주로 쇼팽의 ‘혁명’을 연주했다. 좋은 연주였다. 무대 매너도 무난했다. 다음은 강보미의 바이올린 독주로 ‘그리운 금강산’을 배중석의 반주로 연주했다. 심금을 울리는 연주는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체면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합주는 시원찮았다. 무대 연습 없이 한 탓으로 튜닝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화음이 맞지 않았다. 특히 첼로는 일본 악기를 빌린 것이라 듣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중간에 몇 번의 튜닝을 시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좀더 연습 안한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었고 미안했다. 우리의 연주가 그렇게 허술한데도 학생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질서를 지키고 조용히 들어 주었다. 일본인들의 그 훌륭한 질서 의식의 현장을 직접 본 것이다.
연주회 후 학생들은 미술실로 가서 일본 친구들과 stone art를 제작했다. 칠판에 일본어와 한글로 각각 제작 방법을 상세히 판서하고 친절히 지도하고 있었다. 돌에 그림 그리기가 완성되자 후레아이 네이쳐 랜드로 가서 비석 주위에 작품을 배치하고 기념 촬영을 하였다. 예술 작품 공동 제작을 통한 멋진 우정의 교감이었다.
다음은 급식을 통한 교류 활동으로써 학교 급식을 같이 했다. 우리 학교는 신학기부터 급식을 하기 위하여 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유심히 관찰하였다. 급식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밥을 학교에서 하지 않고 교육청에서 도맡아 해가지고 콘테이너로 배달을 해 주었다. 4교시를 마치자 복도에 흰 모자와 흰 가운을 입은 남녀 학생들이 우루루 나왔다. 급식 도우미들이었다. 층마다 배식실이 있었다. 거기서 자기 반 배식차를 교실로 밀고 가서 배식을 하는데 너무나 질서가 있었다. 아주 예쁘고 자그마한 배식판에 배식을 받은 후 자기 자리에 앉아 다른 친구들이 모두 배식 받을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 같이 손을 합장하고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일제히 식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기다렸다가 일제히 같이 손을 합장하고 "잘 먹었습니다." 하고 그릇을 치우고 청소를 깨끗이 한 후 급식을 마치는 것이었다. 급식을 통해서도 질서 지도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교내 곳곳을 구경했다. 복도가 몹시 좁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매우 질서 정연했고 깨끗했다. 휴지 하나 흩어져 있지 않았다. 교장실에는 현황판, 학교 연혁, 교육목표 등의 게시물이 하나도 없고 벽에는 교가 가사를 멋지게 쓴 액자와 그림과 ‘좋은 만남 서로 발전’ 액자가 조화롭게 걸려 있었다. 현관은 우리 학교처럼 몹시 좁았으나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종 체육대회에서 받은 수많은 트로피가 학교의 영광을 번쩍이며 진열되어 있었고 벽에는 또 수많은 상장들이 걸려 있었다. 교무실에서 가까운 복도에는 자매학교 게시판이 있었는데 그기에 신도중학교의 홈페이지에서 뽑은 각종 자료들이 많이 게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의 홈에도 들어와서 나의 사진과 함께 프로필을 다운받아 상세히 게시하고 있었고 지휘하는 사진까지 붙어 있었다. 음악실은 2개인데 교실마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팀파니도 4대나 있었다. 브라스 밴드 악기실에는 각종 악기를 큼직한 선반에 칸칸이 가지런히 잘 보관하고 있었다. 공간은 몹시 좁으나 깨끗하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화장실도 매우 깨끗하고 화장실용 슬리퍼가 안쪽을 보도록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다음 사람이 들어 갈 때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교실 환경 구성도 특징이 있었다. 게시물이 모두 창의적이었는데 거의가 다 학생들이 직접 그리고 만든 것들이었다. 그리고 옆으로 길고 아주 큰 종이나 천에 그림이나 글을 써서 세로로 혹은 가로로 벽에 걸고 붙여 놓았으며 어떤 반에는 현수막 같은 것을 천장에 붙여 놓은 반도 있었다. 그림이나 글씨 등이 모두 특색이 있고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것들이었다. 사물함은 나무로 튼튼히 만든 것인데 문이 없고 가방 채로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체육을 매우 열심히 하는 학교 같았다. 체육대회를 할 때 오색찬란한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고 또 흔들며 응원을 하는 것 같았다. 방과 후에는 각자 자율적으로 운동장에서 혹은 교실에서 각종 활동을 하고 있었다. 운동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짧은 바지 차림으로 나와 그룹별로 장애물 경기, 달리기, 농구, 축구, 마라톤, 등을 자율적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장애물 그룹을 보니까 장애물 기구를 촘촘히 놓고 수없이 반복하여 뛰어 넘으며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한 분이 파카를 입고 운동장을 돌고 있었는데 그 날 방과 후 활동의 감독이라고 한다. 체육교사가 아니고 교사들이 순번을 정하여 그렇게 하며 수당 같은 건 없다고 한다. 운동장 가에는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있었는데 그룹별 방으로써 체육 기구나 체육복 등이 보관되어 있고 그룹별로 거기 모여 활동도 한다고 한다. 운동장에는 야간 경기를 위한 높다란 스포트 라이트가 4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야간에 경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일본에는 방학이라 해서 계속 노는 것이 아니라 특기 적성 같은 것을 주로 하고 학교 체육행사나 각종 대회 같은 것도 방학 때 한다고 한다. 교실의 교육 선진화 기자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컴퓨터도 없었으며 43인치 프로젝션 TV도 없었다. 따라서 인터넷을 이용한 ICT활용 교육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무실에도 1인 1 PC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직접 손으로 그리고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이 매우 성실했고 알뜰했으며 빈틈이 없는 것 같았다. 이 학교에서 제일 탐나고 부러운 것이 체육관과 브라스 밴드였다. 전교생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멋진 체육관이었는데 여기에서 가벼운 각종 체육을 할 수 있고 각종 문화 행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입학식, 졸업식을 여기서 밴드를 울리면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학교에는 전교생이 들어갈 수 있는 강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가장 감동적인 곳이 바로 기술실이었다. 기술실은 2개로서 금공실과 목공실이 따로 있었다. 금공실에는 쇠붙이로 각종 공작품을 제작 조립 수리 용접 등을 할 수 있는 온갖 기구와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고 목공실에는 목공을 할 수 있는 각종 연장이 구비되어 있으며 나무로 만든 튼실한 작업대가 여러 개 있는데 톱으로 썰고 두드리고 못을 박고 하면서 할퀴고 찍히고 하여 천판이 만신창이가 되어 그 위에 또 다른 합판을 하나 더 올려놓고 온갖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만든 공작품을 보니 왠만한 목수 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책꽂이, 책상, 각종 장식품, 진열장, 등을 만들고 있는데 이러한 노작 교육을 매우 중요시하여 교육하고 있었다. 기술실 복도에 학생들이 써 붙여 놓은 표어가 이 학교 학생들의 정신과 노작교육에 대한 교육관을 말하고 있었다. ‘노작의 즐거움을! 완성한 즐거움을 체감하자.’ 또 한 곳, 실험 실습 교육의 현장. 요리실을 가 보았다. 요리실도 2개인데 매우 잘 되어 있었다.
이 학교에서 또 하나 특징 있는 것이 신발 정리였다. 전교생의 신발장이 1층 중앙 현관에 학급별로 모두 정열 되어 있고 우산도 학급별로 우산꽂이에 정리되어 있었다. 실내화는 갈색의 투박한 비닐 슬리퍼였다. 매우 실용적이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 가장 감명을 받은 장면은 상담시간 운영이었다. 마침 오늘 오후에 이 상담 시간을 운영하는데 중간고사나 기말시험 후에는 반드시 한다고 했다. 모든 학부모가 한꺼번에 와서 와글와글 떠들고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씩 정해진 시간에 복도에 와서 대기하고 있고 교실에서는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님이 마주 앉아 학생의 여러 가지 자료를 가지고 진지하게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원이 모두 학교에 그렇게 나와 상담에 응한다고 한다. 우선 상담을 위해서 오전 수업으로 학생을 보내고 아주 계획적으로 전교가 일제히 상담을 실시하는 것이 너무나 신실해 보이고 정말 교육을 생각하는 나라라는 것을 보고 느꼈다. 거리가 그렇게 깨끗하고 질서가 있는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자꾸 우리와 비교하는 버릇이 계속되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학교 구경을 끝내고 오후에는 시내 관광을 했다. 맨 먼저 가본 곳이 ‘八町 미소’라는 유명한 된장 공장이었다. 16대 동안 된장 공장 가업을 이어온 유명한 곳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통에 콩을 갈아 넣어 3년간 발효한다고 하는데 그 한 통으로 오까자끼 시민이 3년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한 큰 통이 그 공장에 450개나 있다고 한다. 그 규모가 정말 대단했다. 그 다음 구경 한 곳이 오까자끼 성이었는데 비가 너무나 많이 쏟아져 포기하고 ‘이온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다. 밤에 우리는 일본의 거리를 보기 위해서 10시경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다. 기사에게 혼마찌에 간다고 했더니 내려준 곳이 바로 마을 이름이 本町(혼마찌)였다. 한데 사람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상가도 모두 닫혀 있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차비가 아깝기도 했고, 가로등에 비친 하늘거리는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춥고 쓸쓸한 한밤중에 청승맞게 사진 몇 장 찍고 버스로 돌아 왔다.
12. 14(금) 돌아가는 날이다. HOME STAY한 학생들이 일찍이 호텔로 왔다. 학부모들도 많이 왔다. 차를 탈 즈음에 교장 선생님이 두툼한 앨범을 하나 주셨는데 보니 우리가 도착하고부터 찍은 사진들을 차례로 정리하여 만든 앨범이었다. 대단한 호의였으며 철저한 준비성이 한 번 더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 때마다 이 분들이 3월에 올 때 우리가 해야 할 빚을 짊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제 비가 와서 보지 못했던 오까자끼 성을 보러 갔다. 여기는 일본을 통일한 역사적 인물인 德川家康의 성이었다. 일본의 역사와 일본인의 기질을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흔적이었다.
그 다음 간 곳이 유명한 도요다 자동차 공장이었다. 작업 현장은 볼 수가 없고 초현대적 시뮬레이션 장치를 통한 견학을 한 후 완성품 전시장에서 고급의 승용차를 타보고 폼을 재보기도 했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고야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 자매학교 교류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에 고무되었다. 먼저 일본인들의 그 몸에 벤 친절은 우리를 몸 둘 바를 모르게 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성도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또 교육은 겉치레가 아닌 정말 실질적인 기본을 철저히 가르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매우 강하게 가르치고 있었다. 어제 학교에서 교내를 구경하던 중 좁은 복도에서 크고 무거운 나무로 된 합창단이 딛고 올라서는 것과 같은 단을 2~3명의 여학생들이 위층으로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불평하는 얼굴빛을 하고 있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고 모두가 열심히 그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번 방문을 통해서 느낀 바를 몇 개의 단어로 나열해 보면 친절, 성실, 철저, 청결, 조화, 실질, 창의, 강직 등이다. 그 학교는 현재 우리처럼 1인 1 PC를 위시한 각종 선진화 교육 기자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의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보고 느낀 바를 종합적으로 표현해 보면‘일본은 값싸고 튼튼하고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정확한 아날로그 시계’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교육은 좋은 시설이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이 지극히 지당하고 평범한 진리를 한 번 더 깨달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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