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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현동주 | |
신체사항 | 키 : 167.0cm 체중 : 66.0kg 혈액형 : O형 | |
가족사항 | 부인 김미정씨와 슬하에 1남 3녀 | |
종교 | 기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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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년도 | 졸업년도 | 출신학교 및 전공 | |||
1938 |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 ||||
1942 | 우에노음악대학 성악 학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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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기간 | 경력내역 | |||||
1999 | ~ | 노래박물관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 ||||
1967 | ~ |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 부이사장 | ||||
1947 | ~ | 가수협회 부회장 | ||||
1947 | ~ | '고향경음악단' 조직 | ||||
1943 | ~ | 악단 '신태양극단' 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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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연도 | 수상내역 | ||
제3회 원로연예인 공로 대상 | |||
한국전쟁 종군연예인 공로패 | |||
1996 | 제30회 가수의 날 특별 공로대상 | ||
1999 |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 대상(문화훈장) 수상 | ||
2001 | 전국연예예술인노동조합 선정, 올해의 스승가수로 선정 | ||
1999 | 화관문화훈장 | ||
1996 |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본상 | ||
1990 | KBS특별가요대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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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분류 | 년도 | 상세내역 | ||||
출연작 | 기타 | 1998 | 악극쇼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 | ||||
작곡 | 1943 | 서울야곡 | |||||
작곡 | 1946 | 멍기의 노래 | |||||
작곡 | 1947 | 명동애래지 | |||||
故현인 선생의 노래들은 50, 60년대 서민의 슬픔과 향수를 달래 준 희망의 가락이었다.
시원하게 내지르고 부르르 떠는 그의 창법은 압권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난 50년대 초 탱고, 맘보, 샹송, 칸초네 등을 본격적으로 도입해 삶의 고단함에 지친 국민들에게 흥겹고 경쾌한 서구 리듬을전파했던 ‘최초의 월드 뮤직’ 가수였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당시, 국민들은 그의 새로운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본명이 현동주인 현인은 노래만큼이나 유쾌한 풍류 남아였다.
그는 1919년 12월 14일 부산 영도에서 영국의 스탠더드 석유회사 직원이었던 부친 현명근씨와 일신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모친 오봉식씨의 2남 1녀 중맏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 회사의 사원 주택이 있던 영도와 할머니댁이 있는 동래군 구포면을 오가며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석유 회사를 다니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의 동경 지사 기자가 되어 일본으로 떠났던 엘리트였다.
5살 때 부친을 만나기 위해 동경으로 간 그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러시아의 베이스 가수 샬리아핀의 독창회 때 처음으로 음악을 접했다. 뒷날 그는 “큰 감명을 받고 이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총명했지만 장난꾸러기였던 그는 동래의 구포 소학교에 입학, 2학년때 초량에 있던 영주 소학교로 옮겼다. 5학년 때 부친이 경성 지국으로 전근을 오면서 서울 서대문 죽첨 소학교로 전학을 와 1931년 경성 제2 고보(현 경복 중고등학교 전신)에 진학했다.
영어와 일어 그리고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학교의 배구 대표 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잘했다. 방과후에는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 가요나 미국의 포크 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렀다.
3학년 때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는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1935년 어린 시절의 꿈인 파일럿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 시험을 치르려동경으로 갔다. 하지만 일본 군인이 되기 싫다는 생각이 들자 반항심으로 우에노 음악 학교 성악과에 입학 했다. 화가 난 부친 때문에 그는 학비를벌기 위해 마이니치 신문의 보급소에서 1년 간 신문을 포장하는 중노동을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1년 뒤 우연히 NHK에서 합창단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오디션을 통과해 합창단원이 되었다. 그는 우에노 음악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독일 음악이론 보다는 미국의 재즈나 프랑스의 샹송이 더 좋았다.
당시 일본에는 세계 각국의 대중 가요가 크게 유행했다. 그는 방송국에드나들며 각국의 최신 음악 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다. 1939년 창시개 명령이 내려지자 일본신문사에 근무했던 부친의 명에 따라 고토 징(後藤仁)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해방 후 그가 현인이라는 예명을 갖게된 것도 이때 붙인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황족 출신의 마리코와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본과3학년 때 귀국해 소학교 교사였던 조창길과 첫 결혼을 했다.1942년 우에노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을 해 성악 교수가 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성보 악극단의 음악 교사로 들어 갔다.
1943년 2차 대전이 치열해지자 징용을 피하기 위해 박단마, 황해, 진방일 등과 악극단을 구성해 중국 천진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천진의 클럽 신태양의 무대에 올라 샹송 등 외국 가요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북경, 항주 등 중국의 주요 도시 순회공연을 다니다 상해에 정착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던 상해의 국제클럽에 취직한 현인은 영국인과 포크투갈인의 혼혈 처녀였던 마리아라는 여가수와 사랑에 빠져 1년 반 동안 동거했다.1945년 12월 일본이 패망을 하자 귀국길에 올랐지만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북경 비밀 형수소에 수감이 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동요 70여 곡과 훗날의 대히트작 '서울야곡'이 바로 이때 작곡됐다.
6개월 후 그는 석방이 되었지만 애써 적어둔 악보와 가사들이 비밀 문서로 오인돼 빼앗겨 버렸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 왔다. 수소문 끝에 부친은 부산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중이고 아내는 이천에서 교사로 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당시 가족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 당한 존재였다.
이후 홀로서기를 시작한 그는 벌이가 좋은 미군 위문 공연에 뛰어 들었다. 당시는 탱고가 크게 유행하던 시기. 바이올린 연주가인 이장백, 김광수씨와 탱고를 전문으로 하는 고향 경음악단을 조직, 1947년 최초의 나이트클럽인 충무로 신문회관의 뉴스맨스 클럽 무대에 섰다.
이때 '서울야곡'을 슬쩍 불러보았다. 외국 곡이 아닌 우리말로 불리어지는 탱고 풍의 가요에 관객들은 신기한 반응을 보였다.
비슷한 무렵 마도파옆 골목에 국내 최초로 3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하는 최고급 극장식 맥주홀은성살롱이 생겨났다. 현인은 이곳에서 김광수악단과 엄토미 악단의 반주로 번안 곡을 위주로 활동을 했다.
제법 밤무대에서 이름이 알려지자 작곡가 박시춘씨가 자신의 신곡을 불러보겠냐는 제의를 해왔다. 음악 학교를 나온 현인은 '샹송과 탱고 등 외국곡이 아닌 가요는 부르지 않겠다'는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유명 작곡가인 박시춘의 제의를 거절하기 힘들어 악보를 받아 불러 보니 취향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박시춘은 이 노래를 통해 해방의 감격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노래가 바로 그의 대표곡이 된 '신라의 달밤'이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가요 가수로 나설 결심을 내렸다. '신라의 달밤'은 스페인 춤곡 볼레로 리듬이었다
1947년 고려영화협회는 해방 후 최초의 영화 '자유만세'를 명동 시공관에 올렸다. 현인이 소속된 악단을 초청한 것은 관객 끌기 수법이었다. 바로 여기서 불후의 '신라의 달밤'이 발표됐던 것이다. 민족 해방을 감동적으로그렸던 영화가 끝나자 현인의 노래 순서가 왔다.
시원한 마스크와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접한 관객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관객들의 기립 박수가 터지며 시공관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날 현인은 무려 아홉 번의 앵콜을 받았다. 공연은 열흘 이상 계속되었고 시공관은 '자유만세'를 보고 '신라의 달밤'을 들으려는 인파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전의 가요와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멜로디와 독특한 창법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는 하루 아침에 대 스타로 떠올랐다.감격한 작곡가 박시춘은 명동 럭키레코드의 녹음실에서 '신라의 달밤' SP음반의 취입을 서둘렀다.
당시엔 가수뿐 아니라 세션맨 누구라도 실수가용납 되지 않는 동시 녹음 시대였다. 음반을 찍어낼 프레스가 없어 기름 짜는 기계를 개조해 사용했고 고물상들이 가져오는 고물 레코드를 녹여 하루50장 정도의 레코드를 겨우 만들던 시기였다.
판도 쉽게 닳아 몇 십 번 듣다 보면 거덜날 지경이었고, 난데없이 일본노래가 튀어 나오기도 했다. '신라의 달밤' SP는 대단한 반응을 보였다.
충무로 입구의 본정 악기점에 몰려 든 시민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배우느라 북적거렸다. 이에 럭키레코드 강운용사장은 또 다른 신곡 취입을 재촉했다.두 번째 곡은 '고향만리'.
일제시대 학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 이 노래 역시 대히트를 터뜨렸다.
첫 트롯취입곡인 '비 내리는 고모령'은 부르기가 쉬워 '신라의 달밤'을 능가하는공전의 히트를 기록, 이름도 없던 작은 고개 고모령을 명소로 탈바꿈 시켰다.
1991년 10월 대구 수성구의회 개원기념으로 노래비까지 건립된 명곡이다. 당시 노래비 건립 사실을 현장 취재하던 한국일보 사진부 김문호기자가 열차에 치어 순직하는 안타까움이 간직된 노래 비이기도 하다.
이후 '서울야곡', '꿈속의 사랑' 등 그의 노래는 발표하는대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혜성과 같이 나타나 최고 인기 가수로 떠오른 현인은 1948년 해방 후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에 주연 배우로 발탁되었다. 상대역이었던 신인여가수 김은희와 사랑에 빠져 동거에 들어갔던 현인은 전쟁 와중에 헤어졌다.
1949년 부친이 세상을 떴다. 귀국해서도 한번도 뵙지 못했던 부친에 대한 불효에 오열했던 그는 장례식 후 한동안 노래를 접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KPK 악단장 김해송씨의 제의로 무대에 다시 섰다.
1950년 6월 27일 아침. 한국전이 터진 후 그는 경기도 광주의 산골과 집안 다락방에서 숨어 지내며 인민군의 눈을 피했다. 9ㆍ28서울 수복 후 잠시 박춘석 악단과 함께 부평 미 제 1해병사단의 무대에 올랐지만, 1.4후퇴때 또다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오리엔트 레코드사의 이병주 사장은 현인에게 박시춘 작곡ㆍ강사랑작사의 '굳세어라 금순아' 취입을 제의해왔다. 한쪽 벽이 무너진 대구 KBS에서 가마니로 방음장치를 해 녹음을 했다.
부산에 온 수많은 피난민은 물론,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던 국민들은 그의 노래에 큰 위안을 얻었다. 피난 시절에도 현인은 자유극장, 대구극장 무대와 군부대 위문으로 바쁜나날을 보냈다.
가끔 부산으로 원정 공연을 가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면 객석은 매번 눈물 바다를 이루곤 했다. 악극단 '호화선'은 동명의 악극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1953년 대구에서 현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재건하자는 노래 '럭키 서울'을 취입해 한줄기 희망의 빛을 선사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한국은행 뒤에 '다리봉' 다방을 열며 노래를 잠시 접었지만 실패하고 박시춘의'은방울쇼단'에 합류했다. 당시 '남인수 대 현인-가요 대합전 15회전' 무대는 장안의 최고 인기 무대로, 현인은 남인수의 인기에 버금가는 라이벌로 재등장했다.
1957년 명창 박녹주의 질녀인 박정혜와 두 번째 결혼 후 삼남매를 두었지만 5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후 1959년 봉봉쇼단을 만들어 전국 극장들을 돌았지만 사업수완이 신통치 않았던 그는 6개월만에 파산했다.
그는 1960년 한국일보주최로 시민회관에서 열린 프랑스 샹송가수 이베트지로의 내한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해 여전한 노래실력을 과시했지만 1962년 경쟁자였던 남인수의 사망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40대 중반이 된 그는 퇴역 가수 취급을 받았다. 의기소침해 있던 현인은 1968년 15년 연하의 팬이었던 임소연과의 동거에 실패, 1974년엔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났다.
1978년 3대 미스코리아 출신 김미정과 세 번째 결혼 후 클럽 가스라이트등의 사업 부진을 거듭하다 81년 귀국을 했다. 귀국 후 배삼룡, 남진등과 함께 98년부터 악극 '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에 참여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던 현인은 2002년 4월 13일 지병인 당뇨병으로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국민 가요가 된 '신라의 달밤'은 최근 동명의 영화에서 리메이크 되어 젊은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클래식을 전공하고도 대중가수가 된 그의음악 여정은 시대를 앞서 간 개방적 사고 방식 덕분이었다.
풍류객 현인은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더불어 민족의 애환을 어루만지는 대중가요는 물론각 국의 월드 뮤직을 최초로 이 땅에 수혈했던 국민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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