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김(
金)이고, 휘(
諱)는 덕만(
德曼), 호는 성조황고(
聖祖皇姑), 시호는 선덕이다. 신라 26대
진평왕(
眞平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
摩耶夫人) 김씨이다. 632년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634년(선덕여왕 3) 연호를 인평(
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
芬皇寺)를 창건,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
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38년 10월에 고구려가
칠중성(
七重城)을 공격해 오자 11월에 이를 격퇴하였으나, 642년에는 백제의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
唐項城)을 빼앗음으로써 나당(
羅唐)의 통로가 끊어졌고, 백제에게
대야성(
大耶城)까지 함락당하자
김춘추(
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3년에 다시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이듬해
김유신(
金庾信)을
압량주(
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하여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에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으며, 647년에
상대등 비담(
毗曇)과 염종(
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등이 이를 진압하였다. 반란의 와중에 여왕은 신병으로 사망하였고, 유언에 의해 낭산(
狼山)에 장사지냈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당찬 여왕으로 평가받는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
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
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
瞻星臺)를 건립하였다. 백제의
아비지(
阿非知)를 데려와
황룡사 구층탑(
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한편, 1989년에 출현한
필사본 《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둘째딸이고 언니는
천명공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이 후사를 화랑의
수장인 풍월주(
風月主) 용춘(
龍春:25대
진지왕의 둘째아들)에게 물려주려 하자 왕위를 양보한 천명공주와 달리 이에 강력 반발하였고 왕통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오히려 용춘을 남편이자 신하로 받아들이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흠반(
欽飯)과 을제(
乙祭)라는 2명의 남편을 더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위서(
僞書)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