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시 복죽동 이문안 통상제 趙必達 삼도통제사 묘역 답사(2017.8.16)기록☚
趙東和는 1950년 6.25 동란중 부친 조병옥과 모친 延日鄭氏 정순봉사이에서 김제시용지면와룡리267번지에서 長男으로 태어났다.
옛날 이름은 조재곤이라 하였고 金堤趙氏 시조 조연벽의 24세손으로 문량공 趙簡의 후손이다.
김제 와룡의 기차길옆 나의집에서 어린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기차가 검은연기를 내품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렁차게 움직이는 기차의 기관사의 꿈을 갖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종친 조찬익(당시 익산기관차사무소 운전조역)할아버지한테 국립철도학교 원서를 가지고 와 기관사과에 지원 합격후 1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20살 약관의 나이에 청운의 꿈과 희망을 안고 철도청공무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군에 입대 3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75년 복직하여 40여년 철도를 天職으로 알고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청춘의 젊은이가 2009년 停年退職했다.
기관사직무를 수행 중 서대전-대전간 운행시 대전천 약200m교량상에서 6-7명의 어린이가 놀고 있는것을 발견 교량 한가운데 급정차하여 소중한 생명을 구했던일, 기억에도 생생한 1977년11월11일 21시15분 익산역폭팔사고로 숨진 동료직원들을 밤새껏 운구하던일 등 수많은 일들, 익산역 폭팔사고 후 11월19일 당시 소장으로 계시던 박순길 소장님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3명을 아들을 두고 있으며, 國家의 動脈인 鐵道에 40년 복무하는 동안 機關士로서 15년 복무 후 1996년 지도팀장으로 승진 후진기관사 양성하는 임무를 12년간 수행하고, 세월은 현역을 떠나게 만들어 퇴직하여 자유인으로 옛날 근무했던 은퇴한 직원, 학교 동창들, 후배들과 어울리며 세월을 낚고, 일가를 찾아보며 자연을 벗하며 삶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답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7년은 김제조씨종친회에서 김제조씨 족보발간사업을 추진 실행하고 있어 800년의 김제조씨 선조들의 업적을 다시한번 확인하고자 김제조씨 세거지 김제 죽산(행정구역개편으로 복죽동으로 바뀌었음)의 통상재를 답사하고 김제조씨 13세손 조필달(삼도통제사 : 현재의 직급으로 보면 해군사령관급) 묘를 찾아보다.
김제시복죽동(옛 월촌면) 이문마을로 들어오니 집집마다 조씨 문패가 달려있어 김제조씨 집성촌임을 알수 있었다.
통상제 조필달장군묘를 찾을 수 없어 밭에서 일을 하는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니 친절히 알려주면서 자신도 김제조 집안으로 시집와서 김제조씨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통상제각 뒤편 담장으로 묘소 가는길이 있어 살펴보니 맨아래쪽에 조필달장군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조금오르면 묘소가 여러개 있는데 제일 위쪽에 있는 묘가 조필달장군의 묘며 조필달장군의 묘를 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상석이 있다.
통상제는 김제조 9대손 조윤정(趙潤珽), 10세손 대붕(大鵬), 11세손 유정(惟精), 12세 사회(思誨), 13세손 趙必達 必遠 必進 14손 안충(安忠) 위폐를 모시고 시제일은 음력시월12일이다.
통상제는 지은지가 오래되어 제각이 낡고, 제각 담장이 조금식 파손되고 있었다.
통상제 뒤편 산에는 9대손 조윤정(趙潤珽)묘소가 햇볕이 잘드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10세손 대붕(大鵬), 11세손 유정(惟精), 12세 사회(思誨), 13세손 趙必達(삼도통제사)의 묘소도 비석에 공적이 세겨져 양지바르게 자리하고 있었다.
◉통상제 주소 : 전북 김제시 복죽동 112-2번지(이문안마을)
☛13세 조필달 삼도통제사 생애
1600년(선조33)7월7일∼1664년(현종5). 조선 중기 무신‧청백리(淸白吏). 자는 행지(行之)이다. 본관은 김제(金堤)이고, 전라북도 김제 죽산에서 태어났다.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의 후손이며, 부친은 조사회(趙思誨)이며 모친은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송여급(宋礪伋)의 딸이다.
1624년(인조2)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호위하였다. 벼슬은 선전관 의금부도사(宣傳官義禁府都事)‧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순안현령(順安縣令)‧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除授)되었다.
효종 때에는 부호군(副護軍), 칠국별장(七局別將), 수어청별장 겸 오위장군(守御廳別將兼五衛將軍), 남도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1655년(효종6) 전라남도병마절도사(全羅南道兵馬節度使)에 제수(除授)되었고 계속하여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兼晉州牧使),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三道水軍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節度使)에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는데, 1643년(인조21)에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후원(李厚源)이 그가 정주목사(定州牧使) 재임당시의 치적을 아뢰어 포상을 받았다. 1644년(인조 22)에 인조는 그를 제주목사(濟州牧使)에 특별히 임명하였는데 몇 개월 재임했음에도 그가 청백하다는 소문이 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보내 시험하고자 하였다. 인조는 일부러 조필달을 파직시킨 후, 어사에게 명령하여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배에 실은 물건들을 불시에 조사하게 하였다. 어사가 배 안에서 나온 물건은 쌀 석 되‧짚신 3켤레‧군복 한 벌‧장검(長劍) 한 자루‧추(錐) 한 개뿐이라는 보고를 올리자 인조는 기뻐하며 친필로 ‘만고청백우성장조필달(萬古淸白于城將趙必達)’이라는 휘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1648(인조26)에도 전라남도감사(全羅南道監司) 이시해(李時楷)가 그의 청렴함을 아뢰어 포상을 받았다.
효종 때 북벌(北伐) 계획도 참여하였으나, 효종의 승하로 중단되었다. 1660년(현종1)에 무과 시관(試官)으로서 부정행위를 단속하지 못하여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가, 1663년(현종4)에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平安道兵馬節度使兼安州牧使)로 복직되었다. 1664년(현종5년)7월13일 임지에서 돌아가시니 공의나이 아직 65세이다.
부음에 접한 현종께서는 크게 놀래고 슬퍼하시며 처조삼일(조정에서 3일간 조회를 열지않고 애도함)을 시행하는 한편 예조에 명하여 부의를 후히 하고 전라관찰사에 왕명으로 상행을 호송하게 하였고, 현종은 예조정랑(禮曹正郞) 박청(朴淸)을 보내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公의 葬禮는 9.10일에 치제하고 28일에 장지인 김제 죽산으로 운구하여 禮葬(지금의 國葬)으로 모시었으니 당시 임금과 조정에서 臣下의 죽음을 哀悼하고 禮遇하는 은전은 다 갖추었다.
그의 군복, 호남육군사령기(湖南陸軍司命旗), 고신(告身), 화살통, 논시(論示), 교지(敎旨) 17점의 유물은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후손인 조형곤 소유이나 전라북도 김제시 복죽동에 있는 동진농지개량조합의 수리민속박물관에서 이를 위탁, 보관하고 있다가 1998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있는 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이 개관하면서 그곳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조필달은 본관이 김제이고 자는 행지(行之)이며, 문양공(文良公) 조간(趙簡)의 11대손으로서 일평생 72관직을 역임한 청백리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호위하였고, 선전관, 금부도사, 순안현령, 나주감목(羅州監牧),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절형장군(折衡將軍)으로 승진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에 참여하였고 부호군(副護軍), 칠국별장(七局別將), 수어청별장(守御廳別將) 겸 오위장군(五衛將軍), 함경도병마절도사,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전라병사(全羅兵使)에 제수되었고, 계속하여 경상좌도병사 겸 진주목사,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 승임(陞任)하였다.
이제 公이 돌아가신지 353년(1664년 별세)이 되었다.
공은 그때 禮葬으로 葬事한 金堤 竹山의 장지에 고이 잠들어계신다.죽산은 지금의 김제시 복죽동 이문안이며, 이마을은 우리 金堤趙氏의 시조 벽성군 조연벽께서 처음 터잡고 살았으며, 그뒤 6세손 趙義(충청병마절도사)의 배 貞夫人 강능김씨가 부군과 死別하고 京畿道 양주에서 3남2녀를 인솔하고 돌아와 정착한 실로 유서깊은 마을이다.
이마을 뒤 북쪽 갑자지원에 공의 墓가 있으니 이묘를 統相墓라고 하고 그 인접부락을 통상메라고 부른다.